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판判씨

[한국의 성씨]

해주海州 판判씨


판씨는 해주 단본으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다. 당시 분포 상황에 의하면 서울과 고양군에 18가구, 함북 청진에 2가구 등 모두 20가구가 살고 있었다. 해주 판씨의 선조는 고려 말엽에 충신으로서 왕을 보필하는 관직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신배의 모함을 받아 반역의 누명을 쓰고, 강화도 근처의 섬으로 유배 중에 풍파를 만나 배가 파선이 되어 표류하다 구사일생으로 한강 하류에 있는 밤섬에 도착,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살고 있는 판영홍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25년경 서울 마포구 율도동栗島洞(밤섬)에 살고 있었던 종손 판봉석이 대대로 전해오던 보첩譜帖을 보관하다가 1925년의 대홍수로 밤섬 전역이 침수되었을 때 유실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 말기에서 대한제국 붕괴까지 대략 500여 년간의 연결 고리를 밝힐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 1967년 밤섬에 살고 있었던 후손들은 정부 시책에 따라 마포구 와우산 중턱에 옮겨 살다가 점차 전국 각처로 이주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 처음 밤섬에 정착했던 선조의 이름을 판해율判海栗로 존모尊慕하고 전국에 흩어진 후손들이 단결하여 족보 편찬을 서두르고 있다. 집성촌 역시 서울 마포구에 있다.

한편 판씨는 판유걸判有杰이 학창 시절 방송에 출연하여 성씨가 크게 알려졌다. 탤런트이자 뮤지컬 배우인 판유걸은 1999년 SBS 예능 프로그램 〈기쁜 우리 토요일 - 영파워! 가슴을 열어라〉로 데뷔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판유걸은 비디오방에 갔다가 이름을 댔더니 “세상에 판씨가 어딨어요?”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연을 전하면서 독특한 몸짓과 함께 “세상에는 판씨도 있다. 내가 바로 판! 유! 걸!”이라 외쳐 전 국민의 배꼽을 잡게 하였다. 당시 프로그램 방영 후 판유걸은 큰 인기를 얻어 여러 방송과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에 입학하여 연기자로서 입지를 넓혔고 졸업 후에는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로서 현재까지 왕성한 연예 활동을 하고 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해주 판씨는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 때 서울과 고양군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고, 2000년에는 87가구 290명이었다. 해주는 황해도 남해안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는 내미홀內米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폭지瀑池로 고쳤다. 936년 고려 왕건이 군의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를 사명賜名했다. 성종 때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서해西海 등으로 불렸고, 현종 때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를 두었다가 예종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조선조에 와서 세종 때는 진鎭을 설치하였다가 광해군 때는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부府가 되어 인근의 16군郡을 다스렸다. 1896년 도제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13년에 다시 군이 되었다가 1938년 부府로 승격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시市로 승격되었다. 1954년 북한 관제 정비로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