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무극대도 | 선천 상극의 상징-천지비괘天地否卦

[기고]

한태일(인천구월도장, 녹사장)

선천은 천지비天地否



* 선천은 천지비天地否요, 후천은 지천태地天泰니라 (증산도 도전 2:51:1)


온 우주를 다스리는 상제님께서 선후천의 시대정신을 단 한마디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천지비天地否괘를 보면 위에는 하늘괘(☰), 아래는 땅괘(☷)가 있으며, 하늘天과 땅地이 막혀 있으므로 ‘막혔다’는 ‘비否’ 자를 써서 천지비괘天地否卦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땅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왜 막혔다고 할까요? 그것은 하늘은 위에 있어 높기만 하고, 땅은 아래에만 머물려 있어서 서로 교류가 일어나지 못하여 막혀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비否 자에서도 막혔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요. 否=‘不 + 口’로 생명 기운이 출입하는 문호門戶[口]가 막힌 모습(⤒)으로 음양의 교류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나타낸 글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큰 틀에서 보면 하늘땅뿐만 아니라 “선천은 삼계가 닫혀 있는 시대”(도전4:6:1)라고 상제님께서 밝혀주셨습니다. 선천 시대는 하늘과 땅은 물론이요 인간과 신명계까지도 서로 교류가 없는 불통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12번째 천지비괘(䷋)와는 정반대인 괘가 위는 땅, 아래는 하늘이 있는 11번째 지천태괘地天泰卦(䷊)로 천지가 크게 통한다는 괘입니다. 이처럼 비괘와 태괘는 그 괘상과 뜻이 서로 반대죠. 즉 지천태의 괘상을 뒤집으면 천지비의 괘상이 되고, 또 천지비의 괘상을 뒤집으면 지천태의 괘상이 됩니다. 이는 어려운 때가 있으면 태평한 때가 있게 마련이고, 또 막히면 뚫리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이죠. 비괘와 태괘가 서로 앞뒤에 있고 괘상 또한 뒤집어 보면 같다는 것은 선후천이 서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지비괘와 지천태괘를 팔괘도로 비교해 보면, 선천의 복희팔괘도는 곤북건남坤北乾南으로 천지비괘의 모습을, 후천의 정역팔괘도는 건북곤남乾北坤南의 지천태괘의 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선천을 나타내는 팔괘도인 복희팔괘도의 남북축은 위에는 하늘(天)이 아래는 땅(地)이 있는 것이 비否괘와 똑같습니다.

천지비괘의 괘상을 보면, 강건한 양효(☰, 수컷, 강건, 위세)들이 유순한 음효(☷, 암컷, 유약, 순종)들을 위에서 일방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억음존양抑陰尊陽과 약육강식弱肉强食하는 모습이며, 이처럼 힘의 논리가 적용된 선천 영웅시대에는 죄로 먹고 살게끔 도수가 짜여 있습니다.

이렇게 음을 억누르고 양을 높이는 선천 문화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선천에는 하늘만 높이고 땅은 높이지 않았다”(도전 2: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양효(⚊)는 광명, 큰 것, 대인을 상징하고, 음효(⚋)는 암흑, 작은 것, 소인을 나타내죠. 그래서 천지비괘를 정치에다 적용시켜 보면 지천태괘에서 쫓겨났던 소인배들(☷)이 안에서[내괘] 실권을 잡고 있으며, 대인들(☰)은 밖으로[외괘] 쫓겨나 있어 소인배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도無道한 정치가 펼쳐지고 있네요.

우주의 창조 원리는 상극과 상생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목은 대지를 뚫고 나오며 인간도 산고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생의 첫출발을 시작합니다. 대자연의 섭리는 먼저 상극이란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거쳐야 결실의 풍요를 맛볼 수 있는 상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선천 우주의 틀은 시공간이 뒤틀어져 있는 부조화와 불균형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천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어 상극의 살기를 내뿜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도 일년 주기가 365와 4분의 1일로 윤도수의 그물에 사로잡혀 정도수正度數를 벗어나 있습니다.

천지가 이처럼 상극의 틀에 갇혀 있으니 천지의 아들딸인 인간 역시 상극의 형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괘는 종도사님 말씀대로 “음양이 불통하고 조화되지 않는 상象으로 곧 선천 시대의 음양의 부조화와 상극관계를 상징하는 괘”(도전 2:51:1 측주)라고 하셨습니다.

*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運이라.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하늘과 땅에 전란戰亂이 그칠 새 없었나니 그리하여 천하를 원한으로 가득 채우므로 이제 이 상극의 운을 끝맺으려 하매 큰 화액禍厄이 함께 일어나서 인간 세상이 멸망당하게 되었느니라. 상극의 원한이 폭발하면 우주가 무너져 내리느니라. (도전 2:17:1~5)

*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도전 4:16:2~3)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오니


그럼 천지비괘의 괘사를 보겠습니다.

否之匪人(비지비인)이니 不利君子貞(불리군자정)하므로 大往小來(대왕소래)니라
비否는 사람이 아니니 군자의 올바름이 이롭지 못하니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오느니라.


천지비괘를 보고 판단한 문왕의 괘사입니다. 비否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서로 소통이 되는 군자君子를 지칭합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대산 김석진 선생의 해설에 따르면 “비괘의 괘상을 천지의 축소판인 사람에게 대입시켜 비괘의 괘상(䷋)의 획수 9와 인체의 구규九竅(아홉 개의 구멍. 눈, 코, 귀, 입의 일곱 구멍과 항문, 요도의 두 구멍)를 서로 비교해 보면, 상괘 양효(☰)의 획수는 3획으로 얼굴의 눈, 코, 귀, 입의 7구멍과는 맞지 않고, 또 하괘 음효(☷)의 획수는 6획으로 하체의 항문, 요도의 2구멍과도 맞지 않다. 그러므로 괘사에서 비는 사람이 아니다(匪人)”라고 하였습니다.

비괘는 땅으로 상징되는 소인배(☷)가 안에서 득세하는 때이며, 하늘로 상징되는 군자(☰)가 밖으로 물러나 있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군자가 때를 얻지 못해 올바르게 처신한다 하더라도 이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양(⚊)인 큰 것(君子)이 바깥으로 밀려나고, 음(⚋)인 작은 것(小人)이 안에서 커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천지비괘입니다. 결국 자기 이익만을 탐하는 소인배들이 권력을 잡아서 위정자와 백성 간에 소통의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무도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와 닮은 괘가 바로 지화명이괘地火明夷卦(䷣)인데요. 즉 땅 속에 불이 들어가 있어 밝은 것이 상傷하였다는 괘입니다. 명이괘는 은殷나라 폭군 주왕紂王의 폭정으로 유리옥에 갇혀버린 문왕文王과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어려움을 피해 때를 기다리던 기자箕子 등에 대해 이야기한 괘입니다.

다음은 단전을 보겠습니다.

彖曰(단왈) 否之匪人不利君子貞大往小來(비지비인불리군자정대왕소래)는
단전에 이르길 ‘비否는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니 군자의 올바름이 이롭지 못하니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는 것은

則是天地(즉시천지) 不交而萬物(불교이만물)이 不通也(불통야)며 上下(상하)
不交而天下(불교이천하) 无邦也(무방야)라
즉 이 천지가 사귀지 못해서 만물이 통하지 아니하며 상하가 사귀지 못해서 천하에 나라가 없음이라.

內陰而外陽(내음이외양)하며 內柔而外剛(내유이외강)하며
內小人而外君子(내소인이외군자)하니
안에는 음이고 밖에는 양이며, 안은 부드럽고 밖은 강하며, 안에는 소인이고 밖에는 군자이니

小人道(소인도) 長(장)하고 君子道(군자도) 消也(소야)라.
소인의 도는 커 나가고 군자의 도는 사라지느니라.


비괘의 괘사를 보고 공자가 보충 설명한 단전인데요.

‘비괘는 땅으로 상징되는 소인배(☷)가 안에서 득세하는 때이며 하늘로 상징되는 군자(☰)가 밖으로 물러나 있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은 소인배들이 판치는 세상이죠. 그러니 군자가 때를 얻지 못해 올바르게 처신한다 하더라도 이롭지 않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고 했습니다.

천지 또한 이와 같아 서로 사귀지 않으면 만물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괘를 정치에 적용해 보면 위정자와 백성들 간에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겉돌게 되므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나라라고도 볼 수 없겠죠.

그리고 비괘의 괘상을 보면, 안에 있는 땅괘는 음효로 부드럽고, 바깥에 있는 하늘괘는 양효로 당연히 강합니다. 또 내괘의 음효는 소인배에 해당되며, 외괘의 양효는 군자를 상징합니다. 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소인배는 그 세력이 점점 커나가고, 변방으로 밀려난 군자들은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것이 비괘의 모습입니다.

대상전을 보겠습니다.

象曰(상왈) 天地不交(천지불교) 否(비)니 君子(군자) 以(이)하여 儉德辟難(검덕피난)하고 不可榮以祿(불가영이록)이니라
대상전에 이르길 하늘과 땅이 서로 사귀지 않는 것이 비否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덕을 검소하게 해서 어려움을 피하고 (소인배들의) 녹을 받아 영화를 누리지 않느니라.


천지가 서로 어긋나 있는 천지비괘의 상을 보고 공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비괘는 하늘과 땅이 사귀지 않고 교류가 없어 비색否塞한 상황입니다. 이처럼 천지가 막혀 있는 비괘를 보고 군자는 무엇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있는 무도한 시대에 군자는 덕德 베풀기를 아껴야 한다고 합니다. 흔히 덕을 말할 때 ‘후덕厚德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그런데 여기서는 후덕과는 반대로 덕을 아껴야 한다는 ‘검덕儉德’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소인배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불통의 시대라서 군자의 존재조차 눈에 거슬리는 마당에 상생의 덕을 베풀다가 까딱 잘못하면 목숨조차 위태롭게 될 것이니, 후일을 도모해서 덕을 베푸는 것을 아껴 몸을 보전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儉德辟難). 그리고 이 같은 폭정의 시대에는 소인배들에게 받아먹는 녹봉으로 구차스럽게 입에 풀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不可榮以祿).

그래서 공자도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어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으며 의롭지 않는 재물과 직위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소인배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은둔의 낙을 즐기는, 그야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실천하는 것도 괜찮은 것입니다.

육효사를 살펴보겠습니다.

初六(초육)은 拔茅茹(발모여)라 以其彙(이기휘)로 貞(정)이니 吉(길)하여 亨(형)하니라
초육은 띠 뿌리를 뽑음이라. 그 무리로써 바르게 하니 길하여서 형통하니라.

象曰(상왈) 拔茅貞吉(발모정길)은 志在君也(지재군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띠를 뽑는 바름이 길하다’는 것은 뜻이 임금에게 있음이라.


천지비괘의 초육 자리와 지천태괘의 초구 자리는 둘 다 띠풀로 설명하고 있으며 효사 또한 비슷합니다(拔茅茹라 以其彙로 征이니 吉하니라 - 지천태괘 초구). 띠풀(茅)은 ‘삘기’라고도 하며 뿌리가 엉켜 있어 잡아당기면 여러 개가 한꺼번에 뽑힙니다. 띠풀은 제사를 지낼 때 모사기茅沙器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운수가 꽉 막혀 비색한 시절이기에 무모하게 움직이면 어려움이 따르니 일단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초육은 소인배 중 한 일원이지만 아직 어려(뿌리) 나쁜 근성에 덜 물들었습니다. 그러니 육이, 육삼 같은 나쁜 무리들과 함께 어울리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바르게 가르치면 형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하고 형통하게 해 줄 주인공을 소상전에서는 구오 자리에 있는 임금이라고 했습니다.

대인은 막혔어도 형통하다



六二(육이)는 包承(포승)이니 小人(소인)은 吉(길)하고 大人(대인)은 否(비)해도 亨(형)이라
육이는 포용하여 이음이니 소인은 길하고 대인은 막혔어도 형통하니라.

象曰(상왈) 大人否亨(대인비형)은 不亂群也(불란군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대인이 막혔어도 형통하다’고 한 것은 무리를 어지럽히지 않음이라.


육이는 비괘에서 중中을 얻고 음陰 자리에 음효가 와서 제자리[得正]에 있으니 중정中正한 자리로, 육효 중에서 가장 막혀있는 자리입니다. 즉 소인배의 수괴首魁로 서로 응하고 있는 구오 임금의 총애(包)를 받아(承) 소인천하를 구가하며 사욕을 채울 수 있어 길하다고 했으며, 그런 반면에 대인은 이런 소인배들이 들끓는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홀로 지조를 지키며 은둔(否)하고 있어 비록 지금은 힘들겠지만 결국은 형통(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소상전에서 소인배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대인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六三(육삼)은 包羞(포수)로다
육삼은 싼 것이 부끄럽도다.

象曰(상왈) 包羞(포수)는 位不當也(위부당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싼 것이 부끄럽다’는 것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음이라.


육삼은 음효가 양 자리에 있어 부정不正하고 부중不中하며 내괘[소인배 세상]에서 극성한 자리에 있습니다만, 그나마 내괘의 끝자리에 있어 가깝게 있는 외괘[군자 세상]의 군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동안 저질렀던 올바르지 못한 행동[包]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羞] 있습니다.

九四(구사)는 有命(유명)이면 无咎(무구)하여 疇離祉(주리지)리라
구사는 천명이 있으면 허물이 없어서 무리가 복을 받으리라.

象曰(상왈) 有命无咎(유명무구)는 志行也(지행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천명이 있으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뜻이 행하여짐이라.


구사 자리는 소인들이 전횡을 일삼던 폭정의 시대가 종식되면서 새 시대의 서광이 비쳐 오는 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 세상이 닫힌 천지비[선천]에서 하늘땅이 새롭게 열리는 지천태[후천] 기운이 움트는 시기이죠. ‘천명이 있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선후천이 바뀌는 가을개벽의 시운이 알려 주는 하늘의 명[天命]을 깨달아 잘 순응한다면 천지에 허물을 지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 천하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명(天命)이 있으므로 신도에서 신명이 먼저 짓나니 그 기운을 받아 사람이 비로소 행하게 되느니라. (도전 2:72:2~3)

* 상제님께서는 모든 일을 천지도수에 맞추어 인사로써 명命을 내리시기 때문에 그 명은 곧 천명天命이다. (도전 3:319:1 측주)


결국 구사에서 말하는 천명이란 곧 우주의 통치자이신 상제님의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명을 어기는 것은 천지도수를 어기는 것이다. 상제님의 천지대업을 인사로 매듭짓는 상제님 일꾼들은 성성히 깨어진 정신으로 상제님 태모님의 천명을 봉명함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도전 3:319:1 측주)라고 종도사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천하사 일꾼들은 종도사님의 도훈을 받들어 곧 닥칠 가을 대개벽을 맞이하여 “다 함께 태을랑” “다함께 판몰이”를 빈틈없이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리가 복을 받는다’는 의미는 후천의 지천태 세상을 열고자 구사九四 군자가 구오九五, 상구上九의 군자들(疇)들과 함께 천명에 부응해서 상제님의 대도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 하늘이 내려 주는 천복(祉)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리離는 ‘걸릴 리離’자로 붙는다는 뜻이며, 리괘離卦는 선천 말기를 나타내는 문왕팔괘도에서는 남중南中에 있지만 후천 세상을 나타내는 정역팔괘도에서는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천복이 후천에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구사 자리는 양효陽爻가 음陰 자리에 있어 제자리가 아니듯이 구사 군자 또한 많이 힘들지만 천명과 시운時運에 따르고자 구오, 상구 군자들과 함께 결연히 천하사에 임하는 것은 인종 추수 개벽의 급박한 시간대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때의 정신을 각성하여 과감하게 상제님의 대도 진리를 세상에 펼치는 것이야말로 소상전에서 언급한 ‘천명의 뜻이 행하여짐이다’의 올바른 풀이일 겁니다. 우리 태을랑 또한 이를 본받아 신명을 다 바쳐 천하사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뽕나무에 붙들어 매어


九五(구오)는 休否(휴비)라 大人(대인)의 吉(길)이니 其亡其亡(기망기망)라며 繫于苞桑(계우포상)이니라
구오는 비색한 것이 그침이라. 대인의 길함이니 ‘이러다 망하지 이러다가 망하는구나’ 하며 우묵한 뽕나무에 붙들어 매어 놓으리라.

象曰(상왈) 大人之吉(대인지길)은 位正當也(위정당야)라
소상전에 이르길 ‘대인의 길함’이란 자리가 바르고 마땅함이라.


구오 자리는 중정하고 당당한 대인大人의 자리인바(중천건괘의 구오 자리와 같음), 이제 비색한 세상의 종결[休否]을 짓고자 합니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 버리는 선천의 비색한 세상을 구하려는 대의大義하신 대인이 계셔서 길한 것이며, 그분이 어떻게 해서라도 건져 내려 뽕나무에다 단단히 붙들어 매어 놓으려 합니다.

‘비색함이 그친다’는 것은 자연의 순환 원리에 의해 선천의 불통시대에서 후천의 소통시대로 넘어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인의 길함(大人 吉)’이란 이러다간 멸망당하겠구나(其亡其亡)라고 온 천하가 죽음의 공포로 휩싸여 있을 때 대인이 출현하여 억조창생들을 구제한다는 것입니다.

* 내가 이제 천지를 개벽하여 하늘과 땅을 뜯어고치고 무극대도를 세워 선천 상극相克의 운運을 닫고 조화선경을 열어 고해에 빠진 억조창생을 건지려 하노라. (도전 5:3:2~4)


‘포상苞桑’이란 선천 오만 년 동안 쌓인 악업의 홍수가 터져서 이 세상을 쓸어버릴 때 뿌리가 깊고 잎사귀가 무성하여 꽉 붙들 수 있는 뽕나무를 말합니다. 즉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명의 동아줄과도 같은 뽕나무를 꼭 붙잡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선천 상극 기운으로 소멸해가는 가엾은 생명들을 살리시기 위해 뿌리가 질긴 뽕나무에다 단단히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선천 상극의 살기가 넘쳐흘러 죽을 수밖에 없는 창생들은 목 넘기기를 잘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이번 개벽기에 목 넘기기를 잘 하라고 누누이 당부하셨습니다.

* 운수는 좋건마는 목 넘기기가 어려우리라. (도전 4:32:7)

* 운수는 가까워 오고 도道는 멀리 가리니 마음을 굳게 가져 목 넘기기를 잘 하라. 부하고 귀하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든 척隻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라. (도전 7:17:1~2)


참고로 뽕나무와 관련하여 ‘부상扶桑’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중국 고대 신화를 기록한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부상이란 동쪽 바다 속에 해가 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목神木으로 부상의 가지에는 열 개의 태양이 달려 있고 태양새(三足烏)가 해를 운반한다고 합니다. 신화의 배경지인 중국의 동해 연안 지역은 원래 뽕나무의 원산지며 우리 동이東夷의 강역으로 곧 부상扶桑이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오 효사는 앞으로 대환란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갈 때 후천 세상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게 창생들을 붙들어 매는 구원의 성업聖業을 부상의 나라인 우리 동방대인지국東方大人之國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암시한 글입니다.

이 구절과 연관하여 주목하여 볼 것이 바로 주역 52번째 풍뢰익괘風雷益卦(䷩)입니다.

익괘 단전을 보면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는 것은 목木의 도道가 이에 행함이라(利涉大川 木道乃行)’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큰 내(大川)를 건넌다는 것은 후천 가을 세상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며, ‘그 건너가는 수단이 바로 목도木道’라는 것입니다. ‘목도木道는 동방목東方木의 도道’, 즉 한민족 고유의 ‘홍익弘益의 도道가 온 천하에 펼쳐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繫(맬 계)와 扶(붙들 부)는 같은 뜻으로 계우포상에서 말하는 ‘계상繫桑(뽕나무에 매어 놓음)’이란 곧 ‘부상扶桑(뽕나무에 붙들어 놓음)’을 뜻합니다. 즉 이번 가을개벽기에 살기 위해서는 부상扶桑의 나라, 온 나라를 구원하는 남조선, 대한민국을 꽉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확히는 개벽장 하느님이신 증산 상제님의 도, 증산도를 꽉 붙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면 구오 효사는 도솔천의 천주이신 미륵부처님과 삼생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증산도라는 뽕나무에 단단히 묶어 놓아야만 후천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상종도사님께서는 매번 말씀하실 때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상제님이 오셔서 선천 상극 세상에서 후천 상생 세상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아 주셨다. 증산도는 천지의 열매요, 우주의 결실이요, 천지를 담는 그릇이다.”라는 도훈을 내려 주셨습니다.

上九(상구)는 傾否(경비)니 先否(선비)하고 後喜(후희)로다
상구는 비색한 것이 기울어짐이니 먼저는 비색하고 나중에는 기뻐하도다.

象曰(상왈) 否終則傾(비종즉경)하니 何可長也(하가장야)오
소상전에 이르길 ‘비색한 것이 마침은 곧 기울어짐’이니 어찌 가히 오래 가리오.


상구는 비괘의 극성한 자리로, 달도 차면 기울 듯 영원할 것 같았던 막힌 세상도 결국 극즉반極則反의 원리에 의해 태평한 세상이 된다는 뜻이며, 선천 복희팔괘도의 천지비 괘상(䷋)이 후천 정역팔괘도의 지천태 괘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천태괘에서도 ‘평탄하면서도 언덕지지 않음이 없으며(无平不陂),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无往不復)’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면 서로의 마음이 닫혀 있던 비색한 세상이 마음이 통하는 심통心通의 웃음꽃이 피어나는 후천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또 소상전에서도 비색한 세상이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선천을 상징하는 비괘의 극단기에 있는 현재의 시운이 후천으로 바뀔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