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사군은 요서의 평주 또는 유주에 속한 땅이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1-19 |
한사군은 요서의 평주 또는 유주에 속했다(1)
-한사군이 한강이북 땅 전체라는 주장은 폐기되야 한다-
이태수
◯ 머릿말
1925년 조선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자 이병도는 이마니시류(今西龍)의 수사관보가 되어 조선사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다. 그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걸쳐 일본 학자들이 발행하던 사학잡지, 청구학총 등에 진번군고, 현도군 및 임둔군고, 패수고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모두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또한 이마니시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서술하였다. 이병도, 이기백, 노태돈 등의 학설은 대동강 유역이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라는 것이다.
사기 태강지리지에 보면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학자인 이나바이와기치(稻葉岩吉)라는 점과 이를 인용한 자가 바로 이병도이다. 이마니시류(今西龍), 이나바이와기치(稻葉岩吉)등 여러 일본학자들이 평양지역 낙랑설, 임둔군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설, 현도를 평북 산악지역에서 만주 푸순(撫順)으로 옮겼다는 설을 비롯해서, 이병도는 진번군을 황해도 은율을 중심으로 동쪽은 춘천,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른다는 주장을 하여 오늘날 까지 이들의 주장이 한국의 교과서에 그대로 실리고 있다. 그 결과 동북공정 후 오늘날 중국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한강 이북의 땅을 모두 중국 한나라의 영토(漢四郡)로 표시하고 있다.
이 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중심으로 중국 사서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여 낙랑(樂浪)과 진번(眞番), 임둔(臨屯郡), 현도(玄菟), 대방(帶方) 등 한사군(漢四郡)이 평양이나, 함흥, 황해도 및 한강 이북 등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모두 요서지방(遼西地方)의 평주(平州), 때로는 유주(幽州)에 있었음을 밝히고자 쓴 글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다(唐書云 平壤城漢樂浪郡也).“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김부식 자신이 기록한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된 내용을 볼 때 분명히 김부식의 잘못된 인용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 ”낙랑군(樂浪郡)은 한무제 3년에 처음 봉해졌는데, 왕망(王莽)은 낙선이라고 했고, 유주에 속했다.(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라고 해서 낙랑(樂浪)이 요서 유주에 속했다고 분평히 기록 했는데, 김부식은 이 사실을 몰랐거나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주는 평양에서 2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지역이어서 도저히 평양이 낙랑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삼국사기를 통독하면서 고구려와 중국의 전투지역을 살펴본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한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이 모두 고구려의 서쪽 요동 및 요서의 경계지역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될 수 있기를 바라란다.
○현도(玄菟)는 옥저(沃沮)땅이며, 함흥이 아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기에 적혀 있다. 제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 지방을 유람하는데,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순행하다가 묻기를 “당신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 大武神王)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드디어 함께 데리고 돌아와서 사위로 삼았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지방을 유람했다고 하는데, 현재 한국사(韓國史)에서는 옥저를 함흥지역이라고 하나,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의 옥저전에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는 글을 볼 때 현도는 처음에 옥저(沃沮)의 땅에 설치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후에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고, 또 현도군을 낙랑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했다고 하므로, 현도(전의 옥저 땅)는 낙랑의 동쪽임을 나타낸다. 지금의 국사책을 보면 현도가 애초부터 평안북도 산악지대와 즙안 부근이어서 저들이 말하는 낙랑(지금의 평양)의 동쪽이 아니며, 후에 옮겨진 곳도 푸순(撫順)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현도도 낙랑(평양)의 동쪽이 결코 될 수 없다. 한국사 책에는 엉뚱하게도 옥저(현도군 설치 지역)가 함흥평야 지역이라고 지도에 나온다. 이 같은 한국 고대사의 현도(沃沮에 설치한 지역)에 대한 앞뒤가 맞지 않는 여러 기술은 반드시 고쳐지고 바로잡아야 한다.
오늘날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에는 삼국사기에 “15대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을 침범하였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이후에도 약 300년간이나 더 낙랑이 평양을 근거로 존재했고, 대방이 AD 314년까지도 황해도에 존재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계속 하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대방은 “태조대왕이 94년(AD 145년)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樂浪)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요동군 서안평현에 위치해 있음이 확실하다. 대방이 황해도와 한강 이북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 중 한사군과 관련된 내용들
제4대 민중왕(閔中王) 4년(AD 47년)에는 “잠우락부의 대가재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2년 후인 제5대 모본왕(慕本王) 2년(AD 49년)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함으로 이내 화친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북평은 오늘의 북경(北京)이 한 때 북평(北平)이라고 불렸던 점을 상기하면, 북경 부근일 가능성이 있고(인터넷을 보면 일부 사람들은 북경보다 훨씬 남쪽의 석가장시 북쪽이라고도 함. 삼국지연의에 공손찬이 북평태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곳은 지금의 북경이 아니고 진나라 때의 만리장성 남쪽 낙양에서 멀지 않은 곳은 아닐까?), 어양은 지금의 북경시 동쪽이라고 하며, 상곡은 진나라 때 통합된 연(燕)나라의 북부지방이고 사기(史記)에는 탁록 지역이라고도 한다. 또 태원(太原)은 용성(龍城)이라고도 불렸던 지역으로 지금 산시성(山西城)의 성도이며, 북경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한 타이위엔시(太原市)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경계를 이루고 또 싸운 지역은 모두 중국의 북경 부근 지역과 그보다 더 남쪽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
제6대 태조대왕 3년(AD 55년)에는 “요서(遼西)에 10개의 성(城)을 쌓아 한병(漢兵)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요서 지방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53년(AD 105년)에는 “한(漢)나라의 요동(遼東)에 고구려가 군대를 보내어 6개의 현을 약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미 요동과 요서에 고구려의 국경이 있음을 나타낸다. 또 59년(AD 111년)에는 통감(通鑑)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예맥(濊貊)과 더불어 현도를 침구했다.”고 하였고, 66년(AD 118년)에는 “한의 현도에 습격하여 화려성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국경 넘어 한나라를 침략한 내용인 것으로 평안북도나 즙안 지역이 아니라 요동 또는 요서지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태조대왕 69년(AD121년)에는 “한나라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玄菟)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渠帥)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고구려 태조대왕은 아우인 수성을 보내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를 반격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서 거짓 항복을 하니 유주자사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은 이를 이용해서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대군을 차단하고 몰래 3,000명을 보내어 현도군(玄菟郡)과 요동군을 치고 그 성곽을 불살랐으며, 2000여 명을 살획하였다. 이어 여름 4월에 태조대왕이 선비의 군사 8000명을 데리고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내어 신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한나라의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 등은 요동 또는 요서의 한나라 군현이며, 고구려와의 국경이역이다. 현도태수(*옥저 땅에 설치됨, 후한서), 요동태수 등이 예맥의 거수를 격살했다는 것은 예맥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요동 부근의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를 볼 때 현도(玄菟)가 평안북도 북쪽에 있다가 만주 푸순(撫順)으로 갔다고 하는 한국사 통설은 잘못된 것이며,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 부근에 옥저가 있었던 것이다. 현도(玄菟; 沃沮에 설치됨)가 함흥평야 지역이라는 주장은 황당하다.
태조대왕은 94년(AD 145년)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樂浪)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여기에 기록된 서안평현은 어디일까? 한국의 사학자들은 아직까지 이곳이 압록강 건너의 단둥(丹東)이라고 한결 같이 주장해서 식민사관을 호도하고 있으나, 결코 단동일 수 없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상경임황부(上京臨滉府)가 한나라 때 요동군 서안평이었다.”고 해서 현재 내몽골의 파림좌기 지역이라 주장하고 있고, 또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다른 설이 많다. 요동군 서안평현을 공격해서 대방령을 죽이고 또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은 지역이 요동에 있는 지역이 명백하며, 결코 이병도 등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황해도(帶方)나 평양(樂浪) 부근이 될 수는 없다.>
7대 신대왕 4년AD 182년)에는 현도군이 침입해 와서 싸우고, 또 한나라 대군이 침입해 온 것을 수성(守城) 작전으로 대패시키기도 한다. 8대 고국천왕 20년(AD 267년)에는 “위(魏)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장수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나와 침범하니, 왕은 보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역전하여 깨뜨리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싸워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키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3000여 명이었다........밀우가 결사적으로 대항을 하고, 유유가 거짓 항복하면서 적장을 찔러 죽이자 왕은 급히 위군을 공격하여 위군은 낙랑으로 물러갔다.....고국천왕 21년(AD 268년) 동천왕은 환도성이 난리로 파괴되어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사직을 옮겼다.”
<*위의 글을 보면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출발한 곳이 중국 땅의 현도(玄菟)이며, 멀지 않은 곳에 비류수(沸流水)가 있음을 보인다. 이 비류수는 동명성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땅이다. 또 유유가 적장을 찔러 죽이자 패한 위군이 물러간 곳은 중국 땅 낙랑이다. 결코 위군이 패해서 물러난 곳이 지금의 평양일 수 없다. 즉 현도와 낙랑은 요동이나 요서의 위나라와 고구려간 접경지역이지, 결코 평양이나 푸순(撫順)일 수 없다. 여기서 동천왕이 평양에 사직을 옮겼다고도 했는데, 이곳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AD 506년)이므로 이 당시에 옮긴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평양은 “넓고 기름진 땅”을 의미하므로 사학계에서는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밝혀야 할 것이다.>
한사군은 요서의 평주 또는 유주에 속했다(2)
-한사군이 한강이북 땅 전체라는 주장은 폐기되야 한다-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에서 보면 미천왕 3년(AD 302)에 현도군을 침범하여 무려 8천명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여기에 기록된 현도군(현토군)은 평안북도나 즙안(集安)일 수 없다.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남녀 2천명을 사로잡은 낙랑군이 결코 지금의 평양일 수 없다. 또 미천왕 15년에 침범한 대방군(帶方郡)이 황해도일 수 없고, 미천왕 16년(AD 315년)에 쳐부순 현도성(玄菟城)이 평안도나 즙안일 수는 결코 없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멸망했다고 주장하는 낙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고구려 땅 평양에 낙랑이 어떻게 남아 있었겠는가? 미천왕에게 AD 314년에 망한 대방도 이병도 등은 황해도와 한강이북에 있었다고 계속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서울로 삼고 한강 유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어찌 황해도에 대방이 있었겠는가? 대방은 “태조대왕은 94년(AD 145년)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요동군 서안평현에 존재한 곳이지 결코 대방(帶方)이 황해도와 한강이북의 땅이 될 수 없다.>
18대 고국양왕 2년(AD 385)에는 왕이 군사를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때 연나라 왕 수는 대방(帶方)의 왕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는 이를 쳐부수고 드디어 요동∙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왔다.
<*이 내용을 보면 대방(帶方)은 연나라에 위치한 지방임을 보여주며, 대방태수가 용성을 지켰다는 것은 지금의 중국 태원시(太原市)를 지키게 했다는 것이므로 결코 이병도가 주장하는 황해도가 될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
19대 광개토대왕 11년(AD 401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여기에서 말한 평주(平州)는 진서지리지신보정(晉書地理志新補正) 권이(卷二)에 요서에 속하는 유주(幽州)와 접한 동쪽 지역이고, 또 요동(遼東), 창려(昌黎), 원도(元菟: 玄菟), 대방(帶方), 낙랑(樂浪)군을 합쳐서 평주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한사군의 이름이 모두 중국의 평주(平州)에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평주(平州) 중국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위치한 곳이며 결코 평양 부근이 아니다. 진서지리지의 분명한 위치표시를 한국의 사학계 학자들이 외면하고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매국노적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더욱이 광개토대왕은 평서의 숙군을 쳐서 점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대 장수왕 23년(AD 435년) “위(魏)나라가 자주 연(燕: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약, 일이 급해지면 동으로 가서 고구려에 의탁하고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비밀히 상서 양이를 보내서 고구려에게 맞이해 주기를 청하였다....이듬해 위나라가 연의 백랑성을 공격하여 이기니 장수왕은 장수 갈로, 맹광을 보내어 군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에 이르러 연나라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5월에 연왕은 용성(龍城)의 호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장수왕은 그를 평곽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북풍으로 옮겼다...
<*이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에 전혀 소개가 되어 있지 않은데, 중국의 북쪽에서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던 연(燕; 北燕)이 고구려에 합병되고 북연의 지역이 고구려 땅으로 통합되었다. 북연은 수도가 용성(龍城)이었는데, 이 용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으나 태안시(太安市) 지역을 용성으로 부른 때가 있었다. 다시 말하여 광대한 중국의 북부 지역이 장수왕 때 고구려에 통합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한국사(韓國史)에 전혀 나오지도 않아서 매우 이상한 일이다. 상세한 내용은 삼국사기에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한사군은 요서의 평주 또는 유주에 속했다(3)
-한사군이 한강이북 땅 전체라는 주장은 폐기되야 한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수양제는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 요동의 땅을 잠식했고 요서까지 침입하고 있다고 자복(自服)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경이 이토록 명확히 들어난 기록이 드물 것이다. 또 좌12군의 진격 경로에 있는 북쪽의 누방, 현도, 옥저, 낙랑, 조선 등은 수나라의 공격 루트 중에서 좌측이므로 지리적으로는 북쪽이며, 이중 누방은 낙랑군에 속한 땅이다. 경로 중에 조선이 있다는 것은 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12군의 진격 경로에 있는 임둔, 숙신, 갈석, 대방(帶方) 등은 중국의 우측이므로 지리적으로 남쪽 경로이며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대방이 결코 이병도 등의 주장처럼 황해도나 한강 이북일 수가 없다. 15대 미천왕 14년(AD 313년)에 망했다는 낙랑이 수양제(AD 611) 때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역사가들이 무시해선 안 된다.>
이후 수양제가 113만 3800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우어위장근 장근은 양평도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 모두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 이후 수양제의 대군이 을지문덕에게 패하여 완전 궤멸된 이야기나 이후에도 수양제가 수차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실패한 이야기 등은 생략을 한다.
<*이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우문중은 낙랑도(樂浪道)로 출발해서 나오고, 우익대장군 설세웅은 沃沮道)로 출발해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玄菟道)로 출발해서 나와서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고 했는데, 이 압록수(鴨淥水)는 현재의 압록수(鴨綠水; 鴨綠江)과 달리 한자 표시가 다르고 요동 서쪽에 위치한 중국의 지역이다. 전투를 위해서 집결한 지역이므로 고구려 국경의 서쪽 지역이 확실하다. 이병도 등이 주장하는 평양이나 황해도나 함흥평야 같은 지역이 결코 될 수 없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국경지대인 요동과 갈석에서 연개소문의 죄를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이듬해(AD 645년) 4월 당의 장수 이세적은 유주에서 출발하여 통정을 거쳐 요수를 건너 바로 현도(玄菟)에 이르렀다. 5월에 이세적은 요동성에 이르고 당태종은 요택에 머물렀다.
<*여기에서도 이세적이 지난 현도(玄菟)는 요수(遼水)를 바로 건넌 곳에 위치해 있고 요동성 바깥의 서쪽이었음을 확실히 기록하고 있다. 현도(玄菟)가 옥저와 같은 지역이라고 했으므로 결코 함흥평야에 이른 다음 요동성에 다다랐다고 하는 식민사학자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 결론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다(唐書云 平壤城漢樂浪郡也).“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잘못된 인용이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은 한무제 3년에 처음 봉해졌는데, 왕망(王莽)은 낙선이라고 했고, 유주에 속했다.(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라고 해서 낙랑이 요서의 유주지방에 속했다고 했는데, 유주는 평양에서 2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지역이어서 도저히 낙랑이 평양으로 될 수 없다.
-호동왕자는 옥저(沃沮) 땅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났는데, 지금 한국사에서는 옥저를 함흥평야라고 표시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옥저 땅에 현도를 세웠고 후에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겼으며 낙랑 소속의 동부도위가 되었다고 했는데, 옥저는 중국의 많은 역사서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설세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진격해 온 중국 땅의 길목에 있는 곳이다. 평안북도의 북쪽 산악지대에 있다가 푸순(撫順)으로 옮겼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아울러 현도군(玄菟郡)는 전술한 바와 같이 옥저땅에 처음 설치했으나 후에 북쪽으로 옮겨져 군의 지위가 낙랑군 동부도위로 전락한 곳이다. 수나라의 신세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수나라의 좌12군(고구려 북쪽지방)의 진격해 온 길목에 있었던 곳이다. 또 당의 태종 이세적은 유주를 출발하여 같은 달에 통정, 요수를 건너 현도에 도착했고 다음 달에 요동에 도착해서 공격했다고 기록했음을 볼 때, 요동성 보다 더 서쪽에 있었고, 요수를 건넌 지점에 현도(玄菟)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임둔(臨屯)은 수나라의 우십이군(右十二軍)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진격하던 고구려와의 남쪽 국경 지방에 위치한 지명이며, 한국사 교과서에 함흥 땅에 임둔(臨屯)이 있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대방(帶方)은 수나라의 우십이군(右十二軍)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진격하던 고구려와의 남쪽 국경 지방에 위치한 지명이며, 진서지리지신보정(晉書地理志新補正) 권이(卷二)에 의하면 또 요동(遼東), 창려(昌黎), 원도(元菟: 玄菟), 대방(帶方), 낙랑(樂浪)군을 합쳐서 평주(平州)라고 기록하였을 볼 때 중국의 평주에 속한 땅이다. 이병도가 진번의 땅이 후에 대방으로 되었다는 것은 허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병도(1927)는 “진번군고(眞蕃郡考)에서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眞蕃郡)을 황해도 은율(殷栗)을 중심으로 동쪽은 춘천 일대,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또 진번군이 후에 대방군에 합병되었다고도 하며, 진번군 황해도설은 아직도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 되어 있다.
그러나 “최초 15개현을 통괄하던 진번군은 토착세력에게 밀려서 후에 낙랑군 남부도위(樂浪郡 南部都尉)로 편입되고 7개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라는 위키백과사전의 기록을 보면 진번군이 중국 평주에 위치한 낙랑의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현은 매우 넓은 땅이어서 황해도 은율에 설치된 진번군이 7개의 현을 다스렸다는 이병도설은 절대 맞지 않는 거짓이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 연(燕; 北燕)이 항복해 오게 됨으로써 중국 북쪽의 연나라가 통치하던 넓은 땅이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한국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당시 연(燕)나라 땅에는 수도이었던 용성(龍城), 유주(幽州), 평주(平州) 등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수나라 때는 유주가 수나라 영토로 다시 나타나고 있지만 이 부근이 오래 동안 고구려 땅이었다는 사실이 한국사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은 고쳐져야 한다. 더구나 중국은 동북공정을 하면서 지금 한강 이북을 모두 중국의 한나라 땅이었다고 중고등학생들에게 까지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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