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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보는역사]

    세계 2차 대전World War Ⅱ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차 일청전쟁이 두 번 일어나리니 첫 번째에는 청국이 패하고 말 것이요 두 번째 일어나는 싸움이 10년을 가리니 그 끝에 일본은 패하여 쫓겨 들어가고 호병(胡兵)이 침노하리라. 그러나 한강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405장)



    대전大戰의 시작


    대륙 침략에 열을 올리던 일본은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이를 중국의 공격으로 조작하고 중·일전쟁(1937~1945)을 일으켰다. 이 전쟁이 바로 오선위기 도수의 총각판 씨름의 시작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은 중·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대항하면서 중국에 훈수를 두었다. 그리고 ‘베를린 로마추축(Berlin-Roma 樞軸, 1936)’을 형성하며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은 소련의 코민테른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반反코민테른 협정(1936. 11. 25)을 맺고 일본에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의 비무장을 결의한 조약을 파기하고 이곳에 군대를 진주시키며 재무장을 단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중국과 소련, 독일과 일본이 각기 손을 잡음으로써 1936년에 두 번째 오선위기 판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1937년 7월에 이른바 추축국의 하나인 일본이 중국을 침공해 중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마침내 총각판 씨름의 막이 올랐다. 국제연맹의 집단안보 질서를 무시한 이른바 ‘추축국’의 집단 광기가 또 한차례 세계대전의 참극을 불러왔다.

    히틀러의 등장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를 흐르는 인Inn 강변의 오스트리아 쪽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6남매 중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세무 공무원이었으나 학력이 낮았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폭력에서 찾는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1907년 10월, 미술학교 진학을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다. 당시 빈에서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빈에서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우고,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된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독일 군인으로 참전하고 종전 후에는 1919년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한다. 후에 나찌스로 이름을 바꾸는 이 당에서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 능력으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결국 1933년 1월 당시 대통령 힌덴부르크게 의해 총리로 지명되고 이듬해 8월 대통령이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된다.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총통(Führer)이라 칭하였고 보통 총통으로 불리게 되었다.

    독일의 세계 정복


    정권을 잡은 후 히틀러는 뮌헨 협정을 비롯한 여러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다.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켜 국민들을 열광케 했다.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세계 정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독일은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電撃戰’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였고 마지노선을 무너뜨리고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1940년 9월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 세 나라 사이에 정치·경제·군사적 수단을 공동으로 지원한다는 삼국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해 소위 추축국의 틀을 굳건히 해나갔다. 승승장구하던 히틀러는 1940년 말까지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독일은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 우세한 공군력을 쏟아 부어 영국에 대공습을 가했지만 영국 국민들의 항전 의지를 꺾지 못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 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전세는 연합국 쪽으로 기울어져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1943. 9. 8)을 하게 되고 소련의 반격으로 독일군도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협공을 받게 된 독일은 베를린까지 밀리게 된다. 결국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歲月汝遊劒戟中(세월여유검극중)이나
    往劫忘在十年乎(왕겁망재십년호)아
    不知而知知不知(부지이지지부지)하고
    嚴霜寒雪大鴻爐(엄상한설대홍로)라
    세월아! 너는 전쟁의 겁액 속에서 흘러가는데
    가는 겁액이 십년 세월에 있음을 잊었느냐!
    내 일은 모르면서도 알 것이요 알면서도 모르리니
    이 끔찍한 겁액의 고난도 큰 화로에 상설이 녹듯 하리라. (증산도 道典 5:323:4)

    태평양 전쟁


    한편 일제日帝는 군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로 전선을 확장하였고, 미국은 석유 등 자원 공급을 중단하고 경제 제제를 가하며 일제를 견제했다. 이에 일본 군부는 1941년 12월 9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전 세계가 대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후에 미국 영국 네덜란드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의 대일 선전포고 나흘 뒤인 11일에는 베를린 로마 도쿄 추축의 독일이 일본을 도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탈리아도 뒤따랐다. 이듬해 1월 1일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26개국이 ‘연합국 선언’에 조인함으로써, 연합국(민주주의 진영) 대對 추축국(파시즘 진영)의 전쟁 구도가 명료해졌다.

    1937년에 벌인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 축과,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또 다른 한 축의 전쟁에 세계 열강들이 얽히고설켜 대전쟁을 벌였다. 일반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발발 시기는 일본 제국이 타이, 영국령 말라야와 싱가포르, 홍콩을 침공하고 미군 기지인 진주만과 웨이크 섬, 괌, 필리핀에 공격을 가한 1941년 12월 7일 또는 8일로 보고 있다. 태평양 전쟁은 연합국이 태국과 추축국樞軸國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벌인 전쟁이다. 전쟁은 미국 공군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소비에트 연방의 만주 전략공세작전 등이 성공을 거둬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이후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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