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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화]

    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경복궁의 눈물 그리고 상징 체계

    이해영 / 객원기자
    이제 경복궁에 대해서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이네요.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번 글에서는 조선이 겪은 수난을 온몸으로 받은 경복궁 역사를 정리해 보고, 경복궁뿐 아니라 다른 궁궐들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 두어야 할 상징 코드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수난, 임진왜란


    불타는 경복궁
    경복궁에 닥친 첫 번째 시련은 조선이 건국한 지 200주년이 되는 1592년에 있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대로 하여 침략한 일본군은 부산진성, 동래성을 잇달아 함락시키고,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정예 조선군을 궤멸시켰습니다. 개전 20일 만인 5월 3일 일본군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통해 무혈입성하였고, 이윽고 한성 초토 작전을 전개합니다. 이 와중에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이 전소되어 버렸습니다. 이전까지는 조선의 난민들이 경복궁을 불태웠다고 알려졌지만, 일본 종군승들의 기록이나 당시 피난 가는 과정에서 정신없던 도성 사람들이 그럴 경황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비가 많이 왔었다는 정황 등으로 보면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불태웠다고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종묘에서 쫓겨나는 왜군
    이때 일본군 일부가 종묘에 진을 쳤는데, 밤마다 태종 이방원 신명의 호통 소리와 함께 신군神軍이 나타나 분위기가 흉흉하고 병사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묘를 떠나 남별궁南別宮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남별궁은 태종의 둘째 경정공주가 하가下嫁(지체 낮은 곳으로 시집감)해 거주하던 조대림의 집으로 지금의 조선호텔 정문 앞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훗날 고종이 환구단圜丘壇을 설치하고 천제를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창


    버려진 궁궐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전란으로 의주까지 몽진했던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온 뒤 갈 곳이 없어 정릉동 행궁, 즉 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다가 승하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 임금들은 경복궁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270년 넘게 경복궁은 폐허로 버려져 이리와 여우가 출몰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진 경복궁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 있던 경복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집념으로 1868년 고종 5년에 다시 세워집니다. 중창된 경복궁은 고대의 예법에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조선 왕실의 전통과 현실의 조화를 꾀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규칙적인 배치에 따르면서 부분적으로 변화와 파격을 가미하였습니다. 중창된 경복궁은 13만 평의 대지에 330여 동의 궐내 전각 7,225칸 반, 후원 전각 232칸 반, 궁성 1,063칸 반, 후원 둘레 698칸 반이 들어설 정도로 대단히 큰 규모였습니다. 이어 경복궁 북쪽에는 건청궁乾淸宮을 새로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주도해서 중건했다면, 건청궁은 고종이 주도했습니다. 이는 임금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스스로 서려는 고종의 자립 의지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청궁에서 크나큰 비극이 발생합니다.

    을미사변乙未事變(건청궁의 변)에서 경술국치까지


    역사상 다시없을 만행
    1895년 을미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끄는 일본 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경복궁 뒤쪽 끝 건청궁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를 찾아 시해합니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입니다. 혹자는 을미사변 대신에 건청궁의 변이라고 하는데 저 역시 건청궁에서 있었던 사변이란 뜻의 ‘건청궁의 변’이라는 표현에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장소를 구체화시켜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자는 취지입니다. 전쟁을 하는 사이에도 상대국의 왕이나 왕비를 이런 식으로 살해하는 일은 없습니다. 역사상 다시없을 이 만행에 대해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겠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그날 그 사건의 흔적을 지워 버리듯 1929년 박람회를 열면서 건청궁 일대 건물을 헐어 없애고 미술관을 지었습니다. 그 건물은 민속박물관으로, 그다음에는 전통 공예 전시관으로 쓰이다가 헐려 없어졌고, 2006년에 그 자리에 건청궁이 다시 지어졌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흔들리는 국권을 되살리기 위해 고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1897년 천상에 계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됩니다. 이어 독립 제국이 되었음을 나라 안팎에 선포하며 의욕적으로 #광무개혁#을 추진합니다. 더불어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정하면서, 경복궁은 궁궐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마감했습니다. 고종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면서 대한제국은 조선 창업 51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복궁의 눈물, 일제 강점기


    일제의 치밀한 궁궐 해체 계획
    일제가 경복궁 해체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1902년으로 강제 병합 이전부터였습니다. 일본은 조선고건축 조사단을 파견하여 곳곳의 유적과 서울의 남산, 궁궐을 낱낱이 조사합니다. 이때부터 치밀하게 궁궐 훼손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19세기 말 「북궐도형北闕圖形」
    (주1)
    에 도시圖示된 건물 수가 총 509동 6,803칸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남은 건물 수는 총 40여 동 857칸으로 일제 강점기를 통해 469동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일제가 경복궁에 있는 전각을 하나하나씩 헐어 버렸던 이유는 그곳에 새로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려는 흉계였습니다. 조선의 자존심 위에 근대식 석조 건물을 멋있게 지어 놓고 위에서 아래로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면서, 조선의 위신을 깎아내리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통치의 정당성을 조선 민중들 마음속에 세뇌시키려는 책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합니다. 공사는 압록강 기슭에서 잘라 온 낙엽송 9,300그루로 기초를 촘촘하게 닦고, 평양산 석회, 독일산 유리 등 1등급 자재들을 동원했습니다. 내부 대리석은 한반도 곳곳에서 캐 왔고, 외부 화강암은 동대문 밖 창신동 채석장에서 채취할 정도로 조선의 골수를 그대로 빼 왔습니다.

    궁궐의 권위를 떨어뜨리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전부터 일제는 1910년 전각 총 6,806칸 중 4,000여 칸을 경매로, 1914년 자선당, 비현각 등 15동과 문 9개소를 공매 등을 통해 훼손하였습니다. 이때 팔린 옛 집현전인 홍문관, 세자의 집무실인 비현각은 각각 장충동 남산장과 남산의 화월병장으로 팔려 가 일본 기생집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문무 과거장으로 활용되었던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법당이나 객전 등 국내에 있는 일본계 사찰로 변용되었습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의 일부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동궁 자선당은 오쿠라 키하치라는 일본인의 일본 집으로 반출되어 사설 미술관인 조선관으로 잔존하다가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그을린 석축만 남은 채 1996년 경복궁 뒤뜰 건청궁 옆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1925년 조선가금家禽공진회 등 대규모 행사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주요 전각 10여 채를 제외한 부분을 말끔하게 정리해 버렸습니다. 정지 작업을 마친 경복궁 궁역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빈 땅은 정원으로 꾸미거나, 묘지에 쓰는 잔디를 심어 버렸습니다. 궁궐에서 보이는 잔디밭은 본래 건물터였다고 보면 됩니다. 1917년에는 창덕궁 내전에 큰 불이 나자 이를 재건한다며 그나마 있던 경복궁 내전 건물을 해체해 창덕궁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복궁 전각은 헐리고 총독부 청사 별관이나 문서고 따위가 들어섰습니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영욕사榮辱史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전통적인 궁궐 제도의 근간은 남북 축선에 주요 전각을 배치하고, 제왕은 그 중심에서 남면南面하고 앉는 것입니다. 경복궁은 그 제도가 철저하게 구현되었고,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 광화문입니다. 처음에는 오문午門이라 했다가, 세종 때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뜻은 “빛이 사방에 퍼지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化及萬方)”입니다. 이는 임금의 은덕이 백성에게 차별 없이 고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광화문, 그 질긴 수난사
    일제는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책을 실시하면서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근정전 앞에서 물산공진회 등 여러 대회를 개최하면서 전각을 헐어 버리며 사전 정지 작업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 이어지는 축과 방향을 약 3.5도 틀어 버렸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조선 통치 권력의 상징으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철거를 계획했으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 ~1961, 조선 문화를 무시하는 일제의 정책에 항의한 일본 문예 운동의 창시자) 등의 일부 일본인과 조선인의 반발로 경복궁 동쪽 담벼락으로 팽개치듯 옮겨 버렸습니다. 동쪽으로 밀려난 광화문은 이미 궁성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잃어버렸습니다.

    복원과 지금의 경복궁


    해방 이후 광화문과 복원 과정
    형체는 유지하였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광화문은 한국전쟁 당시 그나마 남은 형체마저 잃어버렸습니다. 폭격을 당해 문루는 불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도 아닌 돌무더기로 15년 동안 버려져 있던 광화문은 1968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복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소홀한 고증과 성급한 성과주의로 복원이라고 하면서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습니다. 방향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 당시는 중앙청으로 쓰고 있던 건물에 맞추다 보니 원래 경복궁의 축과 3.5도 동향으로 틀어진 그대로입니다. 현판도 한글로 “광화문” 세 자를 써 편액을 걸었습니다. 상량문도 대충 사인펜으로 써서 종이로 말아 포장하였습니다. 이 상량문은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을 헐고 목조 건축물로 다시 지을 때 드러나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95년 당시 정부는 광화문을 본래 위치에 석축 위 목조 건물로 복원하기로 하였고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편액의 나무 판이 갈라진 겁니다. 그리고 흰 바탕에 검은 글씨 부분도 잘못된 거 아니냐 하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복원 과정
    경복궁의 원형 회복은 1989년 기본 궁제를 복구, 복원하려는 계획이 수립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이뤄졌습니다. 중건 당시 25퍼센트 정도로,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1995년 8월 15일)와 기존 광화문을 철거하고 복원하였습니다. 2차는 2011년부터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당초 목표보다 규모를 줄이고 기간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습니다.

    경복궁을 나오며


    경복궁의 현대적 의미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입니다. 그래서 역할에 따라 궁역이 명확하고 정연합니다. 조선 500년 왕업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겪으며 형태가 바뀌거나 훼손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조선이라는 나라의 창업 정신이 가장 투철하게 형상화된 곳입니다. 경복궁이 비록 유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불교와 도교, 풍수학은 물론이고 조선을 구성하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양식이 알게 모르게 묻어 있는 곳입니다.

    한민족 문화 코드가 담긴 경복궁
    경복궁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달마다 달라집니다. 옛 모습을 되살리려는 복원의 손짓이 조용하지만,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면 눈에 띄지 않고, 차가운 건축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꼼꼼하게 둘러보면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습니다. 그 안에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한민족의 문화 코드가 살아 있는 곳입니다. 이 글에서 살펴본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꽃 한 송이, 건물 기둥, 전각 현판, 문양 하나마다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따뜻한 시선으로 경복궁을 지켜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많은 문화적 자산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경복궁의 상징체계 정리


    이제 마지막으로 경복궁에 담긴 상징체계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비단 경복궁뿐 아니라 다른 궁궐을 포함한 우리 문화유산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음양陰陽
    경복궁은 음양陰陽 개념이 적극적으로 적용된 궁궐입니다. 음양은 천지만물을 구성하는 서로 대립되면서 순환하는 성격을 가진 기운입니다. 정전, 편전, 침전 등의 주요 전각을 남북의 중심축 선상에 배치하고 이를 보좌하는 건물들은 좌우 상대적 음양 개념을 적용하여 배치하였습니다. 이 음양에 상응하여 방위, 색깔, 계절 위치 등을 고려하여 전각의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음양 개념

    ●경복궁 건물의 좌우 음양 배치

    태극太極
    이런 음양의 속성을 잘 보여 주는 게 태극太極입니다. 태극은 자연의 근원과 본질을 나타내며, 우주 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궁궐을 비롯하여 종묘, 왕릉, 향교 등에서 태극 문양을 장식하여 국가와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궁궐은 빨강과 파랑의 2태극 문양을, 왕릉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태극 문양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규범화된 것은 아니어서 혼재되어 사용하고, 심지어 바람개비 모양의 4태극 문양도 등장합니다. 이 중 삼태극은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하나의 원입니다. 모든 색은 이 삼원색으로부터 나오죠. 삼태극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말합니다. 하늘과 땅, 사람은 각각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삼태극은 태극처럼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의존하고 아우르는 성질을 가집니다. 음과 양이 화합해 완전한 원형을 이루듯, 삼태극은 천지인이 하나 됨을 상징하죠.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이 삼태극은 임금, 신하, 백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상호 소통하며 유교의 이상 사회인 대동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이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행五行
    음양이 분화하여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갈려지니 이를 오행五行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작용을 통해 만물이 탄생, 성장하고 성숙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주는 순환 무궁하는 것이지요. 오행의 각 요소는 방위, 계절, 색상, 소리, 숫자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앞서 본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이런 음양오행 개념을 상징화하여 묘사한 그림이죠. 해와 달은 음양을, 다섯 봉우리는 오행을 상징합니다. 조선의 궁궐은 외면적 화려함보다는 상징과 문양을 통해 내면적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광화문 문루의 팔괘八卦
    팔괘八卦는 우리 배달국의 태호 복희씨께서 만든 기호 체계로 천지 삼라만상의 본질과 변화를 나타냅니다. 팔괘는 건태리진손감간곤(乾☰ 兌☱ 離☲ 震☳ 巽☴ 坎☵ 艮☶ 坤☷)을 기본으로 하며 각각 하늘, 연못, 불, 번개, 바람, 물, 산, 땅이라는 자연 현상을 상징합니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문루에는 팔괘 문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장식된 팔괘 문양 배치는 문왕팔괘도입니다. 팔괘 문양은 정면의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손괘, 정면 중앙에 리괘, 곤괘, 서쪽에 태괘, 뒤쪽에 건괘, 감괘, 건괘, 동측에 진괘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특히 정면은 남쪽을 바라보면서 불과 문명을 상징하는 삼리화괘三離火卦를 배치했습니다.

    광화문 문루의 육십사괘
    또한 광화문 문루의 여장은 검정색 벽돌로 띠처럼 둘렀는데 그 표면에 8개의 사각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팔괘의 구성 요소를 하나씩 삽입한 것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각 틀을 9등분으로 세분한 뒤, 중앙에는 소성괘小成卦
    (주2)
    를 배치하고 외곽의 8군데에는 대성괘大成卦
    (주3)
    로 배치하였습니다. 팔괘와 64괘가 궁궐의 정문에 장식되어 있는 것이지요.

    근정전 앞 세 발 달린 정鼎
    근정전 앞 좌우에는 청동으로 만든 향로 모양의 세 발 달린 정鼎이 있습니다. 정은 솥이나 향로처럼 생겼고, 배가 둥글고 다리가 셋에 귀가 둘 달렸습니다. 처음에는 흙으로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자天子는 정을 아홉 개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정九鼎은 왕권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서는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하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쓰였습니다. 왕조가 바뀔 때 이 구정도 함께 전하여졌습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정은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황궁인 덕수궁에만 있습니다.

    정 상단 테두리 팔괘
    우리 근정전의 정에는 특별한 게 있습니다. 정의 윗부분 테두리에 돌아가면서 팔괘를 새겨 놓았습니다. 두 귀 가운데 근정전에서 내다보는 시각, 곧 북에서 남으로 볼 때 왼쪽에 있는 귀 부분에 진괘가 있습니다. 괘를 확인할 때는 정의 밖에서 안쪽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문왕팔괘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의 좌향은 곧 근정전의 좌향입니다. 근정전은 감좌이향坎坐離向, 즉 자좌오향子坐午向입니다. 쉽게 말해서 정남향으로 앉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은 근정전의 주인인 임금이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도록 보살피는 존재임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요, 근정전의 좌향이 남면임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
    천원지방天圓地方은 하늘은 원만하고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말입니다. 이 천원지방 개념은 배달 시대 이후 단군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대한제국 당시 고종이 지은 원구단 제천단에서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원지방 개념은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확인됩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원구단이나 연못의 테두리, 궁중의 우물이나 궁궐같이 격이 높은 건물의 기둥은 원형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반면 땅에 제사 지내는 사직단이나 연못 안의 섬, 사대부의 우물은 정井자형이고, 일반적인 기둥은 네모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연못 형태에 천원지방 원리를 적용한 곳은 동양 문화권 중에서도 우리가 유일합니다. 경복궁에서는 향원정 연못이 그렇고, 경회루는 예외적으로 연못 안에 네모난 세 개의 섬을 두어 도가적 신선 세계를 꾸며 놓기도 하였습니다. (정리 - 이해영 객원기자)

    <참고문헌>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하』 (홍순민, 눌와, 2017)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새벽숲, 2010)
    『경복궁의 상징과 문양』(황인혁, 시간의 물레, 2018)
    『경복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양택규, 책과 함께, 2007)

    *(주1)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뒤인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남문인 광화문으로부터 북문인 신무문까지의 건물 배치 상황을 그렸다. 경복궁 건축배치도라 할 수 있다.

    *(주2) 소성괘는 태극으로부터 파생된 음효???? 또는 양효− 3개를 배열하여 구성한 것으로 모두 8개의 조합이 생성됩니다. 이 8개 조합을 팔괘라고 합니다.

    *(주3) 대성괘는 팔괘의 요소를 상하로 배열하여 구성한 것으로 모두 64개의 조합이 생성됩니다. 이 64괘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존재 양상과 변화 체계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게 역易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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