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맥과 옥저는 강원도나 함흥이 아니고 요하부근이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6-07 |
예맥(濊貊)과 옥저(沃沮)는 강원도나 함흥이 아니라 요하부근 고구려 국경 주변이다.
○ 예맥의 땅이 강원도 강릉지방이라는 한국사학계
삼국사기에는 예맥(濊貊)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그런데 아병도나 한국 사학계에서는 예맥(濊貊)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예(濊)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예(濊: 濊貊)이 강원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모 대학교의 한국사 교재에 수록된 예맥(濊貊: 濊)에 대한 설명이다. “예(濊)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했다고 하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고 하는데, 대체로 지금의 강원도 지방에 해당한다.”이들은 더 나아가 예맥이 원산-강릉-영덕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강변한다.
이는 아마도 후한서에 동옥저 남쪽에 예맥이 접해있다(東沃沮....南與濊貊接)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 같은데 동옥저를 함흥과 함경남도 지역, 북옥저를 간도지방이라고 하는 이병도 등 한국 주류사학자의 논리이며, 그 후인들도 이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고 있지만 필자는 예맥이나 옥저가 결코 강원도나 함흥 및 함경도 지방이 될 수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현재 한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함경남도의 개마고원(蓋馬高原)을 넘어 남하해서 함흥 일대의 땅인 옥저(沃沮)를 차지했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후한서에 “동옥저가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고 한 것을 한국의 개마고원 동쪽으로 생각하고 동옥저를 함흥으로 추정하고 예(濊)는 동옥저의 남쪽에 있다(南與濊貊)이란 기록을 이용하여 함흥의 남쪽인 원산-강능-영덕에 이르는 지역을 예(濊)라고 주장하고 있다.
○ 옥저(沃沮)에 대한 후한서의 기록과 개마(蓋馬)
원래 개마대산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주: 단순히 濊라고만 하지 않았고 濊貊이라고 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개마(蓋馬)의 위치는?
옥저가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에 나타난 개바대산은 한국 땅의 개마고원이 아니다. 한국의 개마고원은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한국의 지리지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지명이고, 일제시 왜인(倭人)들이 함경남도 삼수∙갑산 지역에 새로 붙인 명칭일 뿐이며, 예전 중국인들은 전혀 알 수도 없는 지명이다. 개마(蓋馬)에 대한 지명은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고구려의 죄를 물어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蓋馬),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위에서 수양제의 좌12군 중 네 번째 표시된 지역 개마(蓋馬)는 한서지리지에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라는 구정에서 명확히 알 수 있드시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서 진격하는 지역에 개마(蓋馬)가 있고 그 동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위치해 있음을 명확히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사학회에서는 예(濊)의 강원도설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동옥저의 남쪽이 예맥과 접해 있다(南 與 濊 貊 接)는 설명을 볼 때 동옥저가 수양제의 침략루트 개마의 동쪽(東沃沮 在高句麗盖馬大山之東)에 비추어 결코 강원도일 수가 없다. 고구려에게 복속된 요하 부근에 개마(蓋馬)가 있고, 그 동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었으며, 동옥저의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어찌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엉뚱하게 강원도의 예맥을 경유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울러 좌12군의 진격로에는 8번째 현도(玄菟)를 표시하고 있는데 이 현토는 요하를 건너 요동에 이르는 지역의 중간에 있음이 명확히 밝혀져 있고(*고구려 보장왕조 이적의 공격지점 참고), 11번째는 옥저(沃沮)를 경유하는 길로 진격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아니한가? 옥저가 한사군이다가 고구려에게 회복된 요하부근의 지역이지 감히 함흥지역이 옥저라면, 수양제가 어찌 함흥지역을 지나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예맥(濊貊)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에 태조대왕 69년(AD 121)에 “한나라의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濊貊)의 우두머리인 거수(渠帥)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고 했는데, 유주자사나, 당시 중국에 속했던 현도(위치는 요하와 요동성의 중간) 태수나 요동태수(요동성을 당시 중국이 점령하고 있었음)이 침략한 예맥(濊貊)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요동지방의 현도나 요동에 가까운 땅이지 결코 강원도 강릉 땅을 침략 루트로 삼은 것은 아니다.
“태조대왕 70년(AD 122) 왕은 마한(馬韓), 예맥(濊貊)과 함께 요동(遼東: 당시는 중국 지배하에 있었음)을 침범하니 부여왕(夫餘王)이 한(漢)에 구원병을 보내서 고구려의 군사를 막았다.”고 했는데, 고구려와 함께 요동성을 공격한 옘맥(濊貊)은 요동성이나 요하와 가까운 지역에 있는 고구려에 속한 나라이지 결코 강원도 강능지역의 군사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예(濊)와 맥(貊)이 다른 것이라는 주장을 끈질기게 하고 있으나, 본인의 견해로는 태조대왕 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예맥(濊貊)은 하나이며, 예(濊) 또는 맥(貊)으로만 표시되어 있다고 해도 이는 예맥(濊貊)을 줄여서 쓸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드시 옥저(沃沮)나 개마(蓋馬) 등 예맥(濊貊)과 관련된 지역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출발한 지점이거나 침략 루트에 있는 지역이므로 함흥 옥저설이나 강원도 예맥설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폐기되어야 한다. 요하 부근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 부근에 있던 땅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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