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옥저는 중국땅이거나 고구려 변경이며 함흥이 아니다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1-06-06 |
옥저(沃沮)는 중국땅이거나 고구려 변경이며, 함흥이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옥저에 관한 다음 기록이 있다. “제3대 대무신왕 15년(AD 32년)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 지방을 유람하는데,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순행하다가 묻기를 “당신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혹시 북국신왕(北國神王; 大武神王)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드디어 함께 데리고 돌아와서 사위로 삼았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지방을 유람했다고 하는데, 현재 한국사(韓國史)에서는 옥저를 함흥지역이라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 동옥저에 대한 한국사 통설
고려대학교 한국사연수소편 『한국사』의 동옥저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있으며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한다고 하였다. 이는 대체로 지금의 함경도 해안지대에 해당된다.”
○ 다음백과의 옥저에 대한 설명
<다음백과>의 옥저(沃沮)에 대한 설명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6a1712a
『요약』옥저(沃沮)는 함경남도 북부에서 함경북도 남부의 해안지대를 동옥저라 불렸고, 두만강 하류와 간도지방을 북옥저라 했다. 해안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오곡이 생산되고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조건을 지니고 있었으나 주변에 강대한 세력들이 있어 잇달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옥저는 고구려·동예와 같은 종족으로, 언어·음식·의복·가옥·예절 등이 고구려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사회발전단계는 동예와 비슷했다.
3세기 전반경의 인구가 5,0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던 옥저는 비옥한 자연조건에도 불구하고 통일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가능해지면서 역사적 실체로서의 옥저는 소멸되었다.
대개 함흥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북부에서 함경북도 남부의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집단은 동옥저(東沃沮)라 불렸고, 두만강 하류와 간도(間島)지방에 살았던 집단은 북옥저(北沃沮)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옥저라고 할 때에는 동옥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해안을 따라 동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오곡이 생산되고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조건을 지니고 있었으나 주변에 강대한 세력들이 있어 잇달아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BC 3세기초까지 이곳은 임둔국(臨屯國)의 일부였으며 임둔국이 위만조선에 의해 복속되자 그 지배를 받았다.
고조선이 한(漢)에 의해 멸망되자 BC 108년에는 그 일부가 임둔군에, BC 107년에는 현도군에 편입되어 한군현의 지배를 받았다. BC 75년에 현도군세력이 서북으로 후퇴하자 일부는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편입되고 나머지 지역은 자립했다.
1세기를 전후하여 낙랑군의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부조현(夫租縣)을 중심으로 점차 독자적인 성장을 꾀하면서 이 지역은 옥저로 불리게 되었다. 30년경 후한(後漢)의 지원 아래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한 낙랑군에 의해 일부지역이 군(郡) 직속의 현으로 편제되지만 곧이어 개마고원을 넘어온 고구려에 예속되어 그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
○ 옥저에 대한 일본어 사전
沃沮:
1.高句麗初期の咸鏡道地方の名称
2.またそこに居住した民族
○ 옥저에 대한 중국 기록(三國志 魏志 東夷傳)
옥저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근거한다. 원문에서도 옥저는 710자, 읍루는 270자에 불과하다. 수많은 한국사 책에 나오는 옥저와 읍루 이야기는 거의 전적으로 이 소략한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 방향은 좁고 서남 방향은 길어서 천 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아 있다. 호수(戶數)는 5,000호(戶)이다. 대군왕(大君王)은 없으며 읍락(邑落)에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한 초기에 연의 망인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노릇을 할 때, 옥저가 모두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한 무제 원봉 2년(기원전 109)에 조선을 정벌하였다. 위만의 자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 이로써 옥저성은 현도군이 되었는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방면으로 옮기니, 지금 소위 현토군(玄菟郡)라고 부르는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은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있으므로,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지역에 동부도위(낙랑군 東部都尉)를 나누어두고, 불내성을 치소로 한 영동 7현을 따로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가 모두 현이 되었다.
([원주] “漢初 燕亡人衞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 府是也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다른 기록으로 후한서(後漢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山 :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 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검성(王 儉 城)이다.〕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昔武王封箕子於朝鮮,
〔예(濊)의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며, 남쪽은 진한(辰韓)과 접하였다. 동쪽은 대해에 그치고,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濊)와 옥저(沃沮), 구려는, 본시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다.』
【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皆與南同.界南接挹婁.挹婁人□乘船寇抄,北沃沮畏之,每夏輒臧於巖穴,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다, 일명 “치 구루(置 溝 婁)”이다. “남옥저(南沃沮)”에서 8백 여리 간다. 그 풍속이 모두 남(南 : 南沃沮)쪽과 같다. 경계는 남쪽으로 읍루(挹婁)와 접(接)하였는데, 읍루 인들이 배를 타고 떼를 지어 와서 노략질을 하니,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하여(畏), 매 여름에는 바위구멍(巖穴)에 숨어 산다.
위와 같은 후한서와 위지동이전의 아주 짧은 글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옥저(沃沮)의 위치에 대해 추축과 비정(批定)을 하였는데, 옥저(沃沮)의 위치는 함흥에서 함경북도 및 간도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지금 한국사학계의 정설이며, 너무도 딱딱하게 굳은 정설이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 왜 옥저(沃沮) 함흥설이 문제가 되는가?
옥저가 함흥이라고 일본인들도 주장을 하고, 한국 역사학자들도 주장을 하고 중국 역사학자들도 주장하는 일치된 학설이 되었는데, 이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에 옥저(沃沮) 땅이 포함되고 이로써 옥저성은 현도군이 되었다(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이라 하여 옥저 땅을 점령한 후 이곳을 현도라고 개칭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옥저는 한사군에 속한 중국의 식민지이고 그곳이 바로 함흥이라고 이병도를 비롯한 주류사학자들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함흥과 함경도는 중국의 식민지에 속했다고 주류 사학자들은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한반도 거의 전체가 한사군에 속했으며, 중국의 식민지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해괴한 주장을 왜놈이나 중국놈 보다 앞서서 주장하고 있다. 딱딱히 굳은 이들의 머리를 어떻게 깨부수는 때가올지 정말 걱정스럽다.
○ 옥저(沃沮)의 정확한 위치는 함흥이 아니다.
옥저의 정확한 위치가 함흥과 함경북도 및 간도지방이라고 확정해서 표시한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이병도 등의 한국 역사학자들이나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던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며, 그 후인들이 모두 이들의 학설이 완전무결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1. 옥저와 현도는 동일지역이며, 다른 지역이 아니다.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서 힌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로써 옥저성은 현도가 되었다(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는 위지 동이전의 기록과 같이 현도성을 현도군으로 개칭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주류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평북지방의 현도군 설치와 함흥이 일치할 수 없다.
주류 사학자들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라 평북지방이 옥저를 개칭한 현도라면 이곳이 평야지대가 아니고 산악지대이므로 엉뚱하게 옥저와 현도를 분리하여 함흥으로 비정한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즉 그들의 주장에 맞추려면 현도를 평안북도 산악지방이 아닌 함흥으로 바꾸어야 한다.
2. 현도는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성에 가기 전 중간 지점에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조를 보면
보장왕 3년(AD 644) 당태종은 유주와 계주 등지를 순행하면서 고구려 연개소문의 죄를 요동과 갈석에서 묻겠다고 하면서 1차 고구려 정벌계획을 밝힌다. 이듬해(AD 645),
<四年 夏四月 世勣 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 進至遼東城下.> (4년 여름철 4월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서 현도에 이르렀다. 고루려의 성읍주민은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 갔다......오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모두 죽었다. 이세적은 더 나아가 요동성 아리에 이르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현도는 요하를 건넌 다음 고구려의 현도성에 다다른 것이며, 이후 진군한 요동성과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다. 결코 평북 산악지방이나 푸순이 될 수 없다. 당나라 군대의 진격 지점에 있으므로 함흥이 결코 현도나 옥저가 될 수 없다.
“7대 신대왕 4년AD 182년)에는 현도군이 침입해 와서 싸우고, 또 한나라 대군이 침입해 온 것을 수성(守城) 작전으로 대패시키기도 한다. 8대 고국천왕 20년(AD 267년)에는 “위(魏)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장수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나와 침범하니, 왕은 보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역전하여 깨뜨리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옥저를 현도군으로 만든 곳은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중국의 현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침입해 온 곳이며, 주류 사학자들이 말하는 함흥이나, 평북지방이나 푸순이 결코 될 수 없다.
3. 옥저는 중국의 땅이지 한국의 땅이 아니다.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무리가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나는 풍속을 살피러 유주와 삭주에 순행을 왔으니 이에 고구려의 죄를 물으려 다시 올 수 없다.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옥저가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고 한 후한서의 기록을 볼 때 수양제의 침략 루트 중에 동옥저와 관련된 개마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도(玄菟) 수양제의 좌 12군 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옥저(沃沮)와 낙랑(樂浪)역시 좌 12군의 진격 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 있는 땅이거나 중국과 고구려의 국경지대에 있는 땅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어찌 여기에 표시된 옥저가 함흥이라는 헛소리를 주류 사학자라는 자들은 계속해야 할 것인가? 이병도가 “동이”라는 지명이 한국의 덕원(함경남도 문천 원산)과 음이 같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지만, 동이는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루트에 있는 것이지 결코 한국 함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방 역시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루트에 있는 지명이지 한국의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이라는 이병도의 왜곡된 주장은 맞지 않는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옥저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서 출발한 중국의 땅이거나 평양으로 향하는 고구려 국경지대의 땅이지 결코 함흥이 아니다. 옥저가 함흥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언제쯤 깨어지고 폐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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