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충무공 김시민과 임진왜란 (이해영)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
    (주1)
    과 임진왜란
    (주2)



    *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 안 삼장사는
    일배소지장강수一杯笑指長江水 한 잔 들며 장강 물을 웃으며 가리키네
    장강지수류도도長江之水流滔滔 장강의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파불가혜혼불사波不渴兮魂不死 저 물결 마르지 않듯 넋은 죽지 않으리
    -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국난 극복에 앞장선 김성일이 지은 시

    * 목사 김시민은 백방으로 계책을 내어 밤낮으로 왜적과 맞서 싸웠다.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 생사를 함께하자며 늘 군사들을 타이르고 격려하였다. 몸소 밥과 장漿을 가지고 배고프고 목마른 군사들을 분주히 찾아다니면서 구하였다. 탄환이 비처럼 쏟아져도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때때로 눈물을 흘리며 군사들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온 나라가 함몰되고 남은 곳이 적으니 다만 이 한 성에 나라의 명맥이 달려 있구나. 이제 또 이기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끝이다. 하물며 한 번 패하면 성안의 목숨이 모조리 칼끝의 원귀가 될 것임에랴. 아! 너희 장사들은 온 힘을 다해 용감히 싸우되 죽음을 각오하여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조경남 『난중잡록』 2, 임진 10월 6일


    ■ 충무공 김시민과 임진왜란 관련 연표
    ●1554년 갑인 명종 9년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상백전 마을에서 태어남.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고려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2세손. 자는 면오勉吾. 조선조 을사 명현의 한 사람인 김충갑의 셋째 아들임.
    ●1578년 무과에 급제 종 6품 훈련원 주부에 임명.
    ●1583년 북방 여진족 니탕개의 난에 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무공을 세움. 이때 신립, 이순신, 이억기 등도 함께 출정.
    ●1591년 진주 판관으로 부임함.
    ●1592년 임진년
    -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함. 무술년까지 칠 년 전쟁이 시작됨. 이날 저녁 일본군 선봉대 부산 영도에 침입.
    - 4월 14일 부산진성 함락 첨절제사 정발 전사.
    - 4월 14일 동래성 함락 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 4월 28일 조선 신립 충주 일원에서 일본군과 회전하나 궤멸됨.
    - 4월 29일 조선 조정 몽진, 5월 3일 일본군 한양 숭례문을 통해 무혈입성.
    - 5월 7일 이순신의 전라좌수군 옥포해전, 이후 연전연승함.
    -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정예 수군과 싸워 이김.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 좌절. 제해권을 장악.
    - 7월 8일 일본군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인 웅치와 이치로 진격, 조선군 격전 끝에 방어 성공(권율, 황진 등 활약)함. 이에 진주성에 대한 중요성 증대됨. 김시민 진해성에서 왜장을 생포한 공로로 진주 목사로 승진.
    -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일본군이 진주성 침공. 제1차 진주성 전투
    조선군 3,800명은 일본군은 3만 명을 맞아 치열한 사투 끝에 대승을 거둠(진주대첩). 김시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나 전투 마지막 날 맞은 총탄 치료 중 10월 18일 순국. 38세.
    ●1593년 2월 12일 권율의 육군 한양 서북쪽 행주에서 일군 격퇴(행주대첩). 6월 29일 진주성 2차 전투. 최경회 등 수비군 옥쇄(계사순의).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 전멸당하고(원균, 이억기, 최호 등 전사) 일본군 재침. 정유재란 발발.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명량鳴梁에서 기적적으로 일본 수군 격파.
    ●1598년 무술 11월 19일 경상도 남해도 노량露梁에서 조명 연합 수군 일본군과 결전, 이순신 전사함. 이후 일본군 퇴각하고 12월 11일 7년 전쟁 종전됨.
    ●1709년 숙종 35년 김시민에 대해서 영의정으로 추증 상락 부원군 추봉함. 2년 후 충무忠武란 시호를 하사함.

    들어가는 글


    무술년인 올해는 임진왜란이 종전된 지 420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은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고 나서 백제 부흥군과 일본 구원병이 합세하여 나당 연합군과 싸운 백강 전투 이후 벌어진 국제 전쟁이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조선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었고, 명과 일본은 왕조와 정권이 바뀌기도 하는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일본은 100년간 전국시대를 거치며 실전에서 단련된 30만에 달하는 세계 최강의 육군 정예병을 보유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은 문치주의에 흘러 군사력이 그다지 강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조선의 명장들과 의로운 군대, 그리고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의 침략 야욕을 꺾었다. 이 글에서는 육지에서 최강 일본군을 맞아 그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기고, 전쟁의 판세를 바꾼 1차 진주성 전투의 주역 충무공 김시민과 백성들 그리고 의병들의 이야기를 다뤄 보려 한다.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피의 폭풍


    조선 선조 25년 임진년(1592년) 4월 13일. 대마도에 모여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그의 사위이자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1진이 바다를 건너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7년 동안 조선 땅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고 간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부산포진에서 당상관급인 첨절제사 정발鄭撥과 동래성에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등이 저항하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전투력을 바탕으로 이를 손쉽게 무너뜨린 일본군은 전장의 피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수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제1진은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선산, 성주, 문경을 거쳐 조령을 넘은 다음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申砬의 조선 정예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여주, 광주廣州로 진격하였다. 충주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 정예군이 전멸된 이후 조선은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했다. 5월 2일 일본군 2진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고니시 부대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을 통과하며 서울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길을 따라 곳곳에 거점을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보급로를 끊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옥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면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일본군을 연전연패시켰다. 이런 일본군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는 보급로가 끊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은 진주성에 주목하였다. 진주성은 경상우도
    (주3)
    의 거진巨鎭으로 일대 방어의 중심이 되어 각처 의병과 함께 일본군을 막아 내어 후방 보급로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또한 전쟁 전체 국면에서 진주성은 조선의 곡창 지대인 호남으로 향하는 주요 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이든 일본이든 호남을 차지하는 일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지키고 막아주는 울타리)으로 그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당시 일본군이 육로로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다. 가장 빠른 길은 함안으로 진출하여 의령의 정암진에서 남강을 건넌 다음, 의령과 삼가三嘉(현 합천군 삼가면 일대)를 경유해서 거창으로 올라가 육십령六十嶺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곽재우郭再祐와 김면金沔이 이끄는 경상우도 의병의 활약으로 봉쇄되었다. 이에 무주 쪽으로 우회하여 전라북도 금산錦山(현 충남 금산)으로 해서 전주로 나아가려 했으나, 금산, 이치梨峙, 웅치熊峙, 진산珍山 등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호남 관군과 의병이 결사 항전을 하여 일본군 진출을 좌절시켰다.

    또 다른 길은 하동으로 진출하여 광양으로 가는 길인데, 이 길은 상당한 우회로였다. 여기에 남해를 돌아가는 길은 이미 조선 수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마지막 남은 길이 진주로 진출하여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남원으로 가는 길 뿐이었다.
    (주4)
    일본군은 경주 등지에서 밀려 서생포로 퇴각한 뒤 육지의 거점이 흔들렸다. 낙동강 주변 고을을 일시 점령했지만,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은 조선군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일본군 진영은 이 지역을 맡은 장수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등을 김해로 불러 작전 회의를 열고 진주성을 함락시켜 조선군 거점을 뿌리 뽑고, 전라도로 들어가는 통로를 뚫자는 데로 의견을 모았다. 9월 24일 일본군 3만 명이 창원을 향해 진군하면서 진주성 전투 서막이 올랐다.

    진주성 전투 일지

    (주5)


    10월 5일, 일본군 선봉이 출현하다
    일본군은 진주 동쪽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진주성 공격 이전에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부대를 공격,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진주성 동쪽 마현의 북쪽 봉우리 나타나 형세를 두루 살피며 군세를 과시하였다. 일본군 주 무기는 당시로서는 신무기인 조총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총 보유율은 전투원의 30%였다.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된 조총수의 병력도 4,500명 정도로 볼 수 있다. 이에 조선은 승자총통을 포함한 대형 화기로 대항하였다. 조선의 화기는 속도는 느렸지만 무엇보다 사거리가 우수하였다. 여기에 조선은 활쏘기에 능하여 성벽을 방어막으로 삼고 원거리 무기인 활로 대항하는 수성전은 최고 수준이었다.

    전투 발발 한 달 전에 진주 목사가 된 판관 김시민은 몇 달 동안 수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휘하 장수들과 협력 체제는 물론 백성들과 인화를 다져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이 한 몸이 되어 전투 준비에 임했다. 특히 화기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각종 총통 70여 병柄을 새로 주조하여 요처에 배치하고 사격 훈련을 실시해 왔으며, 화약 306㎏(510근)을 만들어 비축했다. 상당량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질려포蒺藜砲도 제작해 두었다. 비격진천뢰는 목표물에 나아가서 폭발하는 금속제 폭탄으로 일종의 수류탄이고, 질려포는 속이 빈 나무통에 마름쇠 또는 쇳조각을 많이 넣고 쏘아 폭발하면서 파편들이 살상하게 하는 화약 무기를 말한다. 한편 불로 공격하는 도구들을 준비하여, 종이에 화약을 싸서 묶은 섶 속에 넣고 이를 성 바깥으로 던져 공격했다. 또한, 일본군 공성무기가 성 가까이 붙어 올 때를 대비해, 이를 깨트리기 위한 자루가 긴 도끼, 낫 등을 준비하였고, 끓는 물을 들이붓도록 여장女墻(성가퀴, 서첩으로 성벽의 몸체 위에 쌓아 올린 낮은 담장) 안에 가마솥을 많이 비치했다. 이처럼 진주성 안에는 각종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비록 수는 적었지만 대항하는 위력은 대단하였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잘 대응하였다.

    김시민은 적의 도발에 영을 내려 적을 못 본 듯이 하며, 대응을 삼가고 화살 하나 탄환 하나라도 헛되이 쓰지 않도록 했다. 적이 공격해 오면 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적의 공세가 약해지면 그 틈에 맹공을 퍼부어 일본군이 막대한 양의 탄환을 허비하고 당황하게 하는 일련의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런 전술은 민관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만큼 김시민은 백성들의 합심을 이끌어 낸 것이다. 또한 성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잘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을 많이 쳤고, 성안에 있는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불러 모아 남자 옷을 입게 해서 군세를 웅장하게 보이도록 했다.

    10월 6일, 진주성이 포위되다
    일본군은 세 패로 나뉘어 산을 덮을 듯이 내려왔다. 한 패는 진주성 동문 밖 순천당산順天堂山(지금의 수정산水晶山으로 추정)에 진을 치고 성안을 굽어보았다. 다른 패는 개경원開慶院(현재 옥봉동 경류재慶流齋 자리)에서 곧장 동문 앞쪽을 지나 봉명루鳳鳴樓(진주 객사 남쪽에 있던 누각, 객사는 현재 평안동 롯데인베스 아파트) 앞에 늘어섰고, 나머지 한 패는 향교 뒷산으로부터 곧장 순천당산을 넘어 봉명루의 왜적과 합하여 한 진을 만들었다. 이윽고 일본군은 조총 일제 사격과 함께 공격을 시작하였다. 성을 향해 일제히 총을 발사하니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날리는 것 같았고, 일시에 함성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그러나 성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포를 쏘아 응전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민가에 흩어져 들어가 문짝이며 널판이며 마루판 등을 뜯어 와서, 성에서 100보 되는 곳에 늘어세우고, 그 뒤에서 총을 쏘았다.

    이날 밤 진주성 싸움을 조선군 승리로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 등장했다. 의병장 곽재우 휘하 심대승이 원군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 호각을 불고 횃불을 흔들어 성안을 응원하자 성안 사람들도 호각을 불어 응하였다. 이를 필두로 최강, 정길용, 최경회의 부대 등 의병들이 속속 도착하여 진주성 외곽에 포진하였다. 당연히 성 내외 조선군 사기는 충천하였다. 외곽에서 호응하는 의병 중에서는 호남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적과 교전할 수 있는 병력은 아니었지만, 후방에 머물면서 일본군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당황한 일본군은 우왕좌왕하였다.

    10월 7일, 일본군 토루를 쌓다
    일본군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총을 쏘아 대는 한편 화살을 난사했다. 그러면서 인근의 대나무를 모조리 베어 내어 묶기도 하고 엮기도 하였다. 밤에 달이 진 뒤 길이 수백 보에 달하는 죽편竹編(대 엮은 것)을 동문 밖에 몰래 세운 다음, 판자를 벌여 세우고는 빈 가마니에 흙을 채워 층층이 쌓아서 언덕을 만들고 총을 쏘면서, 화살을 피할 보루를 만들었다.

    김시민은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힘썼고, 악공樂工을 시켜 문루門樓 위에서 피리를 불도록 하여 한가로움을 보였다. 당시 일본군 진영에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 있었는데, 일본군은 아이들을 시켜 이미 서울이 함락되었으니 빨리 항복하라고 떠들게 했다. 아이들의 억양은 서울말을 비롯해 여러 지방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이에 군사들이 호통을 치려고 하거나 심지어 성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시민은 이에 대한 일체 대응을 금지시켰다.

    10월 8일, 일본군 산대를 만들다
    일본군 공격은 세찼으나 조선군의 응전은 더욱 거셌다. 일본군은 대나무 사다리를 수천 개 만들었고, 3층 산대山臺를 만들었다. 바퀴를 달아 구르게 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이에 김시민이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게 하여 산대를 세 번 관통하자 산대를 만들던 일본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김시민은 낮에는 군사를 여장 안에 매복시키되 서서 내다보지 않도록 하고, 짚이나 풀로 인형을 많이 만들어 활시위를 당긴 자세로 성 위에 출몰하게 했다. 화살을 헛되이 쏘지 않도록 하고, 돌을 던져 일본군이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이날 밤에 일본군은 죽편을 많이 설치하여 점차 성에 접근했고, 토루를 점점 더 높이 쌓았다. 두 곳의 산대는 4층으로 만들고 앞면에 판자를 달아서 화살과 돌을 차단하며 총 쏘는 곳을 만들었다.

    한편 이날 밤 고성 가현령 조응도趙凝道와 진주 복병장伏兵將 정유경鄭惟敬이 이끄는 의병이 남강 건너 진현에 당도하여 진주성과 호응하였다. 이들 역시 밤이 되면 성 주변에 나타나 횃불을 켜고 호각을 불면서 대규모 부대인 것처럼 시위를 해서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심리전을 펼쳤다.

    10월 9일, 현자총통으로 산대를 격파하다
    일본군은 공격군을 다수의 소부대로 나누어 진주성 외곽에 있는 조선 지원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병력 분산은 전력을 약화시켰다. 이에 단성丹城현 쪽 일본군은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이, 살천薩川 지역에서는 한후장捍後將(후부의 방어를 맡은 장수) 정기룡鄭起龍, 조경형趙敬亨 등이 이들을 격퇴하였다. 여기에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와 임계영 등도 도착하였다. 북쪽의 곽재우 의병과 서쪽의 최경회 의병이 성안 수비군과 호응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총과 활을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고, 산대에 올라 무수히 총을 쏘았다. 진주성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으로 죽편을 꿰뚫고, 판자를 관통하고 일본군 가슴을 꿰뚫어 즉사시킴으로써 일본군에게 겁을 주었다.

    거듭 공성에 실패하자 일본군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하며 성안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내려고 하였다. 짐짓 퇴각하려는 모습을 보인 뒤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낸 뒤 결전을 벌이려 했다. 여기저기 불을 놓아 환하게 밝힌 가운데 군막을 철거하고 모든 자재들을 수레에 실어 전군이 철수하는 모습을 보인 뒤 일제히 불을 끄고 성 밑으로 기어들었다. 이때 한 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신북문에 이르렀는데,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던 진주 아이였다. 불러들여 적의 동향에 대해 물으니 “왜적이 내일 새벽에 힘을 합쳐 성을 공격할 거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월 10일, 적을 물리치고 성을 보전하다
    오전 2시쯤 일본군은 두 패로 나뉘어, 1만여 명의 한 패가 동문 쪽 새로 쌓은 성벽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들은 각자 긴 사다리를 지녔다. 일본군은 인형으로 왜적처럼 보이게 해서 조선군을 속인 연후에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일본 기병이 돌진하는 등 총공세에 들어갔다.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北隔臺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
    (주6)
    은 동문 옹성甕城
    (주7)
    에서 활 잘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힘써 싸웠다. 혹은 진천뢰, 질려포를 쏘고 큰 돌을 던지고, 혹은 불에 달군 쇠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러이 던지고, 혹은 끓는 물을 들이붓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마름쇠를 밟은 자, 화살이나 돌에 맞은 자, 머리와 얼굴이 불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성 동쪽 싸움이 무르익었을 때, 1만 명 되는 다른 한 패의 일본군이 어둠을 틈타 잠행하여 갑자기 구북문 밖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긴 사다리를 지니고 방패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형세가 금방이라도 뛰어 올라올 듯하자 여장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일시적으로 수비진이 뚫렸다. 전 만호 최덕량과 목사 휘하의 군관 이눌, 윤사복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워, 흩어졌던 군졸들이 다시 모여 동문과 같은 방법으로 일본군을 막았다. 또한 남녀노소 민간인들도 돌로 내려치고 불을 붙여 던지며 성을 지켰다. 이 때문에 성안의 기와, 돌, 초가지붕까지도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이었다.

    한참 후 동방이 밝아 오고 일본군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을 때 김시민이 왼편 이마에 탄환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대신하여 지휘를 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이광악은 적장 나가오카 다다오키의 아우를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 아침이 되었으나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 천지가 컴컴한 가운데 일본군은 전사자들을 모아 민가에 쌓아 놓고 불을 질러 화장을 했다. 시체 타는 냄새가 성 안팎에 진동했다. 사시巳時 무렵 일본군은 비로소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오후가 되어 진주성의 포위가 완전히 풀렸지만 성 밖은 지옥의 참상만이 남았다. 일본군은 포로와 우마를 버리고 도망갔으나, 김시민이 총상을 입었고, 군사들의 힘도 다 소진되어 추격을 하지는 못했다.

    진주대첩晉州大捷
    임진년에 있었던 이 전투를 진주대첩晉州大捷이라고 한다. 이 전투는 3,800명의 병력으로 3만여 명의 대군을 맞아 6일간 치열한 접전 끝에 성을 지켜낸 싸움이었다. 대첩은 단순히 크게 이긴 전투를 뜻하는 게 아니라 전쟁의 전체적인 향방을 바꿀 만큼 큰 영향력을 가져다 준 전투를 의미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을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결정지은 전투라 할 수 있다. 즉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을 보존하였고, 나아가 곡창 지대 호남을 지켜 냈으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배후를 안정시켜 조선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유지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지휘관급이 300명, 병사가 1만 명 정도 사망하였다. 후퇴할 당시에 사망자가 많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모든 시신을 불태워 화장해 버렸다. 일본군에게는 병력 손실 외에도 패배가 주는 여파가 컸다. 사기 문제와 가장 중요한 군량 부족 문제에 시달렸다. 후방 보급로는 불안하고, 호남도 점령하지 못해 만성적인 군량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재 진주시의 대표 행사인 ‘진주남강유등축제’도 이 전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당시 일본군에게 진주성으로 지원군이 모이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 적진을 교란케 하려 했으며, 진주성 수성군과 외부 지원군간의 지원 요청과 소통, 그리고 가족들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남강에 종이 등을 띄워 보낸 것이 축제로 이어진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주대첩 이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당시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진주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


    진주대첩은 의병을 비롯한 외부 원군의 활약뿐만 아니라, 진주성 내 수성군의 충실한 방어 능력과 투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 초기 다른 고을처럼 지리멸렬하던 진주 군사는 김성일金誠一
    (주11)
    과 김시민의 노력에 힘입어 경상우도 방어의 중심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이 강화되었다. 김시민金時敏은 1554년 갑인년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상백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고려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2세손으로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면오勉吾였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크고 기상이 씩씩하여(魁梧壯偉) 무인으로 타고난 풍모가 있었다.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전쟁에 쓰는 병기의 제조를 맡은 관아로 옛 서울시청 자리에 있었음)에 들어갔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泥湯介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1591년에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목사 이경을 수행하여 지리산 아래에 피신해 있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부름을 받고 나왔다.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켰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

    그는 진주성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킴으로써, 당시 조선이 육지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 마지막 날 접전 도중에 적의 유탄에 맞아 의식을 잃고 치료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39세였다.

    그에게는 탄복할 만한 지략이나 무용담 같은 건 없었다. 백의종군과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일화도 없었다. #단지 판관으로서 목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오로지 성심誠心과 성의誠意를 다하여 성실히 수행해 냈고, 군사와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지도력을 지녔다.# 이후 1604년 조정에서는 그를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하고, 상락군上洛君에 추봉하였다. 1702년(숙종 35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면서 진주성 내의 창열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진주대첩 당시 김시민의 지도력 아래 보여 준 조선군과 백성들의 필사의 항전은 적인 일본군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군은 김시민을 모쿠소, 또는 모쿠소 판관木曾判官이라고 불렀다. 이는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牧使’를 일본 발음으로 읽은 뒤, 다시 비슷한 음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진주대첩의 명장 ‘모쿠소’에 대한 소식은 히데요시에게도 알려져 이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만은 꼭 함락시키라는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김시민은 이미 전사했으나, 일본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이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목사 서예원을 모쿠소 판관으로 알고 서예원의 목을 히데요시에게 ‘조선의 맹장, 모쿠소’라는 이름으로 보냈다. 일본 가부키에서는 이 ‘모쿠소’라는 캐릭터를 조선의 명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로 설정하였다. 마치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중국 경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당태종을 잡으려는 악역으로 다루고 있는 설정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진주대첩의 원동력, 진주성晉州城


    진주대첩을 가능케 했던 진정한 원인은 진주성 자체에 있었다. 진주성은 천험天險의 요새였다. 진주성은 조선 시대에는 촉석성 또는 촉석산성이라 불렸다. ‘촉석矗石’은 남강가에 바윗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촉석루로 널리 알려져 있고, 촉석성, 촉석강 등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진주목사의 관아가 있는 곳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넓은 들에 펼쳐져 있었고, 진주성은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1리가량 떨어져 있었다. 진주성은 일반 읍성과는 달리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는 데 그 주된 기능이 있었다.

    구체적인 축성 기록은 고려 말기인 1379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여러 번 고쳐 지은 끝에 임진왜란 발발 한 해 전인 1591년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1547~1615)에 의해 동쪽 성곽이 확장되었다. 김수는 성을 넓혀야만 충분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성을 지키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지만, 확장으로 인해 도리어 방어에 취약해지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초기 진주성에 비해 이때 동문을 세웠고, 북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북장대 동쪽 부근의 북문이 본래 있던 것이라 하여 구북문舊北門, 훨씬 동쪽으로 대사지大寺池가 끝나는 지점 부근에 낸 북문을 신북문新北門이라 했다. 이래서 당시 진주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다섯 곳에 성문이 있었다. 현재 진주성 동쪽에 있는 문이 당시 내성에 있던 촉석문이다. 여기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가는 곳에 은밀하게 외부와 통하게 은폐된 성문인 암문暗門이 있었다. 1593년 6월 29일 계사년에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성벽을 무너뜨려 버렸다. 전란이 끝난 후 다시 쌓을 때 내성을 처음 축조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진주성이 그것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에는 외성 성벽 대부분이 대사지(진영못) 매립 공사에 사용되었다. 지금의 진주성은 1969년에 새로 복원되고 단장되었다. 진주대첩을 기억하고 있는 곳은 현재 서문뿐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진주성은 문자 그대로 천험의 요새였다. 진주성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 남강이 흐른다. 이는 천연 해자垓子로 공격이 거의 불가능하다. 성 북쪽 또한 세 군데의 연못으로 형성된 깊은 늪이 성벽 아래에 가로놓여 있어 공성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진주성 북쪽에 가로놓인 이 못을 통칭하여 대사지大寺池라 했다. 서쪽은 촉석이란 말 그대로 산세가 있고 험준하다. 성안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과 샘이 각각 세 곳 있었고, 남강의 풍부한 수량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으니, 식량과 충분한 화살만 있으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진주성에도 약점은 있었다. 촉석과 남강 그리고 대사지는 서, 남, 북 세 방면에서 난공불락의 형세를 이루게 했으나 동쪽 방면은 사정이 좀 달랐다. 현재 진주성처럼 촉석루 북쪽 구릉지를 활용하여 성벽을 쌓으면 동쪽 방면의 약점이 완화되겠으나, 그렇게 되면 성의 규모가 작아진다. 당시 진주성은 성을 지키는 군사들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일대의 많은 민간인들이 들어와 전란을 피하는 역할도 있었다. 그래서 작고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는 길을 버리고 동쪽 방면으로 나아가 성곽을 쌓아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그래서 진주성 동쪽은 평지성平地城이 되었고, 방어에 취약점을 안게 되었다. 실제 두 번의 진주성 전투에서 동문과 신북문 쪽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물론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부족하나마 가방제언加防堤堰이라는 제방을 조성하였다. 대사지와 남강을 이어 낸 것으로 일종의 참호 겸 해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은 성의 규모 문제로 인해 평지성의 약점을 부분적으로 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천험의 요새로 신뢰를 잃지 않았고, 그 실증이 진주대첩이었다.

    거룩한 충절 - 계사순의癸巳殉義


    다시 위기를 맞은 진주성
    진주대첩 이듬해인 1593년 계사년 1월에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한양까지 밀려나게 되고, 강화를 교섭하면서 부산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일본은 군사력을 집중해 진주성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진주성을 함락하면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는 광기 어린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이 차단당했고, 진주대첩에서 패해 호남 지역 진출에 실패하면서 군량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긴 보급로는 경상우도 등 각처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위협을 받았다. 패색이 짙어 갔던 일본은 진주성 공격으로 형세 반전을 꾀하였다. 진주성을 점령함으로 해서, 지난해 진주대첩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를 끌어올리고, 진행 중이던 강화 교섭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며, 호남 진출 육로 확보와 함께 적어도 한반도 남부 지역을 일본 영토로 만들려는 매우 중요한 목표를 실현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속셈이 있었다.

    1593년 6월 15일 일본군 10만 명은 김해, 창원으로부터 진주성으로 이동하였다. 진주성 함락을 위해 일본군은 조선에 있던 일본군 거의 전원을 동원하였다.

    고립무원
    당시 진주 목사는 서예원徐禮元(?~1593)이었고, 경상우병사는 전라우의병장으로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을 구원하며 활약했던 최경회(1532~1593)였다. 진주성과 경상우도를 관할하는 수장이 진주대첩 때와는 달랐다. 다른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진주대첩에서는 외부의 응원이 주요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일본군은 거의 전군을 집중해서 공격해 오는데, 진주성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군 주력은 함안에 있었는데, 일본군이 이쪽으로 나아오자 전의를 상실하여 후퇴를 하였고, 형세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명군 역시 사태를 방관하고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진주성의 비극은 방치되고 사실상 버림받은 고립무원 상태와 병력의 중과부적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충청병사 황진, 창의사倡義使
    (주12)
    김천일, 거제 현령 김준민 등이 진주성에 입성하여 수성 태세를 갖추었다. 전체적으로 진주성에는 진주성 자체의 병사(본성군本城軍)와 황진을 따라 온 태안, 남포, 당진, 보령 등 충청도 관군, 그리고 전라도 의병장(전라도 관군은 외면하고 끝까지 원군조차 보내지 않았다) 다수가 참전하여, 3도 연합군이 수성에 임했다. 진주대첩은 당시 김성일이 상황을 모두 파악해 전투의 상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기록했으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패전과 함께 전원 몰살이라는 대참사를 겪은 터라 전투 상황이나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추정으로 본 당시 진주성 수성군 규모는 진주 본성군 3천 명과 전라도 의병과 경상우병사 및 충청병사 관군을 합해 3천 명 정도해서 6,7천 명 정도로 보인다. 그 밖에 진주성이 함락된 후 희생된 숫자가 7만 명 정도로 보여 전란을 피해 들어온 민간인들이 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진주성 수성군의 중과부적은 어쩔 수 없는 셈 치더라도 외부에서 원군을 보내 주었다면 계사년 진주성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일본군을 맞아 9일 동안 버텨 내는 감투 정신을 발휘했던 당시 진주성 수성군의 의로움은 이래서 더욱 빛이 난다.

    성은 무너지고 충절은 빛나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월 21일 일본군이 출몰하면서 시작되었다. 온갖 방법으로 밀려오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28일 성안 사람들이 의지하였던 황진이 왼쪽 이마에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래서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이튿날 김천일이 지키던 신북문으로 일본군이 밀고 들어왔다. 이곳은 동문과 함께 공방의 급소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밀려드는 일본군을 맞아 용력勇力이 뛰어난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활약하였다. 하지만 단병접전에 능한 일본군에 의해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고, 이종인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에 최경회, 김천일 등은 촉석루 아래에서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일본군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도륙하였다.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은 주변 지역을 분탕질하고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이때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주논개朱論介(경상우병사 최경회의 후처)의 거사가 결행되었다. 일본군은 7월 17일경 진주를 떠나 그들의 소굴이 되어 버린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 결과로 경상우도는 장수가 흩어지고 인심이 붕궤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하나의 행정 체계를 갖추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성곽이 무너진 이후 진주는 그 전략적 중요성이 줄어들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일본 역시 진주성에서 공성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막대한 전략상 손실을 입어 호남을 점령하려는 목표를 포기해야 했다. 결국 최경회, 김천일, 황진 등이 이끌었던 진주성 수성군은 고립무원과 중과부적의 극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목숨 바쳐 항전함으로써 호남을 지켜냈으니, 비록 성은 잃었으되, 그 빛나는 충절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정리: 객원기자 이해영)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왜 패배했는가?
    *(상제님께서) 이어 양지 석 장을 펴 놓으시고 귀마다 ‘천곡泉谷’이라 쓰시거늘 치복이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여쭈니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東萊府使로 가서 절사節死한 사람이니라.” 하시고 치복과 송환에게 명하시어 양지를 마주 들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 모양이 상여喪輿에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395장 1절~3절)


    ☞ 천곡은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호號이다. 송상현은 전라도 고부군 객망리 즉 손바래기 옆 마을인 천곡에서 태어났다. 1591년에 동래부사로 부임,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인물이다.


    조선의 준비 상황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연전연패하였다. 부산에서 정발, 동래성에서 송상현, 그리고 충주에서 신립 등이 의미 있는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일본군은 고속 진격으로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는 몽진을 떠나야 했다.

    이에 대해서 오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조선이 너무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국방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건국 후 전면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국지적인 전쟁은 계속 있었다.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이나 4군 6진 개척에서 보여 주듯 초기의 조선군이 그리 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선의 주적은 북방의 여진족으로, 이들과는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력군은 기병騎兵이었다. 비근한 예로 임진왜란이 있기 10년 전에 여진족 니탕개泥湯介의 난이 있었다. 이 사태를 평정하기 위한 전투에는 신립, 이일, 이순신, 김시민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대부분의 장수들이 참전하였고,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기에 신립은 조선의 장기를 발휘한 기병전으로 충주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조선의 약한 병종은 보병步兵으로, 나라의 기반이 기본적으로 병농 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전투력은 약했고, 농한기에만 모여 훈련해야 했기에 대단위 부대 훈련은 할 수가 없었다. 대가는 고사하고, 기본적으로 먹을 거와 장비를 개인이 준비해야 했기에 일단 모이기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100년간 전국시대란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 주력은 보병이고 이들은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매우 능했는데, 그들은 농사짓는 이들과 전투하는 이들이 구별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변란 수준을 을묘왜변(1555년) 정도로 생각하여 변방에서만 전투가 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남방 지역에 성을 수축하고, 이순신 같은 이를 파격 승진 기용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하였지만, 전반적인 일본군 전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진관鎭管 체제와 제승방략制勝方略
    이어 당시 조선 방어 체제의 허점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왜란 초기 패배 원인은 조선군 방어 전략이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진관 체제는 지방의 군, 현에 군사 거점인 진鎭을 설치하고, 규모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었으며, 행정 책임자가 군사 지휘권까지 겸임하였다. 그리고 자전자수自戰自守, 즉 관할 구역을 직접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한편 제승방략 체제는 정확한 명칭이 분군법分軍法으로 각 진의 병사들이 사전에 정해진 지역에 집결한 후 한양에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는 방식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렇게 모인 군대가 격파당해 후방을 지킬 병사가 없어 순식간에 패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에서는 제승방략 체제가 더 적합하다. 진관 체제는 소규모 침략에는 대응 가능하지만, 만 명이 넘는 대규모 침략에는 큰 소용이 없다. 그리고 초기 부산진이나 동래성은 최전방으로 이들의 의미 있었던 저항이 가능했던 것은 변방이 진관 체제로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었다. 부산포진은 수군의, 동래성은 육군의 거진이었다. 반면 내륙은 대비가 거의 없었다.

    진정한 문제는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된 당시 상황이다. 사실 별다른 대가 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군역은 농민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편법이 바로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와 일종의 용병제인 대립제代立制였다. 방군수포제는 ‘포布’, 즉 ‘베’를 국가에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에 세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대신 군 복무를 시킨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으로 군역을 치르는 사람들보다 편법을 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1541년에는 나라에서 일괄적으로 세금을 걷어서 병사들을 고용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시행했다. 주로 땅을 잃고 떠돌던 농민이나 한양의 빈민층이 그 대상이 되었기에 병사의 질이 점점 줄어들었다. 여기에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良人의 수가 줄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 군역을 담당하는 계층은 주로 농민인 양인이었다. 그런데 양반들의 토지 소유가 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이나 노비로 전락하였고, 군역을 피하기 위한 온갖 편법이 횡행하여 징집 가능한 양인이 점차 감소하였다. 여기에 세금만 받고 군사를 고용하지 않아. 장부의 수치와 실제 수치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패배는 군역 제도 자체의 붕괴와 허술함 때문이었다.

    선조宣祖를 위한 변명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왕 선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 14대 선조였다. 선조는 조선 전기 최악의 암군으로 꼽히는데, 의외로 개인적인 자질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의 치세 전반기前半期는 굉장히 훌륭하였다. 반면 임진왜란 이후 보여 준 그의 행보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이에 여기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유능하였지만, 역사적으로 무능한 임금이 된 선조 치세 전반全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선조는 1552년 임자년에 중종과 창빈 안씨昌嬪 安氏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째 아들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균鈞이고 개명하여 연昖이 되었다. 서손庶孫에 방계였고, 막내였기에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 그가 후사가 없는 명종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탁월한 정치 감각과 명종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총애 덕분이었다.
    (주8)


    아무튼 16세에 왕위에 오른 선조는 학문에 정진하는 등 호학 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명필과 회화에 능해, 당시 명필로 이름난 한호(한석봉)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명군 장수들이 그 글씨를 얻어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하였다. 이에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들이 완전히 장악하면서 한때 태평성세가 지속되었다. 북방의 여진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였고, 조선 건국 200년간 명明과의 외교 문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주9)
    를 성사시키는 등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아마 선조는 명군이라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 확실한 정설은 없다. 다만 전국시대를 막 끝내고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위협적인 제후들의 힘을 축소시키고 내부의 불안을 외부로 표출하여 해소하려 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실제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세력은 도요토미 자신과 친밀했던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 아무튼 임진왜란은 일본 내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 따라 일어난 침략 전쟁으로,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근 300년 뒤 일본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키 위해 메이지 유신을 성사시키고 서구화에 매진할 당시에도 유사하게 벌어진다. 조선 말기 그 당시에도 천하대세와 주변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 자들이 조정을 채우고 터무니없는 자부심에 빠져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와 비슷하다.

    선조와 임진왜란
    선조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임진왜란 당시 행적에 집중된다. 우선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일을 든다. 하지만 역대 왕조 중에서 변란 중 수도를 버리고 몽진하는 사례는 많았다. 동방의 강국 고구려 때도 동천제, 고국원제 때 수도 국내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치욕을 당했고, 고려 현종과 공민왕 때도 거란과 홍건적 침입 당시 수도 개경을 버리고 도망갔었다. 단순히 수도를 버렸다는 점만을 가지고 비난할 수는 없다.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개성 이후 평양으로 도망가고, 결국 요동으로 도망갈 궁리를 한 것이다. 선조는 평양에서 결전을 봤어야 했다. 이후 조명 연합군이 겨우 평양성을 탈환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평양을 사수하였다면 전쟁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의주에서 계속 요동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임금이 나라를 먼저 포기한 것이다. 리더로서 최악의 자질을 보여 준 셈이다. 리더는 꼭 본인이 유능할 필요는 없다. 유능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선조는 이게 없었다. 그저 신하들 핑계를 대고(동인과 서인으로 나눠 싸웠지 않느냐), 백성들에게 핑계를 대고(백성들이 먼저 도망갔으니 나도 도망간다),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기고 도망가려는 후안무치함이 그의 문제였다.

    그러나 조선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과 의병들이 20만 명에 달하는 백전노장 전문 싸움꾼들로 구성된 일본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일부 사림들이 솔선수범하여 의로운 병사들을 이끌었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진주에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 육군이 대대적으로 승리하면서, 일본의 호남 진출을 막아 버렸다. 여기에 명군이 참전하면서 일본을 고립시켜 나갔다.

    도망가려고만 했던 그는 머쓱해졌다. 그래서 선조는 선위禪位 쇼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임진왜란 전쟁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불리할 때마다 16회 이상에 걸쳐서 선위한다고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이 방식을 통해 자신의 왕권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떨어진 제왕으로서의 위신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최전선에서 전란 극복의 구심점 역할을 한 광해군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전란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 전란 후에도 붕당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갓난아이 영창대군과 장성한 세자를 두고 후사를 저울질했다. 만약 선조가 몇 년만 더 살아 있었다면 광해군은 폐세자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당시 조선의 군신들은 일치단결하여 전란의 폐해를 복구하는 일에 전력투구해야 했음에도, 이미 정해진 세자 문제를 놓고 국본 논쟁을 벌였다. 조선 역사에서 두 번째로 신하들이 군주를 내모는 패륜적인 사태의 단초를 선조가 제공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 영향
    약 7년간 걸친 전쟁은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에 참전한 3국의 운명도 크게 변화하였다.

    명은 대규모 원군 파병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고,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선 파병에 신경을 쓰다 보니 만주 지역에 세력 공백이 생겼고, 새로운 역사의 주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를 세웠다.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로 도자기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약탈한 조선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등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일본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주된 전쟁터였던 조선의 피해는 막심했다. 일단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크게 황폐화되어 회복하는 데 1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러 문화재들도 소실되고 약탈당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정권이 바뀌거나 왕조가 바뀌면서 새로운 변혁이 발생했음에도 조선은 왕조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성리학적인 지배 질서가 한층 강화되어, 전란 중 있었던 여러 개혁들이 원상태로 복구 왜곡되어 버렸다. 이후 조선은 특정 정파에 의해 정권이 독점되고, 다른 사상은 용납되지 않는 엄숙주의 사회가 되었다. 유교적 명분론에 매몰되어 사회 변혁의 생명력은 동학이 탄생하기 전까지 숨을 죽여야 했다. 더욱이 명군이 지원해 준 점에 대해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나라를 만들어 준 은혜)이라며 사대모화주의事大慕華主義가 더 공고해지면서 민족정신은 상실되었다.
    (주10)
    조선 초에는 그런대로 형식적 사대와 긴장 관계였던 명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한 주종관계가 되어버렸고, 명이 망해가는 과정에서 시대 흐름을 잘못 읽어 병자호란이라는 치르지 않아도 되는 전쟁을 치르고, 망한 이후에도 명에 사대하는 이들이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렇게 조선은 천천히 형해形骸화 되어 갔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주었다고 알려진 관우關羽에 대한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서울에는 동관왕묘와 남관왕묘가 남아 있다)에 관성제군의 사당이 세워졌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과 그 이후
    1598년 11월19일 노량露梁
    음력 11월의 바닷바람은 끔찍하게 추웠다. 하지만 점점 흥분되는 가슴에서 내뿜는 숨이 하얀 김이 되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손에서는 땀이 배어났다. 순천 예교성에 틀어박혀 있는 조선 침략의 1번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노량해협을 지나는 이는 사쓰마薩摩(현 규슈 남쪽 가고시마鹿兒島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호랑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였다. 시마즈군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0월 사천왜성泗川倭城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 3만 6,000명을 전멸시켜 위세를 떨쳤다. 그가 이끈 시마즈군은 당시 일본군 내에서도 최강의 병사들이었다.

    “이순신은 참으로 대단한 장수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적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 시대를 살다 간 무장이라면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이순신이라는 수군 지휘관 한 명 때문에 전쟁의 전체 판세가 이렇게 전개될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이런 현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방해만 하는 같은 편은 적보다 더 큰 해를 끼치게 마련이었다. 조정의 질시 속에 큰 실권을 얻지도 못했고, 큰 지원도 없었다. 오히려 이순신이 7년간 지켜 낸 전라도는 조선군 전체 군량미와 조정에 공납을 바치고 부역에 동원되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동안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거제도 길목인 견내량見乃梁을 틀어막아, 일본군의 보급을 끊어 버렸다. 싸움을 못하지도 않으면서, 싸움을 참아 내는 각별한 용기와 인내력을 발휘한 것이다. 만약 조정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면
    (주13)
    부산 앞바다는 조선 수군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조선 땅에 올라온 일본군은 전원 항복해야 하고 전쟁은 1년 만에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막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전쟁 첫 해에 깨달았다. 그래서 전쟁 기간 내내 육군 전 인원을 동원해 조선 수군의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상념에 빠졌던 시마즈는 호쾌한 사쓰마 사나이들에게 “오늘 우리는 훌륭한 적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으니, 무사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고, 무장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찬동을 표시했다. 진정한 일본 수군 최강의 군대는 이순신과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하려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때가 왔다. 음력 11월 18일 하현달이 중천에 걸려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노량해전에서 교전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 전력 비교

    최후의 결전
    조선 수군 판옥선에서 신호용 신기전이 솟아오르면서 노량 해전이 시작되었다. 조선 수군의 화포가 방포하면서 쏟아 낸 엄청난 폭음은 어둠 속 바다와 섬들 사이에 가득 울려 퍼졌다. 어둠과 긴장 속에서도 이순신과 지휘부는 제대로 조선 수군들을 완벽하게 지휘하였다. 조명 연합군과 일본 수군을 포함해 800여 척이나 되는 배가 노량의 좁은 해협에 뒤엉켜 있었다. 혼전인 동시에 격전이었다. 근접전이라 일본 조총이 놀라울 정도의 명중률을 보이며 조선 수군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쓰러진 동료의 끈적거리는 피 위로 모래 한 줌을 뿌린 포수는 차분하게 심지에 불을 붙였고, 지자총통에서 발사된 수마석水磨石(물결에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돌)이 세키부네關船(일본의 중형 군함으로 속도가 빠름)의 흘수(선박이 물속에 잠기는 깊이 부근)에 명중하였다. 세키부네의 잔해들이 허공에 날아올랐다가 꽃잎처럼 떨어졌다. 구멍 뚫린 세키부네가 죽은 물고기처럼 배를 드러내고 뒤집혀 버렸다. 물에 빠진 일본 수군이 아우성을 쳤다.

    조선 수군의 다양한 화포 공격에 일본 전함은 하나둘씩 침몰해 갔다. 함선들에 불이 붙고 갑판에서 철포를 쏘던 사쓰마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북쪽에서 내려온 명 함선들까지 자리를 잡으며 조명 연합 수군은 거대한 집게발처럼 일본 수군을 으깨어 버리고 있었다. 명 수군과 조선 수군이 손발이 잘 맞지는 않았고, 한산도나 명량 때처럼 포위망을 완벽하게 구축하지는 못했다.

    여명이 밝아 오면서 목표물이 잘 보이기 시작하자 조총과 총통의 명중률이 높아졌다. 본래 목적이 고니시의 탈출로를 확보해 주기 위한 일본 수군이었기 때문에 탈출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불리한 전황에서 도망가기 위해 탈출로를 찾아 필사적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한 채 열심히 노를 저어 가던 일본 수군은 출구라고 생각했던 곳이 육지로 막혀 있는 관음포觀音浦라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다시 뱃머리를 돌린 일본 전함에 조선 수군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전열이 마구 뒤엉킨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명 수군 제독 진린陳璘의 부장 등자룡鄧子龍이 탄 판옥선에 불길이 치솟고, 일본군이 등선하여 단병접전에 나섰다. 장대將臺에서 등장룡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언월도를 휘두르며 맞서 싸우지만 결국 창에 찔려 쓰러져 버렸다. 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진린의 배를 에워쌌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이 장대에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분전하는 동안, 날렵하게 다가온 판옥선 한 척이 탄환을 퍼부어 일본 전함을 격파하며 진린을 위기에서 구했다. ‘수帥’자가 크게 쓰인 검정색 깃발과 천자일호좌선天字一號座船이라는 휘호가 붙은 조선 수군 함대의 기함인 통제사 이순신의 통제영 상선이었다. 파도를 부수며 곧바로 두 척의 세키부네를 향해 돌격하여 박살을 내 버렸다. 진린을 구원한 통제영 상선은 노량 한복판으로 전진하면서 일본군 세키부네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이때 판옥선의 장대에 붉은 색 융복戎服을 입은 늙은 장수가 북채로 북을 치며 독전을 하는 모습이 시마즈 요시히로의 눈에 들어왔다. “저자가 바로 이순신이다” 시마즈의 특명을 받고 검은색 세키부네 두 대가 상선을 향해 달려들었고, 짤막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7년 전쟁을 이끌었고, 전략과 충성이 무엇인지 동양 3국의 모든 병사들에게 실감나게 보여 준 그 위대한 장수가 천천히 쓰러졌다.

    패배의 수렁 속에서 이를 지켜본 사쓰마 병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전투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제영 상선 옆에서 조총을 쏘았던 세키부네 두 척은 단숨에 짓밟혔고, 조선 수군은 일제히 돌격하였다. 갑판에 늘어선 화포들에서는 한층 더 매서운 화염이 내뿜어졌다. 포화가 두 배 이상 더 퍼부어졌다. 이후 몇 시간 동안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포화 아래 살길을 찾아야 했다. 조선 수군이 죽음의 잔해 위에서 사투를 거듭할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는 묘도 서쪽 수로를 통해 남해도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노량의 해전은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막을 내렸다. 비로소 7년 전쟁 임진왜란이 끝난 것이다.

    이후
    *近日日本國文神武神(근일일본군문신무신)이 竝務道統(병무도통)이니라
    근일 일본의 문신과 무신들이 모두 도를 받아 문명을 여는 데 힘쓰고 있느니라. (증산도 도전 5편 347장 15절)

    *일본 사람이 3백 년 동안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와 모든 부강지술(富强之術)을 배워 왔나니 너희들은 무엇을 배웠느냐. 일심(一心)으로 석 달을 못 배웠고 삼 년을 못 배웠나니 무엇으로 그들을 대항하리오. (도전 5편 4장 2절~3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본은 임진란 후로 도술신명(道術神明)들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일본을 도와 잠시 천하통일(天下統一)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에 역사를 하게 하리라.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어질 인(仁) 자라. 만일 어질 인 자까지 붙여 주면 천하는 다 저희들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어질 인 자는 너희들에게 붙여 주리니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어질 인 자는 뺏기지 말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77장 5절~9절)


    노량해전 이후 일본 수군 주력은 궤멸되어 다시는 조선 바다를 넘보지 못했다. 전력의 3분의 1만을 겨우 건진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후 일본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패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도요토미 가신단의 서군이 일대 충돌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전투가 있었다. 이른바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 대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슈長州(오늘날의 야마구치 현山口縣) 영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서군 총사령관이었고, 사쓰마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1,500명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 두 영주가 사실상 서군의 주력이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먼저 떠올리지만, 일본 내에서는 이 두 명이 단연 두각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군 측 핵심 무장들의 잇따른 배신과 사기 저하로 결국 동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홀로 분투하던 시마즈군은 3면에서 협공을 받아 전멸의 위기에 처했다. 고향 가는 길은 뒤쪽이고 정면은 도쿠가와 본진이었다. 시마즈군은 고향 가는 길과는 반대로 ‘앞으로 후퇴’라는 돌격을 감행하였고, 사쓰마 사무라이들의 투혼을 발휘하였다. 최초로 조총을 수입하여 무기화한 집단이 이 사쓰마의 시마즈군일 정도로 일본 내 최강의 군대였다. 결국 본진을 돌파해 사쓰마로 돌아간 군은 80명 정도였지만, 이런 투혼에 감동한 도쿠가와는 자신에게 용감하게 대든 이들을 인정해 그대로 사쓰마번을 유지하게 하였다. 반면 제대로 싸우지 못한 모리가의 조슈번은 112만 석의 서부 최대 번에서 36만 석으로 감봉되어 산골로 쫓겨 갔다.

    이후 조슈와 사쓰마군은 교역을 활발히 하고 재정 개혁을 통해 튼튼한 재력을 바탕으로 타도 막부의 기치를 내걸었다. 본래 앙숙지간이었던 조슈와 사쓰마를 중재한 이가 도사土佐(현 고치高知현) 출신 낭인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이 두 세력은 이후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죠슈가 제국 일본 육군의 주축이었다면, 이 사쓰마는 해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후 이들은 고대 이래로 문화를 전수해 준 선생국 조선을 침략하고 결국 1910년에 강제로 병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쓰마의 시마즈군은 노량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전사시켰으며, 끝내는 조선을 병탄해 버린 세력이다.



    <참고문헌>
    『임진왜란의 전략적 요충지 진주성 전투』 (지승종, 알마 출판사, 2014)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 (이희진,김우선 ,책미래, 2014)
    『조선전쟁 생중계』(정명섭 등, 북하우스, 2011)
    『조선국왕 vs 중국황제』(신동준, 역사의 아침, 2010)
    『조선왕을 말하다』(이덕일, 역사의 아침, 2010)
    『역사스페셜 6』(KBS역사스페셜, 효형출판, 2003)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임용한, 교보문고, 2012)
    『임진왜란 해전사』(이민웅, 청어람 미디어, 2008)
    『징비록』(유성룡, 구지현 옮김, 올재, 2014)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이화, 한길사, 2001)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1,2』(양재숙, 고려원, 1994)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이광훈, 따뜻한 손, 2011)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들녘, 1996)

    [주1]
    충무공 김시민 - 오타가 아니다.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은 역사상 여러 명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기는 하다. 충무忠武는 조선 시대 무관에게 내리는 최고의 시호였다.
    김시민은 숙종 37년 6월 16일에 충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참고로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우리나라 인물을 보면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의 심복 조영무趙英茂, 태종의 외손자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소년 장군 남이南怡, 구인후具仁垕, 정충신鄭忠信, 이준李浚, 이수일李守一과 명과 후금의 사르후 전투 때 조선군 좌영장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등이 있다. 중국 사람으로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과 남송의 악비가 있다.

    [주2]
    임진왜란壬辰倭亂 - 전쟁에 대한 명칭을 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당사자인가 아니면 제3자인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부른다. 특히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이 모두 참전하고 7년간 이어진 전쟁에 대해서 각국이 다르게 부른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부르고,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왕의 연호를 따라 ‘분로쿠의 전쟁文祿の役’과 ‘게이초의 전쟁慶長の役’이라고 한다. 명에서는 통틀어서 ‘임진동정壬辰東征’,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으로 불렀다. 즉 조선은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분탕질을 한 것이고, 일본에서는 분로쿠와 게이초 시대 조선으로 진출했다가 아쉽게 실패한 전쟁이라는 뜻이고, 명은 임진년에 동쪽에 있는 속방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 또는 만력제 시대에 있었던 싸움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1980년대 들어 이 전쟁을 ‘조일전쟁’이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늘어났고, ‘임진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감추고 싶거나, 과장하고 싶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시대와 사정에 따라서 이름과 의미를 부여한 것 같다. 명칭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결론을 내기 힘들 거라고 생각되며, 이 글에서는 전통적인 명칭인 ‘임진왜란’을 사용한다.

    [주3]
    경상우도 -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을 우도, 동쪽을 좌도로 나누는데 이는 왕이 있는 서울에서 볼 때 낙동강 서쪽이 오른쪽이 되고 동쪽은 왼쪽이 되므로 그렇게 불렀다.

    [주4]
    실제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궤멸시킨 뒤 이 길로 진격하여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켰다.

    [주5]
    진주대첩의 전투 상황은 김성일의 장계(난중잡록 2, 임진 10월 10일)에 의거하여 재구성하였다.

    [주6]
    성수경成守慶(?~1593) - 진주판관으로 재임 중 진주대첩에서 군무를 맡아 참전하였고, 이듬해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힘을 다해 싸우다 순국하였다.

    [주7]
    옹성甕城 - 성문 방비를 위해 성문 밖에 지은 작은 성을 말한다. 서울 동대문 밖에 툭 튀어나온 항아리 모양의 성곽을 생각하면 쉽다.

    [주8]
    이에 대해 조모 창빈 안씨의 묏자리에 대한 설이 있다. 창빈 안씨 묘는 현재 서울 동작동 현충원 중턱에 있는데 이곳은 공작이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조선 왕들은 창빈 안씨의 후손들이다. 묘 앞에서는 동적강銅赤江이 내려다보인다.

    [주9]
    종계변무宗系辨誣 - 태조 이성계가 정적이었던 이인임의 아들이고 이성계가 네 명의 왕을 시해했다는 잘못된 내용이 담긴 『대명회전』의 기록을 고치는 일로 1588년에 종결되었다.

    [주10]
    명군이 조선을 지원한 이유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 때문이었다. 일본이 요동을 넘어 명 내부로 들어오면 북경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명은 국초부터 요동의 정세에 민감하여 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했었다. 명은 요동과 조선, 일본이 연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쌓여 있기도 하였다. 과거 고구려가 최강 당군을 격파하고 장안을 점령하였던 두려운 역사가 있었다. 결코 조선이 좋았기 때문에 도움을 준 건 아니다.

    [주11]
    김성일金誠一 - 임진왜란 초기 통신사로 갔던 그 김성일이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전쟁 발발 후 온갖 욕을 먹고 마음고생이 컸던 그는 전쟁 발발 후 경상우도 초유사로서 방어 태세 확립에 노력하여 진주대첩 등을 이끌었다. 이듬해 너무 과로하여 병사하였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서애 류성룡과 수제자를 겨룰 정도의 학자이기도 하다.

    [주12]
    창의사倡義使 - 선조가 의병장 김천일에게 내린 칭호이며, 그의 관직은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였다.

    [주13]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전라좌수사를 겸했기에 실제 전선 건조라든지 군병 징발에 대한 실권은 전라 좌수영에만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규모가 훨씬 큰 경상우수사를 겸임하였다면 건조된 배의 수나 수군 수는 더 많아졌을 것이다. 참고로 전라좌수영은 5관 5포, 경상우수영은 8관 20포로 최대 규모 수영이었고, 임진왜란 이후 경상우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했다.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2018년 11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