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23. 기자 및 기자조선에 대한 한국의 기록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13 |
한국고대사 자료들-23. 기자 및 기자조선에 대한 한국 기록에 대한 검토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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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기자 및 기자조선에 대한 한국 기록에 대한 검토
기자(箕子)는 이름이 서여(胥餘)이고 주무왕(재위 BC 1045∼1043) 때의 인물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BC 1100년경 살았다는 기자로부터 BC 195년 준왕이 위만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900여 년간 존속했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는 고조선 문화의 특징인 비파형동검의 청동기(靑銅器)와 후대에 철기(鐵器)가 함께 나타나는 시기이다.
〇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기자가 단군을 대신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1천 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주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재위 BC 1045∼1043)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고, 나이는 1천 9백 8세였다고 했다.
(御國 一千五百年 周武王 卽位 己卯 封 箕子於朝鮮 檀君 乃移於藏唐京 堠還隱於 阿斯達 爲山神 壽 一千九百八世)”
***참고: 주무왕이 즉위한 BC 1045년은 단기 1288년이어서 단군이 다스린지 1500년 후라는 것과는 200여년의 차이가 있어서 시기가 맞지 않는다. 시기가 단군 1500년보다 200여년 앞선 1288년 기자가 있어 논리에 맞지 않는다.
***참고: 신채호 등은 장당경을 해성(海城) 또는 개평(蓋平)지역이라고도 하며,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이라고도 함.
〇1287년(충렬왕 13)에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쓴 역사서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을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기자를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서술하여 계승 관계를 드러냈다. 이승휴는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고 하였다.
“후조선의 시조는 기자인데, 주나라 무왕 원년인 기묘년 봄에 도망쳐서 여기에 이르러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 주무왕이 멀리 봉하여 윤음을 내렸다. 예의상 사양하지 못하고 기자가 주무왕에게 내조하여 인사를 하니 홍범구주의 떳떳한 인륜을 물었다. 41대 손의 이름은 기준인데, 침탈을 당하여 백성을 떠났다. 928년간을 다스렸으니 끼친 풍속과 남은 공렬이 빛나고 순수했다. 준왕은 금마군에 옮겨 도읍을 정하고 다시 임금이 되었다.
(後朝鮮紀 後朝鮮祖是箕子 周虎元年己卯春 逋來至此 自立國 周虎遙封 降命綸 禮難不 謝乃入觀 洪範九疇問尋倫 四十一代孫名 準 被人侵奪卯去民 九百二十八年理 遺風餘烈傳熙淳 準乃移居金馬郡 立都又復能君人)”
***참고: 기자가 주무왕으로부터 도망쳐서 나라를 세운 곳은 평양이 아니다. 당시 주나라는 황하 유역의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주나라와 가까운 황하 유역으로 도망친 것이지 XXX나 왜색 식민사학자들은 기자가 평양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은 황당한 소리이다.
주무왕의 부름을 받고 주무왕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는 주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라를 세웠기에 가능한 것이며, 평양이 기자의 터전일 수는 결코 없다. 산동성 조현(曹縣)에 기자의 묘가 있으므로 기자가 나라를 세웠다면 그 곳은 산동성 조현 부근일 것이다.
〇세조 7년 권람(權擥)이 지은 응제시주(應製詩註)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라 우임금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塗山)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夫婁)를 보내었다. 단군은 하나라 우임금을 거쳐 상(商=殷)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셨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이었다. 그 뒤 164년 후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와서 봉해졌다”
〇노사신, 서거정 등이 1476년 지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이 기자조선을 기록하고 있다.
<기자조선>
주무왕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는 평양에 와서 도읍을 정하고 백성들에게 예악, 누에치기, 길쌈등을 가르쳤다. 또 팔조금법을 제정하였다...
(箕子朝鮮 周武王 克商 封箕子於朝鮮 箕子來都平壤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又制八條...)
***참고: 전술한 바와 같이 기자는 황하유역 하북, 산동, 산서성을 중심으로 한 소국이었던 주나라 가까운 지역에 나라(箕國)을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하지 결코 평양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잘못된 기록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기자의 묘가 있는 산동성 조현(曹縣) 부근에 기자의 나라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인데 『환단고기』에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서여국(胥餘國)이 자주 등장하며, 연나라 및 제나라를 비롯한 주나라의 제후국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 서여국은 산동성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〇조선 사대주의자들의 기자(箕子) 예찬과 존숭(尊崇)
조선을 건국한 주도 세력들은 새 왕조를 이상적인 유교국가로 만들려고 하였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권근(權近: 1352-1409)은 1402년에 작성한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기록한 역사서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로 인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가 확립되었다. 권근은 『동국사략』에서 기자가 조선에 와서 평양에 도읍하고 팔조의 금법등을 가르쳐서 미개한 조선에 문명(文明)된 중국의 문화를 전파한 자로 묘사하면서 기자를 극찬하여 후대까지 기자예찬론의 뿌리를 만들었다.
사대주의 신봉자들은 사기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마치 단군조선을 문명국 주(周)나라의 속국인 양 취급하고, 중국의 속국인 기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특히 고려·조선 시대의 유학자들과 사대주의 신봉자들은 중국을 문명의 국가 중화(中華)로 조선을 변방국 중 비교적 발전된 소중화(小中華)로 낮추면서 날조된 기자조선을 계속 답습하고 신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 기자가 주나라 무왕의 신하가 되고 평양에 와서 조선인(朝鮮人)에게 중화 문물을 전수했다는 사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주자는 평양에 오지도 못했고, 산동성 기자묘 부근에 살다가 죽은 인물을 썩은 유생(儒生)들이 모화사상에서 광신(狂信)한 것으로 보인다.
〇『환단고기』의 <단군세기> 25세 솔나단군기에 의하면,
기자는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망한 BC 1122년 이후 “3년이 지난 BC 1120년 서화(西華: 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 살면서 인사를 일체 사절했다(徙居西華 謝絶人事)”라고 하여 조선에 오지도 않았고, 기자조선 자체를 강력히 부정하였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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