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조선의 자존심 경복궁景福宮

[한문화]
이해영 / 객원기자

궁궐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제 광화문 앞에 섰습니다. 그렇다고 쑥 들어가지는 마세요. 조금 천천히 궁궐의 외곽부터 살펴보면서 가 보죠. 일단 광화문 앞 좌우에 있는 석상에 관심을 보여 주세요. 바로 해태獬廌 또는 해치邂豸라고 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입니다. 해태는 서울특별시 상징 동물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2010년 광화문 복원 때 원래 있던 곳에서 조금 앞쪽으로 옮겨 앉은 해태상은 지금도 여전히 궁궐 지킴이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파수군 해태
해태는 신선이 먹는다는 멀구슬나무 열매만 먹는, 둘레에 파리 한 마리 꾀지 않는다는 성스러운 짐승입니다. 해태는 본래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다고 합니다. 뿔은 얼핏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있긴 있습니다. 찾아보면 머리 위에 말려 있는 뿔이 보일 것입니다. 해태는 다투는 사람 중 옳지 못한 자는 뿔로 들이박거나, 물어 버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灋을 뜻하는 옛 글자에는 해태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법과 정의를 세우는 해태이기에 조선 시대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는 대표적 사법기관인 사헌부司憲府 앞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헌부는 오늘날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중간 어디쯤에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 해태는 자리를 계속 이동하다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그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네요. 그러니 궁궐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해태에게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면 어떨까요?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의 시비곡직을 제대로 가려 주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요.

조선의 법궁 경복궁


새 왕조의 궁궐 경복궁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 재위 3년인 1394년에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 이듬해에 창건한 조선의 법궁이 경복궁입니다. 이곳은 고려 숙종(1096~1105) 때에 만들었던 고려삼경 중 하나인 남경南京의 궁궐터 자리로, 원래 터가 작아서 백악산 아래 남쪽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짓게 되었습니다.

경복의 의미
초기 경복궁 규모는 총 755간 정도였습니다. 새롭게 궁궐을 완성한 태조 이성계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베풀고, 정도전에게 여러 전각의 명칭을 짓게 하였습니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 편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만년토록 군자의 큰 경복景福일러라”라는 구절에서 궁 이름을 지었습니다.

경복궁의 수난
이후 경복궁에는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습니다. 목조 건물의 취약점은 바로 화재였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수축과 증축을 통해 규모가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난민의 방화로 전소된 후 여우와 이리가 출몰하고 풀만 무성한 터로 방치되었습니다. 훗날 고종 2년인 1865년에 와서 중건되기 시작하여 현재 우리가 만나는 경복궁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궁궐 이해의 열쇠, 양궐 체제
법궁
임금이 어느 궁궐에 들어가 사는 것을 임어臨御한다고 하는데, 임어하는 궁궐 중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法宮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법궁은 전기에는 경복궁, 후기에는 창덕궁입니다.

양궐 체제
임금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려면 법궁 하나만으로는 곤란합니다. 화재가 나거나 궁궐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길 경우 등 여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다른 궁궐이 필요합니다. 이런 궁궐을 법궁과 구분하여 이궁離宮이라고 합니다. 격은 법궁보다 한 단계 낮지만 임금의 공식 활동 공간으로 필요한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춘 궁궐입니다. 어느 한 시점에서 동시에 쓰인 궁궐은 크게 보아 법궁과 이궁 둘입니다. 법궁과 이궁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전란으로 궁궐이 불타 없어지거나 다른 궁궐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역할은 바뀌는 것이죠. 궁궐의 역사는 영건營建과 훼손,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사대문


이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통해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에는 광화문 외에도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있습니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사대문을 세울 때 대들보를 올리는 상량上梁하는 날과 시간을 달리했습니다. 이는 각 방향에 따라 길한 날짜와 시간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동문인 건춘문은 오행五行상 동쪽에 해당하기에 봄 춘春 자를 넣었습니다. 광화문이 왕권의 정통성과 왕도 정치의 이상을 그려낸 문이라면, 건춘문은 만물의 처음 생겨남과 왕조의 무한한 발전과 용덕龍德을 상징하는 문입니다. 용덕이란 용이 하늘을 날아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땅 위의 만물을 적셔 주는 것처럼 군주 또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천하의 인민들을 유익하게 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건춘문에 새겨진 해와 용, 만세축수萬歲祝壽, 건원조현乾元朝玄, 진색가창震索駕蒼 등의 글씨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상징성은 큰 문이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고, 종실이나 외척 등이 종종 출입하였던 문입니다.

서문인 영추문은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오행상 서방은 가을이고 색은 백白색입니다. 신료들이 궁중에 드나들 때 주로 사용하는 문입니다. 조선총독부 공사를 위한 전차선로 가설로 지반이 약해져 서쪽 궁장이 무너지자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재건할 때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고 위치도 북쪽으로 올라가 동쪽 문인 건춘문과 축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본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영추문의 무표정한 고독이 너무나 처절해 보입니다.

북문인 신무문은 현무문玄武門이라고 합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형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르는 현무문의 변은 장안성 북쪽에 있던 문입니다. 북쪽은 오행상 물기운(水氣)으로 북현무라고 합니다. 청 4대 황제 강희제의 본명이 현엽玄燁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신무문이 되었습니다. 임금이나 성인의 이름 글자를 피해서 사용하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합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잘 사용하지 않은 글자나 새로 글자를 만들어 이름을 지었습니다. 신무문은 궁의 북쪽에 있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일대) 등에서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였습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때 경복궁 안에 군대가 주둔하면서 오랫동안 닫혀 있다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개방되었습니다.

명당수 위의 다리 영제교永濟橋


흥례문興禮門을 지나 조정에 나아가다
광화문에 들어서면 동서로 행각行閣을 거느린 흥례문이 눈앞에 다가섭니다. 예를 흥하게 한다는 의미의 흥례문은 근정전 진입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철거된 것을 복원한 것이죠.

명당수 위 영제교
이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로 동서를 흐르는 명당수明堂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명당수 위에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고 하고, 각 궁궐마다 명칭은 다릅니다. 경복궁은 영제교,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입니다.

다리는 이곳과 저곳을 연결시켜 주는 의미와 함께 두 공간을 구분지어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사찰에 가면 반드시 절 입구에 작은 개울과 다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곳은 속세이고 저쪽은 서방 정토, 극락이다 하는 셈이죠. 그러면서 다리는 속세와 불국토를 이어 준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궁궐의 금천교 같은 경우에는 다리 이쪽은 일반 서민들의 일상적 공간이고, 다리 저쪽은 임금 같은 신성한 존재 또는 아주 공적인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겠죠.

경복궁의 영제교 주변에는 물을 다스리는 용의 석상과 사악한 기운을 제어하는 벽사辟邪의 능력을 지닌 천록天祿 네 마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천록은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정수리에 뿔이 하나 돋아 있는 신령스러운 동물이죠. 흥례문 쪽에 있는 한 쌍은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하면서 점검하는 자세입니다. 근정문 쪽 한 쌍은 서로 마주보면서 나가는 이들을 배웅하는 자세입니다. 영제교를 편안하게 건너고자 한다면 이 친구들에게 아는 체 눈인사라도 해 주세요.

부지런히 다스리는 근정전勤政殿


박석薄石에 담긴 미학
임금님을 뵙는 건 이렇게 어렵네요.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에 들어서면 어도御道가 북으로 곧게 뻗어 있고, 그 끝닿은 높은 2층 월대 위에 중층의 웅장한 건물이 서 있습니다. 경복궁의 중심 근정전勤政殿입니다. 근정전을 둘러싼 월대月臺와 계단, 난간, 돌조각상 등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햇빛 밝은 날에는 이것이 반사되어 은은한 빛이 근정전 처마 그늘에 부드럽게 스며들며 신비감을 더해 줍니다. 여기에 울퉁불퉁하게 박힌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은 햇빛을 난반사시켜 눈이 부시지 않으면서도 전각을 환하게 만듭니다. 달빛도 비춰 준다고 하네요. 박석은 화강암이라 파손 위험이 거의 없고 적당한 우툴두툴함은 가죽신을 신은 신하가 미끄러질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임금 앞에서 좀 더 조심스럽게 다닐 수 있게 해 주죠.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와 미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정전의 앞마당, 이곳이 바로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는 뜰인 조정朝廷입니다.

근정전의 숨은 뜻
근정전은 동쪽 회랑 남쪽 모퉁이에서 바라보는 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근정전을 바라보면 그 뒤쪽 사정전 지붕이 보이고, 근정전과 사정전 지붕 사이로 백악산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날렵하면서도 우직함과 고고함을 가진 근정전의 처마 곡선과 사정전의 용마루 곡선은 흰색 백악산 자태와 어울려 절묘한 조화미를 보여 줍니다.

정도전은 근정전의 이름을 지은 이유를 다음처럼 설명했습니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廢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치의 큰일이겠습니까?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편안히 한다 했습니다.”라고요.

근정전의 구조
근정전은 높습니다. 박석이 깔린 조정 바닥으로부터 기단을 두 층 올린 그 위에 지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러러보게 되었고,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평면의 정방형 건물입니다. 한 칸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660제곱미터, 약 200평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건축 역사상 정면과 측면 모두 5칸의 목조 건물은 근정전밖에 없습니다. 건물에 5라는 수를 적용한 것은 5황극, 즉 하늘 자리로서 천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물과 탄생과 성장을 주재하는 수, 5
동양에서는 1부터 10까지의 수數에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1,3,5의 홀수를 양수, 2,4,6의 짝수를 음수라고 합니다. 5는 1과 4라는 양수와 음수의 합에 의해 태어난 수로 음양 기운을 다 지니고 있어서 ‘중수中數’라고 합니다. 또한 5는 1과 9의 중간에 위치한 수로서 중심과 조화, 균형을 의미하고 생명과 우주의 질서에서 비롯되는 ‘역동적인 자연의 리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5를 중앙의 지극한 조화기운이라고 하면서 5토土라고 합니다. 5토는 만물을 낳고 기르는 생장의 전체 과정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5황극皇極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이 중앙 5황극은 천자, 왕, 임금을 의미했습니다.

천지일월이 담긴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일월오봉도란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해서 각 궁궐의 정전 어좌 뒤쪽에는 같은 그림 병풍이 놓여 있습니다. 혹시 만 원짜리 지폐를 가지고 계시면 한번 봐 주시겠습니까?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 겹쳐진 그림이 보일 것입니다. 바로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입니다.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땅에는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와 쏟아져 내리는 두 줄기 폭포수, 붉은 소나무 그리고 푸른 물결 등의 영원성을 지닌 자연의 소재를 청적황백흑靑赤黃白黑의 오채五彩로 화력하게 채색한 그림입니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이 병풍 앞에 앉는다고 합니다. 일월오봉도는 고려 시대에는 보이지 않고 조선 시대부터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멀리 행차할 때도, 죽어서 관 속에 누워도, 심지어 어진 뒤에도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임금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 기록화에는 임금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 대신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었습니다. 임금의 일생과 함께한 일월오봉도. 그 화려한 위용으로 왕조의 번영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일월오봉도의 의미- 일월
일월오봉도는 매우 깊은 상징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일월日月입니다. 해와 달이죠. 해와 달은 음양오행의 근본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과 양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천체라고 할 수 있죠. 해와 달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 아래 떳떳한 임금으로 음과 양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하늘의 도를 따르고 민심을 살펴 백성들이 편안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게 임금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일월오봉도의 의미-오악
오봉五峯은 우리 본래의 산신 신앙과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불선 삼교의 원형문화인 신교문화에서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연물인 산에서 상제님을 비롯한 천신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는 이 신교문화의 종주국으로 배달 시대 이래로 천제를 지내 왔습니다. 이 천제는 산신에게 제사 지내며 비 내리기를 기원하기도 하고, 수호守護와 구병救病 등을 빌었습니다. 이런 문화는 조선 중기까지 면면히 이어 왔고, 우리 가정으로 들어와서는 조상님에 대한 제사 문화와 칠성 신앙이나 조왕신 신앙 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산신은 신앙의 대상이요 국가를 지키는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죠. 우리나라는 백두산부터 해서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그리고 중앙의 삼각산을 오악이라 여겨 신앙해 왔습니다.

일월오봉도에는 임금을 향한 칭송과 나라 융성의 염원 그리고 우주 변화 원리에 대한 외경심과 오악 숭배 사상 등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 신명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화락함, 하늘과 땅이 서로 감응하는 상생의 모습, 인간 사회에서 상하가 베풀어 주고 보답하는 근본적인 도리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 그림 속에 조화롭게 융합된 일월오봉도는 그 뜻을 알고 보는 이에게는 더 신비롭고 환상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한 곳에서 이 그림을 가만히 보노라면 넘실대는 파도 위에 솟은 다섯 개의 봉우리와 좌우 대칭이 상당히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음양오행陰陽五行
우주는 음陰과 양陽이라는 서로 다른 두 기운이 결합하고 분열하면서 생성, 변화합니다. 거기서 하늘과 땅, 인간과 만물이 태어났습니다. 이 음양이 구체적으로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라는 오행으로 변화하여 순환합니다. 음양이 순환하는 구체적인 변화의 틀을 바로 오행五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화금목이라는 사상四象이 동서남북에 음양의 구조로 짝을 이루고 그 중심에 스스로 화생한 ‘토土’가 위치해서 수화금목의 변화를 조화시킵니다. 결국 이 다섯 가지 기운이 나아가고 들어가고, 가고 오는 과정에서 우주가 지속적으로 순환하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천장의 용과 답도踏道의 봉황


근정전 천장의 용
이제 시선을 근정전 천장으로 돌려 보세요. 천장 위에는 황금빛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고 있습니다. 위로 뻗은 붉은색 기둥이 천장을 더욱 높은 데로 추어올려 놓아 용들이 마치 천상의 세계에서 노니는 듯합니다. 용의 주변에는 황홀한 채색 구름 조각이 어지러이 날리고, 그 사이사이 어두운 공간은 아득한 우주 저 너머의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이 황룡은 월대 사방에 배치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네 방위신의 중앙에 군림하며 경복궁은 물론 천지 사방을 관장하는 임금의 상징입니다.

용의 승천은 지극한 상서로움이요, 지존의 자리에 오름을 의미합니다. 용은 승천하면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조화를 부립니다. 용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온 땅을 적셔 풍요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이와 같이 임금도 백성들을 이롭게 해 주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죠. 이 용과 짝을 이루는 동물이 근정전 남쪽 계단 중앙의 답도에 있습니다. 바로 천지의 불기운을 관장하는 봉황입니다.

답도의 봉황鳳凰
근정전 남쪽 계단 앞 넒은 마당은 만조백관이 임금을 우러러 조회하는 공간이고, 그 위는 임금이 군림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계단 중앙으로 가마를 탄 임금이 지나가는 길인 답도踏道에 새겨진 문양은 나라의 정치적 이상과 빛나는 문물제도를 상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복궁 근정전 답도에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구름 사이를 날고 있는 한 쌍의 봉황이 있습니다.

봉황은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을 함께 부르는 말입니다. 봉황은 여러 짐승들의 여러 부위를 조합하여 관념 속에서 만들어낸 신조神鳥라고 합니다. 봉황은 몸과 날개가 오색 빛으로 찬란하며, 다섯 가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 밖을 날아가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에 깃들여 살면서 태평성대 시기에만 세상에 나온다는 최고의 상서祥瑞를 지닌 신수神獸입니다.

용봉의 춤
그래서 역대 조선의 왕들은 궁전 뜰 앞에 봉황이 항상 노닐고, 격양가 울려 퍼지는 그런 태평성대를 꿈꾸었습니다. 연회를 베풀 때 근정전 앞마당에서는 조선의 발전과 왕실의 번영을 노래하는 봉황음鳳凰吟이 연주되고, 태평성대를 거리낌 없이 즐기며 봉래의鳳來儀를 추었을 것입니다. 화려한 춤과 아름다운 노래가 뜰 안에 가득하고, 답도의 봉황도 군신과 함께 춤을 추는 그런 세상, 바로 근정전 월대의 봉황에는 그런 정치적 이상향에 대한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경복궁 근정전을 깊게 보니 놀라운 우리 문화 코드들이 많이 있죠. 이제 근정전 앞에 서면 푸른 하늘에 용과 봉이 함께 어울려 상생과 평화의 노래와 춤을 추는 거 같지 않을까요?

일월 성신聖神의 상징, 용봉龍鳳
천지를 대행하여 만유 생명을 낳고 다스리는 광명의 주체가 해와 달, 즉 일월입니다. 그 일월의 조화를 다스리는 자연신이 바로 용과 봉황입니다. 달의 광명을 상징하는 용은 물의 조화를 짓고, 태양의 광명을 상징하는 봉황은 불의 조화를 다스립니다.

흔히 용봉 문화의 원류가 중국이라고 알기 쉬운데, 본래는 우리 배달 신교문화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용봉 문화는 환국. 배달. 조선으로 이어지는 우주광명 문화의 원주인공을 상징합니다. 또한 용봉은 우주 절대자인 상제님을 대행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동방 한민족은 태고 창세 시대부터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고, 이를 주관하는 이가 상제님의 대행자인 천자입니다. 천자는 천지 광명의 심법을 열고 상제님의 덕화와 가르침을 받아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 천자의 상징이 바로 일월 용봉입니다. 용은 이미 알려져 있듯 천자의 상징물로 조정의 건축물이나 기물器物에 조각되어 있고,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의 문에는 봉황을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 했습니다.

서양에서는 용을 상징으로 하는 북방 기마 민족이 침입을 했기 때문에, 용은 매우 사악한 존재로 왜곡되었습니다. 기독교 확산으로 신의 은총을 방해하는 악마와 이교도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죠. 봉황은 그리핀Griffin이나 불사조 등으로 인식되어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동서양은 용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있지만, 왕권과 천자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月臺에 펼쳐진 우주


근정전 기단에는 본래 임어한 임금을 호위하는 군인들이 도열하여 위의를 더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난간에는 군인들만 도열한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한 호위병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기단 주위에는 각종 돌짐승들이 계단 기둥 외에도 근정전 전면 계단의 좌우 소맷돌 부분, 난간 모퉁이 요소요소마다 배치되어 있습니다. 근정전 기단에 있는 돌짐승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신四神입니다. 사신은 중앙의 나를 전후좌우에서 지켜 주는 신령스런 짐승입니다.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를 말합니다. 본래 사신은 동물 형상으로 파악한 동서남북 사방의 별자리 이름이기도 합니다. 청룡은 각角 항亢 등 7개 성좌를 총칭하며 동방 목 기운을 맡은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하고, 백호는 규奎 루婁 등 7개 별자리로 서방 금 기운을 맡은 태백신太白神을 이릅니다. 주작은 정井 귀鬼 등 7개 별자리로 남방 화 기운을 맡아 불을 다스리는 태양신太陽神을 가리키며 붉은 봉황의 형상으로 묘사하고, 마지막으로 현무는 북쪽의 두斗, 우牛 등 7개 성좌로 북방 수 기운을 맡은 태음신太陰神을 상징합니다.

다음에는 바로 십이지신十二支神입니다. 십이지란 지지地支 열둘, 즉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12방위 12동물을 나타냅니다. 올해(2019년)는 기해己亥년으로 돼지해죠. 이런 동물들이 방위에 맞게 석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사신이나 십이지신 같은 동물의 석상을 궁궐의 정전 주변에 배치한 예는 우리 궁궐에만 있는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들, 통칭하여 서수瑞獸들입니다. 근정전의 동물 석상을 보면 알겠지만 위협적이거나 괴기스러운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전통 민화에서 받는 인간미와 해학, 친근감, 포근함, 그런 느낌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정감이 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자꾸 쓰다듬게 됩니다. 어수룩하면서도 유연하고 순진하면서도 졸렬하지 않은 동물상에서 우리는 우리 본래의 어진 심성을 발견하게 되는가 봅니다. 조선을 세운 이들은 성리학자이지만, 문화 저변에 깔려 있는 우리 본래의 심성까지는 숨길 수 없었을 겁니다.

<참고문헌>
『증산도의 진리』 (안경전, 상생출판, 2014)
『개벽실제상황』 (안경전, 대원출판, 2009)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하』 (홍순민, 눌와, 2017)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새벽숲,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