제목 | 평양왕검성은 요하동쪽 현도군 개마현이고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6-13 |
평양왕검성은 요하 동쪽 현도군 개마현이고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평양은 요하 부근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
위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느시 개마(蓋馬)에 대한 설명 중에 개마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한 땅일 뿐 아니라 이곳이 곧 평양와검성(平壤王險城)이라고 했으므로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만 정확히 안다면 평양왕검성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
“<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루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리에 이르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현도는 요하를 건넌 다음 고구려의 현도성에 다다른 것이며, 이후 진군한 요동성과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다. 다시 말해서 요하와 요동성의 중간에 현도성(玄菟城)이 위치해 있다. 또 개마현(蓋馬縣)이나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현도군에 소속된 것이므로 요하를 건너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평양 왕검성은 기록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드시 요하를 지나 요동성에 이르기 전에 위치되었던 현도군의 소속현 개마에 위치해 있었고, 현도와 가까운 위치이며, 결코 지금의 평양은 아니다.
소위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최초 현도지방이 평북 산악지방이라는 설은 해괴한 설이다. 중국의 군은 매우 넓은 면적을 통괄하는 행정단위 이어서 사람도 거의 살지 않았던 평북 산악지방에 현도군을 설치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이나, 일본인들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고 또 이를 계속 써먹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의 비 상식적 해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도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수없이 나오며, 요동지방에서 중국과 싸우던 지역임이 분명하다.
○ 평양에 대한 다른 기록들
“11대 동천왕 21년(AD 247년)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리(*관구검의 침입)를 겪었으므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본래 선인 왕검(王儉)의 택지였다고 하였고 또는 왕의 도읍지를 왕검이라 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 기록된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다. 지금의 평양성은 장수왕 때 옮긴 것이므로 다른 지역이다. 평양성을 선인 왕검의 택지이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서 기록된 현도군 개마현에 위치한 왕검성 평양일 가능성도 있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의 기록에 볼 수 있드시 15대 미천왕 3년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에 나온 현도는 요동성과 서쪽의 요하 사이에 현도가 있었으므로(고구려 본기 보장왕조 참고) 이곳에서 사로잡은 8,000명은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이 아니고, 현도군 개마현(예전의 평양성이며, 왕검성)으로 옮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대 고국원왕 4년(AD 334년) 추 팔월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增築 平壤城). 5년 춘정월 축북국신성(築國北新城). 9년 연왕 황(모용황)이 침입하여 그 군사가 신성(新城)에 미치니 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돌아갔다.
위의 기록에서 증축한 평양성은 신성(新城)과 더불어 연(燕)의 침입을 막고자 증축한 성이므로 지금의 평양성이 아닌 연나라와 국경지대에 있는 평양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국원왕 13년(AD 343년) 추 칠월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으니,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秋七月 移居平壤 東黃城 城在今西京東 木覓山中)
위에서 왕이 옮겨 간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평양 동쪽에 동황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또 지금의 평양은 장수왕 때 옮겼으므로 여기에 표시된 평양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41년(AD 371년) 동 시월에 백제왕(근초고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와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아 이당 23일에 왕이 서거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지금의 평양과 같은 지역일 가능성이 높으나, 백제가 대륙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므로 대륙에 있었던 평양성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대 장수와 15년(AD 427년) 장수왕 15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
여기에서 도읍을 옮긴 곳은 지금의 평양이 확실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왕검성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왁검성(王儉城)’은‘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위서 魏書》를 인용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면서, 또 《고기 古記》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7 동천왕 21년조에는 “평양성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平壤城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라고 하였다.
한편 중국 사서인 《사기 史記》 조선전에는 공손수(公孫遂)의 군대와 좌장군(左將軍)의 군대가 왕험성을 공격하자 조선의 신하들이 투항하고 조선 왕 우거(右渠)가 피살되었으나, 왕험성은 성기(成己)가 일시나마 완강히 항거했다고 하였다.
왕검성이라는 용어는 왕검을 임금이라는 말로 해석해 ‘임금의 성’이라는 뜻의 일반 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검성을 특수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볼 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평양 지방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사기색은 史記索隱》에서 왕험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를 인용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기》의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해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 험독은 중국계 지명이 아니라 고조선의 도읍을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이며, 고조선의 도읍이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옮겨졌다는 견해도 있다
○ 결론
평양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설이 있고, 장수왕 이후에는 지금의 평양이 평양성으로 되었지만, 그 이전의 평양성은 대륙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라는 기록에서 볼 때 평양 왕검성은 현도군 개마현에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현도군은 삼국사기 보장왕조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당나라 장수 이적이 요하를 건넌 후 처음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인 장소로 요동성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현도군에 속한 개마현은 요하 부근에 위치한 현도군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지금의 평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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