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이벙도의 짓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10-07 |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이병도의 짓
○한겨레신문 2009. 6. 2자 기사내용 중 일부를 펌한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8262.html#csidxe7ae7298b2ffb01b00a5ba70c68a192
=(전략)=
대방군이 황해도와 경기도에 있었다는 주류 학설은 이병도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이 시초이다.
이병도는 또 1911년 일본인 학자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한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을 근거로 대방군의 치소인 대방현이 봉산군이라고 비정했다. 중국계 무덤이나 유물은 덮어놓고 한사군 유물로 보는 주류 사학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서는 차후 살펴보겠지만 우선 장무이의 무덤에서 나온 ‘무신’(戊申)년이 새겨진 명문 벽돌만 제대로 해석해도 봉산군은 대방현이 될 수 없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중략)=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로 비정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산해경에는 “열구, 요동에 있다”라고 했지만, 국사매국노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해괴한 매국노적 논리는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 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上: 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장황한 설명 후 ‘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병도가 황주를 둔유라고 본 근거는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둔유(屯有)는 ‘군대가 진 치고 있다’는 뜻으로서 주요 군사기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게다가 ‘우동어홀’ 중에서 우(于)자와 홀(忽)자는 마음대로 빼 버리고 가운데 동어(冬於)만을 취해서 ‘동어가 둔유와 같은 말을 달리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이 중 중국 고대 사서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현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인데 이병도는 이를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멀어서 부임하지 않았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후한서>는 이 구절에 “장잠현은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요동에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병도가 이 주석을 못 보았을 리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므로 못 본 체하고 황해도 풍천에 비정한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열구·장잠현을 모두 황해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주류 사학계는 진번군과 대방군을 같은 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고대 사료는 전무하다. 진번군에 대한 사료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크게 정리하면 진번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북방설과 황해도 등지에 있었다는 남방설이 있다. 이병도는 북방설에 대해 “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일축하면서 ‘진번군=대방군=황해·경기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이병도가) 이런 근거로 든 것은 고대 사료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학자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회명헌고>(晦明軒稿)에서 대방군의 7개 현을 옛 진번군의 잔현(殘縣)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양수경의 주장에 대해 이병도는 “어떻든 대방 7현을 고(故) 진번의 잔현(殘縣)으로 추단(推斷: 추측해서 단정함)한 것은 틀림없는 탁견으로 진번 문제 해결에 한 서광을 비추어주었다”(<한국고대사연구> 114쪽)라고 극찬했다.
쓰다 소우키치는 <조선역사지리>에서 진번군을 압록강 상류 부근이라고 비정했는데 이병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쓰다가 아니라 양수경을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충청도 지역으로 비정한 것보다는 조금 나은지도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사기>와 <한서>(漢書)를 근거로 “진번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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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나 왜놈들의 한반도 대방군설은 진실이 아닌 새빨간 거짓이었다
이병도란 한국사매국노는 진번군이나 진번군을 대신해서 설치되었다는 대방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대륙지방에 있다는 북방설(北方說)에 대하여 “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면서 “진번군=대방군=황해᠂ 경기도”라고 강력히 주장해서 왜놈들인 금서룡(今西龍)이나 도엽암길(稻葉岩吉)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내 대방 존재설을 뒷받침한 놈이다.
진서(晉書)에는 대방군 소속 7개의 현이 나오는 데, 1)대방(大方), 2) 열구(列口), 3) 남신(南新), 4) 장잠(長岑), 5) 제해(提奚), 6) 함자(含資), 7) 해명(海冥)이다.
이병도란 놈은 1) 대방=황해도 봉산현, 2) 열구=황해도 은율, 4) 장잠=황해도 풍천, 6)함자-황해도 서흥 , 7) 해명=황해도 해주라고 말도 되지 않는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인 것처럼 적어 놓아서, 이후 한국사매국노 이병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이를 금과옥조로 함아 황해도 대방설을 절대적 진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병도란 자가 얼마나 한국사를 왜곡하고 한국사매국노 짓을 했는지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역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해명,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이병도라는 한국사매국노가 황해도 봉산군 당토성에 있다고 주장한 대방군은 수양제의 침략경로 우12군 11번째 있었으며, 황해도 풍천이라고 주장한 장잠(長岑)은 좌12군 2번째에, 해주라고 주장한 해명(海冥)은 좌12군 3번째에, 황해도 서흥이라고 주장한 함자(含資)은 우12군 2번째에, 기타 제해(提奚)는 우12군 6번째 수양제의 평양을 향한 침략경로에 있었다. 이들은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며, 황해도에 있는 땅이 아니다.
수양제 침략군이 황해도에 있는 대방이나 장잠, 해명, 함자, 제해 등을 통과해서 압록수에 모인 것이 아니다.
이병도란 자는 와세다대학 졸업논문을 「고구려 대수당전쟁(對隋唐戰爭)에 대한 연구」를 대학의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고 하는 자인데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는 땅들을 모두 황해도라고 맹랑한 주장을 하여 한국사매국노 짓을 하였으며,, 아직도 그 한국사매국노를 추정하는 자들이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얼빠진 한국사매국노들은 황해도에 있던 대방땅의 이름이 후에 서쪽으로 옮겨져서 달라진 것이라고 강변하는데, 서울이란 이름이 북경으로 옮겨지고, 상해로 옮겨지고 또는 모스코바로 옮겨지는 일은 1억분의 일도 없다. 한국사매국노들의 지명 이치(移置)설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판치고 있는 한국사매국노들이 언제 박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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