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29. 진시황의 진나라 동쪽은 조선이며,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된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6 |
한국고대사 자료들-29. 진시황의 진나라 동쪽은 조선이며,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진시황의 진나라 동쪽은 조선이며,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된다.
〇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의 조선에 대한 기록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재위 246-210년)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종식시키고 마침내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스스로 자신이 삼황오제(三皇五帝)에 견줄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했던 인물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나누어 36개의 군으로 만들고 郡(군)에는 守(수)와 尉(위)와 監(감)을 두었다. 백성(民)을 黔首(검수)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영토는 동쪽으로 海(해:발해)와 朝鮮(조선)에 다다르고, 서쪽으로는 臨洮(림도)와 羌中(강중)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北嚮户(북향호)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황하(河)에 의지하여 요새(塞)로 하였고 隂山(음산)을 아울러 遼東(요동)까지이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第六
分天下以為三十六郡, 郡置守 尉 監. 更名民曰黔首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户, 北據河為塞, 並隂山至遼東)”
사기정의(史記正意)는 아래와 같이 주석하였다.
“바다는 발해 남쪽의 양주, 소주, 태주의 동쪽 바다를 말한다. 기(曁)는 ‘다다르다’의 뜻이다. (조선은) 동북쪽 조선국이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의 왕검성이다. 바로 고조선이다”
(海謂渤海南至楊,蘇,台等州之東海也 曁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漢樂浪郡 王險城 卽古朝鮮也)
***참고: 사기에 진시황 “영토가 동쪽으로는 바다(海)와 조선의 경계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동쪽은 조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괄지지에 “바다는 남쪽 양주에서 소주 태주 등의 동쪽 바다”라고 하였다. 이 설명은 진나라의 바다가 지금의 발해만으로 추정되고, 고조선의 영토는 만리장성의 기점인 갈석산을 기준으로 현 중국의 하북성 일대까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시황은 연나라 진개가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을 침탈한 후 쌓은 연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으므로, 북경의 팔달령 동쪽은 조선의 땅이다.
***참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본래 한(漢)나라의 낙랑군 왕검성이라고 하였고, 옛날 고조선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낙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수양제가 고구려 평양을 향해 진격하는 우12군 12번째 침략로에 낙랑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접경지대 고구려 땅에 있는 낙랑이다. XXX 이병도가 말하는 평양이 아니다.
***참고: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므로 갈석산 동쪽의 현재 진황도시는 고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던 땅이다.
○진장성(秦長城)의 시발점 낙랑군 수성현
위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 “진(秦)나라의 동쪽은 발해와 조선에 다다라 있다(地東至海曁朝鮮)고 했으므로, 진장성의 동쪽은 조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진장성의 시발점은 사기 하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갈석산이 있는 낙랑군 수성현이었다. 그러나 XXX 이병도는 이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이라고 하여 한국 고대사를 말아먹은 인간이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진나라 장성(長城)의 시발점이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 長城起所)”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강지리지의 주석에“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이 남아있고, 동쪽에는 요수(遼水: 난하)가 흘러서 고구려의 옛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간다(碣石山 在漢樂浪郡 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捻長城 東載遼水 而入高麗遺址猶存)”고 하였다. 태강연간은 AD 280-289년 사이 서진 무제 때의 연호이다.
AD 801년 편찬된『통전(通典)』에 다음과 같이 갈석산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肥如縣)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 태강지지(晉太康地志)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의 옛 지경에 있으며, 이 갈석이 아니다(盧龍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地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참고: 『통전』이 편찬된 AD 801년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한 영양왕 22년(AD 611) 보다 약 190년 후이므로 이 때의 갈석이 진장성의 기점이며, 또 옛날 고구려 땅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또 『통전』 변방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장성이 남아있고, 동쪽으로 요수(遼水: 난하)를 끊고 고구려 옛땅으로 들어간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상서』에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의 북평군 남쪽 20여 리에 있다. 이곳은 곧 고구려 땅에 있는 좌갈석(左碣石)이다. 『안상서』에 이르기를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말은 우갈석이 황하 근처의 바다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리에 있다. 이곳은 곧 고구려의 땅 안에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今捻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按尙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卽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里 卽高麗中爲左碣石)
***참고: 태강지리지에 진장성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수성현은 진장성 안쪽의 진나라 땅으로 보아야 하며,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로 비정된다. 또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었는데, 낙랑군의 낙랑은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 중 좌12군의 12번째 침략경로에 있었고, 우익대장군 우중문이 낙랑을 통하여 고구려를 침략했으며, 고구려 땅에 낙랑이 있었다. 낙랑 역시 진나라 때는 진장성 안에 있었을 것이며, 고구려는 진장성 안쪽에 있는 낙랑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 통전을 쓴 안상서 당시 갈석산이 당시의 북평군 남쪽 20리에 있다고 한 사실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 글귀에 대한 뜻과 내용을 밝혀야 할 것이다.
***참고: 통전에 갈석산은 북평군 남쪽 20리에 있고 AD 801년 당시 옛 고구려 땅에 속한 갈석산이라고 하였는데, 수양제(재위 604-618)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지간을 점령해 있다(崇取勃碣之間)”고 자복했던 점에 비추어 여수전쟁(麗隨戰爭) 당시 고구려 땅에 갈석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 수양제의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진격한 것에 비추어 갈석과 수성이 모두 고구려 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갈석산에는 진시황(秦始皇)을 비롯한 9명의 황제가 올라서 9등황제산(九登皇帝山)으로도 불린다.
진나라 장성을 축조한 진시황, 진시황의 아들 진호해, 고조선 침략하기 전의 한무제(漢武帝)를 비롯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의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이 모두 이 산에 올라 전의(戰意)를 불태웠다고 한다. 서기 207년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는 유성(柳城)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동쪽 갈석산에 임하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東臨碣石 以觀滄海)”라는 시를 남겼다.
당나라 때 인물인 두우(杜佑)가 편찬한 의례서의 일종인 ‘통전(通典)’에서 두우는 자신이 살던 당시에 존재하던 노룡현(盧龍縣)이란 곳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노룡현은) 한나라 때의 비여현(肥如縣)이다.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진나라 때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가 말하는 것과 같이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이 시작된 곳이다.
현재의 갈석산(碣石山)은 지금 중국의 하북성 산해관과 진황도시 및 남쪽 당산시의 중간에 위치한 산으로 남북 길이 24km, 동서 길이 20km, 총면적 480㎢에 달한다. 높이 695.1m이며 전술한 바와 같이 진시황을 비롯한 9명의 황제가 이 산에 올라 9등 황제산이라고도 한다.
*** 참고: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은 이 만리장성이 시작된 진황도시 및 당산시 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 낙랑군 수성현을 만리장성의 안쪽으로 본다면 하북성 당산시 부근에 낙랑군 수성현이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XXX 이병도가 황해도 수안(遂安)을 중국의 수성현이라고 주장한 것은 참으로 맹랑한 소리이다. 이는 이병도가 한사군 대륙 존재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부정하면서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주장하기 위해 맹랑한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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