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대사자료62. 고구려 초기 북평, 어양, 상고, 태원에서 싸웠고, 요서10성과 서안펴을 정복하였다 글쓴이 이태수 날짜 2023-03-03

고대사62. 고구려는 초기에 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서 싸웠고, 태조대왕은 요서에 10성을 쌓았고, 요동 서쪽 안평현을 정복하였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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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태조대왕의 요서10성이 중요한 이유는 고구려의 건국 위치가 압록강 줍변이 아니고, 요서지역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안평현 지도: 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982

4대 민중왕(閔中王) 4(AD 47)에는 잠우락부의 대가재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2년 후인 제5대 모본왕(慕本王) 2(AD 49)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함으로 이내 화친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북평은 오늘의 북경(北京)이 한 때 북평(北平)이라고 불렸던 점을 상기하면, 북경 부근일 가능성이 있고(인터넷을 보면 일부 사람들은 북경보다 훨씬 남쪽의 석가장시 북쪽이라고도 함), 어양은 지금의 북경시 동쪽이라고 하며, 상곡은 진나라 때 통합된 연()나라의 북부지방이고 사기(史記)에는 탁록 지역이라고도 한다.

 

또 태원(太原)은 용성(龍城)이라고도 불렸던 지역으로 지금 산시성(山西城)의 성도이며, 북경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한 타이위엔시(太原市)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경계를 이루고 또 싸운 지역은 모두 중국의 북경 부근 지역과 그보다 더 남쪽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

 

6대 태조대왕 3(AD 55)에는 요서(遼西)10개의 성()을 쌓아 한병(漢兵)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요서 지방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는 대목이다.

 

53(AD 105)에는 ()나라의 요동(遼東)에 고구려의 군대를 보내어 6개의 현을 약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미 요동과 요서에 고구려의 국경이 있음을 나타낸다. 59(AD 111)에는 통감(通鑑)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를 침구했다.”고 하였고, 66(AD 118)에는 한의 현도에 습격하여 화려성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국경 넘어 한나라를 침략한 내용인 것이다.

 

태조대왕 69(AD121)에는 한나라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渠帥)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고구려 태조대왕은 아우인 수성을 보내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를 반격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서 거짓 항복을 하니 유주자사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은 이를 이용해서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대군을 차단하고 몰래 3,000명을 보내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치고 그 성곽을 불살랐으며, 2000여 명을 살획하였다.

 

이어 여름 4월에 태조대왕이 선비의 군사 8000명을 데리고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내어 신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한나라의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 등은 요동 또는 요서의 한나라 군현이며, 고구려와의 국경이역이다. 현도태수, 요동태수 등이 예맥의 거수를 격살했다는 것은 예맥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요동(遼東: 지금의 난하 동쪽) 부근의 지역에 예맥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현도가 압록강 중상류와 평안북도 북쪽에 있다가 만주 푸순(撫順)으로 갔다고 하는 한국사 통설은 잘못된 것이며,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 부근에 옥저가 있었던 것이다.>

 

태조대왕은 94(AD 145)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쪽 안평현(遼東西安平)을 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여기에 기록된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요동의 서쪽 안평“, ”요동의 서안평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한자가 띄어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미 고구려의 제5대 모본왕(慕本王) 2(AD 49)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함으로 이내 화친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미 제6대 태조와 이전에 고구려는 요서지방에서 싸웠고, 지금의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은 제5대 모본왕이 습격한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지방에 속해 있는 땅이며, 6대 태조대왕이 요동의 서쪽 안평현을 정복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안평현이나 서안평현은 과연 어디일까? 한국의 사학자들은 아직까지 이곳이 압록강 건너의 단둥(丹東)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해서 식민사관을 호도하고 있으나, 결코 단동일 수 없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상경임황부(上京臨滉府)가 한나라 때 요동군 서안평이었다.”고 해서 현재 내몽골의 파림좌기 지역이라 주장하고 있고, 또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다른 설이 많다. 본인은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요동서안평(遼東西安平)”은 요동의 서쪽 안평현이라고 비정하는 것이며, 지금의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이라고 비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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