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조선의 임금이 가장 사랑한 궁궐 창덕궁昌德宮과 후원後苑

[한문화]
이해영 / 객원기자

조선 왕조의 역사를 담고 있는 창덕궁


이번에는 창덕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린 산중 궁궐 창덕궁은 가장 많은 조선의 임금들이 생활했으며 사랑했던 궁궐입니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10년 늦은 태종 5년(1405년)에 지어졌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고종 5년(1868년)에 재건될 때까지, 조선 전기 197년과 근대 28년을 합친 225년의 역사를 지닐 뿐입니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비록 임진왜란 때 잠시 불탔지만, 바로 복원되어 국권이 피탈되기 전까지 무려 505년 동안 궁궐의 기능을 수행한 사실상 조선의 정궁正宮입니다.

왜 법궁인 경복궁을 복구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 후 조정은 서둘러 궁궐을 복구하였다. 그런데 경복궁은 복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재정적인 이유라면 다른 궁궐도 복구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창덕궁뿐 아니라 인경궁 등 여러 궁궐 조성의 역사가 있다. 주된 이유는 경복궁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기피한 이유는 태종 때부터 나타난다. 태종 이방원은 알다시피 1398년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라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을 일으킨다. 수많은 인명을 살해하고, 부왕의 미움을 사면서 왕위에 오른 태종에게 경복궁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원과 한이 서린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세운 게 창덕궁이다. 또한 이곳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낸 계유정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여, 이후 왕들도 피로 얼룩진 경복궁을 기피하였다. 그리하여 특별한 국가 행사는 경복궁에서 치르고, 일상 업무는 창덕궁에서 보았다.

또한 경복궁은 북쪽의 백악산白岳山이나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에 노출되어 멀리서 내려다볼 수 있었기에, 여성들이 은밀하게 거처하는 공간으로 부적합했다. 이에 반해 창덕궁과 창경궁은 깊은 숲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후원에는 풍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창덕궁의 특징


창덕궁은 궁궐 배치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검소하게 정성을 다해 지은 궁궐로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으며, 자연미를 최대한 살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덕궁은 평지가 적은 완만한 산비탈에 세워, 궁궐 배치가 경복궁처럼 남북을 축으로 정연하지 않고, 동서로 뻗어간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덕궁은 기하학적으로 궁궐의 배치를 통제하는 인위적인 축이 없습니다. 지형이 생긴 모습 그대로 건물이 놓여 있으면서도, 건물 사이의 관계는 엄정한 질서와 균형을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유기적으로 잘 짜인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덕궁은 유교적 질서에 따른 궁궐 배치 원칙과 자연과 어울림을 함께 존중한 궁궐입니다.

창덕궁을 비롯한 우리 궁궐은 결코 사치하거나 웅장하지 않습니다. 여러 궁궐 건축의 상량문에서 검소하고 질박하게 지었다라는 표현을 자주 대할 수 있습니다. 정성을 다해 건물을 지었고, 우선 점을 쳐 길흉을 정하고 그다음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인 천신지기天神地祇에게 건물을 짓는다는 점을 고했습니다(「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기사 등 참조).

궁궐을 호화롭게 짓지 않은 이유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쓸데없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려는 애민愛民, 위민爲民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궁중에 일반 서민의 집과 비슷한 기와집과 초가가 많은 이유도 백성과 가까이하려는 임금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창덕궁의 건물들은 주변 지형과 어울리도록 설계되어 매우 정겹고 아름답습니다. 특히 작은 정자와 나무, 숲, 개울, 바위들이 한데 어우러진 후원의 아름다움은 창덕궁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는 중국의 자금성이나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미美입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인공을 최대한 줄이면서 생활공간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위압은 주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극히 인간적이고 안락한 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궁궐 건축의 기본 배치 원칙으로 본 창덕궁
당시 궁궐은 몇 가지 기본 배치 원칙이 있다. 창덕궁도 대체로 이 원칙을 따르면서도 유연하게 전각들을 짜 놓았다. 먼저 배산임수背山臨水는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다는 이상적인 집터의 조건으로, 창덕궁은 백악의 매봉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금천禁川을 흐르게 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은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둔다’는 의미로, 창덕궁 앞부분에는 공적 공간으로 으뜸 공간인 인정전仁政殿, 비싼 청기와가 얹어져 있는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宣政殿,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으로 구성된 궐내각사闕內各司 등이 자리하고, 뒷부분은 임금을 비롯한 왕실 가족의 사적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또 흔히 임금의 궁궐을 구중궁궐이라 표현하는데, 구중궁궐九重宮闕은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궁궐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임금의 거처는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싸서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하였다.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과 희정당熙政堂 그리고 낙선재樂善齋 등을 보면 건물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파묻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임금의 뒤를 이을 왕세자의 거처를 동궁東宮이라 하고, 왕실의 어른인 대비의 거처를 동조東朝라고 한다. 예로부터 이들의 처소를 궁궐 동쪽에 두는 것을 법도로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세자의 공간인 중희당重熙堂과 연영합延英閤과 대비의 처소인 수강재壽康齋를 궁궐의 동쪽에 배치했다.

해와 달이 축복하고 봉황이 화려한 날개를 펼친 인정전仁政殿


창덕궁 정문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입니다. ‘돈화’는 『중용中庸』 9장에 나오는 대덕돈화大德敦化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만물의 조화가 쉬지 않고 유행하여 서로 돈독하게 동화한다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화군 원년인 1609년에 재건되어 현재까지 내려왔습니다. 돈화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궁궐 안을 관통한 시냇물이 대궐의 바깥 담장을 휘감으며 흘러갑니다. 이 물은 백성들이 항상 이용하는 청계천과 합쳐서 임금과 백성이 둘이 아니고 결국 하나 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돈화문 앞에는 도로로 꽉 막혀 있고 시냇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옛 분위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인정문 앞 사다리꼴 마당의 의미
돈화문을 지나 말라 버린 금천을 지나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면 마당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북쪽 인정문을 통해 으뜸 공간인 인정전 마당으로 이어지고, 동쪽의 숙장문肅章門을 통해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정형에서 벗어난 사다리꼴 모양입니다. 궁궐 건축은 어느 나라든 사각형이나 원형 같은 정돈된 질서를 의미하는 기하학적 모양에 의존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측량을 잘못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숙장문 쪽 바로 뒤에 종묘에 이르는 산의 맥이 자리 잡고 있어 더는 넓힐 수가 없었습니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신위神位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기에 종묘를 받치고 있는 산의 뿌리를 훼손하면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넓게 쓰는 방법을 고안한 게 지금의 사다리꼴 마당입니다. 자연과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정형화된 틀에 얽매이지 않은 유연한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식의 공간,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은 인정전입니다. 조선 궁궐의 정전正殿은 덕수궁 중화전을 제외하고 모두 정政 자가 들어 있습니다. 정은 바를 정正과 칠 복攴이 합쳐서 된 글자로 매를 쳐서 바르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가 바르지 못하고서는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바르지 못하면 백성을 바르게 할 수 없고, 스승이 바르지 못하면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정政’은 끊임없는 정正의 실천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치治’는 타인의 인격 완성을 돕고 이익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것은 바로 인의 실천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정신입니다. 힘이나 법의 구속력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패도정치와는 다르죠. 조선의 임금은 하늘의 도에 따른 인륜 위에 교화를 통해 스스로 따르게 하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써야 했습니다. 인정전에는 그런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정전 용마루 오얏꽃 문양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재건되고, 순조 때 불탔다가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지붕 용마루에 오얏꽃(李花)문양을 넣었습니다. 다섯 개 꽃잎과 15개 꽃술을 가진 오얏꽃은 자두꽃을 말하며 대한제국 당시부터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쓰였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건물 어디에도 용마루에 이런 장식을 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는 일본의 입김으로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창덕궁의 중요 건물에 새겨진 오얏꽃 문양이 갖는 의미는 예컨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의 건물에 접시꽃 문장을 새겨 놓은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정전의 오얏꽃 문양은 조선 왕조가 일본 왕의 하부 가문에 편입되었음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왜곡할 때 절대 아무 상관도 없ㅋ는 것을 끌어다 붙이지는 않습니다. 식민사학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근거를 우리 사료에서 찾습니다. 찾기는 찾되,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하지 않고 슬쩍 비틀어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데 써먹습니다. 그들이 인정전 용마루에 오얏꽃 문양을 한 것도 대한제국의 존엄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권위를 짓밟기 위함입니다. 이 작은 꽃문양에는 일제에 국권을 잃은 대한제국 황실의 슬픔이 서려 있고, 아직도 우리 땅에 남아 있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를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봉황이 춤추는 인정전 용상
인정전 내부 임금이 앉았던 자리인 용상龍床 뒤에는 나무로 만든 가리개인 곡병曲屛이 있습니다. 곡병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둘러쳐 있습니다. 일월오봉도는 음양을 상징하는 해와 달, 오행을 상징하는 다섯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오봉五峰은 우리의 영토를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으로 상징하는 산을 가리킵니다.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오행의 자연 변화 이치에 따라 정치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용상 위에는 닫집(당가唐家, 보개寶蓋)이라고 하는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습니다. 닫집은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으로, 임금이나 불상의 머리를 덮어서 비, 이슬, 먼지 따위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천장에는 목각으로 만든 봉황 한 쌍이 날고 있습니다. 인정전 월대月臺를 오르는 계단 중간 답도踏道에도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을 새겨 놓았습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있고, 봉황이 구름 속을 나는 곳은 하늘이니, 결국 인정전은 천상 세계에 있는 격이 됩니다. 그만큼 임금은 하늘에서 권력을 받은 신성한 존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천상의 상제님을 대행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후원後苑


창덕궁이 여느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입니다. 자연을 그대로 담은 후원은 나무 사이로 비치는 천상의 달까지도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서 그 경계가 무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유명한 정원들이 많지만 이처럼 광대하고 가장 잘 정돈된 정원은 없습니다. 창덕궁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후원은 궁궐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北苑’, 임금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라 하여 ‘금원禁苑’, 궁궐 안에 있는 동산이란 의미로 ‘내원內苑’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궁궐의 동산을 관리하던 관청 이름이 ‘상림원上林園’이었기 때문에 ‘상림원上林苑’ 또는 ‘상림上林’이라고도 했습니다.

후원의 특징
창덕궁은 남쪽으로 뻗은 백악산의 매봉鷹峯 자락에 터를 잡아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습니다. 그래서 궁궐 주요 전각들은 비교적 평탄한 남쪽에 배치되고 상대적으로 지형이 높은 뒤편에 궁궐의 뒷동산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구릉과 계곡, 폭포, 수림樹林 등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조화를 중시하며 가장 한국적인 정원 문화를 대표하는 명소입니다. 후원에 지은 정자들은 규모가 매우 작습니다. 이는 자연을 위압하지 않으면서 자연 속에 포근하게 안기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후원의 쓰임새
후원에서는 임금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렸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친히 참석한 군사훈련이 자주 실시되기도 하였습니다. 활쏘기는 여러 임금이 후원에서 즐겨했던 행사로, 조선 선비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교양으로 권장되었습니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궁神弓으로 통할 만큼 활 솜씨가 좋았고, 세조와 정조가 특히 활에 능했습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맞힌 다음 일부러 한 발을 빗나가게 하는 여유를 보일 정도였던 문무겸전의 군주였습니다.

또한 후원은 왕과 왕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고,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가 자주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기간산업이 농사와 양잠이었기 때문에 이를 권장하는 행사도 열렸습니다. 임금이 농사를 직접 체험하고, 왕비가 양잠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나 산문으로 남겨 궁중문학의 산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꼭 봐야 할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움, 상림십경上林十景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후원에는 예로부터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 하여 꼭 봐야 할 절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동국여지비고』에 소개된 열 가지 풍경은 이렇습니다. 창경궁 관풍각觀豐閣에서 봄에 임금이 밭갈이를 하는 관풍춘경觀豐春耕, 망춘정望春亭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 망춘문앵望春聞鶯, 천향각天香閣의 늦봄 경치인 천향춘만天香春晩, 어수문魚水門 앞 부용정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는 어수범주魚水泛舟, 소요정逍遙亭 곡수曲水에서 술잔을 돌리는 소요유상逍遙流觴, 청심정淸心亭에서 달을 구경하는 청심제월淸心霽月, 창경궁 관덕정觀德亭에서 단풍을 구경하는 관덕풍림觀德楓林, 영화당暎花堂에서 선비들이 시험을 치르는 장면인 영화시사暎花試士, 능허정凌虛亭에서 저녁 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능허모설凌虛暮雪이라고 합니다. 눈 내린 뒤 창덕궁의 모습은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절경이라고 하니 꼭 시간을 내셔서 관람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조正祖의 꿈이 담긴 주합루宙合樓와 규장각奎章閣


창덕궁 성정각 담을 왼편에 끼고 언덕길을 올라가노라면, 후원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화문翠華門이 나타나고 이를 통과하면, 후원에서 가장 유명한 부용정 일대가 나옵니다. 정방형 연못을 가운데 두고 북쪽 언덕에 정조의 꿈이 담긴 주합루 2층 누각이 우뚝 서 있습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이곳에 2층 누각을 짓고, 위층은 주합루, 아래층은 ‘규장각奎章閣’이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단청은 하되 검소하게 했으며, ‘주합루’라는 현판은 정조가 친히 짓고 쓴 어필입니다. 원래 규장각은 임금이 지은 글이나 글씨를 보관하던 곳입니다. 정조는 단순히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보관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임금을 보필하는 국왕 직속의 근시기구近侍機構로 개편하였습니다.

‘주합宙合’은 육합六合, 즉 상하와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키는데, 곧 ‘천지’를 의미합니다. 즉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이는 정조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 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규장각에서 규奎는 하늘 별자리 28수 중 서방 백호 7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규장奎章’은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창덕궁 후원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산마루턱에 취규정聚奎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취규’란 별들이 규성奎星으로 모여든다는 의미입니다. 『효경孝經』 원신계援神契에 “규성은 문장文章을 주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규성 주위로 다른 별들이 모여든다고 하는 것은 인재가 세상에 나와서 천하가 태평하고 도덕과 학문이 높아짐을 의미합니다. 송宋나라 태조 5년인 967년 오성五星이 학문과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에 모였는데 이 무렵 주렴계周濂溪와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같은 큰 학자들이 배출되어 천하가 태평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취규정’은 학문이 번창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되는 정자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궁궐에 있는 정자는 그 이름 하나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 취규정은 능허정凌虛亭에 이어 후원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있는데 그 높이에 걸맞게 하늘의 별자리를 빌려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능허정은 원림園林 깊은 곳에 묻혀 있어 자연과 일체된 느낌을 주죠. ‘능허’란 시원하게 높이 솟아 있다는 뜻으로 세속을 떠난 초월적인 공간 또는 높은 정신세계를 비유합니다. 능허정에 올라 보면 후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존덕정에 걸린 정조의 포부


화당暎花堂 앞마당에서 북쪽으로 향해 나아가면 왼편으로 ‘애련정’이 있고, 여기서 다시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깊은 수림 속에 연못과 다양한 정자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후원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가장 중심 지역이 존덕정尊德亭 일대입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는 모두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중 존덕정이 단연 눈길을 끕니다.

육각형 지붕을 두 겹으로 올리고 그 지붕을 받치는 기둥을 별도로 세웠는데, 특히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의 기둥을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무리 지어 세워 날렵한 맵시를 부렸습니다. 존덕정은 처음에는 ‘육면정六面亭’, ‘육우정六隅亭’이라고도 했다가 나중에 이름을 고쳤습니다. 정자 북쪽에는 반월형 연못과 네모난 연못이 나란히 있습니다. 이 역시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는 이 정자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유명한 글귀를 나무판에 새겨 걸어 놓았습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정조가 재위 22년에 스스로 지어 부른 자호自號로 이를 설명하는 서문을 친히 짓고 쓴 후에 여기에 걸게 한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정조는 자신감에 찬 임금의 모습을 신하들에게 과시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그러나 그 물의 원뿌리는 달의 정기이다.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요.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이 바로 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만천萬川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그 뜻 아니겠는가.


주변의 개울과 잘 어울리는 글이기도 하지요. 스스로를 태극에 비유하면서 규장각과 장용영壯勇營(정조가 만든 호위 군대) 등의 보좌로 개혁 정치를 이끌던 정조는 더 큰 꿈을 위한 포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인 1800년에 갑자기 정조가 승하하면서 조선의 국운은 급속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인위와 자연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는 존덕정 주변 풍광은 후원의 또 하나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와 그 가족들을 초청하여 춘당대에서 활을 쏘고, 부용정 연못에서 낚시를 하며 즐겼고, 존덕정에서 꽃구경 행사를 하였습니다. 존덕정 내부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곱게 그려져 있습니다.

존덕정 서편에는 폄우사砭愚榭가 나옵니다. ‘폄우’는 북송 성리학자 장재張載의 좌우명에서 따왔습니다. 장재가 서재 양쪽에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砭)을 놓아 깨우치게 한다라는 뜻의 폄우와 아둔함을 바로잡는다라는 뜻을 ‘정완訂頑’을 붙여 놓았습니다. 폄우사의 이 뜻은 덕을 존중한다는 존덕정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면, ‘어리석음을 깨우쳐 덕을 높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원의 백미 부용정芙蓉亭 연못
부용정에서 부용은 ‘연꽃’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이른바 ‘상화조어賞花釣魚’ 즉 꽃을 구경하고 낚시도 하던 곳입니다. 물론 잡은 고기는 다시 놓아줍니다. 부용정은 방의 설계가 아亞 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지붕 처마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터져 있는 특이한 건물입니다. 이와 비슷한 정자로는 정조가 수원 화성에 지은 동북각루東北角樓, 즉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들 수 있습니다. 방화수류정 앞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는 모양도 비슷합니다. 부용정이 있는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넣어 건설하였습니다.

우주 변화 원리를 내포한 청의정淸漪亭과 태극정太極亭


옥류천에서 가장 북쪽에는 청의정이 있습니다. 청의정은 궁궐 전체 정자들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정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구조가 특이합니다. 네모난 섬에 네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잇는 나무 방枋은 팔각형으로 두르고, 그 위에 원형 초가지붕을 얹었습니다. 사각형에서 시작하여 원형으로 끝납니다. 천원지방의 원리를 나타낸 것이고, 기둥이 네 개인 것은 사상四象(일월성신 또는 음양의 네 가지 상징체계인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을, 위에 도리를 여덟 개로 한 것은 팔괘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둥글고 네모난 것이 서로 겹쳐져 감싸 안고 있는 형상 속에 음양이 서로 교호하는 태극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초가지붕이 매우 소박한 느낌을 주는데 자세히 보면 기둥을 받친 주춧돌이나 기둥은 매우 세심하고 화려하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청의淸漪’는 맑은 물이 일렁이는 모습으로 바로 옆을 흐르는 ‘옥류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논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는 현대에 조성된 것이고 원래는 물을 가두어 만든 못이었습니다.

청의정 동쪽, 소요정 북쪽에 또 연못이 있습니다. 그 연못가에 사각형의 태극정이 있습니다. 원래는 ‘구름 그림자’란 뜻의 운영정雲影亭이었는데, 인조 때 다시 짓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태극정 앞개울에는 태극이 새겨져 있는 돌확(중앙에 홈을 파서 물을 담아 마당에 놓아 두는 석물)이 있어 우주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물속에 살짝 숨겨 놓았습니다. 이는 ‘만물의 근원은 원래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흐르는 여울물 속에 태극이 숨어 있듯이 ‘만물의 근원은 반드시 존재하고 이를 찾는 것은 인간의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현재 태극정은 기둥만 있고 사방이 터진 정자인데, 원래는 사방에 문이 달려 있었습니다.

산단山壇과 부군당符君堂 vs 대보단大報壇


창덕궁에는 특이한 제단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신교神敎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산단’과 ‘부군당’이고, 다른 하나는 사대주의 모화사상과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상징인 ‘대보단’입니다. 조선은 비록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우리의 고유 신앙 체계인 신교 문화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실례가 바로 후원의 산단입니다. 인조 6년에는 친히 산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 때에는 산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궁중에서 연주되던 전통음악인 아악을 쓴다고도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산신령이나 토속신에 대해 제사 지내는 행사가 있을 때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능허정 동남쪽에 있었던 산단은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적 신념 체계인 신교가 유교 왕조인 조선의 궁궐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능허정 뒷담을 따라 산을 내려오면 ‘부군당’이라는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부근당付根堂’이라고도 하며 관청에서 복을 빌기 위해 설치한 사당이라고 합니다. 궁궐 내에서도 부군당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며 왕실의 번성과 안녕을 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보단은 일명 ‘황단皇壇’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후원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보단은 ‘큰 은혜에 보답하는 제단’이란 뜻이고 황단은 ‘황제를 위한 제단’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받은 은혜를 보답하고, 황제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명明나라였고, 명나라 황제였습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국가를 지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기에,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선 마당에도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청에서 이를 알면 불쾌할 것이라 여겨 후원에서도 아주 깊은 곳에 제단을 마련하였습니다. 지금 대보단 자리는 무성한 숲으로 변해 있습니다.

창덕궁을 되돌아 나가며


창덕궁은 조선 시대 임금이 생활하면서 신하들과 나라를 경영했던 최고 관청입니다. 그러나 조선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본래 역할과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위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덕궁은 창건 이후 줄곧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지금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변화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리 궁궐의 참모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 글은 창덕궁 안에 감춰진 우리 한문화 코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궁궐 배치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 유연함, 음양오행 원리를 엿볼 수 있는 전각들과 우리 민족 고유의 신교 문화의 흔적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이 아름다운 후원의 미의식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문화유산들이 있기에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은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보존되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