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거지에서 황제가 된 명태조 주원장朱元璋과 그 조력자들

[역사인물탐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주대명朱大明(명明태조 주원장)이 금산사 미륵에게 기도하고 소원을 이루었으되 민중전閔中殿은 각처의 사찰에 빠짐없이 기도하였으나 오직 금산사에는 들지 못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2편 66장 7~8절)

*역사적으로 중국은 자민족이 자기네 나라를 통치한 때가 거의 없었다. 하나 예를 들면 청淸나라 하면 그게 여진족이다. 여진족 누르하치가 명明나라를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우리나라 사람이다. 주원장이 중국에 들어가 원나라를 정복하고 명나라를 세웠다. 또 원元나라를 세운 칭기즈 칸은 몽고족이다. 숱한 역사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민족도 자력으로 통치를 하지 못한 나라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 어록집인 『춘생추살』 182쪽 ~ 183쪽)

*명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 청나라 시대 고증학자 조익趙翼



■ 명明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 관련 연표
●1328년 원 문종文宗 천력天曆 원년에 주세진朱世珍과 도술사 진공陳公의 딸 사이에서 4남 2녀의 막내로 출생, 초명은 중팔重八로 이후 흥종興宗, 덕유德裕 순으로 개명하다 1352년 원장元璋으로 개명했다. 자는 국서國瑞. 태어난 곳은 일반적으로 현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인이었을 가능성이 큼.
●1344년 천재지변과 전염병으로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가 탁발승으로 대륙을 유랑함.
●1351년 홍건紅巾의 난 발생.
●1352년 호주濠洲를 점령한 안휘성 출신 지주 곽자흥郭子興의 홍건군에 참가하고 곽자흥의 양녀인 마馬씨를 처로 맞이함. 그이가 후의 효자황후孝慈皇后임.
●1353년 원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새로이 자신만의 부대를 편제. 이때부터 한고조 유방을 롤 모델로 선정하였음.
●1355년 병사한 곽자흥 뒤를 이어 실권을 잡음.
●1356년 집경集慶(지금의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응천부應天府로 개명함. 이후 1359년까지 장시성, 저장성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고 1362년까지는 강서, 호북 지역을 점령하여 오국공吳國公이 됨.
●1363년 장사성張士誠군이 안풍安豊의 한림아韓林兒를 포위하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 진우량陳友諒이 대거 홍도洪都(지금의 남창南昌)로 쳐들어와 포위한 지 85일이 지나도 함락하지 못하자, 파양호에서 진우량과 싸워 크게 이김. 36세인 1364년 독립하여 오왕吳王으로 추대됨.
●1368년 응천부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정함. 이후 서달 등을 시켜 북벌을 단행하여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를 빼앗아 원 조정을 북방으로 쫓아 버림. 이후 사방의 잔존 원 세력과 홍건적 세력을 평정함.
●1380년 좌승상 호유용胡惟庸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기 때문에 주살하고 그 당파에 연좌된 이들을 많이 죽임(호유용의 난). 이를 기회로 실무 관서인 6부六部를 황제 직속으로 하고,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신설하여 황제 독재권을 강화. 이후 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단행.
●1398년 71세로 붕어. 효릉孝陵에 안장. 황태손 주윤문朱允炆이 즉위(건문제建文帝).

들어가는 글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Khubilai 칸에 의해 창건된 원元 제국은 1279년부터 1368년까지 존속하였다. 원元이라는 국호는 『주역』의 핵심 원리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원 제국은 초심을 잃고 부와 권력의 달콤함에 빠졌다. 드넓은 초원을 누비던 기마족의 기상은 사라졌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 끝에 닿았다. 여기에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여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이에 백성들은 살기 위해 농기구를 버리고 칼과 창을 들며 도적이 되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일어난 이들을 역사는 홍건적紅巾賊이라고 하였다. 홍건적은 미륵 하생 신앙을 하는 백련교도白蓮敎徒를 중심으로 하여 원 제국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백련교는 남송 초에 간단한 염불만 외워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정토교淨土敎의 일종으로 등장한 비밀 결사로 여기에 미륵불 하생 신앙을 접목하여 민중들의 마음을 잡았다. 홍건적 수령으로 백련교 교의를 전파했던 한산동韓山童이 반란 직전 체포되어 죽자 핵심 참모인 유복통劉福通이 거병하였고,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옹립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하였다. 한림아를 소명왕小明王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홍건적을 자처하는 자들이 잇달아 기병하였다. 여러 군웅들이 이 홍건적을 이끌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그중 한 명이 주원장이었다.

중원 제패로 가는 길 파양호鄱陽湖 전투


개전 전야
1363년 중국 최대 담수호인 장시성江西省 북부 파양호鄱陽湖에서는 대륙의 운명이 갈리는 대전투가 벌어졌다. 만수기에는 서울특별시 면적보다 약 82배 큰 호수인 이곳에서 자웅을 겨룬 세력은 주원장朱元璋과 진우량陳友諒이었다.

대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빈민이 되어 사방을 떠돌던 주원장의 인생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25세가 되던 때 곽자흥郭子興의 수하가 된 후로 뛰어난 능력을 살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하고 그 세력을 이어받은 주원장은 자신의 근거지를 장강 이남으로 하여 세력을 옮기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난징(南京)인 집경集慶을 점령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당시 강남에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이들이 많았다. 그중 장사성張士誠은 소금 밀매업자로 강북의 요충지인 고우高郵를 함락시킨 뒤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면서 독립하였다. 곡물과 소금의 운송이 중단돼 곤경에 처한 원 제국은 우승상 토토脫脫에게 명해 장사성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고려 원병으로 최영崔瑩 등이 3천 명을 이끌고 장사성 토벌을 도왔다. 거의 장사성을 토벌하기 직전, 토토는 모함을 받아 삭탈관작되었고, 수장을 잃은 원나라군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장사성은 당시 천하 제1의 도시로 각광받던 소주蘇州를 점령하였다. 소주의 풍요에 장사성은 매일 연회를 열며 사치를 즐겼다. 그는 천하 제패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 사이에 주원장은 세력을 키워 나갔다. 서달徐達과 상우춘常遇春 등으로 외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고, 안으로는 학자들을 모으고 지역 백성들을 다독이며 민심을 얻었다. 이때 얻은 인재가 제갈량에 버금하는 재사로 칭송받은 유기劉基였다. 유기는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유비에게 헌책獻策했듯이 주원장에게 ‘천하제패지계天下制覇之計’를 올렸다. 일단 동쪽의 장사성을 그대로 둔 채 먼저 전력을 기울여 서쪽의 진우량을 쳐야 한다는 요지였다. 진우량을 쳐도 어부지리를 노리며 향락에 빠진 장사성은 결코 협공에 나서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고, 주원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서전緖戰
진우량은 고기잡이 출신으로 야심이 크고 욕망도 높았다. 힘이 장사이고 무예가 뛰어났다. 진우량은 당대 군웅 중 한 명이었던 서수휘徐壽輝의 군단에서 성장하였다. 군사력이 가장 강하였고, 강토도 가장 넓었고, 세력을 얻자 ‘한漢’이라고 나라 이름을 정하였다. 세력이 인접해지면서 진우량과 주원장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는데 주원장의 우세였다.

그러던 1363년 장사성의 부장 여진呂珍이 대군을 이끌고 한림아가 머물고 있던 안풍安豊으로 쳐들어가 유복통을 살해하고 이내 도성을 포위했다. 이는 주원장이 명목상 주군인 한림아를 구원하려 나서지 않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주원장의 ‘제갈량’ 유기는 안풍을 포기하는 쪽이었다. 한림아 구출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진우량에게 협공의 빌미를 제공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강 상류를 장악한 진우량을 전력을 기울여 격파해야만 남경의 안전을 보장하고, 후일 북벌도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반면 주원장은 설욕을 벼르는 진우량이 협공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틀림없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안풍을 포위한 장사성의 군사까지 협공하면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안풍을 방치할 경우 주원장을 얕잡아 본 장사성이 이내 진우량과 손을 잡고 협공에 나설 공산이 컸다. 그해 3월 주원장은 친히 주력군을 이끌고 안풍으로 진격하였고, 이에 진우량은 환호작약하며 곧바로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주원장 세력의 심장부인 남경이 아닌 안풍의 퇴로에 위치한 홍도洪都(지금의 남창)를 목표로 삼았다. 홍도를 점령하면 주원장군의 퇴로를 차단해 안풍을 포위한 장사성의 군사를 협공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는 중대한 착오였다. 바로 남경으로 진격했어야 했다. 주원장의 주력 부대는 장사성군과 전투하느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남경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홍도를 빠르게 점령했다면 진우량의 판단이 맞고, 역사의 방향도 바뀌었을 것이다.

진우량의 군대는 홍도를 포위하여 공세를 폈다. 하지만 홍도의 수장인 주문정朱文正은 85일 동안 굳게 지켰다. 고립무원의 상태였지만 하나의 큰 산과 같이 진우량군을 막아 한 걸음도 전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사이 주원장은 전력을 기울여 안풍의 포위를 해소하였고, 20만 대군을 끌고 왔다. 진우량은 군을 돌려 파양호까지 후퇴하여야 했다. 양군의 존망을 건 피할 수 없는 결전이 이 파양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전決戰
파양호에서 벌어진 한 차례 수전水戰은 양군 주력이 36일 동안 힘들게 싸웠던 일대 회전이었다. 이 정도 규모에 역사적 의미를 지닌 큰 수전은 삼국시절에 있던 적벽대전赤壁大戰밖에 없다. 재미있게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등장하는 적벽대전의 묘사는 이 파양호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나관중은 장사성군의 일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이 있기 전 주유가 수군을 조련하던 곳이 파양호로 나온다.

양군의 형세는 진우량 군대가 60만, 주원장의 군대는 20만이라고 전해진다. 수군의 함선은 진우량군이 높고 크며, 배를 엮어 포진하였으므로 길이가 10여 리였다. 반면 주원장의 배는 모두 소선으로 고개를 들어야만 적군을 바라볼 수 있어, 인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사기 면에서는 주원장군이 아주 높았다. 진우량군은 붉은색으로 물들인 대전함을 철사로 묶어 풍랑은 두려울 것이 없었으나 빠르고 민첩하지는 못했다. 주원장군의 배는 흰색을 칠한 고깃배로 조종하기가 쉽고 진퇴도 빠르므로, 용적 면에서는 열세지만 운동 면에서는 도리어 우세를 차지하였다.

작전 지휘로 말하자면 진우량은 성질이 거칠고 의심이 많아, 부하들이 의견을 꺼내지를 못하여 상하가 단절되고, 서로서로 의심하여 안으로 단결하지 못하였다. 반면 주원장군은 허심탄회하고 조심스러우며 경험이 풍부한 참모와 전투에 용감한 장수들이 있어, 상하가 한마음으로 계책을 세운 다음 싸움에 나섰다. 더 중요한 보급 문제에서 진우량군은 후로가 차단되어 군량은 떨어지고 병사들은 피로한데, 주원장군은 숫자는 적지만 홍도와 후방으로부터 끊임없이 보급이 이루어져 배불리 먹으며 싸움에 임했다.

주원장군의 주요 전술은 많은 화기와 화포를 사용한 화공火攻으로 진우량군의 대선을 불사르는 것이었다. 여기에 일곱 척의 고깃배에 갈대나 마른풀을 쌓아 놓고 바람을 이용하여 진우량 군선으로 밀어 보낸 다음 불을 지르는 화공을 사용하였다. 바람이 맹렬하고, 불길은 거세어서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니, 호수가 모두 붉은빛이었다. 화염은 진우량 군선에 옮겨 붙어 점차로 퍼져 나갔고, 혼란을 틈타 주원장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다. 양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퇴로가 막혀 진우량군이 불리했다. 장강으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총공격을 개시한 진우량군을 주원장군은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진우량군은 마치 늪에 빠진 듯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전투의 와중에 화염에 휩싸인 배를 버리고 다른 배로 갈아타 전황을 살펴보려던 진우량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진우량이 죽자, 진우량 군대는 모두 항복하였다. 천하를 놓고 벌어진 이 대회전은 주원장의 승리로 끝났다.

제위에 오르고 중원을 통일하다.


통일전쟁
파양호 대전으로 강남 지역의 패권을 쥔 주원장은 주변의 추대로 1년 후 오왕吳王이 되었다. 이선장을 우상국右相國, 서달을 좌상국左相國에 임명하였다. 이후 진우량의 세력권이었던 호남, 호북, 강서, 안휘성은 모두 주원장의 세력권으로 변하여 장강 유역에서 그와 대치할 만한 세력은 장사성을 남겨 두고 있을 뿐이었다.

주원장은 1365년 10월 장사성을 토벌하기 위한 총공격령을 내렸다. 대장군 서달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하면서 천천히 장사성 세력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듬해 3월에 서달이 장사성의 이전 근거지인 고우를 함락하였다. 그해 11월 소주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자 전군을 동원하여 장사성의 근거지인 소주성 포위 작전을 전개했다. 소주성은 포위된 지 열 달 만인 1367년 9월에 함락되었다. 장사성은 포로가 되어 남경으로 끌려가던 중 목을 매 자진하였고, 주원장은 예를 갖춰 장사지내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한림아가 요영충寥永忠에 의해 연못에 던져져 익사했다. 그의 죽음은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의 난이 사실상 끝났음을 뜻하고, 천하를 거머쥐려는 주원장의 본격 행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한림아 제거를 계기로 홍건적과 절연하였다. 새로운 제국 건설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후 그는 홍건적과 백련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1368년 정월 응천부應天府에서 주원장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대명大明으로 하였다. 이 국호는 명교明敎에서 나왔다고 한다. 명교는 명왕출세明王出世를 기대하며 전승되어 온 신앙인데, 백련교주 한산동이 바로 명왕을 사칭하여 깃발을 올렸고 그 아들 한림아는 소명왕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주원장도 자신이 명왕의 뒤를 계승하여 나라를 일으켰다는 의미로 국호를 이렇게 정한 것으로 보인다.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그가 연호를 홍무로 정한 후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를 채택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관행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그때부터 주원장을 홍무제로 부르는 관행이 생겼고, 그런 관행은 청대 말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북벌뿐이었다. 서달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상우춘을 부장군에 임명하고 25만 대군으로 북벌의 장도에 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원 제국의 맹장 코코티무르가 선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 제국은 코코티무르의 관작을 깎아내리는 조서를 내렸다. 내분이었다. 지휘관 교체로 원 제국 군사는 제대로 싸우지 못하였고, 명군은 산동을 완전히 수중에 장악한 후 이어서 하남 지역도 평정하였다. 이해 윤 7월에는 원의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압박하였다. 원의 순제는 다른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립무원이 되어 밤중에 대도를 탈출하였다. 8월 2일 북벌군은 대도에 입성하였다. 원의 순제는 북방의 상도上都(현재의 도론노르)로 도망간 다음 계속해서 저항하였다. 역사는 이 세력을 북원北元이라고 한다. 본래 고향인 몽골에서 근거지를 확보한 원 제국의 저항은 예상 외로 강하였고, 이는 두고두고 명 제국 북변을 어지럽혔다.

홍건적의 난이 발발한 지 17년 만에 천하 대란이 마무리되고 원元에서 명明으로 교체가 이루어졌다. 가족을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잃어버린 고아, 죽은 부모를 묻을 땅조차 없던 거지, 떠돌아다니던 유민이자 탁발승으로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출발한 주원장은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천하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후에도 홍무제는 사방의 잔존 세력을 평정하는 데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홍무 25년인 139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원 지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홍무제의 통치
홍무제는 제국 통치 방침의 제1원칙을 몽골 풍습 일소와 한과 당 제국의 위업 계승에 있음을 선언하였다. 의복과 머리 모양을 모두 당나라 풍습으로 개선하였고, 제일 문장가로 불린 송렴宋濂을 통해 모든 문장을 한문으로 작성케 하였다. 그와 함께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피폐해 있던 국력을 재건하는 일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그 초점은 경제력 기반을 이루는 농촌 부흥에 맞추어져 있었다. 농토가 없는 농민을 이주시켜 소, 곡식의 종자, 식량 등을 지급하고 조세 면제 혜택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각지에 인구를 분산시켜 황무지를 개간하고 경지 면적을 늘려 나갔다. 여기에 둔전屯田 정책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새로 획득된 영토나 변경 지대에 농민을 집단 이주시켜 주둔병의 3할이 방비를 담당하고 7할이 농경에 종사하여 군량을 자급자족하게 하였다. 이 정책은 국방과 재정 면에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나중에는 이 군대의 둔전이 주둔군 사령관의 사유지로 바뀌면서 그 성격이 전혀 이질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빈농 출신인 홍무제는 농촌의 실정에 대해 숙지하고 있어, 조세 감면 정책과 함께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게 하여 흉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면화의 재배를 독려하여 면직물업이 대약진을 할 수 있는 기초를 일구었고, 대규모 수리 사업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농업 진흥책 등 민생을 안정케 한 여러 노력은 명 제국이 300년간 지속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청나라 강희제는 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와 같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다.

황제 독재 체제와 숙청


원 제국에서는 실권을 좌우승상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황제는 승상으로 인하여 퇴위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홍무제는 이 승상 제도를 대단히 불안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승상은 유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유능해도 황제의 권위를 모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스스로 승상을 겸하기로 했다. 직접 행정부를 통괄하였다. 이는 권신權臣의 발호를 억누르기는 했지만, 황제의 임무는 무한정 증대되었다. 당시 홍무제는 50을 막 넘은 나이로 원숙함이 무르익었고 노력가에다 일을 좋아하며 타고난 체력 덕분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군주 독재 체제를 행한 홍무제는 관료 기구와 군대로 이를 지속시켰다. 황제의 명령을 말단까지 전달할 관료 기구를 정비하고, 명령에 충실하고 순종적인 관료군을 양성하였다. 이를 위해 학교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를 실시하였다. 또한 군과 민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백성들의 호적을 민적과 군적으로 분리하였다. 한 번 군적에 들어간 자는 영원한 군인으로서 그 신분을 세습시켰다. 이들은 문관이 될 수 없었고, 무거武擧라는 무관 시험을 통해 고급 군인을 양성했다. 또한 군권을 자신의 혈족에게 나누어 주어 변경 수비에 대비하였다. 아들을 왕으로 임명하되 토지나 통치권을 주지 않고 단지 군사권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을 감시하는 이들을 보냈다. 이는 홍무제 당대에는 유효했지만, 그의 사후에는 결함이 드러났다.

홍무제는 권력의 맛을 보면 볼수록 점점 권력욕이 커져 갔다.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 또는 넘볼 염려가 있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오랫동안 자신의 측근으로 대업 성취를 보좌한 부하들은 모두 유능한 이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그러한 공적에 의하여 많은 재산과 권력을 획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재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하지는 않을까? 또는 황제의 권위를 해치는 언동을 일삼지 않을까? 홍무제는 이런 피해 의식에 시달렸다.

고래로 왕조 교체의 혼란기를 지나 새로운 왕조가 개창될 때는 예외 없이 군강신강君强臣强의 상황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창업주는 난세에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워 대업을 이룬 만큼 남다른 의지와 결단력을 지녔다. 창업 공신 또한 새가 나뭇가지를 가려 앉듯이 나름의 판단 아래 주군을 선택해 공업을 이룬 만큼 남다른 지용智勇을 지녔다 하겠다. 창업주의 경우는 그런대로 강신强臣을 제압할 수 있으나 궁정에서 자란 수성守成 단계의 군주는 강신을 제압키가 쉽지 않다. 강신을 방치할 경우 이내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상황이 초래돼 개국의 기업이 이내 무너질 위험이 커지게 된다. 그 때문에 창업주 때 또는 그 다음 대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토사구팽이 행해졌다.

한고조 유방을 전범典範으로 삼은 홍무제는 토사구팽의 악역을 자임해 군강신약君强臣弱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먼저 당대 재사 유기는 만년에 홍무제의 의심을 두려워하여 낙향하였지만 독살을 당했다. 이어 자신의 권세를 과신하여 정무를 독재하고 관료의 임면을 보고 없이 혼자 결정한 승상 호유용과 그 일당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빌미로 체포 주살되었는데, 그 인원이 3만 명이 넘었다. 이러한 일을 집행하기 위해 황제를 호위하는 의장병儀仗兵으로 존재한 친군도위부親軍都尉府를 금의위錦衣衛로 개편하였다. 일종의 황제 직속의 특무 기관(스파이 조직 또는 비밀경찰)이었다. 이 금의위는 황제가 의도한 독재 권력을 유지, 강화하고 일체의 반역 의도를 분쇄하는 데 눈부신 활동을 하여 그 결과 당초의 의도를 훨씬 넘는 살벌한 공포정치를 조장하였다.

이후 홍무제는 자신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는 유능한 부하를 모두 호유용의 잔당이라 하여 처치해 버렸다. 대신 가급적 실무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건국 공신 가운데 천수를 누린 이는 탕화湯和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창업 초에 일찌감치 관직을 거절하고 완전히 은거해 버렸는데 부귀공명富貴功名을 멀리했던 것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홍무제의 명과 암


제왕의 슬픈 말로
홍무제는 독재 권력을 확보하였지만, 창업 공신 이하 유능한 부하 대부분을 잃었다. 사람들의 공포심과 복종심을 얻었으나, 애정과 신뢰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런 그에게 현후 마황후馬皇后의 죽음과 황태자 표標의 죽음은 큰 타격이었다. 온화한 성품이었던 황태자의 치세를 기대하던 이들이 많았다. 65세에 황태자를 잃은 황제는 황태손인 윤문允炆을 계승자로 정하였다. 아버지를 닮아 온화한 성격이었던 황태손은 주원장이 보기에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해 보였다. 그래서 황태손의 앞길을 위해 홍무제는 더 가혹하게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는 조선 태종이 세종을 위해 모든 악역을 자처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1398년 윤 5월, 홍무제는 7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사후 황태손이 즉시 즉위하여 건문제建文帝가 되었지만, 1년 2개월 후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제위 찬탈을 꾀하여 소위 정난靖難의 변變을 일으켰다. 이 또한 조선 왕조의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낸 사건과 유사했다. 당시 홍무제는 후사를 위해 뛰어난 장수를 모두 숙청하였기 때문에 연왕의 변란을 책임질 유능한 장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연왕은 조카를 밀어내고 천하를 거머쥐니 이이가 명 제국의 성세를 이룬 영락제永樂帝였다.

명 제국 초대 황제 주원장
주원장이 일개 홍건적 병사에서 대명 제국 창업주까지 달려온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째, 휘하에 인재가 모여들었다. 서달, 이선장, 상우춘과 같은 명장들과 유기, 송렴 등과 같은 대학자가 막하에 참가하는 등 인재 층이 두터웠다. 주원장은 이들을 훌륭하게 썼으며 그들의 헌책을 잘 받아들임으로써 패업을 향해 나아갔다.

둘째, 전략 전술이 성공을 거두었다. 대국적인 면을 볼 줄 아는 통찰력이 있던 그는 대군단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식량과 전략물자 확보를 도모하는 것을 제1의 목적으로 하였다. 그는 다른 이들이 북방에서 원 제국군과 사투를 벌이며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 홀로 비옥한 강남 지역에서 군사를 양성하였다. 또한 진우량, 장사성의 두 라이벌을 쓰러뜨렸을 때는 강경과 유연의 두 가지 전술을 골라 썼다. 진우량을 멸망시킨 파양호 대전에서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어 훌륭하게 이겼다. 속전속결 전략이었다. 반면 장사성에 대해서는 2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은근히 조여들어 100퍼센트 안전 승리를 목표로 하여 성공시켰다.

셋째, 주원장 군단은 군기가 극히 엄정하여 인심을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체의 약탈을 금하였고, 아무리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도 군령을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참형이라는 극형에 처하여 민심을 얻었다.

주원장은 원 제국 말기 어지러웠던 시대에 태어나 천시를 얻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울 때는 먼저 기회를 잡는 게 임자였다. 여기에 자신의 근거지에서 흥기해 지리를 얻고, 뛰어난 책사와 인재를 얻으면서 인화를 구비해 대업을 이뤘다. 강력한 황권에 기초하여 명 제국 300년의 기초를 다졌다.

주원장의 조력자1 - 거지를 황제로 만든 현처賢妻, 마황후馬皇后


중국 역사상 유명한 마황후馬皇后는 두 명이다. 하나는 후한後漢명제의 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명明태조 주원장의 비이다. 후한 마황후는 현덕함으로 유명하고, 명대 마황후는 큰 발로 날 듯 빠르게 걷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현덕함도 갖추고 있었다. 명나라가 세워진 뒤 마황후는 태조에게 간언을 올리고 계책을 바치며 솔선수범을 보였다. 주원장이 자신을 당태종의 장손황후에게 비교하자 마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부부가 서로 보호하기는 쉬우나 군신은 보호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저와 함께한 빈한한 시절을 기억하듯이, 신하들과 함께한 어려운 시절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신첩이 어찌 장손황후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주원장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마황후를 위해 그 친척들을 불러 관직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마황후는 법도에 맞지 않는다며 사양하였다.

후일 마황후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신하들은 황후를 위해 기도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했다.

“생사는 운명에 달린 것인데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낫지 않는다 해도 어의를 탓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임종 전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

“폐하께서 현인을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여 시종일관 신중을 기하시길 바랍니다. 자손들이 모두 현명하고 신하와 백성이 잘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황후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원장은 마황후의 현덕함에 감동하여 그 후 황후를 다시 세우지 않았다.

주원장의 아내 마씨는 원래 곽자흥의 양녀養女였다. 일반적으로 전통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을 따라 점점 부귀해지는데, 주원장은 반대였다. 곽자흥의 사위가 되고 나서 일약 곽자흥 사단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여 부대 안에서 주공자朱公子라고 불렸다.

마황후는 야사에서는 마수영馬秀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황후 마씨가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컸던 것을 비꼬는 말로 대각마황후大脚馬皇后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마황후는 전족을 하지 않은 자신의 발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마황후는 1332년 6월 25일에 태어나 1382년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3대 성조成祖 영락제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비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명나라 개국에 공이 큰 여걸이었다. 성품이 인자하고 현숙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여장부였다. 또한, 지략과 통찰력이 있었고 경서를 가까이 했다. 평생 주원장의 옆을 지키며 주원장에게 정확하고도 옳은 헌책을 거듭하였고, 주원장은 그런 마황후의 이야기를 잘 따랐다고 한다.

주원장은 개인 서찰을 모두 마씨에게 관리하게 했으며, 주원장을 모함하는 말을 듣고 곽자흥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 언제나 마씨가 곽자흥의 부인을 잘 섬김으로써 남편이 누명을 벗게 도와주었다. 마황후는 수시로 병사들의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파양호 전투 때에는 모든 금은보화와 비단을 털어 군사를 위로했다.

신하들에게 가혹했던 주원장이 신하들을 의심하면, 신하들은 마황후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했다. 마황후는 이들을 슬기롭게 두둔하여 주요 공신과 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건지게 해 주었다.

마황후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하여, 매우 검소하게 황궁의 살림을 꾸려 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라에 흉년이 들면 자신은 푸성귀 반찬을 먹으며 하늘에 기도했고, 관리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의 질을 개선하는 등의 일을 앞장서서 한 훌륭한 황후였다.

조력자 2 - 개국 공신들


명 3대 개국 공신 이선장李善長(1314~1390)
이선장李善長은 서달, 유백온과 함께 명 개국의 3대 공신 중 한 명으로 자는 백실百室이다. 주원장이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하던 시절 처음 만났으며, 그의 식견을 높이 산 주원장의 첫 번째 책사로 임명되었으나 행정 및 정치 참모 역량이 더 높았다. 마치 한고조에게 있었던 소하와 같은 인물이었다. 명 제국 건국에 기여하여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졌다. 초대 승상으로 중서우승상에 기용되어 명 제국 내정 조직을 개편하고 행정 업무를 담당하여 초기 명 제국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공로를 세웠다.

행정 관료로 유능하고 공직에 있는 동안 특별히 흠잡을 만한 실책이나 비리를 저지른 적은 없어 나이가 들어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직계 제자나 다름없는 좌승상 호유용이나 다른 권신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호유용의 난 때 연루가 되었으나 최고 개국 공신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재조사에서 조카 이존의李存義가 호유용 사건에 연관됐음이 확인되어 숙청당했다.

서달徐達(1332~1385)
서달徐達은 자가 천덕天德으로 명 제국 3대 개국 공신이다. 어린 시절 주원장과 동향 사람으로 함께 소를 치며 자란 죽마고우였다. 22세 때 홍건군에 가담하여 당시 곽자흥의 부장이었던 주원장의 수하가 되었다. 주원장이 위기에 빠졌을 때 몇 차례 구해준 적이 있어서 주원장과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이후 전선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

홍무 2년, 홍무제의 지시에 따라 25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어 원 제국을 압박하였다.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원 조정을 본래 고향이었던 몽골 고원으로 쫓아 버렸다. 초기 몽골 제국 수도였던 카라코롬을 불태웠고, 시베리아 동부까지 진출하여 명 제국 초기 대외 환경을 안정적으로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대승에 홍무제는 서달이 개선할 때 직접 도성 밖으로 나와 맞이하였다. 개선장군이자 돈독한 친구로 홍무제와 나란히 앉도록 하였을 정도로 환대하였고,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주체朱棣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이 주체가 명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성조聖祖 영락제이다. 위국공魏國公에 오른 서달은 자신의 공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고,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달이 세운 공이나 군에서의 영향력으로 보면 홍무제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었으나 이런 처세로 인해 홍무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많은 공신들 숙청 속에서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일설에는 홍무제가 보낸 거위를 먹고 죽었다고도 한다). 죽은 뒤에는 중산왕에 봉해졌다.

주원장의 제갈량, 유백온劉伯溫(유기劉基, 1311~1375)
한고조 유방에게 장자방張子房이, 촉한을 세운 유비에게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있었다면 명태조 주원장에게는 유백온劉伯溫이 있었다.

유백온의 본명은 유기劉基로 오늘날 저장성浙江省 온주溫州 문성현文成縣 소재 남전南田 출신이다. 출신지 문성이 후에 청전青田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유청전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자는 백온伯溫인데, 사람들에게 본명보다 유백온이라고 더 많이 불렸다.

유백온은 원말 명초에 활동했던 정치가이며 사상가이자 또한 걸출한 문학가이다. 원나라 말기 가끔씩 시행된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당시 가장 차별이 심한 남송 지역 출신인 그가 과거에 급제한 것만 보아도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절강유학부제거浙江儒學副提擧, 절강행성도사浙江行省都事와 같은 직책을 맡아 각지의 반란군을 진압하며 원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종족별, 지역별 신분상 차별이 뚜렷했던 몽골족의 통치하에서 장강 이남 한족漢族으로서 한계에 직면했고, 이에 더하여 원에 반항하다 후일 투항하는 방국진方國珍에 대한 문제와 관련한 당시 권력자와의 의견 차이로 47세의 나이에 파직되었다. 고향 청전산에 들어와 은거하게 된 이때 산문집 『욱리자郁離子』를 저술하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는 이때 이미 원조元朝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접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3년 후, 남경을 함락시켜 오국공이 된 주원장은 그 지방의 지식인들을 스스로 초빙하였다. 유백온은 이 초빙에 응하고 이후 최고 참모가 되어 명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백온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당시 정세를 정확히 분석하고 진우량 토벌을 먼저 해야 한다고 진언함으로써 파양호 대전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명의 개국 일등 공신인 그는 태사령太史令과 어사중승겸태사령御史中丞兼太史令이 되어 각종 새로운 전장제도典章制度의 제정에 참여하고, 주로 조정의 안정에 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이선장, 호유용 등 다른 신하로부터 미움을 샀다. 이들이 홍무제에게 중상모략을 하니, 주원장은 “저자가 천하를 취해서 대신하는 마음이 있다면, 건국 이전에 그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라며 무시하였다. 그러나 주원장의 개국 공신에 대한 공포정치가 심화되는 정치 환경과, 호유용의 질시와 참소로 결국 61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그곳에서 분울한 삶을 살다 65세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호유용이 독살하였다는 의혹이 있었고, 이 일을 계기로 호유용의 음모로 불리는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만년에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지고, 다시 2백년 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오늘날 문성현은 이 시호에서 딴 것으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알려 준다.

유백온은 송렴과 함께 당대 제일의 문필가로서도 알려졌다. 저서로는 욱리자郁離子, 부부집覆瓿集, 사청집寫情集, 이미공집犁眉公集, 기문둔갑비급대전, 사주 명리학 서적인 적천수滴天髓 등을 남겼다. 유백온은 천문과 병법에 정통하였고, 기문둔갑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제갈량과 같이 천재 군사軍師로서 숭배를 받고 있다. 원말 명초 때 정립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과 비슷한데, 나관중은 유백온을 모델로 제갈량이라는 천하 제일 전략가의 모습을 그려 냈다고도 한다.

유백온의 저서, 욱리자郁離子
유백온의 여러 서적 중 『욱리자郁離子』 에 대해 한국의 일부 학자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갔을 때 펴낸 『목민심서』와 비교해 ‘중국 버전의 목민심서’로 평하기도 한다. 두 책 모두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사실에 주목한 결과다. 현재 중국의 많은 정치 지도자와 기업 CEO들은 수시로 『욱리자』에 나오는 경구와 우화를 인용한다.

『욱리자』는 모두 182편의 산문으로 구성된 우언식 산문집이다. 욱리자는 책 이름인 동시에 책 속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로 작자의 분신이다. 리離는 불火, 즉 ‘문명’을 의미하고 욱郁은 ‘융성한 모습’을 가리킨다. 즉 욱리자의 말을 잘 경청하고 따르면 성대한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적 실의에 빠진 저자가 자신의 불만을 발설하는 동시에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목적이 있어, 철학적 관점을 비롯하여 현실 상황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소재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사실대로 혹은 가공하여 활용한 것이 가장 많고, 신화나 전설 그리고 기문과 괴담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직접 현실 생활에서 얻은 소재를 활용하여 창작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때로는 사실적이며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절실하며 때로는 해학적이기도 하다. 작법은 단순 서사 속에 우의寓意를 기탁하거나, 서사를 주로 하면서 뒤에 의론을 부가하거나 그 반대로 하기도 하였다.

공을 세우고 병권을 돌려주어 선종善終한 개국 공신 탕화湯和
탕화湯和는 1326년 주원장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담력도 있었다고 한다. 1352년 27세 때 곽자흥 부대에 들어가 능력을 발휘하였고, 주원장과 함께 곽자흥군의 중심에 섰다. 이후 탕화는 절대적인 충성심과 무거운 입을 지니고 있으면서 돌격대장으로 명 제국 건설에 큰 공을 세워 나갔다.

이후 명 제국을 개국한 주원장은 대대적인 공신 숙청을 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뒤를 이을 황태자의 치세를 안정되게 하여 백성의 안위를 편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숙청은 무자비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탕화만은 그 숙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탕화는 군대를 이끄는 유일한 원로로 홍무제는 그 처리에 고민 중이었다. 이에 탕화는 먼저 은퇴를 청하였다. 탕화가 은퇴를 청함으로 해서 조정에 남은 원로들 역시 탕화를 따라 은퇴할 명분을 주었다. 고향으로 내려간 탕화는 항상 조심하였다. 거만하거나 불손한 행동을 삼갔고, 정사에 관여하는 어떤 언행도 하지 않았다. 첩들에게는 돈을 주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저 하루 종일 술을 마시거나 바둑을 두면서 산책을 하는 걸로 전부를 보냈다.

이후 나라에 어려움이 있어 홍무제가 부르면, 부름에 응해 공을 세우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노자 도덕경 2장에 나오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공을 이루더라도 그 공을 스스로 차지하지 않음)의 문구를 삶의 자세로 견지하였다. 1390년 병에 걸린 그는 1395년 70세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주원장 치세 30년 동안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인재들이 숙청당했지만, 탕화와 그 가문은 버림과 겸손의 자세로 일관하여 명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정리: 객원기자 이해영)



주원장은 고려인인가?
명태조 주원장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 혈통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명의 사서史書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사관史官이 주원장에게 고향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장검동래杖劍東來하니 기선부지其先不知라(칼을 짚고서 동쪽에서 왔으니, 내 선대는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동쪽은 우리나라를 말한다. 출신을 노골적으로 밝힐 수 없었기에 그저 은유적으로 동東이라는 답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경남 진해에 있는 천자봉(502m)에는 주원장이 우리 민족의 혈통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진해 웅천 향토문화 연구회, 『진해 땅이름 이야기』 ‘천자봉 전설1’ 참고).

그리고 한국민속문학사전에 나오는 『주원장설화』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에게 천자가 되게 했다는 ‘이무기 환생 설화’가 있고, 함경도 사람 이씨가 하인 주씨를 데리고 천자가 날 명당을 찾는데 하인인 주씨가 욕심이 나 그 명당을 써서 주원장이 태어났고 이씨 집안에서는 이성계가 태어났다는 ‘천자 명당 설화’가 있다. 그리고 이성계와의 비교 설화는 담력, 주량(천 냥 술과 만 냥 술), 문장 등이 비교 대상이 되어 전해 온다.
(주1)
주원장의 출생지, 묘지, 활동 지역은 황해도, 함경도, 단양, 강원도, 경상도 등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특히 경상도 웅천은 천자 명당의 장소로 거론되고 있다.

실제 명확한 역사적 근거는 없으나,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당시 동아시아는 몽골족인 원 제국에 의해 단일한 통치 체제 아래에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적 물적 자원의 흐름이 원활하였기에 명을 세운 주원장이 중국 한족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 영웅이었을 주원장과 이성계가 서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하물며 조선 태조 이성계 집안에 대해서도 여진족에 대한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니 왕조의 근원에 대해서는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어느 왕조든 창업 군주와 그 선대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미화 작업을 하는데 반해 명 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통상의 경우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주원장의 출신을 남송의 명유名儒 주희의 후손으로 하려다가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원명元明, 여선麗鮮 교체기 창업 군주들은 모두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고 할 수 있으리라.

<참고문헌>
『춘생추살』 (안운산, 대원출판, 2007)
『주원장전朱元璋傳』 (오함,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인물지:제왕들의 인사 교과서』 (박찬철, 공원국, 위즈덤하우스, 2009)
『영웅의 역사7 대제국의 황제』 (난죠 노리오, 윤소영 역, 솔출판사, 2000)
『조선국왕 vs 중국황제』 (신동준, 역사의 아침, 2010)
『변경』 (렁청진 편저, 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재미있는 중국제왕 이야기』 (서현봉 엮음, 박우사, 1993)
『김지용과 함게 읽는 한중일 500년사』 (김지용, 새로운 세상, 1999)
『욱리자』 (유기 지음, 오수형 옮김, 궁리출판, 2003)

[주1]
출처: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1-8, 351; 3-4, 602; 8-10, 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