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절정의 순간에서 몰락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몰락의 서막- 러시아 원정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강한 법. 일생 최고의 순간에서 나폴레옹은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바로 러시아 원정을 감행한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망신은 러시아 원정의 실패였다. 명목은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러시아를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1812년 6월 24일, 5개 군단, 54만 명을 이끌고 러시아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9월 8일 모스크바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러시아의 차르(알렉산드르 1세)는 항복은커녕 어떤 협상도 거부하였다. 겨울이 다가와 보급이 불확실해져서 10월 17일 후퇴를 시작했지만, 너무 늦었다. 수십 년 만의 혹한은 나폴레옹군을 재기 불능의 상태까지 몰고 갔다. 12월 말에야 간신히 안전지대로 들어갔는데 그 대가로 엄청난 장비와 주력 부대를 러시아 평원에 묻어야만 했다.

■ 실패했지만 위대했던 프랑스 군대
비록 실패했지만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용기와 전투력을 과시하였다. 흔히 러시아군이 나폴레옹군과 전투를 피하고 모스크바까지 일부러 후퇴하면서 지구전을 펼쳤다고 하지만 이는 과장이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분열되어 있었고, 전략도 강경론과 후퇴론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도 내줄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에게 연거푸 패하면서 모스크바도 내주게 된 것이다. 스몰렌스크Smolensk와 보르디노Borodino에서 나폴레옹군의 팀워크만 잘 맞았다면 러시아군은 전멸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모스크바를 버리고 후퇴하는 도중 프랑스군은 러시아군 저지선을 2차례나 돌파했고, 네이Ney 원수는 후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러시아군의 습격을 방어했다.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유는?


한마디로 가용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스페인 왕위를 자신의 형 조제프Joseph에게 넘긴 사실이 스페인 민중의 반감을 샀다. 애국심 하면 프랑스인에 못지않았던 스페인 민중들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반도半島전쟁 1808년~1814년). 험한 산지에서 스페인 게릴라군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2개의 전선(스페인-반도전쟁, 러시아원정: 1812년 6월 24일~1813년 1월 5일)을 형성시켜 버렸다. 현대에도 2개 이상의 전선을 가용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정도뿐이다.

■ 러시아 원정군 자질의 문제점
러시아 원정군 54만 명 중 충성스러운 프랑스군은 절반 이하였다. 나머지는 유럽 각국에서 온 외국인 부대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군의 행군 속도와 병참 능력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군대였다. 여기에 5개 군단 중 하나는 나폴레옹이, 다른 하나는 마크도날MacDonald 원수가 지휘하였다. 반면 다른 군단들은 막내 동생 제롬Jérôme, 조세핀 전남편 아들 외젠Eugène, 오스트리아 왕자가 지휘관으로 있었다. 이들은 무능하였다.

■ 손발이 맞지 않았던 원정군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투가 너무 거대해 군단 간 편차도 크고 처한 상황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부대는 혈전을 벌이고 어떤 부대는 놀고, 적을 추격한 부대는 너무 멀리 갔다 전멸해 버렸다. 부대가 흩어져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보니 부대가 없고, 어떤 부대는 두려움 또는 충성심 부족으로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정신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나폴레옹의 컴퓨터 같은 두뇌도 과열 상태가 되었다. 보로디노 전투 후 정예병 3만 명을 잃은 충격으로 탈진해서 나폴레옹은 쓰러져 버렸다. 그러면서 큰 오판을 내리게 되었다.

■ 치명적인 오판을 내리다
전투 막바지에 러시아군 궤멸을 위해 근위대를 투입하자는 요청을 나폴레옹은 거절해 버렸다. 대담한 승부사 나폴레옹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덕분에 러시아군 사령부가 탈출에 성공하면서 원정을 성공시킬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동장군冬將軍 때문에 패했다는 것은 나폴레옹의 핑계이자 선전에 불과하였다. 프랑스군은 여름에도 진창과 비, 전염병 때문에 병력과 군마 등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넓고 낯선 러시아 땅에서 군마의 손실은 특히나 치명적이었다. 말이 부족해 정찰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현지 조달도 불가능했다. 러시아군은 이런 약점을 노려 코자크Cossacks 기병대를 투입해 낙오하거나 현지 조달을 위해 본대와 떨어진 프랑스군 부대를 가차 없이 공격하였다.

■ 병참 부족이 가져온 비극
처음부터 50만 이상의 병참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외곽 2진 병력이 중앙부를 보호막처럼 감싸는 형태로 진군하였다. 러시아군은 중앙부가 진격하는 동안 외곽 병력을 거침없이 사냥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보급이 열악해지고 불안감이 전군을 습격하게 되었다. 병참이 되지 않은 군대는 이기적이 되어 버렸고 마침내 전군은 통제 불능 상태로 변화하였다. 미리 쌓아 둔 병참기지도 후퇴하는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약탈하여 헛되이 증발해 버렸다. 원래 계획대로 4월에 출발했다면 추위를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출발이 늦어진 이유도 부대의 질과 통솔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넘지 못하다 - 트라팔가르Trafalgar 전투


■ 전투의 배경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왜 무리하게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2개의 전선을 펴야 했고,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을까?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시계를 잠시 앞으로 돌려서 1805년 트라팔가르 전투를 살펴보아야 한다.

유럽 대륙을 거의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남은 마지막 장애물은 숙적 영국뿐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영불 해협과 인접한 불로뉴Boulogne 해안에 집결시켰다. 저 해협만 건너면 막강한 프랑스 육군은 충분히 영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황후 죠제핀Joséphine과 다시 한 번 대관식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국 해군을 와해시켜야 했다. 섬멸까지도 필요 없었다. 18만 대군이 상륙하는 시간까지 해서 단 하루만 제해권을 장악하면 되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해군과 동맹국 스페인 함대까지 끌어들였다.

■ 시작부터 어긋난 트라팔가르 전투
하지만 이는 당시 시간을 육군 방식으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범선(돛으로 움직이는 범선은 바람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의 특징과 바다 기후(특히 영국 인근의 거친 북해)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 그나마 해전 경험이 많고 능력 있던 제독 트레빌이 사망하면서 작전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Nelson의 함대와 교전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고,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나폴레옹은 영국 원정군을 라인강 방면으로 돌려야 했다. 대륙에서 동맹군에게 거듭해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사이 넬슨의 함대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침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 세계 4대 해전 트라팔가르 전투의 서막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서쪽 카디즈Cádiz와 지브롤터Gibraltar 해협 사이의 트라팔가르곶. 영국 함대 27척이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 33척과 대치 중이었다. 넬슨은 영국 함선에 색칠을 하라고 명령했다. 적함과 뒤섞였을 때 아군의 배를 금방 알아볼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 영국의 이순신,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영국의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은 뛰어난 전술가였고 영국을 위해서라면 한쪽 눈이나 한쪽 팔 등 자신의 몸도 기꺼이 내주는 영웅이었다. 부하들을 잘 다스리는 훌륭한 지휘관으로 영국 해군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웰링턴Wellington 공작이 나폴레옹을 모방하여 그를 무너뜨린 영웅이라면, 넬슨은 프랑스 혁명 전쟁 중 동맹군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였으며, 그 누구보다 나폴레옹을 당황하게 한 인물이었다.

■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단열진 전법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사령관은 나폴레옹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나일Nile 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함대를 지휘한 인물인 빌뇌브Villeneuve였다. 빌뇌브는 당시 유럽의 해전에서 주로 사용하던 전술인 단열진(배를 일렬로 세운 뒤 전투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배를 일직선으로 세우는 것은 화력의 중심이 되는 화포가 배의 좌우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함선과 함선의 간격을 일정하게 배치한 뒤 전선을 형성하게 해서 배의 이물(뱃머리)과 고물(배꼬리)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이러한 전열과 전술에 맞는 배가 바로 전열함이었다.

■ 영국의 종열진 속공 전술
반면 넬슨은 단열진으로는 승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함대를 2열 종열진으로 배치하고, 쾌속함 8척을 전위대로 내세우게 하였다. 스스로 제1전대 12척의 함선으로 프랑스 함대의 중앙을 격파하고 들어가 전열을 끊어 놓기로 하였다. 그래서 영국 함대 최선봉에는 대영제국의 자존심이자 기함 빅토리victory호가 나섰다. 빅토리호는 포문을 활짝 열고 프랑스의 뷔상토르Bucentaure호를 향해 힘껏 돌진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적의 진열을 중앙 돌파하면서 적의 함대를 둘로 갈라놓았다. 영국 함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연합함대는 우왕좌왕하였고, 공격을 받은 배는 요동쳤다. 비록 적을 둘로 나누어 놓기는 했지만, 빅토리호는 적진에 갇힌 꼴이 되었다. 연합함대는 빅토리호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넬슨은 침착하게 대응하였다. 넬슨의 제1전대가 연합함대의 전열을 끊어 놓는 데 성공하자, 콜링우드Collingwood가 이끄는 제2전대가 연합함대의 후위를 공격하였다.

■ 트라팔가르 해전의 결과와 영향
결과는 영국 함대의 승리였다. 빌뇌브는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고, 수장을 잃은 뷔상토르호는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22척의 배를 잃었다. 5척이 격침되고, 17척이 나포되었다. 총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7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은 단 1척의 배도 전파되지 않았다. 사상자는 대략 1,600여 명 정도였다. 영국의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넬슨은 이 전투에서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신께 감사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하였다. 우리는 그가 신과 조국을 얼마나 사랑했고, 지휘관으로서 의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기를 거머쥐게 되었고 영국으로 진출하려던 나폴레옹의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806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렸지만, 이는 나폴레옹 자신을 고립시키고 몰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교류했으며 나폴레옹은 여기에 대한 분개심으로 러시아 원정 길에 나선 것이다.

■ 영국이 승리한 이유
영국군이 승리한 이유는 기존의 직선적인 공격과 평행적인 함대 배치를 뛰어넘는 수준의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해군 전술이 획기적으로 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이 전술 때문에 트라팔가르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으로 손꼽힌다. 또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에는 넬슨 같은 명장이 없었다. 넬슨은 부하들과 교감을 이루고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함선들의 간격 조정 여부를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전투 중에 발생하는 연기로 기함의 신호를 인식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위기관리 능력에서도 영국은 우세하였다. 결정적으로 영국 함대는 영국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자국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다국적 함대였기 때문에 정신적 단결력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황제 퇴위와 엘바Elba섬 유배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다. 간신히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에게 전 유럽 국가는 등을 돌렸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군대를 양성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소모전으로 흘러가면서 나폴레옹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의 적들은 그와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그의 부하들에 대해 각개격파를 하기 시작하였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Leipzig 전투에서 대對프랑스 동맹군에게 패배하고, 결국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퇴위를 선언하고 투항하였다. 처음에 연합군은 그의 고향 코르시카Corsica를 프랑스와 분리 독립시키고, 그를 코르시카의 영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거점으로 재차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이탈리아 왕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코르시카 근처 엘바섬으로 귀양을 보내게 된다.

■ 어수선한 유럽 상황
프랑스는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등극하지만, 프랑스를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약 20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1814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그러나 빈 회의는 강대국들의 이견이 컸던 탓에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무도회만 반복되고 있었다. 이렇듯 빈 회의가 결론이 나지 않고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제비꽃이 피기 전에 돌아오마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과 그의 지지 세력은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복귀, 나폴레옹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 가기 전 자신의 근위대와 작별하면서 “비올레타(제비꽃)가 만발할 때 돌아오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과연 그는 약 9개월 뒤 돌아왔고 프랑스에는 한창 연보라색의 제비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3월 1일 칸Cannes 근처에 상륙한 나폴레옹과 그의 지지 세력은 왕당파가 장악한 프로방스Provence 지역을 피해 알프스를 따라 파리로 진군하였다. 루이 18세가 보낸 토벌대 앞에 홀로 나서며, “병사들이여, 병사들의 황제가 여기 있다. 어서 쏴라!”라고 호통을 치자, 병사들이 대거 항복하였다. 나폴레옹은 3월 20일 파리로 귀환해 다시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과 프로이센은 즉시 11만 명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로 진격한다. 나폴레옹은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기로 마음먹고 1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합군이 결집한 벨기에로 진군하였다.

하늘이 나폴레옹을 버린 전투, 워털루Waterloo 전투


워털루 전투는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자 나폴레옹 천하를 끝낸 전투였다. 1815년 6월 16일 나폴레옹은 리니Ligny 전투에서 4만 5천 명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프로이센군은 지휘관 블뤼허Blücher 원수가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퇴각하였고, 나폴레옹은 영국군과 대치 중이던 자신의 병력과 합류하여 결전을 준비한다. 이때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완전히 퇴각한 것으로 판단했고, 신중하지만 융통성이 없는 성격의 그루시Grouchy 원수에게 별동대를 주어 프로이센군 추격을 명령한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동쪽으로 퇴각한 것이 아니라, 영국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 전투의 전개상황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

나폴레옹 지휘의 프랑스군은 72,000명이었고,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68,000명의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폴레옹을 지독히 싫어했던 블뤼허 원수가 지휘하는 45,000명의 프로이센군은 연합군을 돕기 위해 워털루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 프로이센군 저지를 위한 그루시 원수 지휘의 프랑스군 30,000여 명이 프로이센군을 추격 중이었다. 웰링턴은 반달형 언덕에 굳건한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곳은 가로로 긴 산등성이가 횡대로 포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웰링턴의 전술은 이랬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자. 반면 나폴레옹의 전술은 이랬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에 승리하자. 속전속결이 답이었다.

■ 프랑스군, 빗나간 노림수
영국군은 전장인 워털루에 있는 농가 두 곳을 요새화시켜 프랑스군을 맞이했다. 프랑스군은 웰링턴의 중앙 병력을 유인하기 위해 우구몽Hougoumont성을 집중 공격했다. 그런데 프랑스의 미쉘 네Michel Ney 원수는 병력을 찔끔찔끔 보내며 시간만 끌다 함락에 실패하고 뒤늦게 상대의 중앙에 포병 공격을 집중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원래 계획은 포병의 집중사격을 통해 적군 보병의 밀집대형을 무너트리고, 방어진이 흐트러지면 아군 보병을 투입해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을 잘 알고 있던 영국군 지휘관 웰링턴 공작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 방어만 하였다. 프랑스군의 포격이 시작되면 부대를 산등성이 뒤로 후퇴시켜 포격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했다. 참다못한 프랑스군 보병사단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지만 타격을 가하는 데 실패하였다.

■ 결정적 패착 1단계
오후 1시 우구몽 농가 점령에 실패하고 포격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나폴레옹은 휘하의 중앙군을 전진시켰고, 또 다른 농가인 라-에상트La-haye sante 농가에서 양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을 방어하던 영국군은 사단장이 전사하는 등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를 구원하기 위해 영국 기병대가 출전하였다. 위기에 빠진 영국군을 구원한 기병대는, 그 기세를 몰아 프랑스 포병대에 돌격했지만, 곧이어 나타난 프랑스 창기병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나폴레옹은 그루시를 불러들이기 위해 참모장 술트Soult 원수에게 전령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야전사령관 경험은 풍부했지만, 참모장은 처음 맡아본 술트 원수는 전령을 고작 1명만 보내는 결정적 실수로 패배를 자초하였다. 이 1명의 전령이 도중에 실종되어 결국 그루시의 별동대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베르티에Berthier라면 전령 20명은 보냈을 텐데!”라며 탄식했다.

■ 결정적 패착 2단계
프로이센군이 합류하기 전에 영국군을 격파해야 하는 나폴레옹은 점점 초조해졌다. 평소 지병인 치질을 치료하기 위해 아편을 처방받았던 나폴레옹은 아편 과다 복용으로 인해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미셀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긴 채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지휘를 맡게 된 미셀 네 원수는 과감하지만 신중하지는 못한 성격이었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해 산등성이 뒤로 숨는 영국군을 본 미셀 네 원수는 영국군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오후 1시경 직속기병에 근위기병까지 더해 2만 명에게 일제히 돌격을 지시하였다. 영국군은 13개의 방진方陣을 구성해 효과적으로 방어해 냈다. 이러한 프랑스 기병대의 무모한 돌격은 영국군의 방진에 막히게 되고 결국 프랑스군은 엄청난 수의 기병을 잃게 되었다.

■ 저승사자, 프로이센군
휴식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미셀 네 원수를 크게 질책하고 뒤늦게 기병대의 돌격을 제지했으나 저지에 실패하였다. 보병진에 대한 기병의 단독 돌격은 이미 한 세기 전에 효용을 잃은 전술로 본능적으로 방진의 총검을 두려워하는 말의 습성을 간과한 무모한 전술이었다. 때마침 프랑스 오른쪽 진영으로 검은색 군복을 입은 프로이센군이 전장에 도착하였다. 같은 시각,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떠났던 그루시의 3만 별동대는 프로이센군의 미끼 병력에 낚여 헤매고 있었다. 멀리서 포격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부하가 그루시에게 전장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하였지만, 융통성이 없었던 그루시 원수는 처음에 받았던 프로이센군 추격 명령만을 고집하였다.

■ 반전을 꾀하다, 황제 근위대 투입
가까스로 미셀 네는 기병과 보병의 연합 공격을 통해 영국군의 전위를 무너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우익 보병사단도 적진 침투에 성공하여 승기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제 결정타를 날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미셀 네 원수는 증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 전위가 도착한 우익으로 도몽D’Aumont 장군 휘하 4개 사단의 예비 병력을 급파한 상황이라 이제 나폴레옹에게 남은 병력은 ‘불패의 부대’ 황제 근위대가 유일하였다.

한편 프로이센군 추격을 위해 떠난 그루시가 배신을 했다는 소문이 돌아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꺾여 있었다.

■ 워털루 전투의 종장
오후 6시. 교착상태를 끝맺기 위해 냉철한 승부사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 근위대를 투입하여 승부수를 던졌다. 황제 근위대는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중앙으로 접근하였다. 산등성이에 숨어 있던 영국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능선을 확보하려는 순간, 영국군 근위사단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영국 기병대까지 가세한 총공격을 가하였다. 치명적인 맹공 앞에 결국 프랑스 황제 근위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후퇴 신호에 퇴각하고 만다. 그와 함께 프로이센 본대가 전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그루시의 별동대는 끝까지 워털루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프랑스, 전쟁, 선봉, 그리고 조제핀!


간신히 파리로 퇴각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20일 다시 퇴위되었다. 그리고 남대서양 남쪽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고립된 채 6년 동안 외롭게 살다가, 1821년 5월 5일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France, the Army, head of the Army, Josephine(프랑스, 전쟁, 선봉, 그리고 조제핀)”이었다. 그의 유지에 따라 나폴레옹의 시신은 1840년 파리로 돌아왔고, 앵발리드Invalides 기념관에 안치된 채 죽음의 문에 갇혀 침묵하고 있다.

[요약]

천재의 몰락은 드라마틱하였다. 나폴레옹 제국은 불과 10년 만에 몰락하였다. 전쟁의 신처럼 군림했던 나폴레옹은 가용 범위를 넘는 원정을 떠난 러시아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만하였고, 잘난 부하를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이런 총체적인 문제가 드러난 게 워털루 전투였다. 천재였던 그를 이길 사람은 그 자신뿐이었고, 그를 파멸시킬 사람도 그 자신뿐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비록 전쟁이 살육과 약탈 등 파괴의 모습이 있었지만, 이를 통해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수많은 명장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명장들의 전략 전술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국가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혜안을 얻기 위해 그들의 삶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살펴본 명장들에게는 크게 네 가지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기본기에 충실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병사들에게 강한 훈련으로 전투력과 정신력을 무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찰, 엄한 군율 등 군이 지녀야 할 기본에 충실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변칙적인 응용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둘째, 솔선수범하였습니다. 그들은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였습니다. 카이사르, 한니발, 알렉산더, 나폴레옹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전선에서는 특권을 버리고 병사들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며 연대감을 키워 갔습니다.

셋째, 특히 보급에 신경을 썼습니다. 배고픈 군대가 승리하는 법은 없습니다. 절대 강자 항우와의 싸움에서 결국 천하를 얻은 한고조 유방에게는 보급을 확실하게 책임져 주는 소하라는 명참모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천책상장天策上將(하늘이 내린 장수)이라는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이유나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정예 병력을 모두 잃은 이유는 한없이 길어진 보급선과 보급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 끊임없는 학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선대의 전략 전술을 배웠고, 심지어 상대의 장점도 아낌없이 배웠습니다.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를,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과 프리드리히 대제를 학습하였습니다. 스키피오나 웰링턴은 적의 장점을 습득하여 그대로 적을 격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장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리더의 소양을 알 수 있습니다. 훌룡한 리더는 훌륭한 리더를 낳는다 하였습니다. 모두 이들 명장처럼 훌륭한 리더가 되어 이곳 대한민국을 슬기롭게 이끌어 나갔으면 합니다.


대륙봉쇄령
1805년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영국에게 패한 프랑스로서는 사사건건 대립하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유럽대륙과 영국 간의 경제적 교류를 금지해야만 했다. 영국과 통상 및 통신 금지, 영국 선박의 대륙 내 항구 출입 금지와 위반 선박의 몰수 등이다. 하지만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대륙 여러 나라의 산업을 압도하였고, 미국과 같은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교역을 하지 못하는 대륙 국가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없었고, 대륙 내 프랑스에 대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한 대륙봉쇄령은 나폴레옹 몰락의 서막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머뭇거린 이유
속전속결을 원했던 나폴레옹은 머뭇거렸다. 이에는 2가지 설이 있다. 전날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땅이 진흙탕이 되어 버린 탓에 포를 땅에 고정시키기 위해 땅이 굳기를 기다렸다는 설과 지병이었던 극심한 위경련이 재발했다는 설이다. 아무튼 아침 8시에 시작되어야 할 전투가 오전 11시에 시작되었다. 결과론이지만 프랑스군의 공격 개시 시간 지연과 전투의 절반 이상을 미쉘 네Michel Ney 원수가 지휘한 게 패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전쟁 천재의 몰락
■ 전투 패인1- 자만심
워털루 전투는 전쟁 천재 나폴레옹의 완전한 몰락을 가져왔다. 천재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불만족,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욕구, 항상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천재들은 미지의 영역이 주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극복하는데, 이는 자신을 뛰어넘을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자만심으로 변질된다. 이런 양날의 검에 나폴레옹은 베인 것이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그동안 보여 준 확실한 전략이나 전술, 자신감을 보여 주지 못했다.

■ 전투 패인 2- 수족들이 없었다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불가능에 계속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능가할 타인의 등장에 쉽게 상처 입는 경향이 있다. 나폴레옹도 그랬다.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 전후부터 잘난 부하, 창의적인 부하를 미워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뛰어나고 용감한 장군들은 하나둘씩 전사해 버렸다. 나폴레옹 주변에는 예스맨이나 충직하지만 창의력이 부족한 부하들만 잔존하게 되었다. 이를 간파한 적들은 나폴레옹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부하들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마치 신처럼 지휘관들의 생각, 돌발 변수, 잠재적 능력까지 통제했다. 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는 모든 지휘관들이 엉뚱한 실수와 명령 불복종을 저지른다. 나이가 들어도 그의 판단력은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이전처럼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나폴레옹 대신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유능한 지휘관들이 부재하였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계획과 판단은 정확했지만, 손과 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은 것이다.



<참고문헌>
『나폴레옹』(프랭크 매클린 지음, 조행복 옮김, 교양인, 2016)
『나폴레옹 전쟁 근대 유럽의 탄생』 (그레고리 프리몬 반즈 등, 박근형 옮김, 플래닛미디어, 2009)
『파란만장 세계사 10대사건 전말기』(심현정, 느낌이 있는 책, 2017)
『나폴레옹 나의 야망은 컸다』(티에리 랑츠 지음, 이현숙 옮김, 시공사, 2001)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임용한, 교보문고, 2014)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미야자키 마사카츠, 오근영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8)
『전쟁연대기 2』(조셉 커민스, 김지원 옮김, 니케북스, 2013)
『역사를 바꾼 세계 영웅사』(스펜서 비슬리외 지음, 이동진 옮김, 해누리 , 2018)
『왕은 어떻게 무너지는가』(정유경, 시공사, 2017)
*전쟁사 분야에서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임용한 박사의 여러 동영상은 이번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