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왕조와 운명을 함께한 경운궁(덕수궁)

[한문화]
이해영 / 객원기자

이제 경운궁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한국을 연 대한문 앞 광장


대한제국 황궁이 된 경운궁은 궁 앞으로 곧게 뻗은 하나의 길만을 가졌던 경복궁과 달리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 지금의 광화문 앞 도로인 육조거리와 연결되는 새로운 길을 개설하였습니다. 동으로는 을지로로 연결되며, 남으로는 남대문으로 그리고 동남 방향으로는 원구단을 지나 남대문로와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도로 체계를 가졌습니다. 특히 대한문에서 원구단으로 가는 현재 시청 앞 광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미년 삼일 만세 운동 등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았던 곳입니다. 이는 고종이 지향하던 근대 도시의 공간 구조였고, 그 중심이 경운궁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광무개혁의 두 기둥, 궁내부와 원수부


현 서울 광장 일부에는 많은 궐내각사가 있었습니다. 궁궐의 일상을 도맡았던 전각이기도 하면서 고종이 추진한 광무개혁을 실무에서 돕던 관청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관청은 궁내부와 원수부입니다.

궁내부宮內府
궁내부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왕실 관련 업무를 의정부의 행정 업무에서 분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입니다. 궁내부대신은 의정부 총리대신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습니다. 궁내부는 고종의 근대국가 정책이 추진될 때 직접 명을 수행하면서 역할이 확대되었습니다. 현재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원수부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원수부元帥府
군 통수권자인 황제가 대원수로서 군 전체를 총괄하는 부서로 대한문 옆에 2층 벽돌 건물로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전체 모습은 알 수 없고, 대안문을 찍은 사진에 나와 있을 뿐입니다.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 일대


대한(안)문을 지나면 초라한 금천교가 나옵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서 정문과 금천교 사이 거리가 유난히 짧기도 합니다. 이 역시 경운궁 동쪽에 개설된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대한문이 서쪽으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금천교를 건너 앞으로 곧장 가면 오른쪽에 중화문中和門이 나오고 경운궁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 나옵니다. 중화문은 독립건물처럼 서 있지만 원래 다른 궁궐의 정전 문들과 같이 좌우로 행각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중화문 오른쪽에 따로 떨어져 서 있는 건물이 중화문에 연결되었던 행각의 일부이지요.

제국의 심장, 중화전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입니다. 왕의 즉위식 및 신하들의 조하朝賀 의식, 외국사신 접견 등 중요한 국가 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경운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급박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출범한 대한제국이라 한동안 정전을 건설할 여유가 없어서 기존의 즉조당卽阼堂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중화전은 한참 뒤인 1902년 중층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광무 8년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지금의 단층 전각으로 중건되었습니다.

중화에 담긴 뜻
중화전은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등과 같이 정政 자 돌림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정전의 이름에는 임금과 정전에서 업무를 보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 이름은 하나같이 올바른 정치를 통해 나라를 잘 다스리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왜 중화전에만 ‘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우선 ‘중화’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으로 중용에서 유래했습니다. 중용에서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든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고 했습니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대한제국으로 새로 출범한 조선을 두고 각축을 벌이던 서구 열강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은 나라의 정치를 바르게 행하라는 염원을 담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질서 속에서 당당하게 자리 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 출범은 정상적인 세계 질서를 구축한다는 대의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화전 들여다보기
중화전은 비록 단층 정전으로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에 비해 단출한 모습이지만, 격에 맞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중화전 권역의 전체 구성은 2단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중화전이 있고, 중화전 앞으로 조정이, 정전과 조정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여느 궁궐의 정전과 같습니다.

중화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화문을 지나야 합니다. 중화문 기단부 중앙 답도에는 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다른 궁궐에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과 달라진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화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답도에도 용을 새겨 놓았습니다. 중화전 내부 어좌 뒤에는 역시 일월오봉도를 그린 병풍이 있습니다. 황제가 임어하는 용상龍床 위에는 집 속의 집으로 불리는 닫집이 있고, 그 천장에 쌍룡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채색구름 사이를 날고 있는 비룡은 발가락이 다섯인 오조룡五爪龍입니다. 천장에 장식된 이 황금색 빛나는 용은 완벽한 대칭 구도로 화려하고도 엄격한 격식을 따르는 궁정 장식미술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운궁 드므에는 무엇이 있는가?
경운궁 중화전 월대 좌우에 놓인 드므에는 길상吉祥의 의미를 가진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드므는 순우리말로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을 가리킵니다. 목재로 지어진 건조물은 화재에 가장 취약합니다. 그래서 주로 목조로 지어진 궁궐의 화재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비치한 물건입니다. 안에는 물이 담겨 있는데, 불의 신인 화마火魔가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다는 주술적 의미에 따른 것입니다. 만卍 자 문양과 함께 중화전 왼쪽 드므에는 성스러운 임금의 수명이 영원하길 기원함이라는 의미의 ‘희성수만세囍聖壽萬歲’가, 오른쪽 드므에는 나라가 태평하게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의 ‘국태평만년國泰平萬年’이 돋을새김되어 있습니다.

‘희성수만세’의 ‘희’는 쌍희자雙囍字로 불리는 글자로 원래 혼인 중의 남녀 쌍방이 기쁘고 경사를 함께 영접한다는 의미이며 축복의 의미로도 널리 사용된 말입니다. ‘성수’는 성스러운 임금의 수명을 뜻합니다. ‘만세’는 원래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을 가진 말로 최고 통치자 즉 황제를 칭송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황제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이 말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 조선 왕들에게는 ‘천세千歲’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드므에 새겨진 ‘만세’는 중화전에 있는 드므가 고종이 황제 자리에 오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국태평만년’의 ‘만년’은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나라가 태평하게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종의 승부수,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황태자였던 순종이 대리청정하게 된 것을 신하들로부터 축하받는 의식을 중화전에서 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강요로 대리청정이 명해진 것이고, 며칠 후 대신들은 슬그머니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습니다. 그리고 순종에게 양위를 하게 하였습니다. 당연히 이 자리에 고종과 순종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배경에는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해외 여론이 심상치 않자, 이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물었습니다. 고종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 매국 세력과 일본의 강요로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重明殿


경운궁은 너무도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일부 시설은 궁궐 영역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장소인 중명전重明殿입니다. 중명전은 대한문을 등지고 오른쪽, 흔히 이야기하는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5분 정도 걸어가야 합니다. 미국 대사관저 입구를 지나, 서울 시립미술관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동극장이 있고 그 뒤편에 있습니다.

중명전은 붉은색 벽돌로 된 2층 양옥입니다.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이 설계한 건물로 처음에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졌습니다.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습니다. 하지만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고종이 임시로 들어왔고, 연회장이나 외교 사절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중명’이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중명전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 야욕을 확실하게 드러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한일협상조약이라고 하는 불평등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됩니다. 그날 일본은 중명전을 비롯한 경운궁 안팎에 무장한 군인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협약의 조인을 거부합니다. 끝내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조약을 체결해 버립니다. 우리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이양하는 내용의 굴욕적인 조약입니다. 주권 국가에서 외교권을 빼앗는 일은 나라를 식물 상태로 만드는 일이었고, 국권을 빼앗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이나 옥새 날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국회에서 조약을 비준해야 효과가 있지만, 당시는 왕조 국가입니다. 국가원수가 승인하지 않은 협약은 당연히 무효인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상황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도움을 구하고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곳도 이곳입니다. 중명전 내부에 들어가면 왼쪽에는 을사늑약의 현장이, 오른쪽에는 헤이그 특사 파견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공간들에서 엿보는 근대사의 흔적들


광명문
다시 경운궁 권역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화문 앞을 지나 곧장 가면 왼편에 광명문光明門이 있습니다. 제법 큰 문인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 남쪽에 있던 문인데, 1938년 석조전 서관을 증축하여 덕수궁미술관을 개관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의 구실과 상관없이 여러 유물의 전시 공간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광명문을 등지고 서면 정면에 석조전石造殿이 보입니다.

석조전石造殿, 개명한 근대국가의 상징
경운궁에는 다른 궁과 달리 많은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졌습니다. 물론 경복궁과 창경궁에도 있지만, 이것은 일본의 주도 아래 지어진 반면, 경운궁의 서양식 건물은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지어졌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서양식 건물이 지어진 경위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석조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석조전은 중화전의 서측에 중화전과 엇비스듬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중화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석조전은 여느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서양 역사주의 건축 양식이라 이방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석조전은 경운궁의 사실상 주인입니다. 즉 개명한 근대국가의 상징으로 서양 건축 양식의 전각을 세운 것입니다. 근대국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그 지향점은 서구였습니다. 그 의지의 결과물이 석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흙과 나무로 집을 만듭니다. 돌로 집을 짓는 전통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돌집을 짓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곧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조전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완벽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이란 서양 건축 문화의 기본인 그리스와 로마 건축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석조전은 이 중에서 그리스 신전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대영박물관으로 대표되는 그리스풍의 신고전주의가 유행했습니다. 이를 따른 것입니다.

석조전은 본래 고종의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1900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졌습니다. 대한제국 재정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J.M. Brown이 발의해 짓기 시작하여 한국, 러시아, 영국, 일본의 건축가들이 참여한 국제 규모의 공사가 되었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를 한 기둥이 늘어서 있고, 앞쪽과 동서 양쪽에 발코니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중앙 현관 위쪽에는 황실 문양인 오얏꽃(자두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석조전 앞의 서구식 정원과 청동제 분수는 별관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앞서 창덕궁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폭포는 만들지만, 분수는 만들지 않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분수는 우리 정서와는 맞지 않는 구조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궁궐의 다른 전각은 다 나름의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석조전은 그냥 돌로 지은 전각이라는 뜻만 갖고 있습니다.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시고 외교 사절을 접대한 정관헌靜觀軒
준명당과 즉조당 뒤편 왼쪽에는 믿음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가진 창신문彰信門이 있습니다. 이는 “상나라 탕왕이 능히 너그럽고 인자하여 억조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는 『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 문을 지나면 또 다른 서양식 건물이 나옵니다. 바로 정관헌靜觀軒입니다. ‘정관’은 깨끗함을 본다는 의미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우리 전통 방식과 서양식을 절충하여 설계한 건물입니다. 로마네스크식 기둥머리를 얹은 돌기둥을 둘러서 내부를 만들었고 앞면과 양 옆면의 외부에는 발코니를 설치했습니다. 발코니 기둥의 모양은 서양식이지만, 재질은 나무로 용과 박쥐, 꽃병 등 우리의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발코니 앞 난간도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철제로 되어 있지만 사슴, 소나무 등 전통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함녕전에 머물던 고종은 이 정관헌을 정자처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을 접대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정관헌의 여러 문들
정관헌은 아름답게 장식된 꽃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가운데 유현문惟賢門이 있습니다. 유현문은 ‘오직 어진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란 뜻으로 벽돌로 쌓아 문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든 화려한 문입니다. 고종이 예순에 얻은 막내딸 덕혜옹주가 내전을 드나들 때면 반드시 이곳 유현문으로 드나들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 옵니다. 전서篆書로 쓰인 글씨 좌우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습니다. 『서경』에 ‘관직에는 어진 이를 세우고 일에는 유능한 이를 쓴다(건관유현建官惟賢 위사유능位事惟能)’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유현문 옆에는 『주역』 건괘 「문언전文言傳」에서 온 말로 제왕의 ‘덕’을 의미하는 용덕문龍德門과 ‘선을 내려 준다’는 뜻의 석류문錫類門이 있습니다. 석은 여기서 준다는 뜻이고, 유는 선善을 의미합니다. ‘효자가 끊이지 않으니, 길이 너희에게 선을 내려 주리로다(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시경』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임금의 즉위식이 있던 석어당昔御堂과 즉조당卽阼堂
중화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뒤쪽으로 가면 석어당昔御堂이 있습니다. 석어당은 2층 건물입니다. 겉보기만 2층이 아니라 실제로 계단을 이용해 2층의 별도 공간으로 오를 수 있도록 지은 건물입니다. 단청을 하지 않아 민간의 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석어’는 옛날 임금이라는 뜻으로 이전 이름은 즉조당卽阼堂입니다. 석어는 선조와 인조가 머물렀다는 의미이고, 즉조는 인조가 계해년에 즉위한 당이라는 의미로 둘 다 영조가 붙인 이름입니다.

석어당 왼쪽 뒤편에 즉조당이 있습니다. 즉조는 임금의 자리에 나아간다는 뜻으로 영조 이전까지의 즉조당은 석어당을 일컬었고 지금 즉조당은 서쪽에 있는 건물이라 ‘서청西廳’이라 불렸습니다. 중화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즉조당은 태극전으로,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중화전이 지어진 1902년 이전까지 중화전이었던 이곳 즉조당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장소이기도 합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이를 무척 안타까워한 고종은 새로 지으면서 어필 현판을 내렸습니다.

임금의 침전 준명당浚明堂과 함녕전咸寧殿
즉조당의 왼쪽에 붙어 있는 건물은 준명당浚明堂입니다.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는 뜻입니다. 고종 때는 어진 봉안 장소나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쓰였습니다.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임금의 침전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올 때 건립된 침전입니다. 본래 침전은 매우 사적 공간이기 때문에 궁궐 이야기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녕전은 경운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전각 중 하나입니다. 특히 1904년 경운궁 대화재의 발원지가 함녕전 온돌이라고 합니다. 당시 있었던 전통 건축물 대부분이 이때 소실되었습니다. 함녕전의 정문이 광명문입니다. 1897년 함녕전 대청마루에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전화로 고종은 각부 대신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막은 것도 이 전화였다고 합니다.

1919년 기미년 1월 21일 고종은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였습니다. 세간에는 고종이 북경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를 막으려는 일제가 독살을 자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으로 민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국장으로 치러져야 함에도 일본은 일본 친왕의 장례 의식으로 축소하였습니다. 그래서 통상 5개월 정도 걸리는 조선 국왕의 국장은 40여 일 정도로 축소되고 3월 3일이 황제가 마지막 가는 길인 인산일因山日(발인)이었습니다. 그 전인 3월 1일 드디어 일제의 강압적인 폭압과 불법적인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거족적인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종의 승하는 기미년 삼일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제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국체가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환국, 배달, 단군조선 이래 면면히 이어 온 우리 한민족의 9천 년 역사가 이제 제정帝政과 왕정 통치에서, 민국民國으로 바뀌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운궁의 현대적 의미


백성에게 군림하지 않고 백성의 삶 한가운데 자리 잡은 궁궐이 바로 대한제국의 황궁인 경운궁입니다. 이는 고종이 ‘민국’을 지향했기에 가능했던 부분입니다. 국체는 제국의 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지향하는 바는 민국에 있었기에, 그의 사망 이후 자연스럽게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졌습니다. 경운궁은 제국에서 민국을 지향한 고종의 의지가 담긴 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조선의 상징적 장소였다면, 경운궁과 대한문 앞 광장은 근대 한국의 원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덕수궁이란 호칭보다는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할 것입니다. 본래 이름 그대로 불러 줘야 이 궁궐이 우리 역사,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녔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근대사를 다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로만 여겨졌던 고종이 서구를 모델로 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근대 군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대한제국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함께 경운궁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근대 한국의 중심이었던 경운궁과 대한문 앞을 ‘근대 한국의 출발점’이라는 살아 있는 가치로 되새길 때입니다.



화마로 날아간 제국의 꿈, 경운궁 대화재
1904년 갑진년 4월 14일 함녕전咸寧殿 구들을 고치고 불을 지피다가 발생했다는 석연치 않은 원인으로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화재로 함녕전,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昔御堂 등 주요 전각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선조 이후 원형을 보존해 오던 준명전浚明殿과 석어당 그리고 즉조당의 소실이 가져온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특히 당시 러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기에, 힘겹게 일본의 압박에 대응하던 고종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직면했습니다. 불안정하던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던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 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무의미했습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서울을 무력으로 점거했고 러시아는 공사를 철수시켰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지원자였던 러시아 공사가 철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경운궁 대화재는 단순한 화재 이상의 사건이었습니다. 승기를 잡은 일본의 압박 앞에 견제 세력은 소멸돼 버렸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의 국운은 급전직하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은 1905년 우리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상황이어서 열강의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종은 이 문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특사로 파견된 대한제국 최초 검사 출신 법률가 이준, 성균관장 겸 박사를 지낸 지식인 이상설,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러시아 한국공사관 참사관 출신이었던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자들 앞에서 회견을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중 이준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끝내 이역만리 타향에서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습니다. 다른 두 명의 특사인 이상설, 이위종은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국하셨습니다.

궁궐의 문이 지닌 의미
궁궐의 문은 단순히 출입을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상서롭지 못한 것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상서로운 것을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또 문은 깨끗하지 못한 몸을 가진 사람이 여러 문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정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궁궐의 문은 신분의 벽을 강조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군신과 지위의 높고 낮음, 남녀와 역할의 차이를 문의 방향이나 크기, 형태 등으로 철저하게 구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나란히 붙어 있는 유현문, 용덕문, 석류문도 크기나 모양, 방향에 차이가 있습니다.

김구를 살린 전화
1896년 21세의 청년 김구金九는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된 것에 격분하여 황해도 안악군에서 마주친 쓰치다 조스케라는 일본인을 죽였습니다. 쓰치다가 일본군 정보장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거사를 벌였다고 당당히 밝힌 김구는 3개월 뒤 체포되어 인천 교도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1897년 7월 사형 집행일 직전 ‘국모 복수’라는 특이한 범행 동기를 발견한 비서의 보고에 고종은 긴급하게 전화를 사용하여 사형 집행을 정지시켰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전화선은 사형 집행일 사흘 전에 개통되었습니다. 만약 사흘만 늦게 전화선이 개통되었다면 우리는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상생출판, 2014)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하』 (홍순민, 눌와, 2017)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새벽숲, 2010)
『궁궐, 그날의 역사』(황인희, 기파랑, 2015)
『덕수궁』(안창모, 동녘, 2009)
『궁궐의 현판과 주련 3』(수류산방 편집부, 수류산방,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