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대사자료55. 한사군 설치역사와 낙랑, 대방 등 설치위치 비정(펌) | 글쓴이 | 이태수 | 날짜 | 2023-02-28 |
고대사 55. 한사군 설치의 역사적 배경과 낙랑 대방 등 설치 위치에 대한 인터넷 글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XXX나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아래는 펌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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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uddhistforest/3EFj/990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 진개(秦開)와 연오군(燕五郡) 설치
연대 적 요
BC350 번조선(番朝鮮)이 북막(北漠: 東胡)와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
BC343 연이 번조선에 화친을 청해 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다
BC341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다
BC339 연이 안촌홀(安寸忽: 安市城)을 돌파하고 험독(험독: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箕子의 후손들) 기후(箕詡)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薊城)의 남쪽에 이르니 연이 화친을 청하면서 자제를 인질로 보냈으며 연의 장수 진개가 번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BC323 번조선의 왕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어 기후(箕詡)가 계승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하였다.
BC305 번조선이 북호(北胡: 東胡)와 함께 연의 상곡을 공격하자 연이 진개를 보내 대항하였다.
BC300 연의 진개가 번조선과 동호를 쳐서 조양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등 5군을 설치하였는데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한다.
*번한(番韓)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였던 昌黎를 말함
▲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조
연대 적 요
BC226 진시황이 연을 치자 연와 희(喜)가 요동으로 달아나다.
BC222 연이 멸망하다.
BC215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을 방문하다.
BC214 진시황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지난날 중국 북부에 위치했던 진(秦), 조(趙), 연(燕)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다.
BC209 진의 2대 황제 호해가 요동에 와서 그 아비(진시황)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요동의 갈석산이다.
(주) * 갈석산: 진서 당빈전에 '진장성(秦長城)의 요새를 다시 쌓았는데 온성으로부터 갈석(碣石)에 닿았다'고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갈석산은 한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이 산에서부터 장성이 시작된다'했으며, 진서(晉書)에도 '수성현은 진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임을 말해주고 있다.
▲위만과 번조선의 멸망
연대 적 요
BC202 한고조(漢高祖: 유방)가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綰)으로 연왕을 봉하다.
BC195 한고조가 죽자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위만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다.
BC194 위만이 당시 이곳에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하여 수용된 연(燕), 제(齊), 조(趙)의 무리를 이끌고 처 들어와 번조선을 멸망시키다.
BC 상하운장의 서쪽 중국 국경에는 진나라 당시 초소인 요동외요(遼東外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너무 멀어서 지킬 수가 없어 옛날 연(燕)과 진(秦)의 옛 요새였던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물러났는데 이 곳이 지금의 산해관(産海關)이다.
BC 위만은 도읍을 새(塞) → 패수(浿水) →상하운장(上下雲障) → 왕검성(王儉城)으로 옮겨갔다.
*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서지망의 광녕(廣寧)이다.
●낙랑군(樂浪郡)의 지리적 위치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낙랑군은 동으로는 요하에서 서로는 난하 사이에 발해만 해안에 연하여 있었다. 낙랑군의 북쪽 즉 내륙에는 서쪽은 요동군, 동쪽은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대방현이 분리, 승격한 대방군 위치하였다.
한서에 전하는 낙랑군의 속현은 모두 25개였는데 후한서에는 18개로 줄고, 진서에는 6개로 줄고, 6개가 대방군으로 나온다.
낙랑군 속현
縣 名
漢書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鏤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남邯남감, 浿水패수, 粘제점제, 增地증지, 昭明소명, 呑列탄열,
東????동이(동시), 不而 불이, 蠶台잠태, 華麗화려, 邪頭昧사두매 前莫전막
夫租부조
後漢書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鏤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남邯남감, 浿水패수, 粘蟬점제(점선), 增地증지, 昭明소명, 呑列탄열,
<**필자 주: 점제는 점제현신사비에서는 秥蟬(점제, 점선)으로, 삼국사기 영양왕조에는 煔蟬으로 다른 기록에는 粘蟬, 黏蟬 등 여러 가지로 표시되고 있다. 평안도 평강에 있다는 점제비(秥蟬碑)는 수양제의 침략경로 우12군 첫 번째 경로인 煔蟬(점제 또는 점선)이 동일한 명칭으로 나타나므로 이곳이 점제현(秥蟬縣)의 정확한 위치일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晉書
樂浪낙랑군 소속(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鏤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군 소속(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呑列탄열)
한의 낙랑군은 요하서쪽 난하 동쪽의 발해만 해안지방에 있었는데 일제는 그들의 대륙 침략목적을 위하여 평양, 황해도 지역에서 출토된 낙랑국과 대방군의 유물을 조작하여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라고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필자 주: 특히 XXX 이병도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대방을 황해도라고 왜곡 주장함으로써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확고히 한 원흉이 되었다. 대방군 소속의 대방과 열구, 장잠, 제해, 함자, 해명 등은 모두 수양제의 침략 경로에 있었고, 압록수(鴨淥水: 지금의 요하) 서쪽에 있는 땅이지 결코 황해도가 아니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 조작 내지 왜곡(歪曲)은 일제시대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던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계속되었고, 오늘날에도 일본의 우익분자들에 의하여 역사교과서 왜곡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한사군(漢四郡)의 허실(虛實)
▲ 우리 사학계의 한사군(漢四郡)의 정체
이병도(李丙燾)저「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1976. 3. 博英社)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학계의 한사군에 대한 견해는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樂浪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4개 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 우리 한(漢)과 위만조선(衛滿朝鮮) 간의 전쟁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한무제(漢武帝)는 양복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제(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순체(荀彘)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고 하였다.
제(齊)는 산동반도에 있던 나라이고 발해(渤海)는 당시나 지금이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므로 해군은 산동반도를 출항하여 발해를 건너 위만조선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또 요동(遼東)은 지금의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한의 육군은 최 동단 요동고새(遼東故塞) 즉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을 출발하여 왕검성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위만의 마지막 도읍지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패수는 지금의 대능하(大凌河)이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검성은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 사학계는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아 왕검성을 평양이라 주장한다.
한(漢)과 위만과의 전쟁 결과에 대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우거(우거: 위만의 손자)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를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涉河)는 공(功)을 도둑질하였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戰死), 누선(樓船: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핑계로) 어려운 일을 당해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公孫遂)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가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고 하였다.
한과 위만 간의 전쟁은 위만조선의 왕 우거는 죽고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한(漢)의 장수 섭하는 공에 욕심을 내다가 전사하고, 공손수와 순체는 역시 전공을 다투다가 사형 당하였으며, 양복은 전투에서 꽁무니를 뺏기 때문에 폐 서인이 되는 처벌을 받아 전쟁을 치르고도 포상된 사람이 없으니 결국 이 전쟁의 결과는 한(漢)도 위만조선의 우거도 모두 함께 패한 셈이다.
북부여기(北夫餘記)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漢)의 유철(劉철: 武帝)이 평나(平那)를 처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東明)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 ' 고 하였다.
이 상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한무제가 해로과 육로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공격하여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전의 번조선 유민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니 결국 이 전쟁의 승자는 번조선의 유민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킨 동명 고두막인 것이다.
(*이하 생략: 이 글은 인터넷에서 옮긴 글인데, 인터넷의 글이 삭제되어 원본을 볼 수 없습니다)
***참고: 필자의 견해로 낙랑의 상하운장 지역으로 비정되는 북경 부근지역을 비롯하여 천진시, 진황도시 및 당산시 주변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현도는 임둔과 합쳐진 군으로 당태종 침략 당시 이세적이 지금의 난하인 요수를 건너 현도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볼 때, 지금의 난하인 요수 부근과 요수 동쪽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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