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71. 동옥저와 개마 및 서안평에 대한 기록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3-07 |
고대사71. ○동옥저와 개마 및 서안평의 위치에 대한 기록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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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평(西安平)은 개주(蓋州: 平郭)과 동일지역이고, 안시성(安市城) 부근의 요동군(遼東郡)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왜색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 지역이 아닙니다.
***또 현도군(玄菟郡)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었고, 현도군의 서북쪽에는 서개마(西蓋馬)가 있었고, 마자수가 서북쪽에서 들어와 염난수가 되며(합류하며), 그 물은 다시 서남쪽에 있는 서안평(西安平)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왜색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단동지역의 서북쪽에 서개마(西蓋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후한서 동옥저 기록에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蓋馬,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라고 하였는데,
개마현(蓋馬縣)과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평양왕검성(平壤王儉城)이 있다고 했는데,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왜색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낭림산맥이 결코 아니다.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 위나라 정시(正始) 기간 중 서안평(西安平)에 고구려가 침입했다고 하였고(入寇), 삼국지ㆍ위지》권30 <동이전>ㆍ《수서》권81 <고려전>에는 「요서안평」이「서안평」으로 되어 있다. 또 《후한서》<군국지>2에는 안평국은 기주에 속하며, <군국지>5에는 서안평이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기록을 보면 서안평이 요서(遼西)에 속하기도 하고, 기주에 속하기도 하고, 유주(幽州) 요동군에 속하기도 했다고 했는데, 요서군에 속하기도 했던 서안평은 왜색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단동이 아니다.
***기타 여러 가지 설명으로 서안평의 위치가 왜색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압록강 하구의 단동(丹東)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서안평의 위치를 찾아 봅시다”란 글을 펌했습니다.
*서안평은 압록강 옆 단동이 아니고. 중국 형수시 안평현이다.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 해석의 난조를 보이고 있는것이 작금의 현상입니다. 충분히 근거사서들을 검색할 수 있는 실력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기록의 해석을 왜곡하며 오히려 큰목소리로 군림하고 난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거던 떨지나 말지!좋은말로 충고를 해보아도 우이독경(牛耳讀經)입니다. 학문을 빙자하여 억지를 부려가며 동북공정을 이롭게 하려는 행위를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
遼東郡,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襄平。有牧師官。莽曰昌平。新昌,無慮,西部都尉治。望平,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長說。房,候城,中部都尉治。遼隊,莽曰順睦。遼陽,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莽曰遼陰。險瀆,居就,室偽山,室偽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顯,安市,武次,東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한서>><지리지>는 서안평을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며 그 위치를 비교적 요동반도의 서남부에 배치된 평곽의 남쪽, 문현의 북쪽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沛水의 흐름을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의 평곽은 개주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서안평은 개주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실재의 흔적은 많은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리적인 특징으로 추정하면 평곽에 철관과 염관이 있었다고 함으로 서안평도 염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戶四萬五千六。口
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上殷台,莽曰下殷。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다시 현도군 조에서는 마자수를 설명하고 있는데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고 하며 이 물은 다시 서남쪽에 이르러 서안평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자수는 서개마(개주)의 남쪽으로 흐르는 고니하(古泥河)=浿水=청하=대통강으로 부르던 물로서 서북으로 역류하여 소요수(염난수)와 합류하며 다시 다른 경로의 서남으로 흘러서 서안평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추정이 되는것입니다.그러나 요동만위치에 있어야 될 이 강물길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마자수는 현 국경의 압록강과는 어떻게 다른것인지는 물의 흐름으로 알 수 있습니다. 현 국경의 압록강은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없습니다.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조
전략...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一]注[一]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위의 현도군조에서는 서안평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마자수는 염난수와 합류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소요수와 합류한다는 대목이고, 이 소요수를 근거하여 고구려의 별종인 맥이라고 부르는 종족이 살았는데 이들을 소수맥으로 불렀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소수맥이 살았다는 개주의 서남쪽에 있어야 할 소수, 즉 소요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의 기록중에 <<삼국지>> 권 3의 <동이전>이나 <<수서>> 권 8의 <고려전>에 요서 안평을 일명 서안평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록상의 오류가 아니라 서안평의 윤몰과 관계되는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一]하략 注[一]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三國魏志》卷三 《東夷傳》·《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志》五, <西安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爲<幽州>刺史<丘儉>所破. 其玄孫<乙弗利>, <利>子<釗>,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建國>四年, <慕容元眞>率衆伐之, 入自<南陝>, 戰於<木底>, 大破<釗>軍, 乘勝長驅, 遂入<丸都>, <釗>單馬奔竄. <元眞>掘<釗>父墓, 載其屍, 幷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城>而還. 自後<釗>遣使來朝, 阻隔寇, 不能自達. <釗>後爲<百濟>所殺.
<위서> 고려전 교감기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 ->
위정시(240-249)중에 요서안평을 침입하여, ->
三國魏志卷三0東夷傳ㆍ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 志五, 西安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삼국지ㆍ위지》권30 <동이전>ㆍ《수서》권81 <고려전>에는 「요서안평」이「서안평」으로 되어 있다.
생각컨대《후한서》<군국지>2에는 안평국은 기주에 속하며, <군국지>5에는 서안평이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였다. 요서군에는 안평 혹은 서안평현이 없다.
여기서「요遼」자는 연衍(군더더기)자字이거나, 「요遼」자 아래「동東」자가 탈락된 것이다.
<<후한서>><동옥저>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에 대한 주석
沈欽韓曰, 明志,海州衛, 本沃沮國地, 今奉天海城縣. 又奉天蓋平縣,高麗國蓋牟城, 本其地.
***주석자 심흠한은 동옥저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본옥저의 위치를 설명하기를, <<명지>>에 나오는 해주위가 본 옥저국지이고, 그곳은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며, 개평현이었다. 고구려의 개모성이 '그 땅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개마대산은 당연히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또는 단단대령을 벗어날 수 없고 동옥저는 그 천산산맥의 바로 동쪽에 그리고 평양성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것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는 동옥저가 있었기에 요동군의 서안평이 존재할 수 없는것입니다. 만약에 단동지역까지 요동군이 있었다면 요동반도의 중남부에 속한 많은 지명들도 포함이 되었어야 했을것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살수의 위치는 청천강이 아니라 초자하입니다. 초자하는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으며 벽류하의 동쪽에 있는 장하로 합류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을 동옥저 지역이라 하는것입니다. 구산은 벽류하라고 주장하였음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한 위치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살수의 기록입니다.
○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 <<삼국사기>> 상 <고구려본기> 2 대무신 27년조
대무신 27년(서기 44) 추 9월 한 나라의 광무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 현을 삼으니, 살수의 남쪽이 한나라의 영지가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시니 대수촌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이 전쟁으로 한달뒤 대무신왕이 서거한것으로 추정됨) 필자주.
그렇다면 살수의 남쪽이 어디일까요? 다시 다음 기록으로 살수의 남쪽을찾아 보시겠습니다.
[15卷-高句麗本紀3-大祖大王-04年]
○四年, 秋士{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대조대왕 4년(서기 56) 7월,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으로 성읍을 삼으니, 경계가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으로 창해에 이른다라는 해석은 지도를 참조하시면 요동반도의 남쪽 해변에서 동으로는 창해라는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설만으로는 함흥의 동쪽에 있는 동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다음으로 연결되는 남으로는 살수에 이른다는 기록이 함흥의 동 옥저설을 부정합니다. 만약에 살수가 함흥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면 청천강과는 관계가 없는 지명이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서 정벌을 한곳이 함흥의 남쪽이 되어야 한다니 이때의 살수는 평안도와는 관계가 없는 지명입니다.
참고로 이병도박사의 <한국고대사연구> 269쪽에는 삼한도라는 지도가 있는데 옥저의 위치를 함경남도로 비정하고, 북옥저의 위치를 함경북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경남도의 남쪽은 텅텅빈 바다밖에는 없는데 그 곳이 살수라는 설명이 전연히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옥저와 북옥저의 거리가 천여리 라는 기록도 무시하고 지도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방향도 옥저와 북옥저가 맞지를 않습니다. 지도상 함경남도와 북도는 동서간이라야 맞는얘기고, 남 북간은 틀린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참고: 서안평은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형수시 안평현이 서안평이며, 단동이 아니다.
***참고: 옥저는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2군 11번째 침략경로에 옥저가 있었다. 동옥저가 개마대산 아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개마도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2군 4번째 침략경로에 있어서 이병도란 놈이나 왜놈추종자들이 말하는 백두산이나 낭림산맥이 아니고, 요소지방에 있던 땅이름이다. 동옥저나 북옥저는 왜놈추종자들이 말하는 함경도나 만주 북쪽이 아니고, 옥저의 동쪽이 동옥저, 옥저의 북쪽이 북옥저인 점을 감한 하면 수양제 침략경로 좌12군 11번째 위치한 요서 지방에서 옥저와 동옥저, 개마대산, 북옥저 등을 찾아야 한다.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시 평양을 향해 가는 길에 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명백히 나와 있는 옥저나 개마, 낙랑, 대방 등의 지명이 모두 요서지방에 있는 것이지 이병도란놈이 주장하는 함경도나 만주 북쪼지역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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