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방군 황해도설은 폐기되고 요하 서쪽 존치설로 바꾸어야 한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6-05 |
대방군 황해도설은 폐기되고 요하 서쪽 존치설로 바꾸어야 한다.
한사군 중에서 대방군(帶方郡)의 위치에 대한 설명은 아마도 이병도의 진번군고(眞番郡考)라는 글이 1929년 사학잡지(史學雜誌) 40-5권에 실린 이후 이병도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계속 주장하여 현재 한국사통설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에 보면 황주목은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라고 했고 그 밑의 분투(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중국의 지명인) 둔유(屯有)의 음(音)이 서로 근사(近似)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자면 (중국의 지명인) 둔유(屯有)와 (고구려의 지명을 조작해서 표시한) 동어(冬於)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 방위의 상(上: 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屯有縣)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아래에 말할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史學雜誌 40-5. 1929)
○ 진번군에 대한 통설(通說)
진번군(眞番郡)은 한나라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 설치한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로 설치 이후 곧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낙랑군(樂浪郡)에 통합되고 낙랑군은 이곳에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후 2세기 후반 한(韓), 예(濊)의 토착세력이 강성해져서 이 지방을 공격하게 되어 남부도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AD 204년 공손도(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후한(後漢)의 헌제(獻帝) 건안년간(建安年間: AD 196-220)에 낙랑군 소곡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대방군(帶方郡)은 약 1세기 동안 낙랑군 남부도위 소관의 대방(帶方), 열구(列口), 남신(南新), 장잠(長岑), 제해(提奚), 함자(含資), 해명(海冥) 등 7개 현(縣)을 관할하면서 치소(治所)는 대방(帶方)에 두었다. 현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동남 문정면에 있는 속칭(俗稱) 당토성(唐土城)이 그 유지(遺址)로 추정되고 있다. .....미천왕 때인 AD 313년 대방, 낙랑 양군 지역에서 버티고 있던 장통(張統)이 고구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한인(漢人)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달아나자 대방군(帶方郡)은 고구려에 점령되고 말았다. 이것이 아마도 지금 한국사의 통설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 중국의 둔유현(屯有縣)이 어째서 동흘(冬忽)로 둔갑되었을까?
중궁의 지명인 둔유현(屯有縣)은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나 우동어홀(于冬於忽)과 전혀 한자도 다르고 음도 다른 것인데 이병도는 우동어홀(于冬於忽)을 동어(冬於)란 지명으로 변개창작(變改創作)한 후 둔유(屯有)와 동어(冬於)가 똑같은 음(音)이라고 단언하면서 진번을 중국 땅 지명인 둔유(屯有)에서 황해도 동홀(冬忽)까지 끌어들였다.
어째서 이병도는 학자적 양심으로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중국의 둔현을 황해도까지 끌어들였을까? 한국에서 청주와 충주는 비슷한 음이어도 다른 지역이며 결코 같을 수 없다. 이병도는 우동어홀을 동어로 개변창작해서 소설을 쓴 것이며, 이를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囑託: 常勤臨時職)으로 근무했던 이병도는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며, 조선사편수회를 담당했던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을 추종해서 자신이 아는 한국말의 발음을 빙자하여 둔유(屯有)와 동흘이나 우동어흘을 동어(冬於)로 변개(變改)하여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 고대사를 중국의 속국인 한사군으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나바이와키치(稻葉岩吉)가 충청도 지역으로 비정한 것보다 황주를 대방의 중심지로 비정하여 더 악랄하게 일본인의 구미에 맞도록 역사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의 변개창작(變改 創作)의 소설같은 황해도 대방설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이척일이 2009년 6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반박 글이 있으므로 우선 이를 소개코자 한다. (*이덕일의 설명: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8262.html)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④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
* 둔유 : 屯有, 동어 : 冬於, 열구 : 列口, 율구 : 栗口
한사군 중에는 진번·임둔군처럼 설치 25년(서기전 82) 만에 낙랑·현도군에 편입된 군이 있는가 하면 대방군처럼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다시 설치된 군도 있다. 대방군은 요동의 토호였던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에 세운 것인데, 현재 주류 사학계는 황해도와 한강 이북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과거에는 한사군 진번군의 고지(故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남 일대라고 규정한 주류 사학계로서는 대방군은 황해도쯤에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고대 사서가 말해줄 것이다.
-삼국지 “대방군, 둔유에 설치” 기록
-한자음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병도 “둔유는 황해도 동어라 믿어”
-군국지에선 “대방군, 요동에 속해”
대방군이 황해도와 경기도에 있었다는 주류 학설은 이병도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이 시초이다.
이병도는 또 1911년 일본인 학자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한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을 근거로 대방군의 치소인 대방현이 봉산군이라고 비정했다. 중국계 무덤이나 유물은 덮어놓고 한사군 유물로 보는 주류 사학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서는 차후 살펴보겠지만 우선 장무이의 무덤에서 나온 ‘무신’(戊申)년이 새겨진 명문 벽돌만 제대로 해석해도 봉산군은 대방현이 될 수 없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낙랑이 평안도이고 대방이 황해도라면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유령처럼 황해도에 나타나 대방 현령을 죽이고 다시 평안도의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아온 것이 된다. 공수특전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구절에 대해 ‘군국지’(郡國志)는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그러나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로 비정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산해경에는 “열구, 요동에 있어”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 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上: 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장황한 설명 후 ‘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병도가 황주를 둔유라고 본 근거는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둔유(屯有)는 ‘군대가 진 치고 있다’는 뜻으로서 주요 군사기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게다가 ‘우동어홀’ 중에서 우(于)자와 홀(忽)자는 마음대로 빼 버리고 가운데 동어(冬於)만을 취해서 ‘동어가 둔유와 같은 말을 달리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이 중 중국 고대 사서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현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인데 이병도는 이를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은율군은 고구려 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栗口)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구현이 오늘의 은율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주류 사학계는 대방군 열구현을 황해도 은율군으로 보는 데 이론이 없을지 모르지만 <후한서> 주석자는 “곽박(郭璞)이 <산해경>에서 ‘열(列)은 강의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열구가 요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장잠현에 대해서 이병도는 황해도 풍천군으로 비정하면서 그 근거로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을 들었다. ‘최인이 장잠현령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멀어서 부임하지 않았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후한서>는 이 구절에 “장잠현은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요동에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병도가 이 주석을 못 보았을 리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므로 못 본 체하고 황해도 풍천에 비정한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열구·장잠현을 모두 황해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방군 설치자 주무대도 요동
또한 주류 사학계는 진번군과 대방군을 같은 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고대 사료는 전무하다. 진번군에 대한 사료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크게 정리하면 진번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북방설과 황해도 등지에 있었다는 남방설이 있다. 이병도는 북방설에 대해 “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일축하면서 ‘진번군=대방군=황해·경기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근거로 든 것은 고대 사료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학자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회명헌고>(晦明軒稿)에서 대방군의 7개 현을 옛 진번군의 잔현(殘縣)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양수경의 주장에 대해 이병도는 “어떻든 대방 7현을 고(故) 진번의 잔현(殘縣)으로 추단(推斷: 추측해서 단정함)한 것은 틀림없는 탁견으로 진번 문제 해결에 한 서광을 비추어주었다”(<한국고대사연구> 114쪽)라고 극찬했다.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조선역사지리>에서 진번군을 압록강 상류 부근이라고 비정했는데 이병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쓰다가 아니라 양수경을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충청도 지역으로 비정한 것보다는 조금 나은지도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사기>와 <한서>(漢書)를 근거로 “진번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대방군을 설치한 공손강 가문은 그 부친 공손도(公孫度)가 후한 말의 혼란기에 요동왕을 자칭했던 가문이다. 이 가문은 서진(西進)하는 고구려와 요동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다. <삼국지> ‘위서’ 공손도(公孫度) 열전은 공손도와 아들 공손강 일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의 무대는 시종일관 요동이었고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요동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다. 고구려의 저지선을 뚫고 황해도와 경기 북부까지 진출하는 것은 이 가문의 관심사도 아니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위에는 고구려, 아래는 백제가 압박하는 황해·경기도에 대방군이 존속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이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는 건국초부터 요동지방에서 중국과 싸웠고 대방은 요서에 속한 땅이다.
지명은 한 번 정해지면 그 지역에서 계속 사용되는 것이지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져 사용될 수가 없다. 예컨대 경주(慶州)나 전주(全州) 같은 지명은 옛날에도 경주나 전주이고 지금도 경주나 전주이지 경주가 평양일 수 없고, 전주가 황해도 해주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요동(遼東)은 예전에도 요하(遼河)의 동쪽이고 지금도 요하(遼河)의 동쪽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사군이라 불린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 대방(帶方) 역시 한 번 정해진 지명의 위치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한사군(漢四郡)에는 대방(帶方)이 없었으나,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진번군을 황해도, 충청도 또는 충청∙전라도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이병도는 한국말을 할줄 안다는 재주를 밑천 삼아 한 술 더 떠서 황해도 황주가 예정에 동홀(冬忽 또는 于東於忽)이라 했던 것이 중국의 지명 우둔(于屯)과 일치한다는 논리를 세워 황해도 지방이 진번이다가 후에 대방(臺方)으로 되었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비약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식민사학자들은 이 이병도설을 추종하고 있다. 그러나 한사군(漢四郡)이라 주장하는 땅이 모두 원래 고조선의 영토이며, 요하 서쪽이거나 요동 부근에 있던 지명이며, 한반도 내에 있는 지명일 수 없다.
한반도내 한사군설은 일본인과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말살책으로 왜곡된 역사이며, 지금은 중국에서 한나라가 한강 이북까지 점령하고 있었다는 지도를 버젓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한사군이 월래 조선에 속한 땅이었던 것을 중국 한무제가 침략해서 설치했다고 하는데,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2년(BC 36)에 송양(松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므로 그곳을 다물도(多物都)라 고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다물은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다는 뜻이므로 이곳은 부여등 우리나라와 달리 아마도 중국에게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 초기의 요하(遼河) 부근의 한사군과 관련된 전쟁
제4대 민중왕(閔中王) 4년(AD 47년)에는 “잠우락부의 대가재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2년 후인 제5대 모본왕(慕本王) 2년(AD 49년)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함으로 이내 화친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북평은 오늘의 북경(北京)이 한 때 북평(北平)이라고 불렸던 점을 상기하면, 북경 부근일 가능성이 있고(인터넷을 보면 일부 사람들은 북경보다 훨씬 남쪽의 석가장시 북쪽이라고도 함. 삼국지에 공손찬이 북평태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곳은 지금의 북경이 아니고 낙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어양은 지금의 북경시 동쪽이라고 하며, 상곡은 진나라 때 통합된 연(燕)나라의 북부지방이고 사기(史記)에는 탁록 지역이라고도 한다. 또 태원(太原)은 용성(龍城)이라고도 불렸던 지역으로 지금 산시성(山西城)의 성도이며, 북경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한 타이위엔시(太原市)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경계를 이루고 또 싸운 지역은 모두 중국의 북경 부근 지역과 그보다 더 남쪽의 지역이었으며 결코 요하(遼河) 부근의 지명이지 식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즙안(楫安) 부근의 지명이 될 수 없다.
제6대 태조대왕 3년(AD 55년)에는 “요서(遼西)에 10개의 성(城)을 쌓아 한병(漢兵)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요서 지방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는 대목이다. 53년(AD 105년)에는 “한(漢)나라의 요동(遼東)에 고구려가 군대를 보내어 6개의 현을 약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미 요동과 요서에 고구려의 국경이 있음을 나타낸다. 결코 고구려가 압록강 주변의 조그만 나라였다고 하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맞지 않으며, 허구이다. 또 59년(AD 111년)에는 통감(通鑑)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玄菟)를 침구했다.”고 하였다.
여기에 나타난 현도는 삼국사기 보장왕 4년 “<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루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래에 이르렀다)”는 기록에서 분명이 나타난 바와 같이 요수(遼水; 遼河)를 요동성(遼東城)에 이르는 길목의 중간에 있다. 식민사학자들의 한사군 현도(玄菟) 위치 주장인 평북 산악지방에서 푸순(撫順)으로 옮겼다는 설은 반드시 폐기되야할 잘못된 학설이다.
또 태조왕 66년(AD 118년)에는 “한의 현도에 습격하여 화려성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국경 넘어 한나라를 침략한 내용인 것이다. 태조대왕 69년(AD121년)에는 “한나라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渠帥)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고구려 태조대왕은 아우인 수성을 보내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를 반격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서 거짓 항복을 하니 유주자사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은 이를 이용해서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대군을 차단하고 몰래 3,000명을 보내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치고 그 성곽을 불살랐으며, 2000여 명을 살획하였다. 이어 여름 4월에 태조대왕이 선비의 군사 8000명을 데리고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내어 신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태조왕이 공격한 요동군과 현도군은 이웃에 있는 요하지방의 지명이며, 결코 평북 산악지방일 수 없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요동은 요하지방의 땅이지 결코 압록강이나 한강 지방의 땅이 아님을 식민사학 역사학자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태조대왕은 94년(AD 145년)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여기에 기록된 서안평현은 어디일까? 한국의 사학자들은 대학교재용 한국사 역사책에 서안평을 단동이라고 단정하여 표시하고 있다.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縣)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요동군임이 확실함에도 식민사학자들은 엉뚱한 표시를 하고 있으나 결코 단동일 수 없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상경임황부(上京臨滉府)가 한나라 때 요동군 서안평이었다.”고 해서 현재 내몽골의 파림좌기 지역이라 주장하고 있고, 또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다른 설이 많다. 요동군 서안평현을 공격해서 대방령을 죽이고 또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은 지역이 결코 황해도나 평양 부근이 될 수는 없다.>
7대 신대왕 4년AD 182년)에는 현도군이 침입해 와서 싸우고, 또 한나라 대군이 침입해 온 것을 수성(守城) 작전으로 대패시키기도 한다. 8대 고국천왕 20년(AD 267년)에는 “위(魏)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장수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침범하니, 왕은 보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역전하여 깨뜨리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싸워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키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3000여 명이었다.
7대 신대왕 때 침입해 온 현도군도 요동성 밖 요하와의 중간 지점에 있는 지역이며, 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출발한 현도군도 요하와 요동성 중간에 위치한 땅이다. 왕이 나아가 싸운 비류수(沸流水) 역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즙안(楫安) 부근이 아니고 현도와 요동성 부근에 있음이 확실함을 표시하고 있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에서 보면 미천왕 3년(AD 302)에 현도군을 침범하여 무려 8천명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에 기록된 현도군(현토군)은 평안북도가 될 수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요하와 요동성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다.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남녀 2천명을 사로잡은 낙랑군이 결코 지금의 평양일 수 없다. 또 미천왕 15년에 침범한 대방군(帶方郡)이 이병도가 주장하는 현재의 평양 이남 황해도일 수 없고, 중국 요하부근에 위치한 땅이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멸망했다고 주장하는 낙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분명히 대방은 요하 국경지대에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양왕조와 보장왕조를 인용하여 수양제가 스스로 자복한 수나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고찰한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遼東) 예맥(濊貊)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遼西)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幽州)와 삭주(朔州)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수양제는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 요동의 땅을 잠식했고 요서까지 침입하고 있다고 자복(自服)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경이 이토록 명확히 들어난 기록이 드물 것이다. 또 좌12군의 진격 경로에 있는 북쪽의 누방, 현도, 옥저, 낙랑, 조선 등은 수나라의 공격 루트 중에서 좌측이므로 지리적으로는 북쪽이며, 이중 누방은 낙랑군에 속한 땅이다. 경로 중에 조선이 있다는 것은 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12군의 진격 경로에 있는 임둔, 숙신, 갈석, 대방(帶方) 등은 중국의 우측이므로 지리적으로 남쪽 경로이며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대방이 결코 이병도 등의 주장처럼 황해도나 한강 이북일 수가 없다. 15대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망했다는 낙랑이 수양제(AD 611) 때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역사가들이 무시해선 안 된다.>
이후 수양제가 113만 3800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우어위장근 장근은 양평도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 모두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 이후 수양제의 대군이 을지문덕에게 패하여 완전 궤멸된 이야기나 이후에도 수양제가 수차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실패한 이야기 등은 생략을 한다.
<*이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우문중은 낙랑도(樂浪道)로 출발해서 나왔다고 하는데, 요동을 비롯하여 요서지방까지 점령하고 있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출발한 지점이 낙랑(樂浪)이며, 중국의 땅이고 결코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평양이 될 수 없다. 경주가 평양이 될 수 없듯이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평양이 갑자기 요서(遼西)의 낙랑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11년(AD 401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한 평주(平州)는 진서지리지신보정(晉書地理志新補正) 권이(卷二)에 요서에 속하는 유주(幽州)와 접한 동쪽 지역이고, 또 요동(遼東), 창려(昌黎), 원도(元菟: 玄菟), 대방(帶方), 낙랑(樂浪)군을 합쳐서 평주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한사군의 이름이 모두 중국의 평주(平州)에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평주(平州) 중국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위치한 곳이며 결코 평양 부근이 아니다. 진서지리지의 분명한 위치표시를 한국의 사학계 학자들이 외면하고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매국노적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玄菟道)로 출발해서 나와서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고 했는데, 신세웅이 출발한 현도도는 전술한 요하를 건너 현도로 향하는 길이며, 결코 평북 산악지방이나 푸순일 수 없다. 여기에서 수나라 군사가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고 했는데 이 압록수는 현재의 압록수(鴨綠水; 鴨綠江)과 달리 한자 표시가 다르고 요동 서쪽에 위치한 중국의 지역이다. 수나라 군사가 을지문덕에게 살수에서 대패하고 ‘수나라 장수와 군졸들이 뛰어 도주하였는데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압록수(鴨淥水)까지 4백 5십리를 행군하였다(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라고 했는데 이곳은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고 수나라 군사가 현도를 지나서 집결했던 지점이고 살수로부터 4백 5십리나 떨어진 지점임을 밝히고 있다.
수양제가 요하를 건너는 도중에도 대패한 기록이 있다. “수양제는 고구려 영양왕 23년 2월 양제가 군사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3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에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서 언덕에 닿지 못하였다. 이때 고구려 군사가 크게 공격하였다. 수나라 군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하였으나, 고구려 군사들은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나라 순사가 언덕에 이르지 못하였다. 수나라 군사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사웅」, 「맹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고구려는 요서까지 점령하기도 하였으며, 요하의 동쪽을 견고히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인 학자들이나 이병도 등 식민사학자들이 황해도 또는 충청∙전라도 지방에 대방이 있었다는 맹랑한 주장을 되풀이 하고 “대방군(帶方郡)에 대방(帶方), 열구(列口), 남신(南新), 장잠(長岑), 제해(提奚), 함자(含資), 해명(海冥) 등 7개 현(縣)을 관할하면서 치소(治所)는 대방(帶方)에 두었다고 하면서. 현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동남 문정면에 있는 속칭(俗稱) 당토성(唐土城)이 그 유지(遺址)로 추정되고 있다. .....미천왕 때인 AD 313년 대방, 낙랑 양군 지역에서 버티고 있던 장통(張統)이 고구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한인(漢人)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달아나자 대방군(帶方郡)은 고구려에 점령되고 말았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서 출발한 지역에는 우십이군(右十二軍) 중에 함자(含資), 임둔(臨屯), 대방(帶方)이 들어 있고, 좌십이군(左十二軍)의 출발지 중에 장잠(長岑)이 들어 있어서 모두 대방과 관련된 지명이 수양제의 침략지점 도로상에 들어 있다. 이같이 삼국사기에 명백한 설명이 있음에도 어떻게 식민사학자들은 황해도에 대방(臺方)이 있고, 대방군의 통치지역인 함자(含資), 임둔(臨屯), 대방(帶方), 장잠(長岑) 등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 양심이 있다면 대방군(對方郡) 황해도설을 폐기(廢棄)하고 대방군의 대륙 존재설로 고쳐써야 할 것이다.
댓글
번호 | 제목 | 글쓴이 | 조회 | 날짜 |
---|---|---|---|---|
213 | 예맥과 옥저는 강원도나 함흥이 아니고 요하부근이다 | 이태수 | 1172 | 2021-06-07 |
212 | 옥저는 중국땅이거나 고구려 변경이며 함흥이 아니다 | 이태수 | 1885 | 2021-06-06 |
211 | 임둔군은 요하 부근 지명이며, 이병도의 함경남도설은 폐기되야 한다 | 이태수 | 1822 | 2021-06-05 |
210 | 수성현은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고 황해도 수안이 결코 아니다 | 이태수 | 1648 | 2021-06-05 |
>> | 대방군 황해도설은 폐기되고 요하 서쪽 존치설로 바꾸어야 한다 | 이태수 | 1665 | 2021-06-05 |
208 | 현도군이 평북에서 푸순으로 옮겼다는 한국사통설은 폐지되야 한다 | 이태수 | 1256 | 2021-06-02 |
207 | 서안평이 단동이라는 한국사통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 이태수 | 1321 | 2021-06-01 |
206 | 수양제가 스스로 말한 고구려와 수나라 국경 | 이태수 | 1516 | 2021-04-02 |
205 | 한사군은 요서의 평주 또는 유주에 속한 땅이다. | 이태수 | 2182 | 2021-01-19 |
204 | 낙랑군은 삼국사기에도 분명 평양이 아니다 | 이태수 | 1595 | 202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