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단재 신채호는 변한과 위만조선의 수도가 개평(開平)이라고 하였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10-16 |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변한(卞韓)과 위만조선의 수도가 개평(蓋平)이라고 하였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박기봉 옮김)에 실려 있는 삼한(三韓)과 그 수도에 대한 글을 옮겨 적는다.-
○변한(卞韓)의 수도는 지금의 개평(蓋平) 동북 안시(安市)이었다.
”한(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王)이란 뜻이니,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을 나누어 통치하였던 3 대왕(大王)이며, 삼조선(三朝鮮)은 삼한(三韓) 곧 세 왕이 나누어ㅓ 통치하였던 3대 지방은 물론이며, 따라서 그 세 도읍지의 위치와 강영의 범위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 한(韓)의 도읍지는
(1) 제1편에서 서술한 「아스라」 곧 지금의 하얼빈과
(2) 「아리티」 곧 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의 안시(安市) 고허(故墟)와
(3) 「펴라」 곧 지금의 평양이 그것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이르기를 요동의 번한현(番汗縣) 곧 지금의 개평(蓋平) 등지가 변한(卞韓)의 고도(故都)“라고 하였는바, 번한(番汗)과 변한(卞韓)은 동음(同音)이므로 개평(蓋平) 동북의 「아리티」가 「불한(*卞韓)」의 고도일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박기봉 옮김 117-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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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의 수도와 패수(浿水)는 지금의 개평(蓋平) 부근이었다.
위씨(衛氏: 위만조선)가 망하자 한(漢)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眞蕃), 임둔(臨屯), 현토(玄菟), 낙랑(樂浪) 등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는 바, 사군(漢四郡)의 위치 문제는 삼한(三韓)의 연혁(沿革) 문제에 관한 논쟁 못지 않은 조선사(朝鮮史) 상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만반한(滿潘汗: 위만조선)᠂ 패수(浿水)᠂ 왕검성(王儉城) 등 위씨(衛氏: 위만조선)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海城)᠂ 개평(蓋平) 등지일 뿐 아니라(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상술하였음), 당시에 지금의 개원(開原) 이북은 북부여국이었고, 지금의 흥경(興京) 이동은 고구려국이었다.(신채호의『조선상고사』 박기봉 옮김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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