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배달국 14세 자오지 환웅 下 - 군신軍神 강림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 난을 지은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
(증산도 도전 2:31:1∼2)


거대한 전쟁의 서막


때는 신시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즉 치우治尤천황 재위 초기입니다. 지금의 중국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일대를 일컬어 중원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중원 지역 사람들을 배달국에서는 서쪽 사람들, 즉 서토인西土人이라 했습니다.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동이족 계통의 염제 신농씨의 나라가 8대 유망楡罔의 시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정치의 속박이 가혹해지자 여러 읍락이 사이가 나빠져 백성이 많이 흩어지고 세상살이가 심히 어렵게 되면서 천하가 난세에 돌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치우천황이 이끄는 배달군의 면모
이에 치우천황은 천하를 평안케 하려는 큰 뜻을 품고 정예 배달군을 이끌고 서방으로 출정하게 됩니다. 치우천황은 형제와 부계 일족, 즉 종당宗黨 중에서 장수가 될 만한 인물 81명을 뽑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전군을 모아 대오를 정비하였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어 칼과 갑옷과 창과 큰 활과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을 많이 제작하였습니다.

날선 무기와 금속으로 된 칼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치우천황의 배달군은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그 형세가 자못 질풍과 같았습니다.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고 만군萬軍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들은 탁록涿鹿을 무너뜨린 이후 1년 사이 아홉 제후의 땅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채광 기계인 구치九治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캐어 예과芮戈와 옹호극을 만들었습니다. 과는 창날이 일자가 아니라 가지처럼 옆으로 뻗은 형태의 병장기입니다. 극戟은 앞으로 뻗은 긴 창날 옆에 가지처럼 칼날이 더 달려 있는 형태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 최강의 무력을 뽐내는 여포가 사용한 무기가 방천화극方天畵戟입니다. 또 뒷날에 헌원과의 전쟁에서는 지남차를 격파할 목적으로 지금의 박격포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었습니다. 이러니 천하에서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토인들은 화살과 돌팔매만 믿고 갑옷의 사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치우천황이 철을 캐내어 처음으로 갑옷과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어 입으니, 투구와 갑옷을 처음 본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는 구리로 되었고 이마는 쇠로 되었다(동두철액銅頭鐵額)며 무시무시한 괴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치우천황의 뛰어나고 강력한 법력에 부딪혀서 두려운 마음이 들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하였습니다.

염제 신농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치우천황군
치우천황은 천자의 군사를 일으켜(天兵) 양수洋水로 출진하여 빠르게, 산동성 임치현 근처인 삭도索度에서 군사를 진격시켜 회수와 태산 사이의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이후 하남성 진류현에 위치한 유망의 도읍지 공상空桑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해에 치우천황이 12제후의 나라를 모두 병합하니,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서토인들이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유망은 소호少昊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쌍날창인 예과와 옹호의 갈래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울 때,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수와 병졸로 하여금 혼미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하니 소호가 대패하여 황급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달아났습니다. 이에 치우천황은 즉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천하를 태평하게 할 것을 맹세하여 고하시고, 다시 진군하여 탁록을 포위 압박하여 일거에 멸망시켰습니다.

『관자管子』에 “천하의 임금 곧 치우천황이 급작스럽게 싸우며 한 번 노하심에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치우천황에 반기를 든, 황제헌원黃帝軒轅


헌원작란軒轅作亂
이때 치우천황뿐 아니라, 동이족 출신인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민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치우천황께서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크게 펴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병마를 크게 일으켜, 먼저 염제 신농국에 도전하였습니다. 산서성 운성運城시 남쪽에 있는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헌원과 염제군은 격돌하였습니다. 야심찬 헌원의 거센 공격에 염제군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헌원은 치우천황에게 정면으로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건곤일척 대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헌원을 비롯한 중국 삼황오제는 동이족 출신

여기서 잠깐 치우천황에 대항한 공손헌원(황제헌원)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달국이 세워질 무렵, 서토에서도 중국인들이 그들의 시조로 일컫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으로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제왕들입니다. 그중 오제는 삼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삼황의 뿌리만 밝히면 그 시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황은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그리고 황제헌원입니다. 태호 복희씨는 앞서 보았듯이 배달국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드님입니다(본지 2020년 4월호 기사 참조). 그리고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경농과 의학의 시조이자, 강씨 성의 시조인 신농神農씨 역시도 동이족 출신입니다. 즉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중국 역사의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손헌원의 뿌리는 8세 안부련安夫連환웅 말기 소전少典이라는 사람입니다. 소전은 명을 받들어 섬서성 기산현에 있는 기수岐水, 즉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었고, 그 아드님이 신농씨입니다. 이 소전에서 다시 갈라져 나간 후손 중 한 사람이 공손公孫이며, 그 후손이 황제헌원입니다. 즉 공손헌원도 배달국 동이족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헌원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자라면서는 성실하고 영민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널리 보고 들어서 사리 분별이 분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치우천황의 스승인 자부 선생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고대 중국의 신화, 전설적인 인물들의 계보를 담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황제의 어머니가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다가 큰 번개가 북두칠성을 감싸는 것을 보고 황제를 잉태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치우천황과 공손헌원의 싸움은 결국 같은 동이족 간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세계 대전, 탁록대전涿鹿大戰


탁록에 집결한 양측 세력의 면모
동방 종주국 배달국의 치우천황군과 공손헌원이 이끄는 서토인은 천하의 패권을 두고 승패를 겨루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 패권 쟁탈전이자 동방과 서방이 본격적으로 분리된 일대 사건입니다. 이후 10년 동안 양측은 73회에 걸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마지막 결전장은 지금의 산서성 대동부大同府에 있는 탁록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의 군대는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 장수들과 바람의 신(風伯), 비의 신(雨師), 거인인 과보夸父 종족 그리고 도깨비 이매魑魅와 망량魍魎 등의 무리가 대거 참여하여 사나운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황제헌원은 자신의 군대를 운사雲師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배달국 후손임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등의 맹수와 맹금 그리고 충직한 신하로서 날개 돋친 용인 응룡應龍과 황제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魃(가뭄을 뜻하는 한발) 등으로 대군을 이루어 대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훈련시켜 직접 참전하게 한 맹수들이라 보기도 하고, 혹은 짐승 이름을 딴 용맹한 군대로 보기도 하며 이런 동물 등을 토템으로 삼는 여섯 부족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양쪽 세력은 동아시아에 있는 여러 종족들을 모두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탁록대전 개전 상황
치우천황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탁록격문涿鹿檄文을 짓고, 종당대인宗黨大人, 즉 종가宗家의 계통에서 최고 우두머리 연장자가 되는 사람들 81명을 소집하였습니다. 그리고 먼저 치우천황의 형상을 그려 반포하였습니다. 아마도 군기軍旗였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아울러 신하들에게 경계의 글을 내려 알렸습니다.

“너, 헌구軒丘(공손헌원)는 짐의 말을 똑똑히 들으렸다! 하늘의 태양의 아들天子은 오직 짐 한 사람이니라.

짐이 천자로서 이 세상을 만세토록 공의公義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닦는 경계의 글을 짓노라. 너, 헌구는 우리의 삼신일체 원리를 우습게 알고 태만하여 삼륜구서三倫九誓를 실행하지 않았느니라. 이에 삼신상제님께서 오랫동안 너의 더러운 행위를 싫어하여 짐 한 사람에게 명하시어 ‘삼신의 토벌’을 행하게 하셨노라. 네가 하루속히 불의한 마음을 씻고 행동거지를 뜯어고쳐 타고난 삼신의 본성에서 진리의 열매(씨)를 구하여라. 그러면 상제님의 성령이 너의 머리에 내려오시리라. 만일 네가 천명을 따르지 아니하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하여 네 목숨이 온전치 못하리니 너는 두렵지도 않으냐?”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치우천황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먼저 보내 탁록을 포위하여, 헌원의 세력을 멸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헌원은 오히려 항복하지 않고 수많은 전쟁에 나섰습니다. 치우천황은 9군에 명하여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하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곧장 탁록의 유웅有熊 들판에서 헌원과 맞붙었습니다. 이곳에서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협공하여 참살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니, 헌원군은 두렵고 손이 떨려 바쁘게 도망쳐 백 리 안에 병마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탁록의 10년 대전쟁
헌원군은 여러 번 싸워 치우천황군에게 패하면서도 군사를 더욱 크게 일으켰습니다. 헌원군은 배달군을 본받아 무기와 갑옷을 많이 만들고 지남거를 만들었습니다. 지남거指南車는 수레 위에 신선의 목상을 얹고 손가락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로 치우천황이 일으키는 짙은 안개를 만나면 지남거를 이용해 병사들에게 방향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치우천황이 일으킨 안개로 헌원군은 방향 분간을 못하게 되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겨우 지남거로 안개 포위망을 빠져나온 황제군은 수공水攻으로 공격하려 했으나, 바람의 신인 풍백과 비의 신인 우사가 치우천황 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황제군 진영이 물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겨우 가뭄의 여신인 자신의 딸 발의 뜨거운 열로 물을 말리고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같이 진노한 치우천황군은 형제 종족으로 하여금 대격전에 힘써 싸우게 하여 위엄을 확고히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헌원의 군사들이 감히 추격하거나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였고, 더불어 대전을 치러 한바탕 몰아쳐 휩쓸어 버린 뒤에야 비로소 싸움을 그쳤습니다. 이때 탁록에서 풍겨 나온 피비린내는 수만 리 밖까지 진동하였고, 군사들이 떨어뜨린 병장기가 핏물 위로 둥둥 떠다닐 만큼 치열하였습니다.

이후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수淮水, 태산泰山 땅을 모두 차지하고, 탁록에 성을 쌓고 회수와 태산淮垈에 성읍을 만들어 헌원이 동쪽으로 침투할 길을 막았습니다. 이후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후 황제헌원은 동방의 신교문화를 전수받았으며 정치, 병법, 금속제련 기술, 농업, 음양론 등을 서방에 전파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조이자 군대와 전쟁의 신인 병주兵主가 되어 수천 년 동안 동방 배달족은 물론 서방 한족에게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역사 왜곡



지금으로부터 약 4,700년 전 동방 종주국 배달의 치우천황과 이에 대항한 서방 헌원 세력의 대결로 탁록에서 벌어진 큰 싸움은 치우천황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중국 문헌에는 헌원이 치우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기』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헌원이) 무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 늘 병사로 하여금 병영을 호위하게 하였다. -「사기 오제본기」


즉,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한 헌원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으며, 또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치우천황의 군사들 때문에 막사 밖에는 늘 보초를 세워 두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사기 오제본기에서 사실과 반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즉 황제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죽이고(금살치우禽殺蚩尤),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왜곡시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성급하게 공을 세우려고 공격을 시도하다가 불행하게도 전사하였는데, 이를 두고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전쟁의 시작도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치우가 난을 일으켰다는 치우작란蚩尤作亂이라고 왜곡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왜 사마천은 굳이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 기술해야 했을까요? 동양에서 역사의 아버지,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 그가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중국 역사의 시조인 헌원을 천자, 즉 동북아의 주도권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입니다. 헌원이 천자가 되면 중국은 그 출발부터 천자의 나라가 됩니다. 중국을 원래부터 동북아의 패권자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마천은 ‘금살치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시기가 중요합니다. 때는 자신의 주군인 한 무제가 단군조선 서쪽 땅의 위만정권을 어렵게 항복시켰지만, 단군조선의 본토 북쪽 땅의 북부여를 침공하다가, 북부여 구국의 영웅인 고두막한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만 수치스런 역사를 숨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 한민족을 예로부터 중국의 제후국 백성이었던 것으로 만들어 패배의 치욕을 앙갚음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청구 배달국 시대를 열다


치우천황은 중원을 개척하여 넓힌 뒤에 그 땅을 청구국靑丘國이라 하였습니다. 그 중심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입니다. 치우천황의 능이 있다는 산동성을 후대에 일어난 모든 왕조에서는 청주靑州라 하였는데 이는 청구국에서 비롯된 지명입니다. 그래서 산동성 일대에는 청靑(淸) 자가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환웅천왕이 처음 태백산 신시에 도읍한 이래 14세 자오지환웅에 이르러 중원을 개척하며 옮겨와 나라 이름을 청구국이라 한 이때는 배달국의 말기에 해당합니다.

『태백일사』에서는 치우천황이 중원을 평정한 뒤 도읍한 곳을 하남성의 진류, 현재의 회양淮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한 치우천황은 신시개천 1300년인 기원전 2598년 천수 151세를 일기로 붕어하였습니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감闞)鄕城에 있다고 전합니다. 현재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남왕진南旺鎭에 실재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7장丈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산동 땅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鉅野縣 두 지역에서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무덤에서 피어올라 하늘까지 치솟아 오르고 마치 깃발처럼 너울거려서 사람들은 이를 치우기라 불렀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천관서天官書」에서는 ‘치우기는 빗자루와 유사하고, 뒷부분이 굽어 마치 깃발처럼 생겼다. 이 별이 출현하면 제왕이 사방을 정벌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속설에는 붉은 연기 같은 것이 깃발처럼 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또 깃발 모양을 한 혜성을 고대로부터 치우기성蚩尤旗星이라 하여 역시 그 혜성이 출현하는 곳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치우천황의 웅렬하심은 대대로 온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영웅적인 기백은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진실로 길이 남을 찬란한 위엄은 후세인의 가슴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켜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치우천황
군신軍神 치우천황은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살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 『동국세시기』에는 궁중이나 양반의 집에서 단옷날에 부적을 붙이는데 치우의 이름과 형상을 써서 질병을 물리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상나라 때에는 탐욕을 경계할 목적으로 도철饕餮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서 사악한 기운이나 잡귀를 쫓아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신라 시대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鬼面瓦에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이미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가 한창일 무렵, 우리 한반도의 온 거리와 경기장에서 치우천황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붉은 악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것이 개벽이다 하』(안경전, 상생출판, 2014)
『사기 본기』(사마천, 정범진 외 역, 까치, 2014)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치우천황
뚝섬과 둑신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맞아 연전연승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이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올린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바로 둑제纛祭입니다. 둑이란 전쟁의 신인 치우천황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큰 창에 소의 깃털을 꽂거나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장 앞에 세우는 깃발로 이 깃발에 제사 지내는 게 둑제입니다.

해마다 봄에는 경칩驚蟄, 가을에는 상강霜降 때 그리고 왕이 군대를 열병하거나 출병을 할 때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둑기를 세우고 둑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둑제는 서울과 각 지방의 병영과 수영에서 각각 시행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둑제에 참여하는 무장들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었다고 합니다. 경칩과 상강 때 지낸 것은 치우천황의 생몰 또는 일생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뚝섬은 조선 태조 때 둑제를 올렸던 곳이고 치우천황을 모신 둑신사纛神祠가 있던 곳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둑신사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치우와 황제의 탁록대전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한제국 후반인 1908년까지는 있었던 둑신사가 현재는 그 장소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그 전해인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일제에 의해 없어져 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둑기를 세우고 둑제를 지낸 것은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둑신기
둑신사에는 둑신기纛神旗가 있었는데 이를 치우기라고 했습니다. 이 둑신기가 지금 태극기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이 둑신기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에는 역동적인 음양의 태극이 그리고 칠성과 같은 중요한 별자리들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별자리는 혹 빠져도 칠성만은 반드시 있었다고 합니다. 박영효가 일본으로 갈 때 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4괘로 줄였는데 이 둑신기가 진정한 우리 태극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