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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보는역사]

    근대사 | 대륙 침략의 서곡, 만주사변滿洲事變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내가 이제 일본을 도와 잠시 천하통일天下統一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에 역사를 하게 하리라.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어질 인仁 자라. 만일 어질 인 자까지 붙여 주면 천하는 다 저희들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어질 인 자는 너희들에게 붙여 주리니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어질 인 자는 뺏기지 말라. (도전 5편 177장)


    자작극으로 철로 파괴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무렵, 만주 봉천奉天(지금의 심양瀋陽) 북쪽 유타오후(柳條湖) 부근 남만철도의 한 선로가 폭파되었다. <관동군 조례 3조>에 따르면, 남만철도가 끊기면 일본 관동군이 출동할 수 있었다. 관동군은 즉각 ‘장학량張學良 군대의 소행’이라면서 동북군의 주둔지 북대영北大營을 공격했다. 9·18사변 즉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선로 폭파는 관동군의 자작극이었다.

    사건을 주동한 사람은 관동군 참모였던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征四郎) 대령과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령 같은 영관급 장교였다. 둘 다 센다이(仙台) 육군지방유년학교(13~15세)에서 어린 시절부터 군사 교육을 받으면서 전쟁 기계로 자란 사람들이다. 이 중가운데 “육군에는 이시하라 간지가 있다.”고 선전될 정도로 전략(음모)에 능했던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 점령 계획을 입안한 사람이다. 관동군은 선로가 폭파된 다음 날 봉천을 점령하고, 봉천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를 임시 시장으로 임명했다.

    사변 일주일 전쯤인 9월 12일, 장개석은 장학량을 만나 “일본이 도발할 경우 응전하지 말고 국제 연맹에 제소하는 외교적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장학량은 이를 받아들여 관동군이 북대영을 공격했을 때 휘하 군대에 무저항 철퇴를 명했다. 반면 일본의 침략에 격분한 중국 민중들은 전국 각지에서 항의 집회, 항의 파업, 대일 구매 거부 운동 등을 전개했다.

    ‘영토 확장 열풍’에 휩싸인 일본


    당시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입헌민정당 내각은 중국에 대한 무력행사가 국제 조약에 어긋나기 때문에 19일 즉시 ‘사태의 불확대 방침과 국지적 해결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내각의 지시를 비웃으면서 하얼빈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21일,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는 본국 정부의 승인 없이 1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봉천奉天으로 진공했다. 육군은 이 독단 월경의 사후 승인을 얻어 냈다. 내각은 관동군을 통제할 수 없었고 육군 수뇌부는 관동군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만주로의 무력 침략을 ‘자위권 발동’으로 강변했으며, 관동군은 전격적인 군사 작전으로 만주 전역을 점령해 갔다.

    만주사변이 기존 사건과 달랐던 것은 일본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유력 신문들은 20일 조간부터 과거의 논조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면서 관동군의 발표 내용을 앵무새처럼 보도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의 군사 행동을 마치 승전보 마냥처럼 전하고 침략자들을 영웅시했다.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망각하고 군부의 나팔수 노릇을 하며 대국민 선동에 열중한 것이다. 언론의 이런 태도에 발맞춰 사회 각 분야가 일제히 만주사변을 지지하고 나섰다. 9월 25일에는 일화실업협회, 28일에는 일본상공회의소 등이 만주사변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체채택했다. 일본 사회 전체에 ‘영토 확장 열풍’이 불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 결국 국제 연맹 탈퇴



    일본군은 이 모략 사건으로부터 약 4개월 만에 주요 도시, 철도 연선沿線지대 등을 군사 점령하고 1932년 1월 3일에는 발해 연안의 금주錦州를 함락시켰다. 이에 히로히토 천황은 1932년 1월 8일 관동군의 만주 침략을 ‘자위전쟁’이라면서 옹호하는 칙어勅語를 내렸다. 이에 고무된 관동군은 드디어 중국 본토와 만주를 가르는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욱일승천기를 꽂았다.

    이에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 행위를 호소했고, 국제 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해 상황을 조사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직전인 1932년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이용해 위성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1931~1945)을 수립했다. 일본이 만주를 직접 차지하면 부전조약不戰條約 위반이므로 중국인들 스스로 만주에 독립 국가를 세운 것이라고 강변하려는 책계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최대 관심은 세계 대공황에 대처하여 자국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 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국제 연맹의 조사단이 만주국을 부인하고 만주 지역을 열강이 공동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하자,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전체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전쟁으로 내달렸다. 만주사변은 실제로 중일전쟁의 시작이자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싸우는 태평양 전쟁의 준비 과정이었다. 중국에서는 매년 9월 18일을 국치일國恥日로 정해 기념식을 하고 있다.

    관동군關東軍
    일본이 대한제국 소유였던 간도間島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대신 남만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는 ‘그 철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군대 주둔권을 확보한 게 관동군의 시작이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양도받아 관동주關東州를 설치했다. 1919년 4월 일본이 관동주에 군사령부를 두면서 만주 주둔 일본군을 관동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초 1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1940년대에는 70~80만 대군으로 늘어났다.

    이시하라 간지의 ‘세계 최종 전쟁론’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9~1949)
    그는 육사 시절 법화종의 한 분파인 일련종日蓮宗 계열 국주회國柱會의 종말론에 심취하여 ‘세계 최종 전쟁론’을 고안했다. 이시하라 간지가 1931년 5월 작성한 《만몽문제에 관한 사견(滿蒙問題私見)》은 관동군 참모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 일련종의 종말론을 응용한 ‘세계 최종 전쟁론’이 담겨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가 소비에트 연방, 미국, 유럽, 동아시아라는 4개 국가연합으로 나뉘었다고 분석했다. 4개 연합 사이에 일종의 준결승이 벌어져 소비에트 연방과 유럽이 탈락하고 일본과 미국이 결승전을 벌인다는 것이 최종 전쟁론이었다. 즉 최종전의 결과, 일본 아니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일본의 모든 전략과 국력은 최종 전쟁에 맞춰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만주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행보는 그의 최종 전쟁론을 실천한 셈이었다.

    부전조약不戰條約
    1928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일본 등 15개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 미국 국무장관 켈로그가 주도했기에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이라고도 불린다. 이 조약의 1조는 국가의 정책 수단으로 전쟁 포기를 선언했고, 제2조는 일체의 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단 자위를 위한 전쟁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참고문헌>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13)
    『동아시아 근현대사』 (우에하라 카즈요시外 지음, 한철호·이규수 옮김, 옛오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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