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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인도의 이슬람 왕조, 무굴 제국의 창업자, 바부르Babur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가 살아남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피와 눈물을 흘리며 싸우고 방랑했으며, 이기기보다는 진 적이 더 많았던, 따뜻하게 지낸 밤보다, 별 보며 서리를 안고 노숙한 날이 부지기수로 많았던 지휘관이 있었다. 그에게는 조상 티무르가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고, 그럴 야심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만한 의지와 인내심을 지녔다. 결국 그는 꿈을 이루었고, 동시대 세계 최고의 부국을 연 창업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바부르Babur(재위 1526~1530), 인도에 무굴 제국을 연 인물이다. 이 글은 거듭된 실패를 딛고 일어선 그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맑고 투명하게 빛나리.
    그것이 타지마할
    오! 황제여, 그대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 시간에 마술을 걸려 했습니다.
    그대는 경이로운 화환을 짜서 우아하지 않은 주검을
    죽음을 전혀 모르는 우아함으로 덮었습니다.
    무덤은 자기 속으로 파묻고 뿌리내리며
    먼지로부터 일어나 기억의 외투로 죽음을 부드럽게 덮어 주려 합니다.
    -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 ‘타지마할’


    무굴 제국 전성기인 제5대 황제는 #샤 자한Shah Jahan#(재위 1628~1658)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뭄타지(애칭 타지, 본명 뭄타지 마할)의 영묘. 사이가 매우 좋아 8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두었다. 데칸 지역에서 14번째 아기를 낳은 뒤 산후욕으로 세상을 떠날 때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절대로 다른 여자와 재혼하지 말라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을 세워 달라고 하였다. 샤 자한은 두 약속을 모두 지켰다.

    타지마할은 ‘대리석의 환상’이라 불릴 정도로 섬세한 아름다움과 우아한 미를 지녀, 페르시아계 절세 미녀였던 왕비의 생전 모습을 보여 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를 당한 후에 ‘시간의 뺨에 떨어진 눈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타지마할을 매일같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 바부르Babur와 무굴 제국 연대표
    ●1483년 2월 23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페르가나에서 자히루딘 무함마드 바부르Zahīr-ud-Dīn Muhammad Bābur 태어남. 부친은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로 티무르의 4대손. 모친은 쿠틀라크 니가르 카눔으로 칭기즈칸의 15대손.
    ●1494년 부친이 사망하고 페르가나의 지배자가 되다. 이후 30년간 여러 고생 끝에 페르가나를 빼앗기기도 함. 이후 티무르 제국의 영광을 위해 절치부심 노력함.
    ●1526년 4월 21일 북인도 지역 파티파트에서 로디 왕조 술탄 이브라힘의 대군을 격파함. 곧바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니 바로 인도 마지막 왕조인 무굴 제국임. 이슬람 교도였던 바부르는 타 종교인들에게 관대한 지배자였다.
    ●1530년 재위 4년 만에 아들 후마윤이 병들어 눕자 자신을 대신 데려가라는 기도 끝에 건강했던 바부르가 죽음. 향년 47세. 초기 무굴 제국은 기초가 많이 부족했지만, 손자 아크바르 대제 때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음. 무굴 제국은 1526년부터 1857년 9월 영국에 멸망할 때까지 인도를 총 332년 동안 지배하였다.
    ●1530년 2대 후마윤Humayun 즉위.
    ●1556년 3대 아크바르Akbar 대제 즉위. 제국이 라자스탄, 구자라트로 확장되다.
    ●1600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 창설.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창설.
    ●1605년 4대 자한기르Jahangir의 통치.
    ●1628년 5대 샤 자한Shah Jahan의 통치. 1631년 뭄타즈 마할의 죽음 이후 타지마할 건설 시작, 1648년 타지마할 완공.
    ●1658년 치열한 왕위 계승 전쟁 이후 6대 아우랑제브Aurangzeb 즉위. 데칸 고원 이남을 정복하여 인도 역사상 최대 영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무굴 왕조의 새 시대가 열리다


    10만 대군을 무너뜨린 포성
    “쾅!” 커다란 대포 소리가 진陣 중앙에서 터지자 코끼리들이 마구 날뛰기 시작하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포성을 들은 병사들도 공포로 몸을 떨었다. 델리 술탄(정치와 군사적 실권을 쥔 이슬람 왕국의 지배자) 이브라힘의 10만 대군은 혼이 나갔다. 포탄 터지는 소리에 놀란 코끼리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였다. 날뛰는 코끼리에 밟혀 죽은 병사가 싸우다 죽은 병사보다 더 많은 지경이었다. 이브라힘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코끼리 부대가 무력화되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525년 조상인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했던 페르가나의 지배자 바부르는 술탄 이브라힘에게 혹독한 패배를 당한 알람 칸의 원조 요청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북인도로 향했다. 바부르는 이브라힘의 수도 델리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의 첫 번째 공격은 실패하였다.

    바부르군은 히말라야 산맥 앞의 구릉지를 따라 진군하다가 델리로부터 약 150km 정도 떨어진 파니파트라는 마을에서 멈추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수적 열세는 확연했다. 그의 군사는 1만 2천 명 정도였는데 그중 절반 정도만 공격 대열에 설 수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이브라힘군은 18만 대병에 1500마리 코끼리 부대가 있었다. 병력면에서는 이브라힘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우즈베크인과 수많은 전투를 치른 노련한 전략가 바부르는 이브라힘군이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임을 간파하였다.

    로디 왕조 마지막 술탄 이브라힘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억눌렀다. 부정부패를 막겠다면서 일가친척에게 조금도 혜택을 주지 않았다. 뜻과 의지는 고상했으나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제 나라와 왕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험해도 사심으로 뭉친 귀족과 일가친척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힌두교인으로 술탄과 종교가 다른 대다수 백성들도 그의 운명을 방관했다. 여기에 이슬람 지배에 항거하던 라지푸트 30개 부족이 바부르와 손을 잡고 그를 위협하였다. 힌두교도인 라지푸트가 보기에 바부르는 전쟁에 승리하여도, 자신의 고향인 중앙아시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난 바에 의하면 이는 착각이었다.

    안목과 전략이 부른 승리
    바부르군에는 당시 인도 대륙에 알려져 있지 않은 무기인 대포를 다룰 줄 알고 병법에도 능통한 투르크족 포병이 두 명 있었다. 16세기 초 인도에서는 총기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화약의 힘을 이용하는 총기보다는 활이나 검 같은 냉병기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군대의 정예 부대는 사수射手로 이루어져 있었다. 총기에 관심을 가진 바부르는 투르크 포병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장포나 화승총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난 대포에 흥미를 나타내, 포의 주조를 감독하며 포격 연습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일단 바부르는 오른쪽으로는 마을까지, 왼쪽으로는 강가까지 포진하고 그 사이에 군을 배치하였다. 좌우로 적이 우회하여 뒤를 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수레란 수레는 모두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 700개 정도의 수레를 모은 바부르는 이를 소가죽으로 묶어 군진의 앞에 늘어놓았다. 수레 뒤에는 화승총을 든 총병들이 포진하였다. 아울러 앞의 수레 벽에 몇 개의 틈을 두어 뒤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뛰쳐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포진은 당시 총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바부르는 적의 공격을 자극하기 위해 밤을 틈타 병사를 보내 적 보초를 약 올리게 하였다. 1526년 4월 21일 아침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브라힘은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브라힘군은 바부르군 진영이 파니파트 마을과 만나는 지점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 때문에 로디군의 좌군左軍이 너무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우군右軍은 뒤처지게 되었다.

    바부르는 적의 좌우가 흐트러지게 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병 예비대로 하여금 로디군의 우측을 우회토록 하였다. 그리고 중군의 일부도 이 공격에 투입시켜 로디군의 뒤를 돌아 그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로디의 우군은 좌군을 따라잡기 위하여 급히 움직이는 과정에서 대열이 흐트러지고 한 덩어리로 뭉쳐 버렸다. 이브라힘 좌군은 바부르군의 오른쪽 날개 부분을 무찔렀으나, 끝내 돌파하지 못하였다. 이에 바부르군은 총기와 대포, 그리고 활을 총동원하여 이브라힘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바부르군이 대포와 화승총을 발사하자 대포 소리에 놀란 이브라힘의 코끼리들이 이리저리 흩어졌고, 정신 나간 군인들이 살길을 찾아 줄행랑을 놓았다. 이브라힘의 10만 대군 중 겨우 6천 명만이 싸웠다.

    몽골지방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 무굴
    충성스럽고 잘 훈련된 바부르 기병대는 속전속결로 충성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싸울 줄도 모르는 이브라힘군을 유린하였다. 바부르는 직접 싸우지 않고 총과 야포를 가진 군대와 기병대를 이리저리 오가며 쉬지 않고 격려했다. 체스판을 들여다보며 말을 지휘하듯 통솔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술탄의 부하들은 후퇴를 권유하였지만, 술탄은 이를 거부하고 최후까지 싸웠다.

    정오의 더운 태양 햇살이 파니파트 지역에 작열할 무렵, 이브라힘 진영은 파괴되었다. 술탄의 시체가 바부르 앞으로 끌어내어졌다. 바부르는 영웅으로 죽은 이브라힘에게 한 나라의 지배자로서 마지막 예를 치러 주었다. 이렇게 로디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바부르는 곧바로 부당하게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목숨을 빼앗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의 기강을 잘 잡은 노련한 40대 장군 바부르는 아그라를 수도로 삼아 제국을 세우고 제위에 올랐다.

    일주일 만에 이브라힘의 수도 델리를 점령하였다. 델리 남쪽의 아그라에서 스스로 ‘파트샤’(힌두스탄의 황제)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전까지 인도의 이슬람 지배자들은 자신을 술탄Sultan이라 칭했으나 바부르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천상의 신이 지상에 내려 보낸 ‘신의 그림자’라고 여겼다. 이 왕조는 북부의 몽골 지방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페르시아어, ‘무굴Mughul’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제 인도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바부르, 제국을 꿈꾸는 정복자


    야망과 강인함으로 뭉친 인물
    “신(알라)의 은총으로 그 어려운 일이 쉽게 이루어졌다. 강력한 군대가 반나절 만에 먼지가 되었다.” 무슬림인 바부르는 일기에다 파티파트 승전의 공을 자신의 신앙 대상에게 돌렸다.

    이브라힘과 전투는 불과 반나절 만에 끝났으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길고도 고단하였다.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지나면서 바부르는 오뚝이처럼 수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강인한 감정적 복원력을 보여 주었다. 거듭되는 시련에도 주눅 들지 않는 야망과 놀라운 내적 탄성이 성공의 동반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바부르 나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티무르와 칭기즈칸의 후예로 태어나
    1483년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페르가나에서 출생한 바부르는 부계는 티무르, 모계는 칭기즈칸의 후예였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여러 부족이 오랜 기간 싸우고 교류하면서 투르크인과 몽골인의 피가 상당하게 섞였다. 그래서 이 시기 무굴인은 언어와 신체적 특징이 몽골인보다는 투르크인에 가까웠다. 현존하는 그의 초상을 보면 맑은 피부와 약간 길쭉한 검은 눈, 튀어나온 광대뼈 같은 용모에서 그가 중앙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1세에 아버지가 죽고 페르가나를 물려받았다. 전쟁터의 용감한 호랑이 바부르는 그의 작은 왕국을 탐내는 이웃 나라 왕들의 공격을 물리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꿈은 커져 갔다. 조상 티무르 제국의 사마르칸트를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줄기차게 진격하였다. 그 꿈은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사마르칸트는커녕 물려받은 페르가나마저 동생에게 빼앗겼다.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다. 말도 없이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과 한 천막에서 형제처럼 지내며 그들의 충성심을 얻었다. 그는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데 탁월했다. 고통을 견뎌 내는 것도 지배자의 덕목이었다.

    인도 정복의 야망을 불태우다
    1504년 바부르는 이삼백 명의 군사를 모아 눈 덮인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을 점령하였다. 카불은 상업의 요충지로 부유한 도시였다. 중국, 페르시아, 이란, 인도의 대상隊商과 상인들이 면제품, 설탕, 말, 노예를 팔기 위해 카불로 몰려들었다. 바부르는 여기서 더 넓은 세상을 내다보았다. 중앙아시아가 아닌 동쪽 인도 땅을 눈여겨보았다. 카불이 아무리 상업의 요지라도 좁은 산악 지대였다. 광대한 땅 힌두스탄, 인도의 부와 재물에 마음이 끌렸다. 이제 사마르칸트 탈환이라는 대업을 버리고 넓고 비옥한 인도를 정복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20년 뒤 네 번에 걸친 인도 정복의 실패 끝에 파니파트에서 승리하였다. 그는 참고 기다리며 야망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델리를 정복한 자가 인도를 정복한다’는 말이 있다. 황제가 된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과거 가즈니의 마흐무드 술탄이나 티무르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중앙아시아로 돌아갈 거라는 예상을 깨고 인도에 머물러 버렸다. 바부르와 연합하였던 메와르 왕국의 왕이자 라지푸트 연합군 사령관 라나 상가는 크게 당황하였다. 라나 상가는 백 번의 전투 경험을 가진 영웅 중 영웅으로 한쪽 팔과 한쪽 눈을 잃고 80군데 상처를 가진 전쟁의 베테랑이었다. 인도에 눌러앉은 바부르와 이슬람 정권을 끝내고픈 라나 상가와 결전은 필연적이었다.

    강한 군사를 만들고 이긴 비결
    일전을 앞둔 바부르는 지친 부하들의 사기를 돋우는 색다른 작전을 썼다. 이슬람을 믿는 부하들에게 라나 상가와 전쟁은 ‘지하드, 즉 성전聖戰’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술을 쏟고 술잔과 술병을 깨뜨렸다. 이슬람 계율을 지키겠다는 경건한 맹세였다. 그의 맹세는 무슬림 군인의 지지와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바부르는 애주가였다. 시인이자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술을 사랑했다. 싸우며 방랑하는 그에게 사랑과 평화의 상대는 오직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그런 애주가가 술병을 깨드렸다. 승부를 걸어야 할 때 거는 것. 바부르는 그랬다. 그의 금주 선언은 군대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전장에서는 힘보다 사기가 중요했다.

    1527년 인도의 황제라고 선포한 바부르는 라나 상가와 수도 아그라 부근 칸와하에서 맞섰다. 바부르 측 군대 8만 명과 5백 마리의 코끼리가 라나 상가 군대와 격전을 펼쳤다. 10시간에 걸친 팽팽한 전투였다. 승패를 가른 건 바부르가 가진 대포였다. 당대 인도에서는 신무기였던 대포와 화약을 갖추고 군사적 테크놀로지를 적절히 활용한 바부르군은 라나 상가를 이겼다.

    또한 바부르는 정보원을 고용하여 주변의 정세와 적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상대가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불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지푸트 왕들은 서로 경쟁 관계였다. 바부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저 적의 적은 친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라나 상가를 시기하여 그의 지휘를 잘 따르지 않았다.

    백성들은 그들의 전쟁에 무심했다. 누가 이기든 세금만 내면 똑같은 지배자라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았다. 반면 바부르군은 야망과 강력한 동기로 무장한 강한 군사들이 있었다. 고향인 터키, 페르시아, 아프간을 뒤로하고 바부르를 따르는 이들은 새로운 땅에 자신의 미래를 걸어야 했고, 그래서 이겼다. 승리로 제국 초기의 위기를 넘긴 바부르는 패장 라나 상가의 용맹을 칭찬하는 아량을 보였다. 아그라에 정착한 그는 곧이어 갠지스 평원을 넘어 동부 벵골 지방까지 군사를 보내 영토를 넓혔다. 재위는 불과 4년이었지만, 느슨하게나마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낭만 황제 바부르


    겸손하고 섬세했던 지배자
    사실 바부르는 인도를 싫어했다. 그는 인도의 더위를 싫어했으며, 인도 여성이 아름답지 않다고 싫어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온화한 기후를 즐겼다. 이곳에서 사냥과 자연 관찰에 열중하였다. 내향적이며 수줍으며 고독하고 겸손하고 단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이에게 베풀기를 즐겼다. 그리고 궁전의 화려함보다는 탁 트인 공간과 자연을 더 좋아하였다. 종교적이며 섬세한 문학 기질을 지닌 아마추어 시인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문명어인 페르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시를 애호하고, 매일 일기를 기록하였다. 또한 모국어인 투르크 차가타이어로 『바부르 나마』를 저술하여 수많은 중앙아시아 부족 중 돋보이는 자기 부족의 고유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바부르 나마Baburnama』는 후손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손자 아크바르Akbar 대제는 이 작품을 찬양하여 1590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고 원본에 없는 많은 세밀화를 그려 넣게 하였다. 이후 1826년에 영어로, 1871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알려졌다. 이 회상록에서 바부르는 놀라운 솔직함으로 불행했던 시절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기록하였다.

    재물을 나누고 제국의 기반을 쌓다
    이런 그가 인도에 머문 건 막대한 재물 때문이었다. 라나 상가와 결전을 치르기 직전 뜨거운 열대의 더위와 계속된 전투에 지친 부하들은 그에게 회군을 요청했다. 옛날 인도를 정복하던 그리스 알렉산더의 군사들이 인더스 유역에서 회군을 요구하고, 알렉산더는 군사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다 죽었고, 그 제국은 멸망했었다. 이때 바부르는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설득하였다. 바부르는 인도의 금, 은, 돈 그리고 몬순 뒤 날씨를 좋아하였다. 솔직함도 이런 솔직함이 없다. 하지만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무굴 제국은 장수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다. 바부르는 재물을 맘껏 누렸다. 오랜 세월 그를 걱정하며 고생한 가족들에게 승전보와 함께 상당한 양의 재물을 나눠 주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인과 노예까지 카불의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돈이 하사되었다. 또한 삶과 죽음, 명예와 굴욕을 함께한 부하들에게 보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남과 나누지 않는 재물은 진정한 재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화해와 양보를 가르친 고독했던 황제
    그가 죽을 무렵 무굴 제국은 지속적으로 전쟁을 계속하였다. 인도인들은 여전히 바부르를 외국인이자 침입자로 여겼다. 무굴 황제가 ‘우리’의 지배자로 여겨진 건 훗날의 일이었다.

    ‘사자’란 뜻의 이름을 가진 바부르는 아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맏아들 후마윤Humayun이 병에 걸렸고,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의사들은 마지막을 각오하라 하였고, 백전노장 바부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두 손으로 아들의 손을 부여잡은 그는 외로운 아버지로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그는 결국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 자신의 생명을 내걸며 기도했고, 그 결과로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 45세의 건강했던 황제는 얼마 뒤 이승에서의 시간의 닻을 내렸다. 사람들은 바부르의 제국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보았다. 빠르게 세워진 만큼 빠르게 무너지리라 보았다. 하지만 바부르에게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크바르란 손자가 있었다. 그는 바부르의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바부르는 잠시 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묻혔다가 그의 바람대로 고향 카불로 옮겨서 개울이 흐르는 언덕에 누웠다. 5대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은 고조부 바부르의 묘에 ‘천사 왕, 빛의 정원’이라고 새긴 비를 세웠다.

    제국을 세우고 4년 만에 죽은 그는 인도를 제대로 이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방인인 그는 고독하였다. 고독은 그의 동무였다. 이슬람 신자인 그는 과한 신앙과 격한 권력 투쟁이 보편적이었던 그때도 극단적으로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문제를 칼로 해결해선 안 되는 곳이 인도였다. 자신과 종교가 다른 다수의 백성들이 사는 이곳에서 바부르는 다양한 계절이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진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특성을 이해하도록 아들을 가르쳤다. 그에게 황제란 다른 종교와 화해하며 양보할 줄 알아야 함을 일깨웠고, 이런 지침은 후대 황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후계자들


    왕조의 안정을 이룬 아크바르 대제
    이슬람교도에 의해 건국된 무굴 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 신도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이었다.

    바부르가 목숨으로 지킨 2대 황제 후마윤Humayun(재위 1530~1540, 1555~1556)은 불안한 제국 초기를 겨우 수습하던 중 도서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고 제국은 다시 흔들렸다. 13살에 제위에 오른 3대 황제 아크바르Akbar(재위 1556~1605)는 중국 청淸나라 강희제의 삶과 유사하였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고 섭정(강희제는 오배, 아크바르는 바이람 칸)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 섭정을 제거하여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국을 공고히 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였다. 아크바르 대제는 라지푸트족과 결혼하였다. 그는 개방된 정신과 관용으로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정책을 확립하였다. 당시 데칸 지방을 제외한 인도 전역과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지배했다. 그는 힌두교도 중 실력 있는 자를 관료로 등용하고 이슬람교가 이교도에게 부과하는 지즈야jizyah를 폐지하는 등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지즈야는 이슬람권에서 피지배대상인 다른 종교인에게 부과한 인두세로 일종의 재산세요 불신앙세였으나 이를 과감히 없앤 것이다.

    17세기에 무굴 제국은 번영의 절정에 있었다. 국경은 점차 확장되었고, 궁전의 부와 화려함으로 제국은 동양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제국이 되었다. 1600년과 1700년 무굴 제국의 GDP는 각각 세계 2위와 1위였다. 농업 생산력이 점차 높아지고 상공업 역시 발달하였다. 제국이 농작물을 두 번 수확할 수 있는 기후와 넓은 영토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화약의 원료 초석과 직물의 수출 등 해외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여, 전성기의 제국에는 델리와 수라트처럼 인구 20만 명인 도시가 9개 있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동인도 회사가 그 부를 찾아 황제의 땅으로 몰려들었다.

    개혁의 부재가 부른 제국의 몰락
    아크바르 대제가 이룩해 놓은 국가의 안정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오히려 독약으로 작용했다. 후계자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이 같은 무감각은 왕권의 쇠퇴를 가져왔다.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재위 1658~1707)는 데칸 고원 이남을 정복하여, 최대 영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독실한 이슬람교도였던 그는 힌두교도의 관습을 무시하고 전 영토의 이슬람화를 시도하였다.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지즈야 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무리한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런 아우랑제브의 종교 정책은 비이슬람교도를 자극하여 반란으로 이끌었고, 유럽인은 이러한 분열을 틈타서 인도를 제압하였다. 18세기 인도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이 대결하였으나, 결국 영국이 인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1857년 세포이sepoy 반란을 진압한 후 영국은 무굴의 마지막 20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Ba hadur Shah II(재위 1837~1857)를 추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굴 제국을 폐지시켰다. 18세기 들어 민족적, 종교적 분열을 겪은 인도에게 영국의 지배는 일종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셈이다.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무굴황제』(이옥순, 틀을깨는생각, 2018)
    『무굴제국』(발레리베린스탱 지음, 변지현 옮김, 시공사, 1998)
    『처음 읽는 인도사』(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휴먼니스트, 2012)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1』(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이영주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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