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개마대산은 대흥안령산맥이라는 설도 있으며, 한국사 매국노들이 주장하는 개마대산=백두산이란 주장은 폐기되어야 한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9-17 |
개마대산은 대흥안령산맥이라는 설도 있으며, 한국사 매국노들이 주장하는 개마대산=백두산이란 주장은 폐기되어야 한다.
○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평양은 요하 부근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
***위의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한서지리지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놈들의 주장이나 왜놈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이병도 등 한국사 매국노들의 주장인 개마대산이 백두산이라면 어찌 이 개마대산(백두산)이 평양의 서쪽에 있겠는가? 만약에 한국사 매국노들의 주장대로 백두산이 개마대산이라면, 평양은 함경도에 있거나 동해바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왕검성이 위치했던 개평은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의 개주(蓋州)시다. 단재 신채호는 ‘평양패수고’에서 개주시 조금 위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를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고 위당 정인보(鄭寅普)도 1946년 ‘조선사연구 상(上)’에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 평양과 원래 무관하다’면서 신채호처럼 해성현(海城縣)을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다.
개마(蓋馬)에 대한 설명 중에 개마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한 땅일 뿐 아니라 이곳이 곧 평양왕검성(平壤王險城)이라고 했으므로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만 정확히 안다면 평양왕검성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위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래에 이르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현도는 요수를 건넌 다음 고구려의 현도성에 다다른 것이며, 이후 진군한 요동성과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다. 다시 말해서 요수와 요동성의 중간에 현도성(玄菟城)이 위치해 있다. 또 개마현(蓋馬縣)이나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현도군에 소속된 것이므로 요수를 건너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평양 왕검성은 기록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드시 요수를 지나 요동성에 이르기 전에 위치되었던 현도군의 소속현 개마현에 위치해 있었고, 현도와 가까운 위치이며, 결코 지금의 평양은 아니다.
소위 이병도라는 한국사 매국노나 왜놈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매국노적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최초 현도지방이 압록강 상᠂ 중류 지방이었다는 핵괘하기 짝이 없는 개소리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현도(玄菟)는 바로 요수(遼水)를 건너 바로 존재했던 땅이며, 요수와 요동성(遼東城)의 중간에 위치했던 땅이다.
○개마대산은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이거나 노호얼산맥(努虎얼山脈)일 가능성이 있다.
또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라는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볼 때 옥저가 남북으로 길게 천리에 달하고 있다고 하므로 여기에 나타난 개마대산은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일 가능성도 있으며, 중국 요동반도 북쪽 조양시(朝陽시)의 북쪽에 대청산(大靑山: 1154m)가 위치한 노호얼산맥일 수도 있다.
이같은 현도의 위치로 볼 때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고 한 한서지리지의 설명이 맞는 것이다. 한국사를 한다는 놈들이 양심도 없이 결코 개마대산을 백두산이라고 우기는 한국사매국노 짓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양심적인 한국사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개마대산이 백두산이 아니고 대륙에 위치한 산임과 그 정확한 위치를 반드시 밝혀 주어야 한다.
한서지리지를 쓴 사람은 당나라 수도 장안의 사람으로 추정되므로 이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백두산을 알거나 또는 개마고원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조선의 영역이었던 요수 부근의 산악지대를 개마대산(蓋馬大山)으로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백두산은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한국의 지리지에 개마대산이란 말이 나온 적이 없으며, 예전의 기록에도 백두산이 개마대산이란 기록은 없다. 개마고원도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지명이 아니며, 왜놈들이 한국을 점령한 후 산수,갑산 지역에 붙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한국사를 배우는 사람들이 양심이 있다면 백두산=개마대산이란 한국사 매국노적 주장을 결코 해선 안 된다.
○ 평양에 대한 기록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조 11대 동천왕 21년(AD 247)에 “21년 봄 왕은 환도성이 난리(*관구검의 침입)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평양성>으로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 한다”(美川王 二十一年 春二月 王 以丸都 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儉).”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 기록된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다. 지금의 평양성은 장수왕 때 옮긴 것이므로 다른 지역이다. 평양성을 선인 왕검의 택지이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서 기록된 현도군 개마현에 위치한 왕검성 평양일 것이다. 왜놈들이나 왜놈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한국사 매국노들은 낙랑이 미천왕 14년(AD 314년)까지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보다 67년 전인 11대 동천왕 21년(AD 247년) 고구려의 수도를 낙랑이 점령하고 있었던 지금의 평양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인가?
“15대 미천왕 3년(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 311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AD 313년)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년(AD 314년)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년(AD 315년)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위의 기록에 볼 수 있드시 15대 미천왕 3년(AD 302년)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범하여 8,000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왜놈들이나 왜놈들을 추종한 이병도 같은 한국사 매국노들은 낙랑이 미천왕 14년(AD 313년)까지 평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미천왕이 어떻게 낙랑이 망하기 11년 전에 현도인 8,000명을 낙랑이 있는 평양으로 옮겼단 말인가?
이병도같은 한국사 매국노나 이를 추종하는 한국사 매국노들이 아니면 미천왕 3년 왕이 현도 사람 8천명을 평양으로 옮길 수 없음이 명백하다.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위치한 평양이다.
당시의 평양은 개마대산 동쪽의 왕검성이 위치했던 개평이며,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의 개주(蓋州)시다. 단재 신채호는 ‘평양패수고’에서 개주시 조금 위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를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고 위당 정인보(鄭寅普)도 1946년 ‘조선사연구 상(上)’에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 평양과 원래 무관하다’면서 신채호처럼 해성현(海城縣)을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다.
북한은 왕검성의 위치를 어디라고 보고 있을까.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1963)에서 요동군 험독현과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각각 다른 곳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험독현은 지금의 하북성 산해관 부근이고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오늘의 개평(蓋平)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서술했다. 개평은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의 개주(蓋州)시다.
왜놈들이나 왜놈들을 추종한 이병도 같은 한국사 매국노나 매국노 이병도 추종자들이 낙랑이 미천왕 14년(AD 313년)까지 평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낙랑이 망하기 67년 전(AD 247)에 어떻게 11대 동천왕이 낙랑이 있는 평양에 서울과 사직을 옮길 수 있였고 낙랑이 망하기 11년 전인 15대 미천왕 3년(AD 302년) 어떻게 현도에서 잡은 포로 8,000명을 낙랑의 수도 평양으로 이주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앞으로 양심있는 자가 한국사 선생을 하거나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들이라면 평양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달리 《사기색은 史記索隱》에서 왕검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를 인용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기》의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해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왕검성에 대한 서울신문 기사-
https://blog.naver.com/gukppa/221274701638
개마대산이 대흥안령산맥이라는 주장
https://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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