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대사자료24. 기자 및 기자조선에 대한 환단고기의 기록 글쓴이 이태수 날짜 2023-02-14

 

한국고대사 자료들-24. 기자 및 기자조선에 대한 환단고기의 기록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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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환단고기<단군세기> 25세 솔나단군기에 의하면,

기자는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망한 BC 1122년 이후 “3년이 지난 BC 1120년 서화(西華: 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 살면서 인사를 일체 사절했다(徙居西華 謝絶人事)”라고 하여 조선에 오지도 않았고, 기자조선 자체를 강력히 부정하였다(안경전역 환단고기 149p).

 

환단고기의 기록은

공자(BC 551BC 479)가 저술했다고 하는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서

미자는 은나라를 떠나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은 간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은나라에는 어진 사람이 세 사람 있었다.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라고 하였고,

 

 

장자(BC 369BC 289)의 외물(外物)에서

외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용봉(龍逢)은 주살(誅殺)을 당했고, 비간(比干)은 목이 베었으며, 기자(箕子)는 미치광이가 되었고, 악래(惡來)는 죽었으며, 걸주(桀紂) 역시 망하고 말았다.

(外物不可必,故龍逢誅,比干戮,箕子狂,惡來死,桀紂亡)”라고 하였다.

 

***참고: 환단고기나 공자의 논어(論語)나 장자의 외물(外物)에서 기자가 조선왕에 봉해 졌다는 내용이 전무하고, 미치광이가 되었다거나 종이 되었다고 한 것은, 환단고기에서인사를 일체 사절하고 살았다(謝絶人事)”라고 하여 외롭게 살다 죽었다고 한 것과 상통한다. 기자가 조선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공자나 장자 당시 전무하였다.

 

수유국과의 연나라 정벌에 대한 환단고기의 기록

-“36대 단군 매륵단군 52(BC 653) 임금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국(須庾國) 군대와 더불어 연()나라를 정벌하니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을 고했다. 제나라가 대거 고죽(孤竹)으로 처들어오다가 아군의 복병을 만나자 화친을 구걸하고 물러갔다(戊辰五十二年 (買勒)帝 遣兵 與須臾兵 伐燕 燕人 告急於齊 齊人 大擧入孤竹 遇我伏兵 戰不利 乞和而去)(안경전역 환단고기 161p).”

 

***참고: 수유(須臾) 또는 서여(胥餘)는 기자(箕子)의 이름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의 후손이나 기자의 일족이 세운 나라로 보이며,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자가 세웠거나 또는 기자의 후손이 세운 수유국은 조선의 후국이었으며, 연나라 및 제나라 등의 연합국에 대항해서 싸운 고조선 연합국 중의 한 나라이다.

 

***참고: 사기에서는 제나라 관자(管子)BC 664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令支)를 정벌하고 부지산(鳧之山)을 지나 고죽을 짓밟고 산융과 대치하였다”(大匡)고 했는데, 이와 달리 환단고기에서는 이보다 10년 후인 BC 653년 전쟁에 패한 제나라가 화친하고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인의 기록과 환단고기의 기록은 10년의 년대 차이가 있으며, 그 결과는 전쟁에 패한 제나라가 물러간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70대 번조선(番朝鮮) 왕이 된 수유(須臾)사람 기후(箕詡)

번조선 제69대 수한(水韓)왕 때 임오년(BC 339)에 연나라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 쳐들어와 안촌홀(安寸忽: 安市城; 탕지보)을 공격하고 험독(險瀆)까지 쳐들어 왔다.

 

이 때 수유 사람 기후가 젊은 청년 5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전쟁을 도우니 군세가 조금 진작되었다. 이에 진한(眞韓)과 번한(番韓)의 군사가 합세하여 함께 크게 격파하였다. 또 한 무리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 계성(薊城: 연나라 수도) 남쪽에서 싸우게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공자(公子: 왕족의 자제)를 인질로 보냈다.

 

***참고: BC 300년 경 연나라가 진개(秦開)를 조선의 인질로 보내왔던 사실이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환단고기에서 연나라가 인질을 보냈다는 사실은 이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번조선의 왕통 단절과 기후의 왕위 계승

무술년(BC 323) 69대 번조선왕 수한이 세상을 떠나니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후(箕詡)가 명을 받들어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하례하였다.

 

이 해에 연이 왕이라 칭하고 장차 침범하려다 그만두었다. 기후도 명을 받들어 왕호를 써서 70대 번조선 왕이 되고 비로소 번한성(番汗城: 안시성)에 머물면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기후(箕詡) 이후 71대 기욱(箕煜), 72대 기석(箕釋), 73대 기윤(箕潤), 74대 기비(箕丕) 75대 기준(箕準)으로 이어졌고, 정미년(BC 194) 도적 위만(衛滿)에게 속아 패하여 마침내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참고: 환단고기에는 조선을 번한(番韓: 番朝鮮), 진한(眞韓: 眞朝鮮), 마한(馬韓)의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고, 그 중 연나라 등 중국과 접한 지역은 번한(番韓)이 다스렸는데, 번한의 69대 수한(水韓)이 후사가 없자 수유인 기후(箕詡)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번한의 70대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자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기후(箕詡)가 번조선 왕이 된 것이며, 기자가 직접 조선왕이 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참고: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주석으로 인용한 위략(魏略)

옛적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서 왕을 자칭하면서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또한 왕을 자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다. 그때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동원을 중지하고, 예를 서쪽의 연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침략을 중지토록 설득하였으며, 연이 공격하지 않았다.”

(昔 箕子之後 朝鮮候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 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以止之 不攻)”

 

***참고: 위략은 백인종의 국가인 대진(大秦: 로마제국)까지도 중국인 자손이라고 적을 정도로 중국인 자존심을 병적으로 들어낸 책자이므로 위의 글을 전부 맹신할 수는 없다.

 

신채호의 기자조선에 대한 견해

신채호는 여기에 쓰인 조선후(朝鮮侯)불한(卞韓: 番朝鮮)의 왕으로 진한(辰韓)왕의 우보(右輔)이다가 스스로 칭왕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卞韓)이 있었고, 진한의 진왕(辰王)이 한자(漢字)로 쓰면 조선왕(朝鮮王)이고, 마한(말한)과 변한(불한)은 좌보(左補)와 우보(右輔)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쓰면 변한(卞韓: 불한)의 지위에 있던 자가 조선후(朝鮮侯)이었으며, 이 조선후인 기씨(箕氏)가 진한(신한)의 조선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조선왕으로 칭하게 되어 조선이 진조선(辰朝鮮; 신조선), 변조선(卞朝鮮; 불조선) 및 맞조선(馬朝鮮; 말조선)3 조선으로 나누어 지게 되고 3명의 왕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참고: 결론적으로 기자는 조선의 평양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운 사실이 전무하며, 기자의 후손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수유국(須臾國)은 주나라의 후국(侯國)이 아니고 고조선의 후국이었으며, 기자의 후손으로 보이는 수유국의 사람 기후(箕詡)가 번조선(番朝鮮: 番汗)70대 왕이 되고 그의 후손 기준(箕準) 때 위만에게 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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