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51. 수서에 기록된 수양제의 전투일정과 요수, 요동성,압록수,살수의 위치(임찬경논문)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26 |
고대사 51. 수서(隋書)에 기록된 수양제의 전투 일정과 요수, 요동성, 압록수, 살수, 평양의 위치 비정(임찬경박사의 논문 요약)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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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찬경 박사의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요수, 요동성, 압록수, 살수, 평양의 위치 비정』이라는 논문에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일정 및 주요 지명에 대한 비정이 있어 이를 요약한다.
수양제는 신사년(AD 612년) 1월 1일 탁군에 집결하여 이날 임삭궁에 제계를 올리고, 1월 3일부터 좌우 12군의 제1군을 출발시켰다. 수양제의 어영군(御營軍)은 2월 13일 탁군(涿郡)을 출발하여 32일 후인 3월 15일에 요수(遼水: 지금의 난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도착한 수군(隋軍)은 고구려의 저항에 요수를 건너지 못하고 맥철장, 전사웅, 맹금차 등이 전사하였는데, 수양제는 마침내 요수에 다리를 놓고 4월 16일(수양제가 요수에 도착한 후 31일 후) 요수를 건넜고, 당일 요동을 포위하였다. 수양제는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6월 11일 장수들을 크게 꾸짖고 육합성에 머물었다.
수양제의 군대는 평양성(平壤城: 당시의 평양성은 혼하의 바로 남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평양은 장안성이었다) 부근 30리까지 진군하였다가 고구려의 가짜 항복을 받고 돌아가다가 7월 24일 우문술 등은 살수(지금의 혼하)에서 대패하여 9군(九軍)이 궤멸되었고, 살아 돌아온 자는 2000여 기에 불과하였다. 7월 25일 수양제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결국 요동성은 수양제가 철수한 7월 25일까지 203일을 싸웠지만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수양제는 패퇴하였다.
위에서 수양제가 건넌 요수(遼水)는 지금의 난하이며,
난하 동쪽에 있던 요동성은 수양제가 요수를 건넌 후 당일 포위했던 성으로 요수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고대 병력이 하루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대략 12km 정도로 보고 있으며, 이 거리 안에 요동성이 있었을 것이다),
9개의 군(九軍)이 집결한 압록수(皆會於鴨淥水西)는 지금의 요하(遼河)이다.
또 패수(浿水; 또는 저강 沮江으로도 표시하고 있다)는 압록수(요하)의 남쪽에 있는 태자하(太子河)로 보고 있다.
살수는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평양은 혼하의 바로 남쪽에 있었다.
수나라 군사가 을지문덕의 전술에 따라 살수(지금의 혼하)를 건너왔다가 철군하면서 고구려군에게 우문술이 살수(薩水: 지금의 혼하)에서 대패하여 7월 25일 철수를 시작하였는데, 37일 만인 9월 3일 냑양에 도착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과서에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올바르지 않고, 수양제가 싸운 요수(遼水)는 지금의 난하이고, 요동성은 지금의 난하 하류 동쪽의 창려 부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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