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78. 신채호 조선상고사에 올려진 연나라 인질 스파이 진개에 대하여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09 |
고대사 78.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올려진 연나라 스파이 진개에 대하여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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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먼저 신채호는 고대 조선을 『신조선(辰朝鮮)』, 『말조선(馬朝鮮)』, 『불조선(番朝鮮)』으로 나누었는데, <사기>에 동호(東胡)라고 쓴 것은 신조선을 말하는 것이고, 위만이 차지한 조선은 불조선이며, 말조선은 기씨(箕氏)가 신조선의 조선왕에게 반기를 들고 스스로 왕이라 칭한 기자조선을 말조선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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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某甲)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朝鮮)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東蒙古) 등지를 쳐서 선비(鮮卑)를 정복하고 연(燕)을 쳐서 우북평(右北平)[지금의 영평부(永平府)와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北京)부근]과, 상곡(上谷)[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부(大同府)]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弗離支)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燕王)이 크게 두려워하여 해마다 세폐(歲輪)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컫고 태자를 보내서 인질(볼모)로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某乙)이 왕이 된 뒤에는 연(燕)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燕王)이 되어 장군 진개(秦開)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秦開)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秦開)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辰朝鮮)을 습격, 신(辰),말(馬),불(番)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辰朝鮮) 왕 모갑(某甲)이 점령한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番朝鮮)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遼西) 지금의 노룡현(盧龍縣)과 요동(遼東) 지금의 요양(遼場)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 군을 두고, 2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朝鮮)을 막으니,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고 한 것과 흉노열전(匈奴列傳)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秦開)가 호(胡)에게 볼모가 되어 호(胡)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까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고 한 것과 위략(魏略)에, 연(燕)이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滿潘汗)에까지 이르렀다(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곳은 ‘신조선’이지 ‘불조선’이 아니었으며, 만반한(滿潘汗)은 ‘불조선’이지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략(魏略)에는 비록 조선전(朝鮮傳)에 기록하였으나, 진개(秦開)의 인질(볼모)로 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滿潘汗)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참고:
https://blog.daum.net/elpaso57/8114041
○ 진개가 침략한 땅은 산해관과 난하(灤河: 이전의 遼水)를 넘지 못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에서 진개의 침략한 땅에 대하여 논하였다.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진개(秦開)의 입구(入寇) 사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진개(秦開)에게 빼앗긴 지방을 변정하노라. 전사(前史)에 매양 진개(秦開)가 기조(箕朝)와 싸워 이천리 땅을 차지하고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정하였다 하였다.
이는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서 나온 말이요, ... 만번한(滿潘汗)은 곧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문(文)·번한(番汗) 양현(兩縣)의 음을 취하여 만반한(滿潘汗)이란 지명을 위조(僞造)하고, 이천리(二千里)는 사기(史記) 연세가(燕世家)의 진개척지(秦開拓地) 천리(千里)라는 문자를 취하여 배수를 더하여 이천리(二千里)라 함이니 그 억지로 끌어낸 자취가 드러나거늘 어찌 이를 믿으리오.
만일 어환(魚豢)의 말을 믿고 보면 서압록(今 大遼河) 이서(以西)가 다 연(燕)의 땅이 되었을 것이나, 사기에 연(燕) 지방천리(地方千里)라 하며 또 연(燕)은 소국(小國)이라 하였으니, 어찌 이 같은 광활한 지방을 차지한 적이 있겠는가?
문,번한(文,潘汗)은 이 곳 요양(遼陽) 부근이라. 지나(支那)를 통일한 진시황도 꿈에도 밟아 보지 못한 땅이니, 연(燕)의 동경(東境)이 어찌 진(秦)의 동경(東境)보다 늘며, 문,번한(文,潘汗)은 곧 기조(箕朝)와 위만(衛滿)의 흥망하던 땅이니, 만일 당시에 연(燕)의 땅이 되었으면 어찌 후래 위만(衛滿)의 근거되었으며,
고대의 요수(遼水)는 란하(灤河)라 고로 연(燕)의 말세에 요서·요동군을 들 때에 영평부가 요서(遼西)가 되고 그 이동이 요동(遼東)이 됨인즉, 요동도 요서의 차례로 그 범위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지 못하였을지니, 어찌 진개(秦開)가 벌써 요양(遼陽)·해성(海城) 등지까지 차지 하였으리오.
고로 만반한(滿潘汗)을 한하였다 이천리(二千里)를 차지하였다 함은 다 황설이어늘, 후인이 조사도 하지 아니하고 그저 믿었도다.
○연나라는 역시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는데 조양(朝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진개가 고조선의 땅을 침략한 후에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렀다고 하였다(燕亦築長城 自朝陽之襄平).
중국 문헌에 따르면 연燕장성 동쪽 시작점인 양평襄平은 무수(武隧,武隧)로 이름이 바뀌었고, 형수이시衡水市 우창현武強縣 북서 방향의 안평현安平縣이 연장성 진장성의 시작점인 요동의 양평襄平이다
따라서 연나라 5군의 동쪽인 요동은 하북성 중부인 형수시衡水市 안평현安平县 부근이다
[출처] 고조선은 요동(하북성 중부 땅)을 연나라에 빼앗겼다(상곡,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작성자 수구리
***참고: 연나라는 당시 약소국이고 고조선은 당시 강대국이어서 약소국 연라라는 강대국 고조선에 진개를 인질로 고조선에 보냈다. 인질은 주로 왕자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진개는 약소국 연나라의 왕자이거나 왕자를 사칭한 자일 것이다. 고조선에서 신임을 얻었던 진개는 연나라로 돌아간 후 군사를 일으켜 고조선을 침략하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을 점령하고 이곳에 연장성을 쌓았다.
후에 진시황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연장성을 이어서 진장성(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진장성이 갈석산 낙랑군 수성현에서 시작한다고 하였으므로 진장성은 현재의 산해관과 갈석산을 지나 북경 팔달령을 지나는 장성이며,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등의 지역은 진장성, 지금의 만리장성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낙랑은 낙랑군 상하운장의 지역으로 비정되는 북경 부근을 비롯하여 천진, 진황도시 및 당산시 부근 지역에 있었을 것이며, 임둔은 임둔태수 인장이 발굴된 요령성 금서시 태집둔 부근이 검토될 수 있으며, 현도는 지금의 난하인 요수 동쪽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당태종 침략 당시 당의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 현도를 침략하였기 때문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내가 아닌 요서지역임을 반드시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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