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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태太씨


    시조는 대중상大仲象


    태씨는 협계陜磎, 영순永順, 남원南原, 명천明川, 밀양密陽, 발해渤海, 상주尙州, 예천醴川, 통천通川 등 14본관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협계·영순 태씨에서 분적하여 거주지를 관향으로 삼은 경우다. 우리나라 태씨들은 모두 말갈 출신인 대중상을 시조로 모신다. 대중상은 대조영의 아버지이다.「협계태씨족보陜磎太氏族譜」에 의하면 대중상은 천문, 지리, 병법에 능했으며, 696년 고구려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으로 본거지를 옮겨 말갈靺鞨과 통합하여 진국震國을 세웠다고 한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의하면 걸걸중상乞乞仲象(대중상)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 출신으로 당나라의 영주榮州 지방에 옮겨 가 살고 있었다. 696년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함께 억류 생활을 하던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하려 하였으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부하자 토벌군을 보냈다. 걸사비우 집단이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전하고 걸사비우는 전사하였다. 이때는 걸걸중상이 죽은 뒤로서 그의 아들 대조영이 지도자 지위를 계승하여 무리를 이끌고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해고의 부대가 계속 추격해 오자,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남은 무리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천문령天門嶺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대진국大震國(발해) 건국과 관련하여 대중상과 대조영의 역할이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환단고기』에서는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일본의 산케이 신문과 아사히 신문은 ‘발해국왕渤海國王의 세계도世系圖 발견’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 기사는 발해의 초대 국왕 대조영과 그 일족에 대해 기술한 족보가 대조영의 47세손으로서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츠카(寶塚)시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 태석호太錫灝 씨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고 했다. 이 기사는 ‘영순永順 태씨太氏 족보族譜’와 발해 흥망사와 발해와 일본의 교류에 관한 내용을 소개했다. 태석호 씨는 1937년 선친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는 대조영의 정체성에 대해서 답하기를 “대조영 할아버지는 ‘속말말갈 출신’이라며, 속말말갈은 지금의 송화강 유역에 살았던 부족으로 알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는 부여족, 속말말갈 등 부족 연합 국가였으니까 속말말갈이라면 곧 고구려인이고 발해인이다.” 아울러 대조영의 성씨가 대大씨인데 후손의 성씨가 왜 태太씨인가에 대한 답변에서는 “한자의 대大와 태太는 그 뜻이 같고, 고문古文에서는 실제로 구별하지 않고 쓴다며, 대를 태로 바꾼 데는 고려 멸망 후 왕성이었던 왕王씨를 옥玉씨 등으로 고쳤던 사실과 비슷한 사정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영순태씨족보」는 전문 한문으로 된 4백 쪽 정도의 족보 책이다. 이 족보는 약 8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첫머리에 실린 「태씨원보서문太氏原譜序文」에는 발해의 건국기, 융성기, 패망기에 관한 설명과 발해인이 어떤 경로로 고려에 흘러들어 갔는지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태씨원보서문」에서는 “태씨는 그 근본이 발해국왕 대조영의 후예니 발해는 곧 고구려에서 갈려 나간 지맥이라….”로 시작된다. 이 서문에는 발해의 왕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던 때의 상황도 그 어느 사료보다 자세히 쓰여 있다고 한다. “발해 멸망 당시 세자 대광현大光顯과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사정司政 대원균大元鈞,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백성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하니, 고려 태조가 중후하게 대우하여 세자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종적宗籍에 부쳐서 제사를 받들게 하고 여러 신료들에게도 다 벼슬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협계陜磎 태씨
    대중상의 10세손 대광현이 대진국이 망한 뒤 서기 934년 대화균, 대원균 등과 유민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하였다. 고려 태조가 그들을 예우하며 정착을 도왔다. 대씨가 태씨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고려 태조가 망명해 온 대진의 왕족 중 대화균에게 태씨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대조영을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태太씨를 칭하였다는 것이다. 협계 태씨의 중시조 태집성太集成은 대화균의 8세손이라고 한다. 따라서 태집성은 대중상의 18세손이 된다. 그는 고려 고종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대장군에 올라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내침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이를 격파하는 데 크게 공을 세우고, 협계군陜磎君에 봉해졌다. 이로써 후손들은 태집성을 1세조로 받들고 본관을 협계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협계는 황해도 신계군의 옛 지명이다.

    가문의 인물로는 태집성의 아들 태정취太貞就가 충렬왕 때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손자 태영재太永財는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으며,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진 태경후太慶後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 시대에는 태경후의 아들 태응진太應辰이 정종 때 담양도호사潭陽都護使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태이太異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參軍(병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연습, 병서의 강의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 함평현감,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 밖에 형조참판을 지낸 태맹인太孟仁과 직제학을 역임한 태맹의太孟義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태우림太雨霖 등이 유명했으며, 태일민太逸民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내고 숙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에 추증되었다.

    협계 태씨는 선조조에 팔충신八忠臣을 낸 집안이다. 선조 25년 임진란이 터지자 태색太穡은 종중의 장사들을 동원, 출전해서 전라병사를 도와 군량 3백 석을 조달하는 등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우瑀와 시경時慶, 귀생貴生, 상문尙文, 천생賤生, 팔회八恢, 윤주允周 등이 함께 출전하여 같은 날 모두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후에 만헌晩軒 정염丁熖이 일문팔충一門八忠은 고금에 드문 일이라고 칭송하며 시를 지어 기렸으니 “君家兄第古今稀 生共一門死共歸, 立馬帶方城北路, 龍蛇往事淚添衣”(군가의 형제는 고금에도 드문 일, 살아서는 일문, 죽어서는 같이 갔네, 남원성 북쪽 길에 말을 세우고 임진년 옛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라고 했다. 태씨는 워낙 자손의 수가 적은 탓도 있겠지만 조선조를 통틀어 부귀나 권세와는 거리가 멀었고 청렴 강직한 선조의 기개는 곧 가풍으로 이어져, 대대로 문한文翰은 끊어지지 않았으나 벼슬보다는 분수를 지키며 안빈낙도하여 왔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협계 태씨는 1,348명이었다. 참고로 1930년도 국세조사 때 태씨는 총 1,043가구가 있었는데 그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영순永順 태씨
    시조 태금취太金就 역시 대중상의 18세손으로 상장군을 지냈다. 또한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진 태웅성太雄成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금교金郊에서 몽고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올라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협계 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영순으로 삼아 오고 있다. 영순은 지금의 경북 문경시 영순면이다.

    영순 태씨를 대표하는 인물은 중종 때의 명신 태두남太斗南이다. 그는 영순군의 11세손으로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이다. 28세 되던 중종 8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 같은 해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집의執義를 거쳐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등을 역임한 청백리다. 회재晦齋 이언적, 충제冲齋 권벌權橃, 졸제拙齋 권오기權五紀,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와는 친교가 두터웠고, 문장으로는 소세양蘇世讓, 황윤헌黃允獻과 가장 가까웠다고 한다. 품성이 청렴 강직하여 불의에 영합하지 않았으며, 스승 김양진金揚震의 죽음을 치상治喪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로 인해 당시의 권신 김안로의 미움을 받고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순직했다. 이언적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한 구절에 “소백산小白山과 같이 우뚝 솟았고 양천瀼川 냇물과 같이 맑고 깨끗했다.”라고 찬미했다. 후에 선조 때의 석학 김응조金應祖가 비문을 지었고, 옥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순 태씨는 2000년 인구 조사에서 전국에 4,14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남원南原 태씨
    시조 태맹례太孟禮는 태집성의 9세손이다. 태맹례는 조선 단종 때 진사를 지내다가 화를 입어 1454년(단종 2) 함경도 길주吉州 명원明原에 유배되었고 후에 길주 명원이 명천明川이 되어, 그곳에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협계에서 분적하여 태맹례의 출생지인 남원을 관향으로 삼아 후손들이 계대系代하고 있다. 남원 태씨를 흔히 협계 태씨 명천파明川派라고 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태씨는 남한에 총 371가구, 1,5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은 북한에 많다. 함경남도 북청군 양화면 일원,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독포동과 거문동 일대, 함경남도 단천군과 풍산군 일원,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양정동과 서면 용동,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신계동과 배령동 등이 집성촌이다. 2016년 남한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북한 공사의 부친 고향이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황곡리이다. 지금도 태씨 수백 명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




    환단고기에 나오는 대중상과 대조영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서두에서 조대기朝代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을 보면 “개화開化 27년(단기 3001, 668)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振國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000명이었다. 함께 동쪽으로 돌아가 동모산東麰山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셨다.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았다. 오로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다가 중광 32년(신시개천 4596, 단기 3032, 699)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요 시호諡號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이시다. 태자 조영祚榮이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 계성薊城에서 무리를 이끌고 와 제위에 오르셨다(신시개천 4596, 단기 3032, 699).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시고 10만 명의 군병을 모아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치셨다. 이에 정책을 정하고 제도를 세워 당唐을 적으로 삼고 항거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셨다. 말갈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 거란 장수 이진영李盡榮과 손을 잡고 군대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천문령天門嶺에서 대파하셨다.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군현을 두어 지키게 하시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불러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정착하게 하시니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나라의 모든 기강이 새로워졌다. 이에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시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셨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시고 6천 리 땅을 개척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볼진대 대진국의 창업 시조는 대중상이고 처음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였다.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표방한 것이다. 아들 대조영이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꾸고 옛 고구려의 영광을 회복하고 국가 번영의 토대를 놓았다. 대진의 ‘동방 진震’ 자는 고조선 진한辰韓의 ‘진’ 자와 의미가 같다. 고조선에서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뜻을 담아 대진이라 정한 것이다. 대진 역시 그들의 왕을 황제로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천자국이었다. 대진은 15세 258년간 이어 오다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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