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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보는역사]

    근대사 | 경술국치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 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을 잠시 다른 나라에 넘겨주고 천운天運을 기다리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이 다르므로 차별과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 없을 것이요 청국으로 넘기면 그 민중이 우둔하여 뒷감당을 못할 것이요 일본은 임진란 후로 도술신명道術神明들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일본을 도와 잠시 천하통일天下統一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에 역사를 하게 하리라. (도전 5편 176장)


    조선을 맡길 나라가 필요하다!


    당시 조선은 오랜 폐쇄 정책으로 서구의 문명 기술에 눈을 닫고 있었다. 내정은 부패와 착취 행위가 만연하여 나라 전체가 더 이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당시 조선은 치열한 생존 경쟁이 펼쳐지는 국제 무대에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상제님 입장에서는 조선을 잠시 맡아서 보호해 줄 나라가 필요했다. 한반도 주변 강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러시아가 있다. 상제님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 차별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셨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인종이 다른 아프리카와 중남미, 아시아 대륙에서 범한 잔인한 범죄 행위를 보라. 그들이 행한 광범위한 인종 학살, 고유한 문화 말살, 그리고 집단 이주 정책은 한 민족을 멸망의 경계로 몰아갔다. 그 다음 중국을 보자. 상제님의 해답은 ‘그 국민성이 우둔하여 조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의 한족漢族은 자기 스스로 나라를 세운 적이 없다. 역사의 격변기가 되면 항상 그들이 오랑캐라고 불러 왔던 동이족들이 중원 땅에 나라를 세웠고, 한족은 자연스레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을 서양 제국주의의 칼날로부터 지켜서 잘 보호하고 있다가 별문제 없이 돌려줄 수 있는 나라가 필요했다. 상제님의 해답은 바로 일본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그들의 침략욕을 동양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는 힘으로 사용하셨다. 하지만 일본의 영유는 일시의 영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주인이자 문화 조국을 영원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 그 자체가 배사율背師律을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합방이 아니라 경술국치다!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칸코쿠 헤이고니 칸스루 조야쿠)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일방적인 위력에 의해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조약에 대해 한일병합조약으로 부르거나, 이 사건을 한일합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역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침략 당사국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한일병합’이 가치를 배제한 중립적인 용어라고 하는 것도 실상을 알고 보면 ‘영혼 없는 역사 해석’이다.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역사는 낭만적인 중립 지대가 없었다. 생존을 담보로 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가 국제 정치사였다. 게다가 우리는 일제 침략 행위의 최대 피해자가 아니던가? 우리는 이를 국권피탈國權被奪,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 불러야 합당하다.

    경술년의 주역들 8명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 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에게 ‘병합 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 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탄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하면서 일본 제국은 점차 ‘병탄’의 시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고 판단,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이 누출되어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 응원 병력과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이 경비를 섰다.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으로 불려 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의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 8명은 한일병탄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조선 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에서 ‘한일병탄조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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