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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혁명의 아들 유럽을 정복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해영 / 객원기자


    1789년. 잦은 전쟁으로 재정이 파산 직전에 이른 프랑스에서 불만이 폭발한 민중들에 의해 혁명이 발생한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유럽을 뒤덮은 혁명의 불길 속에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혼란과 격랑의 시대는 영웅을 요구했다. 마침내 유럽 대륙의 역사를 통째로 뒤흔들 20대의 포병 장교가 프랑스 툴롱Toulon 전투에서 그 이름을 드러냈다.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다.

    혁명의 아들


    ■군인이 되다
    1769년 8월 1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의 항구도시 아작시오Ajaccio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프랑스와 제노바 협약에 따라 전년도부터 프랑스 영지가 된 곳이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낮은 귀족 신분을 획득하였다. 당시에는 귀족이 아니면 사관학교에 갈 수 없었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1779년 브리엔의 사관학교, 1784년 파리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785년 라 페르 연대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군인으로서 그의 인생이 열린 것이다.

    ■고독하고 우울했던 나폴레옹, 프랑스를 선택하다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그는 파리 귀족 출신들이 대부분인 동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였다. 우울하고 고독했던 나폴레옹은 독서와 공부를 더 좋아하고 문학을 지망했다. 당시 그는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곤란해진 가정 문제를 위해 자주 집을 방문하였다. 코르시카에서 그는 코르시카 독립을 열망하는 파올리Paoli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파올리는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영국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이는 나폴레옹과 불화하는 발단이 된다. 나폴레옹은 당시 일어난 대혁명의 이념에 동참하기 위해 프랑스를 선택한다.

    나폴레옹의 등장


    1793년 9월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툴롱Toulon에서 혁명정부에 대항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혁명군 진영은 무능한 지휘관들이 대부분이어서 효과적으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때 24살의 나폴레옹은 포병 장교로 전투를 지휘하였다. 나폴레옹은 효과적인 사격이 가능한 위치에 포대를 구축한 뒤 왕당파와 영국군을 몰아내고 툴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툴롱 포위전(Siege of Toulon)은 장차 유럽 대륙 역사를 통째로 뒤흔들게 되는 나폴레옹의 역사 속 첫 등장이었다. 그 공로로 그는 약관의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과 결혼


    공화력(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Thermidor(열월熱月: 공화력의 제11월로 7월 19일~8월 17일) 9일인 1794년 7월 27일. 프랑스 혁명 이후 지속된 공포정치로 민심을 잃은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결국 반대파에 의해 몰락, 처형당하게 되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났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5명의 총재가 국정을 운영하는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다. 앞서 툴롱 포위전에서 공을 세워 진급하였지만, 로베스피에르 동생과의 친분으로 인해 잠시 교도소에 갇혔던 나폴레옹은 곧 석방되어 1795년 10월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과감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육군 소장이 된 나폴레옹은 국내군 사령관이라는 요직에 오르게 된다. 툴롱 공략 이후부터 알고 지낸 총재 정부의 수장 바라스Barras는 나폴레옹 군직 경력의 후원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의 ‘연인’이란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듬해 1796년 조제핀과 결혼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훗날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분별없는 소비에서부터 부부 사이의 부정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27살의 나폴레옹은 1796년 이탈리아에 주둔한 대對프랑스 혁명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진한다. 이윽고 4만의 병력을 이끈 나폴레옹은 북이탈리아에 있는 사르데냐 왕국을 굴복시켰다. 이후 밀라노를 점령한 뒤 오스트리아군의 거점인 만토바를 포위하자 곧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이 출진하게 된다. 이때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과감하게 만토바의 포위를 풀고 여러 갈래로 이동 중인 오스트리아의 지원군을 각개 격파해 버린다.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전투였다.

    ■빠른 기동력의 프랑스군
    하지만 프랑스군도 피해를 입어 오스트리아군의 수적 우위는 여전하였다. 이 불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오히려 과감하게 적진으로 침투, 오스트리아군의 보급 거점이 있는 곳을 습격하였다. 이 시기부터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다리 힘으로 전쟁에서 이긴다. 그의 사단들 중 몇몇은 매일 적군들보다 10~15킬로미터를 더 많이 주파하였다. 이리하여 신속히 기동한 나폴레옹 앞에 아르콜레Arcole 다리를 지키는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났고, 곧 전투가 발생한다.

    ■아르콜레 다리 전투
    다리를 건너려는 프랑스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오스트리아군이 치열하게 싸움을 펼쳤고, 나폴레옹은 직접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에 앞서 나폴레옹의 신출귀몰한 기동에 몇 번이나 혼쭐이 났던 오스트리아 장군들은 사기가 떨어져 패퇴해 버렸고, 결국 나폴레옹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렇듯 승리를 거듭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오스트리아는 결국 1797년 10월 나폴레옹과 조약을 맺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남과 동시에 프랑스를 압박하려고 맺어진 주변 국가들의 1차 대對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어 버렸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 전쟁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북이탈리아 지역을 획득해 단숨에 프랑스의 영웅이 된 나폴레옹에게 대적하는 세력은 이제 영국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해군력이 강한 영국을 직접 침공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 영국과 그 식민지인 인도를 갈라놓기 위해 중간에 위치한 이집트를 정복하기로 한다. 때마침 최고 인기인이 된 나폴레옹의 존재가 부담스러운 프랑스의 총재 정부가 이를 재빨리 승인하면서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시작된다. 영국 해군을 피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곧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는 카이로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나폴레옹 앞에 오스만Osman 제국 휘하의 맘루크군이 나타났다. 최강의 기병대를 자랑하는 맘루크는 프랑스군의 방진을 뚫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은 손쉽게 끝났지만, 앞서 나폴레옹을 뒤쫓던 영국 해군은 넬슨 제독의 지휘 아래 이집트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해군을 격파해 버렸다. 이것이 ‘나일Nile해전’이다. 이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어 버렸고,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없는 틈을 타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가 재차 동맹을 맺게 된다. 바로 2차 대對프랑스 동맹이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와 통령 정부


    이렇듯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자 나폴레옹은 북진을 멈추고 이집트를 몰래 탈출, 무사히 프랑스로 귀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1799년 11월 귀국한 나폴레옹은 5명의 총재 중 한 명인 시에예스Sieyès와 결탁하였다. 그리고 연이은 실정과 내부의 권력 투쟁,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총재 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단행한다. 이것이 바로 안개의 달인 브뤼메르Brumaire 18일의 쿠데타였다. 이윽고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를 해산하고 3명의 통령이 프랑스를 통치하는 #통령 정부#를 수립, 자신은 제1통령이 되었다. 불과 30살의 나이에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1802년 영국과 아미앵Amiens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1794년 이후 유럽에서 얻은 땅을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내 지지 기반을 굳건히 다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하다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제정 선포일인 1804년 5월 18일까지 프랑스를 이끌어 가는 체제가 되었다. 이 4년 동안 나폴레옹은 최고 권좌에 오르기 위해 계속해서 국내외의 적들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 했다.

    ■알프스를 넘다
    1800년 5월 18일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기 위해서 말이 아닌 수노새의 등에 올라타고 그랑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협로를 통해 알프스산맥을 넘어갔다.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담긴 다비드의 그림 배경이 되는 사건이었다. 1796년 첫 번째 원정보다 그 기간은 짧았지만 어려움은 더 컸다. 마렝고Marengo 전투에서 모든 것을 잃을 뻔했지만, 드제Desaix 사단이 전장에 도착해 최후의 순간 구출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퇴각시키지는 못하였지만, 라인강 원정군 총사령관 모로Moreau가 독일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국외의 주요한 위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질 수 있었다.

    ■내부의 적을 제압하다
    국내적으로 나폴레옹은 왕당파와 투쟁을 벌여야 했다. 암살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암살을 도모한 자코뱅파 주모자 네 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나폴레옹은 정적들을 대사직이나 부사령관 지위를 주어 제거하였고, 의회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세력에는 숙청 작업을 완수하고, 공공기관에서 대다수의 반정부 공화파를 제거하였다. 이후 국민투표로 종신 통령이 되었고, 결국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온 국민이 제정을 수락한다는 점을 확인받았다.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현대 프랑스의 창건자, 나폴레옹 1세


    1799년 11월 이후 나폴레옹은 정치적 파열, 경제적 탈진, 사회적 분열, 정신적 피폐에 처한 프랑스를 물려받았다. 그는 모든 걸 재건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려 15년 후 프랑스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워털루Waterloo에서 패한 후 권좌에서 물러나긴 하였지만, 국가 조직은 잘 정비되고 있었다. 실용주의자인 나폴레옹은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일을 밀고 나아갔다. 그가 국내에서 이룬 업적은 현재 프랑스 사회의 틀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제도들과 조직 원리들의 바탕이 되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다
    나폴레옹 통치 시기 프랑스는 몇 번의 풍작과 무역의 재개로 경제 상황의 위기를 극복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승리로 인해 국외적으로 프랑스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어 황제가 수도에서 점점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빈번해져도 그의 대신들과 행정부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1807년 이후 나폴레옹이 왕권을 확고히 하고 반대파들을 침묵시킨 후 절대 군주의 행동을 취하자, 체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정치 행정 제도의 개편
    나폴레옹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택하였다. 권한을 집중시키고 행정부와 정치 사회 제도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프랑스 재건 사업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프랑스 은행, 증권거래소, 정부 주관 박람회를 통한 공업 제품의 개발 촉진 등의 경제 및 금융기관 혁신이 있었다. 그리고 간접세 우선주의의 세제 개혁, 루브르 박물관과 프랑스 학사원 등의 문화 제도, 중앙 및 지방 분권적 행정 조직과 사법 조직 개혁, 공교육 조직, 공공 토목 사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혁명 이념을 담은 법전 편찬
    나폴레옹은 대혁명 과정에서 프랑스인들 사이에 이기주의와 동족상잔을 부추기는 경향이 나타나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고 생각했다. ‘모래알’이 되어 버린 국민들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는 사회집단을 조직화하는 주요한 기구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저명한 법학자들에게 민법전부터 시작하여 법전을 편찬하는 일을 맡겼다. 여기에 자유와 평등과 같은 혁명 정신을 담게 하였다. 그가 만든 법전에는 소유권 확립과 계약 자유의 원칙이 명시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규범이 법적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프랑스 봉건제도는 무너져 내렸다.

    ■나폴레옹 통치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
    국민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은 되찾은 프랑스의 번영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폴레옹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 소유권을 안정시켜 주었다는 것과 가톨릭을 마음껏 신앙하게 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훨씬 더 개방된 교육제도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유럽 최강의 나폴레옹 군대의 비밀


    그렇다면 나폴레옹 군대는 왜 유럽 최강의 육군이 되었을까? 이에는 4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들 수 있는 요인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징병제로, 군인의 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뛰어난 포병 전술과 신속한 기동이 가능한 병사들의 자질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나폴레옹 자신이 가진 천재성을 부가할 수 있다.

    ■국민 총동원 체제의 징병제
    나폴레옹 이전 전쟁은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효과적으로 싸우려고 했기 때문에 일반 민중은 직접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798년 이후 시행된 징병제를 통하여 수많은 청년들을 동원한 나폴레옹은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고 민중들의 생활을 지킨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전쟁에 임했다.

    ■나폴레옹 포병 전술
    나폴레옹은 수학에 뛰어난 유능한 포병 장교였다. 그는 당시 사용하던 그리보발Gribeauval 대포 전술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는 포병대장 그리보발이 개발한 전술로 탄환에 탄약을 대충 채워 넣는 종래의 방법을 개선해 탄환에 일정한 비율의 탄약을 손쉽게 집어넣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다. 또 새로 고안한 포차에 바퀴와 부품을 교체해서 쓸 수 있도록 했고, 쇠로 만든 조준 나사를 사용해 포신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신속한 기동을 가능하게 한 프랑스 군인들의 자질
    프랑스 군인의 대부분은 농민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늦게까지 농사짓는 습성이 있어서 야간 행군에도 익숙했다. 프랑스군의 강점은 그들의 다리 힘에서 나왔다. 나폴레옹은 끝없는 강행군, 불편한 야영 생활, 불결한 위생 등을 해결하며 군대의 기초적인 요구들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병사들의 민감한 심정을 다룰 줄 알았다. 그는 병사들이 자신을 그들과 같은 한 사람, 혹은 ‘꼬마 하사관’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황제가 나폴레옹이었다.

    ■천재적인 전략가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새로운 전략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연구와 성찰만으로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명장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군은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대군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한꺼번에 승패를 가리는 기동전이라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전투는 최후의 수단이고 포위가 주된 공략 방법이었던 당시의 관행을 버렸다. 나폴레옹은 가장 신속하게 결전을 모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전술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공격을 하거나 공격을 당하는 시점에서 항상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도록 하였다. 나폴레옹은 종종 긴 명상 끝에 순식간에 그날의 전술을 결정하기도 하였는데 상상 속에서 모의 전쟁을 치르며 승리를 고안했다. 1805년부터 1809년까지 그 어떤 장군도 나폴레옹의 전술에 맞서지 못했다. 이런 프랑스군의 장점이 극대화되었던 전투가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거둔 승리였다.

    영원한 맞수, 영국과의 전쟁


    나폴레옹 전쟁은 백 년이 넘게 경쟁해 온 영국과 프랑스만의 독특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양국은 이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중대한 경제와 외교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이 대륙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무역에서도 똑같이 막아 버릴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영국과의 경쟁에서 프랑스는 인도와 캐나다 그리고 잃어버린 식민지들에 대한 복수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1803년 5월 20일 재개된 전쟁은 11년 동안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은 ‘런던에 평화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결심하고 영국에 상륙할 준비를 하였다. 대군이 불로뉴Boulogne에 집결하였다. 단 하루만 바닷길을 열면, 프랑스 대군을 상륙시켜 영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위기의 나폴레옹
    하지만 유럽 한가운데에서 그에 대한 원망이 높아져 갔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프랑스 동맹국을 침공하였다. 나폴레옹은 후방에 닥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 상륙 계획을 다시 정비하였다. 1805년 8월 25일 나폴레옹의 대군은 프랑스 북서부 진영을 떠나 유럽의 중앙으로 진군하였다. 나폴레옹 군대는 적들이 깜짝 놀랄 만큼 강행군을 하여 대륙의 절반을 가로질러 갔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전에 오스트리아 군대는 울름Ulm에서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육전陸戰에서는 압도적 우위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Trafalgar곶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의 넬슨 함대에 의해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나폴레옹은 초조해졌다. 나폴레옹은 오직 군사적 영광에 의해 황제로 즉위한 인물이다. 단 한 번의 패전으로도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승리 아우스터리츠 전투


    드디어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기념일에 프랑스 사관학교 전술 교본의 본보기가 되는 #세 황제의 전투(三帝會戰)#가 아우스터리츠(현 체코 브르노 부근)에서 벌어진다. 가장 완벽한 나폴레옹 전술의 승리로 일컬어지는 전투이다.

    ■전투 배경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유럽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전 유럽은 국가의 방어를 위해 혹은 나폴레옹이 전파하는 자유주의 파도를 막기 위해 동맹을 결성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이 주도하는 3차 대對프랑스 동맹은 그동안의 대프랑스 동맹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개별 병력만 해도 프랑스보다 많았다. 이미 해전에서는 영국이 승리했다. 육전에서만 이기면 나폴레옹은 몰락이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언제나 기동과 타격에 의한 속전속결이었다. 적이 결집하기 전에 각개 격파를 시도하였다. 러시아군의 수장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 대공이다. 그는 실전을 풀어 가는 능력은 둔했지만, 러시아군 장군 중 나름 뛰어난 판단력과 전술적 혜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동맹군이 모두 가세할 때까지 버티기로 하였다.

    ■도발
    초조한 나폴레옹은 적을 도발하기 위해 평원으로 이동해 진을 펼쳤다. 패배하면 달아날 곳이 없는 자신을 완전히 사지에 몰아넣었다. 빈의 북쪽에 위치한 아우스터리츠 평원이었다. 이곳에는 해발 12미터의 프라첸Pratzen 고지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유일한 고지이며 중앙의 강력한 진지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하지만 이는 미끼였다. 노련한 쿠투조프는 더 후퇴하여 증원을 기다리려고 했으나, 혈기 넘치는 28세 젊은이였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 1세는 공격을 명령하였다. 쿠투조프는 해임되다시피 하였고, 작전권은 바이로터 백작에게 넘어갔다.

    ■전투 개시
    프라첸 고지가 있어 지형상 방어에 유리한 우익에 최소한의 병력을 배치하여 적을 유인하자, 압도적인 병력의 러시아군은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쪽에 있던 프랑스 제26경보병 연대와 코르시카 이탈리아 저격병 연대는 정예 병력이었다. 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동맹군은 점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도 프랑스군은 약화되지 않았다. 빈에 주둔하고 있던 다부Davout 원수의 제2보병사단과 용기병龍騎兵(드라군drgoon: 짧은 소총으로 무장한 경기병. 총의 개머리에 용 장식을 하는 데서 유래) 5천 명이 110킬로미터를 48시간 만에 주파하는 엄청난 속도로 증원되어 있었다. 비록 병력은 열세였지만, 공격해 온 러시아군을 붙잡아 놓는 데는 성공했다.

    ■아우스터리츠의 태양
    나폴레옹은 비장의 카드를 뽑았다. 생틸레르Saint-Hilaire 사단과 반담Van Damme 사단을 프라첸 언덕과 그 북쪽으로 출격시켰다. 이 두 부대는 나폴레옹 부대 중 최정예였다. 이들은 프라첸 고지를 향해 신속하게 전진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침마다 언덕 주변으로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는데, 얼마 후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평원을 밝게 비추었다. 유명한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었다. 프라첸을 향해 정연하게 걸어오는 프랑스군의 군복과 총검이 태양을 받아 찬연하게 빛났다. 전선 한복판에 유일하게 솟아 있는 고지를 프랑스군이 점령하면서 동맹군은 완벽하게 좌우로 절단되었다. 러시아는 급히 증원부대를 찾았지만, 가까이 있는 부대는 겨우 두세 개 대대뿐, 그나마 언덕이 좁아 병력을 한 번에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

    ■최고의 부대만이 최고의 임무를 감당할 자격이 있다
    양군의 운명을 건 혈전이 작은 언덕에서 벌어졌다. 양군 다 이 전투가 승패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사적이었고, 결국 강한 쪽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어이없게도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났다. 나폴레옹의 계산에 없는 부대였다. 고지 위의 생틸레르 사단은 격렬한 전투를 마친 뒤라 탈진한 상태였고, 탄약 주머니도 다 비어 있었다. 그런데 생틸레르 병사들은 총에 착검한 뒤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돌진했다. 신병 부대였던 오스트리아군은 투지 가득한 생틸레르에게 압도되어 겁에 질린 채 도망치고 말았다. 이게 나폴레옹이 생틸레르에게 프라첸을 맡긴 이유다. 아마 다른 부대였다면 그들은 후퇴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투는 최고의 부대원만이 참여할 자격이 있다. 그들만이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돌발 상황과 위기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정신과 투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황제는 최고 부대인 황실 근위대를 투입했지만 반담의 병사들은 잘 대응하였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근위기병을 출동시켜 대적하게 했다.

    ■완벽한 승리
    거의 정면 대결을 펼친 프랑스군 좌익에서도 프랑스군이 진격하기 시작하였고,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러시아군은 동강이 났고, 각 측면으로 프랑스군이 포위를 시작했다. 러시아군 대부분은 탈출하지 못했다. 전투 직후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병사들에게 훈시하였다고 한다.

    “병사들이여, 짐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의 전장에 있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의 민중들은 ‘보라, 여기 진정한 용사가 있다’라고 말하리라.”

    오스트리아는 20일 후 프레스부르크Pressburg 조약을 맺고 엄청난 이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써 3차 대프랑스 동맹이 와해됐고, 나폴레옹은 인생 최절정에 서 있었다.

    [요약]


    이번 나폴레옹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담았다. 구체제의 모순으로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하지만 혁명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이런 열망에 부응한 나폴레옹은 군사에 대한 천재적인 자질로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군대는 기동력이 뛰어났고,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자신감으로 유럽 전역을 발아래에 무릎 꿇렸다.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처럼 이때 나폴레옹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지롱드파와 자코뱅파
    지롱드파는 입법회의에서 보수적인 공화정치를 주장한 온건파 정당이고, 자코뱅파는 급진적인 공화정치를 주장한 급진파 정당이다. 회의장에서 지롱드파가 우측에, 자코뱅파가 좌측에 자리했다고 해서 좌파, 우파의 기원이 되었다. 즉, 현 체제를 고수하면서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우파와 현 체제를 타파하고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프랑스 공화력
    프랑스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부가 그동안 보편적으로 써 왔던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을 폐지하고 새로 도입한 역법체계로, 1년 12달 365일은 같지만 한 달 날수를 30일로 통일하고 나머지 날은 축제일로 삼았다. 기존의 달 명칭도 더운 달은 테르미도르Thermidor, 안개 달은 브뤼메르Brumaire 하는 식으로 계절의 변화에 맞게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파리 가까운 지방의 계절을 반영한 탓에 먼 지방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폐지해 버렸다.


    <참고문헌>
    『나폴레옹』(프랭크 매클린 지음, 조행복 옮김, 교양인, 2016)
    『나폴레옹 전쟁 근대 유럽의 탄생』 (그레고리 프리몬 반즈 등, 박근형 옮김, 플래닛미디어, 2009)
    『파란만장 세계사 10대사건 전말기』(심현정, 느낌이 있는 책, 2017)
    『나폴레옹 나의 야망은 컸다』(티에리 랑츠 지음, 이현숙 옮김, 시공사, 2001)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임용한, 교보문고, 2014)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미야자키 마사카츠, 오근영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8)
    『전쟁연대기 2』(조셉 커민스, 김지원 옮김, 니케북스, 2013)
    『역사를 바꾼 세계 영웅사』(스펜서 비슬리외 지음, 이동진 옮김, 해누리 , 2018)
    『왕은 어떻게 무너지는가』(정유경, 시공사, 2017) 카이사르의 리더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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