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동서 융합의 세계 제국을 향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사인물탐구]

BCE 480년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강적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곧 그리스의 전체 도시국가가 둘로 나뉘어 싸우는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BCE 431~BCE 404)이 벌어졌고, 그리스 세계는 쇠퇴기로 접어들어 도시국가 사이에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의 상황이 되었다. 그때 그리스 북쪽에 있는 마케도니아Macedonia에서 23세에 왕이 된 필리포스Philippos는 3년 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얻었다. 고대 정복 군주의 대명사이자 헬레니즘 제국을 창시한 위대한 인물,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이 출생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벗들


알렉산드로스가 강력한 정복 군주로 성장하고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자질도 있었지만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과 환경 요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 인적, 물적 요소들을 살펴본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아버지 필리포스Philippos 2세는 어린 시절 테베에 볼모로 있으면서 그리스의 선진적인 문화와 군사 전술을 익혔다. 이를 본국으로 가져와 최강의 군사력으로 길러 냈다. 기병과 궁수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켰고, 보병은 팔랑크스라는 밀집 방진대를 도입하여 장창과 단검으로 무장시켜 정예 직업 군대로 만들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큰 자산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 올림피아스
어머니 올림피아스Olympias는 알바니아 국경 부근 산악 지대 에피루스의 왕 네오프톨레미오스의 딸이었다.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가 14세 되던 해 사모트라키 섬에서 열린 종교 행사에서 처음 보고 반했다고 한다. 과격한 성격의 올림피아스는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의 광적인 제사 의식과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고, 뱀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었다고 한다. 둘의 결혼 생활은 성격 차이와 필리포스의 바람기로 인해 평탄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에게서는 무자비하고 현실적인 정치인의 면모를, 어머니에게서는 종교적인 모습과 다혈질의 성격을 물려받았다.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였다. 그는 스승에게서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문법, 음악, 기하학, 수사학, 의학, 철학 등 인문학과 국가 통치 기술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그의 문화에 대한 존중과 애호는 이런 교육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리아스』 전쟁 이야기
알렉산드로스는 청소년기 때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를 동경하였고, 자신의 꿈을 키웠다. 원정 도중에도 책을 늘 곁에 두었고, 잘 때는 그 책을 칼과 함께 베개 밑에 넣고 잘 정도였다.

애마 부케팔로스
12세 때 알렉산드로스는 또 다른 생애 최고의 친구를 만나게 된다. 머리 부분만 보면 소로 보일 만큼 다른 말보다 체격이 무척 큰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빠르기가 여느 말에 뒤지지 않았다. 이름도 소의 머리라는 뜻을 가진 #부케팔로스Bucephalus#였다. 위압감도 대단하고 눈빛도 사납고 용맹한, 아무도 타 보지 못한 말을 알렉산드로스가 길들였다.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전투에 나설 때마다 목숨을 맡긴 말이다.

주변 정세와 왕위 계승


BCE 359년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강력한 세력 확장 정책을 꾀하여 그리스 지역을 위협하였다. 필리포스 2세는 이에 맞서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스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 원정의 초석을 다지던 중 BCE 336년에 암살되었다. 이에 부친을 계승하여 20세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제압하고 반마케도니아 세력의 중심인 테베를 잔혹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이를 통해 마케도니아를 배반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뒤 총사령관으로서 권위를 되찾고 이듬해인 BCE 334년 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동방 원정을 승리로 이끈 4대 전투


알렉산드로스가 구상한 계획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에게해 동쪽 연안을 평정하여 이 지역을 그리스 세력권 안에 두는 게 목표였다.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그를 끌어들인 먼 오리엔트 지역까지는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시와Siwa의 신탁을 받고 암몬의 아들 파라오Pharaoh로 등극하면서 그는 더욱더 동쪽으로 진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라니코스Granicus 전투
아시아로 건너온 알렉산드로스가 첫 승리를 장식한 곳은 그라니코스Granicus 전투였다. 북쪽에 펼쳐진 마르마라 해협으로 유입되는 그라니코스라는 이름의 강 양편에 펼쳐진 평원에서 싸운 전투였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21세였다.

■전략·전술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기병의 돌격으로 페르시아 적진에 쐐기를 박고 적의 진영을 분리시켰다. 다음으로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한 보병과 그때까지 공격 일변도였던 기병과 연대 작전으로 분리된 페르시아군을 포위 섬멸했다. “전쟁터에서는 주도권을 장악한 쪽이 승리한다”는 말은 알렉산드로스의 말이다. 모든 공격은 속전속결이었다. 이곳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지나치게 돌격해서 적에게 포위당해 죽을 뻔했다. 그의 친위 기병이 달려와 탈출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전투 승리로 알렉산드로스의 위상은 높아졌다.

■고르디온의 전설
알렉산드로스는 리키아의 팜피리아를 거쳐 고르디온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신전 기둥에 매여 있는 유명한 고르디우스의 전차를 보게 되었다. 이 전차는 산수유나무 껍질을 꼰 줄로 동여매여 있었는데,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전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검을 뽑아 단번에 그 매듭을 잘라 풀어 버리고 자신이 아시아를 지배할 자라고 선포하였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고르디우스 전차의 매듭을 푼 일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의지로 명쾌, 단순, 과감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소스Issus 전투
BCE 336년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 3세는 당시 40세로 재능이 있고 그리스어에도 능통한 왕이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군은 이소스Issus라는 낮은 언덕이 이어져 있는 평범한 평원에서 격돌하였다.

■다리우스와의 일전
BCE 333년 11월 초반 쾌청한 날씨 속에 이소스 전투가 벌어졌다. 충분한 수면을 취한 알렉산드로스는 승부수를 던졌다. 3천 명의 정예 기병 군단을 이끌고 페르시아군 좌익을 돌파하였다. 중앙 보병은 노장 파르메니온이 지휘하면서 적의 공격을 끝까지 견뎠다. 페르시아 좌익이 전투 능력을 상실하자 다리우스가 있는 중앙부 왼쪽 옆구리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중앙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기병대의 공격이 집중됐다. 목표는 대형 전차에 타고 있는 다리우스뿐. 황제만 쓰러뜨리면 승패는 끝이다. 위험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황제는 도망을 쳤고, 전열이 무너진 페르시아군은 말 그대로 괴멸되었다.

■이소스 전투 결과와 의미
페르시아 희생자 수는 보병 10만, 기병 1만이었다. 반면 그리스 군대는 450명뿐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로 들어온 이후 치른 전투 중, 가장 중요한 전투가 바로 이 이소스 전투였다. 페르시아 황제가 직접 거느린 군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고, 페르시아 황제는 스스로 전선을 이탈했다. 이는 많은 페르시아 지방관과 호족들이 황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했다.

압도적 승리를 거둔 그리스군은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 다리우스의 가족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 전투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감을 얻어 광대한 페르시아 동쪽 끝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시리아, 이집트 등을 점령하였고, 이집트 해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건설하였다.

가우가멜라Gaugamela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원정을 떠나기 전 성대한 제전을 열었다. 그리스의 극과 무용, 경기, 음악 경연 대회 그리고 성대한 종교 의식과 군대의 행진, 열병식이었다. 길고 고된 한여름의 행군을 겪은 뒤 BCE 331년 10월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페르시아 대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양측 규모
페르시아군은 20만의 보병과 4만의 기병, 낫이 달린 전차 200대, 여기에 15마리의 코끼리까지 가세한 최대 규모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군은 4만 보병에 7,250명의 기병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전략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지휘 계통이 명확했다. 최고 사령관에서 말단 병사까지 끈으로 이어져 있어서, 병사들은 모두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페르시아 진형을 본 알렉산드로스는 전략과 전술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하지만 공격을 담당하는 우익(망치)과 개전 후 전반전에 적의 공세를 견디는 중앙(모루)의 임무는 변함없었다.

■수뇌부 공격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페르시아의 위협적인 전차를 무력화시켰다. 그 뒤 페르시아 좌익과 다리우스가 있는 중앙의 틈 사이로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콤파니온# 기병 군단이 돌격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앙의 군단도 공격을 개시했다.

적의 수뇌를 직접 공격하여 결판을 내는 것, 이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알렉산드로스가 선택한 탁월한 전략이었다. 몸소 앞장서서 자신에게 창을 던지는 알렉산드로스를 본 다리우스는 자신감을 잃고 전차에서 뛰어내려 말을 타고 도주하였다. 왕의 도주로 급격히 사기를 잃은 페르시아군의 주력은 궤멸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전연승이었다.

■정복 또 정복
알렉산드로스군은 잇따라 바빌론을 점령하고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하였다. 다리우스는 역심을 품은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타도했다. 페르시아는 멸망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들에게서 흑해나 카스피해, 아랄해의 북쪽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믿고 있던 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 대전투 ‘히다스페스Hydaspes’ 전투
마침내 BCE 327년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가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BCE 326년 봄, 그는 인도에서 포로스 왕의 대군과 히다스페스Hydaspes 강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여기에서도 알렉산드로스는 속공을 위주로 하면서 적을 늪지로 밀어 버렸다. 인도의 코끼리 부대도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여러 곳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결국 굴복시켰다. 끝까지 분투했던 포로스를 왕으로 대우했고, 동맹 관계를 맺었다.

■부케팔로스를 잃다
여기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애마 부케팔로스를 잃고 말았다. 만남부터 17년 동안 인마일체人馬一體로 그가 목숨을 맡기며 모든 전투에 참전했던 애마였다. 말은 노령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소와 달리 그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름을 부케팔리아Bucephalia라고 하였다.

귀환
승리는 하였지만, 그의 부하들은 더 이상 미지의 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인도의 낯선 환경은 적응하기 힘들었고, 나쁜 기후는 그들을 괴롭혔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랬다. 가장 충실한 부하들조차 그의 뜻에 반대하였고, 점괘 역시 흉조로 나와 알렉산드로스는 귀환을 선택하게 되었다.

■영광의 절정에서
BCE 324년 2월에 페르시아 제2의 수도 수사(엘람의 도시)에 귀환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부하 장수들과 페르시아 여인들의 합동 혼례를 주선하여 정복지의 여러 계층을 혈연을 통해 맺어 주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세계의 모든 인류가 동질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런 시도를 하였다.

■서방 원정을 꿈꿨으나
그는 바닷길을 따라 아프리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지중해로 돌아오려고 생각하였다. 그곳으로 진출하려면 당시 서부 지중해 최강 세력인 카르타고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1천 척 정도의 군선을 건조하고 원정의 출발만 남겨 놓은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는 이름 모를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BCE 323년 6월 13일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인간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


두 얼굴의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는 극단과 모순에 찬 사나이였다. 교양과 박식함, 소탈하고 인간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위대한 왕이자 두려움 없는 거친 용사의 이미지가 있다. 자제력과 방종, 관대함과 잔인함의 극단을 오고 갔다. 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 계모로 인해 여러 번 생명에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서 왕위 계승이 불투명해지기도 하고, 독살이나 암살 시도가 있었던 근원적인 불안정 때문이지 않은가 싶다.

지도자로서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적인 용기와 대담함을 모두에게 각인시켜 병사들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결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신하들을 함부로 다스리지 않았다. 자기 확신과 신념으로 가득 찬 지도자였지만 부하들에게 강압적인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부하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득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수직적 신분 관계에 따른 표면적인 복종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판단에 따른 복종을 원했다.

그가 남긴 것들


정치적 안정과 세계 제국 등장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으로 그리스를 포함한 지배 영역이 왕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오리엔트 지역의 국가와 민족을 나누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 중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여러 곳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도시를 건설했다. 대표적인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이곳은 군사 기지이자 경제적 기지가 되었다. 이곳에 병사들이 상주하고 치안도 안전해지면서 사람과 물자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졌다.

군사 혁명과 서양 병법의 원조
알렉산드로스는 전투를 치르면서 진보해 나갔다. 처음 페르시아가 동경해하던 스파르타 중무장 보병을 진화시켜 거대한 고슴도치를 닮은 ‘팔랑크스’를 제대로 활용했다. 여기에 기병과 보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기본적인 전술이랄 수 있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기병과 보병을 각각 잘게 나누어 기동성을 향상시켰다. 그래서 군장은 더 가볍게, 무기는 더 다루기 쉽게 하고, 소부대로 상황 변화에 빠르게 대처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전투에서 보여 준 여러 모습은 그의 뒤를 이은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등의 서양 명장들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서구 문명의 뿌리, 헬레니즘Hellenism 문화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비롯된 동방 원정이다. 그는 아시아 대륙을 정복한 최초의 유럽인이었고, 정복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세계적으로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나타났다. 이를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라고 한다.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지역 전체에 오랫동안 상당한 통합력으로 작용하였고, 세계 제국 로마로 유입되어 #서양 문명의 근간#으로 뿌리내렸다. (정리·이해영 객원기자)


알렉산드로의 속전속결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은 속공을 위주로 한 무척 단순한 편이었다. 아군의 피해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전쟁이란 어차피 이기는 쪽이 모두 갖는 것, 후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황 자체를 아예 처음부터 전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마케도니아군은 정신적으로 강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만약에 지거나 비기거나 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의 리더십 차이
다리우스는 대제국의 수장이다. 늘 많은 고문관을 포함하여 간언하기 좋아하는 신하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온건한 성향이어서인지 다리우스는 무엇을 결정하기 전 모두의 의견을 들었다. 물론 결정을 내리는 이는 다리우스이지만, 확고한 생각 없이 의견을 청취했기 때문에 결단 직후부터 망설이기 일쑤였다. 최고 지도자가 고민에 빠지면, 휘하 장수들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명령이 언제 바뀔지 모르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실패하거나 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지휘관들조차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으니 그 명령에 따르는 병사들도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전략과 전술은 고사하고 전투 의욕마저 공유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반대였다. 결정은 독단적이었다. 작전 회의를 하긴 해도 이는 전략과 전술을 설명하고 회의를 끝내는 일이 많았다. 물론 장수들에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이 동세대에 속하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독단적이었지만, 유연성도 겸비했다. 전쟁터를 직접 눈으로 본 뒤에 갑자기 부대 배치를 변경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변경할 때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부터 소부대 부대장까지 충분히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최고 사령관에서 말단 병사까지 승리에 대한 의욕을 공유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은 육체로 싸우는 데 반해, 총사령관은 두뇌로 싸우는 것이다.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로. 아군이 공포에 빠지지 않게 하면서 적에게는 공포를 안겨 주는 바로 이 한 점이 요체였다.

콤파니온Companion(왕의 동료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강력한 친위부대가 있었다. 대부분 마케도니아의 지배층 출신 젊은이로 콤파니온Companion, 즉 동료들이라고 불린 기병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8개 중대로 나누었고, 1개 중대의 구성원은 250명이었다. 적을 향해 돌진할 때 늘 앞에 서는 알렉산드로스를 따랐던 제1중대가 왕의 경호를 맡는 친위대였다. 가장 높은 전사율을 가졌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상황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로스였기 때문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Hammer and Anvil TACTIC
망치는 쇠를 치는 역할이고 모루는 쇠를 불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이다. 기병을 주공主攻부대로 하고 보병을 조공助攻부대로 운용하여, 망치에 해당하는 기병이 적을 타격하는 동안, 모루 역할인 보병이 저지 부대로 적을 붙잡아 놓는 방식이다. 조공은 적을 유인하여 주공이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때까지 버텨 주면서 적을 저지해 한곳에 가둬 놓고, 주공은 기동력을 이용해 적을 포위하여 중간에 낀 적을 섬멸하는 방식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는 정병正兵과 기병奇兵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제5편인 세勢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범전자凡戰者는 이정합以正合하고 이기승以奇勝이라. 무릇 전쟁은 정병(정공법)으로 대처하고 기병(임기응변)으로 승리를 쟁취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길은 동서양이 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허승일 외, 도서출판 길, 2006)
『그리스인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이경덕 옮김, 살림출판사, 2018)
『역사를 바꾼 세계 영웅사』(스펜서 비슬리 외 지음 이동진 옮김, 해누리, 2018)
『난세에는 영웅전을 읽어라』(김욱, 쌤앤파커스 , 2013)
『전쟁 연대기 1』 (조셉 커민스, 김지원 옮김, 니케북스, 2013)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존 워리, 임웅 옮김, 르네상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