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저자와의 인터뷰_일본 속의 신라사

[STB하이라이트]

1회 한일 고대사


사회자 김철수 : 중원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출연자 홍윤기 : 왕인학회장 국제뇌과학대학원 석좌교수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처럼 일본은 우리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감정의 골이 깊은 나라입니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고 있는 한일 고대사의 문제는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채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그동안 한일 고대사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활동과 저작물들을 내주셨는데요 이번에 상생출판사에서 『일본 속의 신라사』라는 책을 발간하시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교수님께서 이런 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본 시가를 연구


A 홍윤기 교수: 1980년대에 일본에 들어가서 일본의 시가詩歌를 연구하다 보니까 일본 시가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었습니다. 왕인에 의한 백제의 시가가 일본 시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현재 백제 가요 3편이 전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 정읍사井邑詞(백제시대 때 지어진 작자미상의 가요)에 보면 일본과 같은 율조律調의 시가가 나오게 됩니다. 일본 시가의 뿌리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것이기에 일본 고대사를 공부하면 더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고대사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사실 우리가 고대 일본에 미친 영향을 얘기할 때는 백제를 많이 얘기하는데요 백제문화가 일본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는지요?

일본 왕실이 백제계열이라 신라에 반감


A 홍윤기 교수: 일본 왕실이 백제 계열입니다. 이 부분은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또 일본의 서해안 지역을 답사해보니 신라인의 뿌리가 아주 깊었습니다. 혈청학적으로 일본의 여러 학자들도 밝혀냈습니다만 A형 혈액형은 우리나라 경북지방 혈액형의 33.4% 정도입니다. 그런데 일본 서해안 지역 일대 주민들의 혈액형의 비율이 아주 비슷했습니다.

일본 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보면 일본이 신라에 상당히 시달렸습니다. 일본 왕실이 백제 계열이라 그런지 신라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특히 신라의 명칭들이 14가지 정도가 됩니다. 신라인들이 일본 서해안 일대에서 그 지역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 서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니카타현’이란 곳이 있는데요, ‘신라왕묘’의 묘비가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신라왕이 그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이는데요 앞으로 한일 간에 일본에 진출한 신라의 발자취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될 것이라 봅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일본 고대사에 대해 말씀하실 때 백제와의 관계를 많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신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일본 서해안 신라유적 발견


A 홍윤기 교수: 제가 백제중심 지역만 답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 서해안 지역을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쓰루가만’이라는 지역에 가보니 신라왕자 ‘천일창’을 모시는 큰 신궁이 있더라고요. 또 ‘신라 신사’라고 하는 사당도 있었고요. 그래서 백제만 연구할 게 아니라 신라도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교수님. 백제가 일본열도에 넘어간 시기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요 신라의 경우는 언제일까요?

야요이시대 이주


A 홍윤기 교수: 일본 역사에서 말하는 ‘야오이 시대’ 즉 지금부터 약 1,800년 전 신라인들이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이주했던 겁니다. 일본 서해안 지역에 가보면 신라의 명칭들이 나오는데요 신라는 목조 건축술과 선박 건조술이 뛰어났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저도 일전에 이즈모 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요 해류가 동해안에서 일본열도 ‘이즈모 지역’ 쪽으로 흐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쪽에는 상당히 많은 우리 고대신라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박혁거세 알을 모심


A 홍윤기 교수: 신라가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농경문화와 대장간 문화를 전파한 것이죠. 일본 서해안 지역을 가면 ‘둥근 자갈돌’을 모신 사당들이 많습니다. ‘미호신사’라는 곳에 가보면 큰 바닷돌을 신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주를 소개한 안내자분이 이 바닷돌을 보고 ‘신라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 분인데 그분을 조상으로 모신다는 뜻으로 이 알 모양의 돌을 신주로 모십니다’라고 설명을 해줬습니다. 신라의 알 문화가 일본 서해안 일대에는 도처에 많이 있는데요 박혁거세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긍지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일본 고대사는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사실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었는데요 660년 백제가 멸망을 했을 때 과연 신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착하는 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홍윤기 교수: 네 그렇습니다. 백제인들이 일본 왕실을 지배했던 것은 일본의 여러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일본인들은 신라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에서 온 이주민들은 오사카라든지 큐슈지역으로 진출은 힘들었고 일본 서해안 일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Q 김철수 교수: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일본열도에 이주했을 때 거주했던 지역에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라는 A형, 백제는 〇형


A 홍윤기 교수: 네 차이가 있습니다. 혈액형으로 나타나는데요 큐슈, 오사카와 같은 관서지역 혈액형은 주로 O형 혈액형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호남지역과 일본 관서지역의 O형 혈액형이 비슷한 비율입니다. 일본학자들이 혈청학적으로 연구한 혈액형 분포를 보면 신라와 백제의 대치관계가 혈액형으로도 나타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Q 김철수 교수: 백제와 신라가 일본으로 이주했는데요 문화적으로도 일본 내에서 구분이 될까요?

A 홍윤기 교수: 문화적으로는 크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백제나 신라 모두 결국 한반도에서 이주한 것이고 단군신앙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1640년대 이후 일본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신라인들이 배척을 당합니다.

Q 김철수 교수: 신라와 일본의 이야기를 하려면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에서의 ‘스사노오노미코토’란 일본 건국신이 소시모리에 왔다가 이즈모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와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소시모리는 춘천 우두산(춘천 왕도 가능성)


A 홍윤기 교수: 예전에 25년 전에 춘천에 우두산牛頭山이 있는데요 일본의 건국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 ‘소시모리’인데 이 ‘소시모리’가 발음으로 ‘소의 머리’이고 소시모리는 춘천의 ‘우두산’ 지역이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일본의 건국신이 신라신이 아니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 춘천 우두산이면 신라땅이지 않습니까.

일본의 어느 학자가 ‘소시모리는 소의 머리로서 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춘천 우두산에 내려왔다면 춘천이 고대에는 왕도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Q 김철수 교수: 저도 예전에 ‘소시모리’에 대해서 논문을 하나 발표한 적이 있는데요 신라문화는 어떤 측면에서는 종교적인 부분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고요 그래서 소시모리를 저는 ‘소도蘇塗’로 봤습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소도신앙’으로 봤고요 그 천신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일본학자들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소시모리가 어디인지 찾는 일도 있었죠. 결국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일본 열도 속에 있는 한반도의 흔적들을 지워나가는데요 교수님께서 그 현장들을 답사하시면서 살펴보신 감회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A 홍윤기 교수: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반한(反韓)으로 역사 지우기를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서해안 지역에서 신라의 명칭을 가진 지명이 메이지유신 이후로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 지역 향토사학자들로부터 듣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면서 역사자료를 찾아내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신라 연구에 많이 참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