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로마를 위기에 몰아넣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역사인물탐구]

BCE 323년 지중해 서쪽 원정을 준비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지중해 패권을 놓고 전통의 강호 카르타고Carthago와 젊은 공화국 로마Roma 사이에 길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역사에서는 이를 포에니Poeni 전쟁이라고 한다. 특히 한 인물에 의해 시작되고 마무리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전쟁의 주역은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 Barca이었다.


카르타고의 아들


한니발(BCE 247~BCE 183)은 카르타고의 유력 집안 중 하나인 바르카Barca(번개라는 뜻) 가문 출신이다. 바르카 집안은 카르타고의 번영을 위해서는 상업 중심의 해상 진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또 다른 명망가인 한노Hanno 가문은 농업 중심의 경영론을 내세웠다.

즉 카르타고는 비옥한 아프리카 농지를 기반으로 한 지주 계층과 바다로 진출하려는 상인, 평민 계층의 이해관계가 꾸준히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본국에서 어떤 집단이 권력을 잡고 있는지에 따라 카르타고의 대외적인 전쟁 수행 역량이 결정지어졌다.

로마의 흥기


카르타고가 로마와 세 차례에 걸쳐 벌인 포에니 전쟁은 해상 강국 카르타고가 멸망해 가는 과정이자 로마가 지중해와 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르는 과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로마는 BCE 270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하지만 남단의 섬 시칠리아가 포함되지 않았다. 로마가 시칠리아로 진출하려면 지중해에 있는 두 개의 걸림돌을 넘어서야 했다. 첫 번째는 지중해는 물론 인도까지 위협했던 그리스. 하지만 BCE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고 그의 제국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그리스는 이빨 빠진 사자가 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지중해 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아프리카 북부에 자리 잡은 카르타고였다.

부유한 곡식 창고, 시칠리아


시칠리아Sicilia는 이탈리아 반도의 발끝과 아프리카 사이에 마치 징검다리 돌처럼 놓인 고대의 가장 부유했던 섬이다. 이곳은 천혜의 비옥한 농지와 자연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지중해로 성장 발전하려는 로마로서는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다.

■전쟁 발발
BCE 265년 시칠리아섬 내 최강국 시라쿠사가 메시나를 공격하자, 로마는 메시나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카르타고가 시라쿠사와 연합하였고, 이후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힘을 겨루면서 장장 1세기에 걸친 패권 다툼을 벌였다. 페니키아인을 로마에서 ‘포에니Poeni’라 불렀기 때문에 이 싸움을 ‘포에니 전쟁’이라 이름하였다.

■전쟁 결과
1차 전쟁의 총사령관은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였다. 그는 초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로마군을 거의 패배시킬 수 있는 상태로 몰고 갔다. 하지만 카르타고 본국에서 한노파派가 권력을 잡고, 전쟁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로마는 대규모 선단을 정비하여 시칠리아 서쪽 바다에서 카르타고의 대규모 군수품 보급선단을 침몰시킴으로써 곡창지대인 시칠리아섬을 획득하였다. 결국 카르타고가 항복하면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무는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는 새로운 전쟁을 잉태하게 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 한니발


■새로운 근거지 에스파냐
전쟁으로 인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섬 그리고 오랜 무역 거점들을 상실한 카르타고는 새로운 시장 개척이 절박했다. 하밀카르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자신과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지금의 스페인 땅인 히스파니아Hispania를 선택했다. 이곳은 훗날 한니발의 이탈리아 대원정이 시작되는 근거지이자 생명선이었다.

■2차 포에니 전쟁 발발
1차 포에니 전쟁이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벌인 패권경쟁이라면 2차 전쟁은 복수를 낳은 불평등 강화조약 때문에 일어났다. 전쟁은 로마 측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다. 부친과 매형의 뒤를 이어 26세에 총사령관이 된 한니발은 에스파냐 남부 해안 도시 사쿤툼을 개전 8개월 만에 점령하였다. BCE 218년 한니발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구상했던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카르타고 노바(오늘날 스페인 남동부의 카르타헤나)에서 출정하였다. 한니발은 적의 반격에 대비하여 본국과 스페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신속한 작전을 위해 가족을 동반하지 않았다. 병력은 보병 9만, 기병 1만 2천 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였다. 군 편성은 기병 위주였다. 드디어 인류사의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저 유명한 ‘한니발의 알프스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고
한니발이 머물던 사군툼에서 로마에 이르려면 거대한 두 산맥을 넘어야 했다. 오늘날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있던 피레네산맥(중앙부 높이 약 2,700m)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희고 높은 산 알프스산맥(평균 고도 2,500m이며 최고봉인 몽블랑은 4,810m)이다. 로마인들 중 한니발이 이 두 산맥을 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레네산맥으로 접근하는 한니발군을 막기 위해 로마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그는 훗날 카르타고에 치명타를 안기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한니발군은 피레네산맥을 넘자마자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에 로마는 충격에 빠졌다.

■알프스를 넘어서
나폴레옹 이전에 이 산맥으로 대군을 끌고 넘어간 이는 한니발뿐이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목동들이 넘던 산길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니발은 저항하는 세력을 학살하고 갈리아인들을 포섭하면서 이 지역을 개척하였다. 그는 확실한 길을 만들어 열대 동물인 코끼리로 완전무장을 한 채, 아열대 기후에 익숙한 카르타고 정예병을 지휘하여 설산雪山 알프스를 지나갔다.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다
한니발군은 9일 만에 정상에 닿았고, 보름 만인 12월 초에 마침내 북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보병은 절반 이상, 코끼리 부대는 거의 전멸하여 이탈리아에 도착한 총 병력은 보병 2만(9만에서 7만 감소), 기병 6천(1만 2천에서 절반 감소) 명 정도였다. 하지만 로마가 사르데냐섬에 2개 군단을 주둔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해상 루트로 진격하는 방안은 훨씬 더 위험했을 것이다.

카르타고, 로마 정벌을 개시하다


■티치노 전투와 숙적 등장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군과 로마군이 첫 전투를 벌인 곳은 이탈리아 북부 티치노였다. 로마군 사령관은 2개 군단 병력을 지휘하는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하지만 로마군은 보름 걸려 알프스를 넘어온 카르타고 정예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특히 누미디아 기병(용병)은 순식간에 로마 기병대를 짓밟고, 로마군 본대에 달려들어 집정관을 사로잡으려 했다. 부상을 당하고 누미디아 기병대에 포위된 집정관을 구출한 이는 그의 아들이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집정관을 놓친 것을 매우 애석해했으나 진정 놓친 것을 애석해야 할 사람은 집정관의 아들이었다. 겨우 17세였던 집정관의 아들은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한니발의 병법을 익혀 정확히 16년 뒤 한니발의 몰락을 가져오게 하고 포에니 전쟁을 매듭짓게 하는 ‘스키피오’ 바로 그 사람이었다.

■트레비아강 전투
한니발군은 포po강 지류인 티키누스강에서 로마군과 격돌하였다. 한니발을 애송이로 본 로마군은 오히려 그의 정예 기병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을 바로 공격하려는 계획을 철회하고 시칠리아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정관 롱구스를 불렀다. 룽구스는 남은 병력을 통합하여 트레비아강 유역에 진을 쳤다. 하지만 정면 대결을 추구하는 로마인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니발 군대의 기습 공격에 로마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제 로마는 북이탈리아를 포기하고 비옥한 포강 유역이 한니발의 수중에 떨어졌다.

■트라시메노호湖 전투
이후 에투루리아 지방의 #트라시메노 호숫가#에서 로마군은 집정관의 지휘 아래 한니발이 위장해 놓은 카르타고 숙영지를 기습하다 함정에 빠졌다. 안개 낀 호숫가에 매복한 카르타고군은 집정관을 포함한 1만 5천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켰다. 이제 로마까지 150㎞ 정도로 3일이면 당도하는 거리였다.

■파비우스 막스무스의 등장과 칸나에 전투의 서막
이에 로마는 신중한 성격의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였다. 파비우스는 긴 보급로로 인해 속전속결을 원하는 한니발군의 약점을 간파했다. 그는 한니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주민들을 소개疏開(분산시킴)하고 집과 평야, 물자들을 모두 불태우는 소모적인 지연 전술을 썼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기에, 파비우스는 온갖 비난을 받았고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비극의 시작
로마 원로원은 빨리 공격하여 승패를 내자는 분위기 속에서, 경험이 없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하였다. 평민 출신으로 인기가 높았던 바로Varro는 8개 군단과 동맹군을 합쳐 8만 병력을 이끌게 되었다. 그사이 한니발은 아드리아 해안의 평원에 진을 쳤다. 한니발로 인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칸나에’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 근처였다.

칸나에에서 로마군을 궤멸시키다


BCE 216년 8월 2일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수식어를 한니발에게 붙여 준 칸나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남쪽에 포진한 한니발군은 갈리아 지역 용병 등을 포함하여 5만 명이었다. 그때까지 로마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다.

■경과
전투가 시작되자 수적으로 우세한 기병은 먼저 로마 기병을 제압하였다. 예상대로 로마군 보병을 등 뒤에서 포위하여 이제 가운데가 오목하게 반원형으로 변형된 카르타고군의 포위망 안으로 밀어붙였다. 이중二重 포위전술에 말려든 로마군 지휘부는 속수무책이었다. 로마군의 참패 원인은 병사들의 용감성 유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장 한니발에 비해 전반적으로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로마군 지휘관들에게 전적으로 그 책임이 있었다.

■칸나에에서 희생된 로마군
집정관 파울루스와 원로원 의원 80명을 포함해 최소 5만 명이 이날 죽었다. 테렌테우스 바로는 도망을 갔고, 스키피오의 기병 부대는 유일하게 부대 단위로 탈출에 성공했다. 한니발군은 6천 명 정도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역사상 단 하루 동안 이렇게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전투는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치러진 전투를 제외하고는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한니발의 실수


■로마를 바로 치지 않았다.
칸나에 전투 이후 한니발은 로마를 코앞에 두고도 15년 이상 진군하지 않은 실수를 범했다. 당시 카르타고군 장교들은 곧바로 로마를 치자고 아우성이었다. 로마군 주력은 무너졌고, 로마에는 군대가 없으니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어떤 이유였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국의 외면과 로마의 지연 전술
한니발은 동생 마고를 본국에 보내 승리를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한노파가 장악한 본국에서는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한니발은 로마 측의 강화 제의를 기다리거나, 로마와 동맹국 사이가 와해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칸나에 참패를 당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카푸아 이외의 어떤 도시도 로마를 배반하지 않았다. 로마 동맹 체제는 단순한 계약 관계 이상이었다. 로마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았고, 예비 병력을 차출하여 1년 만에 20개 군단이 정비되었다.

■동생의 죽음
BCE 208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은 형을 돕기 위해 출전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보낸 서신이 도중에 로마군에게 차단당하고, 이탈리아에서의 행군로와 합류 예정 지점이 노출되었고, 총력전으로 나온 로마군의 포위 전술에 지원군은 전멸했다. 하스드루발은 적진 한복판으로 말을 달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결정적 실수
한니발의 군대는 도시 생활의 안락함에 젖어 버렸다. 한니발군은 BCE 216년에서 이듬해로 넘어가는 겨울 카푸아에서 머물렀는데, 3년 만의 휴식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독약이 되어 버렸다. 음주와 방탕한 생활, 규율 없는 자유로움과 빈둥거림은 카르타고군의 육체와 정신의 예민함을 잃어버리게 했다. 이제 그들은 독기를 품은 정예군이 아니라 그저 그런 부랑자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 자마Zama 평원 전투


■스키피오 등장으로 본국으로 소환되다
동생의 죽음 앞에 경악한 한니발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러던 중 로마는 한니발이 구사한 전술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그의 적수가 되는 30세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를 새로운 군 지휘관으로 삼았다. BCE 204년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전쟁터가 된 적이 없던 카르타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카르타고는 급히 한니발을 소환하였고, 한니발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파비우스 장군의 집에는 축하객들이 몰려들었고, 로마의 모든 신전에서 5일 동안 감사의 제사가 올려졌다.

■자마 전투 패인 1 - 기병대의 몰락
BCE 202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남서부에 위치한 자마 평원 인근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격돌했다. 양측은 5만 정도로 병력 수는 비슷했으나, 한니발군은 이탈리아에서 퇴각할 때 데려온 역전의 용사 1만 5천 명을 제외하면 각양각색의 병사들이 뒤엉킨 잡동사니 부대에다 급조된 코끼리 부대까지 뒤섞인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누미디아 기병대(용병)가 로마 편에 가담했다. 한니발이 연전연승한 비결 중 하나는 기병대의 우위였다. 이탈리아에는 풍부한 말의 산지가 부족하였고, 보병과 달리 기병은 오랜 기간 훈련을 필요로 하였다. 당시 지중해에서 최고로 치는 누미디아 기병대와 스페인 그리고 갈리아 기병대까지 포함하여 한니발은 늘 로마군보다 기병대에서는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 것이다.

■자마 전투 패인 2 - 훌륭한 사령관
로마군 사령관 스키피오는 이미 10대 후반에 몇 차례 한니발에게 패배를 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통해 한니발의 전술에 능통해 있었다. 여기에 지난 5년 동안 스페인 전선에서 실전 경험을 쌓아 뛰어난 전략가로 성장해 있었다. 거기에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에 대한 포용력과 개인적인 관대함 덕분에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부하들에게서 남다른 헌신을 끌어내는 카리스마도 지니고 있었다.

■운명의 자마 전투
스키피오는 스승 격인 한니발보다 더 독창적인 전술을 자마에서 들고나왔다. 스키피오는 가볍게 무장한 군인들을 맨 앞에 두어 후방의 진영 배치로 적의 눈을 속인 채, 보병대를 소규모 단위로 띄엄띄엄 배치해 한니발이 풀어놓은 코끼리들이 그 사이로 빠져나가게 했다. 일부 코끼리들이 양옆으로 빠져나가면서 오히려 양익에 배치된 한니발의 기병대 대열을 흩뜨려 놓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 기병대는 한니발 군대의 측면과 배후를 동시에 공격했다. 결국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성공한 포위 전술을 그대로 되갚아 준 것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자마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이어진 종전 협상에서 카르타고는 항복하였다.

■전투 패배와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모든 포로와 탈주자와 도망한 노예를 돌려보낼 것, 전함을 완전히 없애고 전투용 코끼리를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지중해에 있는 모든 섬에 대한 소유, 교역, 교전을 금지시켰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으며, 카르타고 청년 100명을 로마에 인질로 잡아 둔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한니발이 죽은 뒤 30여 년이 지나 일어난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도시 전체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렸다. 도시의 땅에는 소금을 뿌려 그 뒤 100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 황폐화시켜 버렸다.

명장의 최후


BCE 183년 흑해 남쪽 한 농가에서 추적자들을 피해 숨어들었던 한 노인은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로마인들의 공포를 끝낼 시간이 되었구나. 그들에게 그토록 많은 걱정을 안겼던 이 늙은이의 죽음을 더 이상 마냥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구나!” 기록이 전하는 한니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마지막 순간 포로가 되어 굴욕을 당하길 거부했다. 늘 반지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독약을 마시고 장렬하게 죽어 갔다. BCE 183년 64세였다. 공교롭게도 역사상 라이벌이었던 스키피오도 이해에 죽었다.

역사가들의 평가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모방하여 역사가 실레노스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전법이나 전황 등을 기록하게 하였지만, 패자가 되면서 그 기록이 사라졌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그를 전쟁의 아들 또는 복수심으로 다시 태어난 전략가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 역사가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15년 동안 무패 행진을 기록한 점에서 빛나는 영웅의 모습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1만 명의 죽음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냉혈한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또 5개 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높은 교육을 받은 천재적인 전략가의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카르타고Carthago
카르타고는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있는 티루스의 페니키아인들이 BCE 814년경 지금의 북아프리카 튀니지Tunisie 지역에 건설한 식민 도시이다. 전체 지중해에서 중간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와 소아시아로 가는 스페인산 주석의 중간 기항지, 그리고 북아프리카 쪽 배후의 비옥한 농경 지대라는 이점을 가지고 성장하였다.

집정관執政官
집정관執政官은 고대 아테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행정관이다. 콘술consul이라고 한다. 행정 및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원로원과 합하여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을 가진다. 임기는 1년으로 한 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 간 합의하에 업무를 집행한다. 이는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비상사태 때 한 사람의 독재관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이때 임기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포위 섬멸 작전
한니발은 투석 부대 뒤쪽에 가운데가 볼록한 초승달 모양으로 보병을 배치했다. 이 진영은 중앙의 경보병이 퇴각해 로마군이 밀고 들어오도록 유도한 다음, 양쪽에 배치한 중보병이 적의 측면을 공격하고, 동시에 기병대가 뒤로 돌아가 적의 배후를 포위 섬멸하는 전법이다. 중앙부를 이상할 만큼 두텁게 하여, 기병이 로마군 배후로 돌아갈 때까지 레기온Legion이라 불리는 로마 군단의 공격을 견뎌 내게 했다.


대大스키피오(BCE 236~183)
‘대大스키피오’라 불리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본명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이다. BCE 202년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원로원에서 ‘아프리카누스Africanus(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으며,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치고 로마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장남의 양자인 소小스키피오(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BCE 146년 카르타고를 함락하고 초토화시킨 인물이다. 이 소小스키피오와 구분하기 위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대大스키피오라 부른다.

한니발이 군대밖에 모르고 검약했던 것에 반해 스키피오는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그래도 스승 격인 한니발처럼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지휘관이었다. 포에니 전쟁 승리의 영웅이었지만, 정적들의 뇌물죄 고발에 대한 배신감에 로마를 떠났다. 자신의 장례식을 로마에서 치르지 못하게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요약] 한니발의 리더쉽
한니발은 탁월한 전략 전술과 더불어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싸움에서는 직접 선두에 섰고 어떤 고난도 병사들과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그는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전쟁에서는 실패하였고, 전쟁은 결코 혼자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역사에 알려 주었다. 이러한 결점들이 제대로 보완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전략 전술을 그대로 익힌 스키피오에게 패배하였고, 카르타고도 결국 로마에 멸망한 것이다.



<참고문헌>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허승일 외, 도서출판 길, 2006)
『로마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3)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영웅 열전』(이윤기, 민음사, 2011)
『역사를 바꾼 세계 영웅사』(스펜서 비슬리외 지음, 이동진 옮김, 해누리 , 2018 )
『전쟁 연대기 1』(조셉 커민스 지음, 김지원, 김후 옮김, 니케북스 , 2013)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존 위리, 임웅 옮김, 르네상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