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9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남북국 시대를 연 문무왕文武王과 김유신金庾信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백제)을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한 자를 불러와서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이 돌보아 주심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래된 원한을 갚아 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널리 추상追賞하고, 내외에 관직을 고루 나누어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백성들을 인수仁壽(인덕이 있는 이가 오래 산다는 뜻)의 경지까지 이끌었다. 또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 주니, 집집이 넉넉해지고 사람마다 풍족해져서,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어졌으며, 창고에는 곡식이 언덕과 산처럼 쌓이고 감옥은 텅 비어 풀이 무성해졌으니,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선비들에게 저버림이 없었다고 하겠다. -문무왕 유조遺詔 중에서-


    *신이 예로부터 대통을 이은 임금들을 보건대, 처음을 그럴듯하게 하지 않는 경우는 없으나 끝까지 훌륭한 경우는 드물어(미불유초靡不有初 선극유종鮮克有終) 여러 대 동안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없어지니 매우 통탄할 일이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공을 이루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이룬 것을 지키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소서.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한 유언-


    *이제 신라에서 유신을 대하는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사이가 없고,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으며, 도모하면 행하고 말하면 들어서 쓰이지 않음을 원망함이 없게 했으니, 가히 ‘육오동몽六五童蒙’
    [주1]
    의 길함을 얻었다고 하리라. 그러므로 유신은 그 뜻을 행할 수 있었고, 공적과 명성을 남기고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자들의 김유신에 대한 평 -


    ■ 신라 문무왕과 김유신 관련 연표
    ●595년 을묘 신라 진평왕眞平王 17년 건복建福 12년 김유신金庾信 태어남. 금관가야金官伽倻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 아버지 서현舒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냄. 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고 함.
    ●603년 계해 진평왕 25년 김춘추 태어남. 아버지는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용춘龍春, 어머니는 진평왕의 둘째 딸 천명공주天明公主.
    ●626년 병술 진평왕 48년 문무왕 김법민金法敏 태어남. 아버지는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 어머니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인 문명왕후文明王后.
    ●629년 신라 고구려 낭비성娘臂城 공격, 김유신이 공을 세움.
    ●641년 백제 의자왕 즉위, 정적을 숙청하고, 이듬해 신라 대야성 점령.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 부부 전사. 김춘추, 백제에 복수 결심하고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했으나 실패. 고구려에선 연개소문의 정변 일어남.
    ●647년 신라 상대등 비담, 진덕여왕 즉위에 반발해 반란 일으킴. 김유신이 이를 진압하여 군권을 장악. 김춘추 왜국 방문해 동맹을 모색하나 실패.
    ●648년 신라와 백제 치열한 전투 진행됨. 김춘추 당태종과 군사동맹 체결.
    ●654년 김춘추 진덕여왕 뒤를 이어 즉위함.
    ●657년 백제 의자왕 서자 41명을 최고위 좌평에 임명, 귀족들의 반발을 삼.
    ●660년 나당 연합군 백제 공격,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 결사대 전멸. 사비성 함락, 의자왕과 왕족 백성들 당에 끌려감. 백제 부흥군 일어남.
    ●661년 태종 무열왕 사망, 문무왕 즉위.
    ●662년 김유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한 당군에 대한 군량 수송 작전 지휘.
    ●663년 왜국 백제 구원군, 백강 하구에서 나당 연합군에 대패. 백제 부흥 실패.
    ●668년 나당 연합군 고구려 평양성 함락. 고구려 부흥 운동 일어남.
    ●670년 문무왕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정복하려는 당군에 맞서 나당전쟁羅唐戰爭을 벌임.
    ●672년 신라가 당의 말갈 부대 및 이근행 부대와 맞서 싸움. 초기에는 신라가 승리하나 당군 반격으로 수뇌부들이 전사하고 신라 주력군 7할 이상이 궤멸. 이후 수성 태세로 항전.
    ●673년 문무왕 13년 7월 1일 김유신 사망. 향년 79세. 사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됨.
    ●675년 신라가 이근행의 당군을 매소성에서, 이듬해에는 설인귀의 당군을 기벌포에서 대파. 나당전쟁 사실상 종결지음.
    ●681년 7월 1일 문무왕 승하. 유조遺詔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 지냄.

    들어가는 글


    7세기 동아시아는 거대한 전쟁과 국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수많은 생명들이 명멸해 가면서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칼의 시대 속에서 거대한 제국이 무너져 갔고, 변방의 작은 나라가 역사의 주역으로 우뚝 서는 등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희망의 싹들이 움트기도 했다. 바야흐로 변혁의 시대. 비정하리만큼 냉철했던 리더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가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황산벌 1 : 계백階伯과 오천 결사 660년 7월 10일



    계백 출진
    새벽의 선선한 공기는 무더위와 피와 땀 냄새가 벌판을 뒤덮자 사라져 갔다. 잔혹한 땅은 사람의 피를 게걸스럽게 원하고 있다. 단단하게 짜여 있던 목책은 조금씩 허물어졌고, 피곤에 지친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이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사대장 계백階伯은 동쪽 신라 군영을 날선 눈빛으로 보며 “올해 추수는 보지 못하겠구나”라며 낮게 읊조렸다.

    660년 7월 백제를 향해 동으로 신라군 5만, 바다 건너 당군 13만이 쳐들어왔다. 단순한 침략 전쟁이 아니라,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것이다. 신라는 모든 전력을 동원했고, 수장은 대장군 김유신이었다.

    백제 조정은 우왕좌왕했다. 이런 대군과 싸워 본 경험도 없었다. 여기에 대신들 의견도 갈렸다. 지구전으로 가면서 여러 귀족의 협력을 얻어 대군을 편성하여 적을 격퇴하자는 쪽과 의자왕과 그 아들들로 구성된 현임 좌평 세력의 친위군을 주축으로 빠르게 승부를 내자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택은 귀족들의 협조를 구하지 않은 후자였다. 신라군을 소수의 병력으로 저지하고, 강을 타고 들어오는 당군을 총력을 기울여 요격하기로 했다. 여기서 의자왕 측근들의 근시안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 총력을 다 쏟아부어도 부족할 시점에 자신들의 기득권에 너무 집착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계룡산에서 덕유산 사이 산줄기를 넘어 논산으로 들어오는 어느 고갯길인 것만은 확실한 탄현炭峴(숯고개,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을 신라군이 넘어 버렸다. 문제는 시간! 왜국에 원병을 요청하는 데 드는 시간과 지방에서 올라올 구원군이 모이는 시간이 부족했다. 의자왕은 달솔 계백에게 신라군을 최대한 저지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사이 지방군이 모아진다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서도 마지막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으리라.

    계백의 결사대에는 좌평 충상忠常 같은 고관도 있었으나, 이들 대신 제2품 달솔인 그가 지휘를 맡은 걸 보면 의자왕과 특별한 사연이 있는 심복 중 심복이었을 것이다. 결사대는 충상 이하 고관들의 사병과 사비성에 사는 백제 1등 시민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수도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지녔다. 이 싸움에서 진다면 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후손은 신라의 영원한 일개 지방민으로 차별과 학대를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지켜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예감한 결사대가 되었다.

    죽음의 땅 황산벌黃山之野
    황산벌은 논산과 태전 사이인 연산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 위치해 있던 벌판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전투가 있던 곳은 벌판이 아니었다. 먼저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군은 3개의 진을 설치했다. 금강 지류인 논산천 위로 펼쳐진 평야가 황산벌인데, 그 중간에 매봉이란 자그마한 산이 여러 언덕을 따라 솟아 있고, 그 정상에 산성이 있다. 지금은 청동리 산성이라 부르는데, 정상에 오르면 주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황산성, 남쪽으로는 신흥리산성, 동쪽의 황령산성과도 지척으로 연결되는 장소이다. 남으로는 논산천을 해자로 삼고, 청동리 산성을 기점으로 나지막한 언덕에 진을 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지역이 지니는 의미는 분명하다. 이곳을 통과하면 노령산맥이 끝나고 황산벌, 논산, 부여로 이어지는 강경평야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는 적을 막을 만한 작은 고개조차 찾기 힘들다. 계백의 결사대는 신라군이 강경평야로 들어서기 직전에 그야말로 간신히 도착해서 출구를 봉쇄했다. 노령산맥 입구에 있을 탄현이었다면 1선이 뚫려도 2선, 3선 방어가 가능하고, 패해도 산으로 달아나면 몰살은 면할 수 있다. 하지만 황산벌을 배후로 둔 이 배치는 배수진背水陣과 같다. 2차 저지선도 없고, 벌판으로 달아나 보았자 신라 기병들에게 몰살당할 것이다.

    이곳에서 백제 결사대는 신라군과 만났다. 시간이 급하기는 신라가 더했다. 7월 10일까지 사비성 앞에서 당군과 만나기로 했는데 만약 늦게 되면 트집을 잡힐 것이다. 더구나 군대에서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죄는 매우 크다. 그리고 만약 당군만으로 사비성이 함락된다면, 신라는 백제에 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시간에 쫓긴 신라군은 네 번이나 파도처럼 죽음의 말발굽을 몰고 공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백제군은 이를 이겨 냈다. 구릉과 하천으로 측면 방어가 가능한 요지에 목책을 이용해 진을 쌓고 결사의 의지로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다. 네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체력을 소진한 신라군은 더 이상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백제군은 고립되었고, 수도 적으니 천천히 적을 지치게 하면 되는데 무리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더운 기운이 조금 가셔진 여름밤 하얀 달빛 조각이 황산벌을 비추고 있었다.

    황산벌 2 : 독한 아비들의 전쟁



    화랑출격
    “처자를 죽이고 왔다지?”

    네 번째 패배를 알리는 전령이 도착한 뒤로도 한참 후에서야 김유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66세 고령의 신라 대장군은 전투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다. 계백이 전투에 임하기 전 가족을 죽이고 왔다는 소식은 이미 신라 진영에도 널리 퍼진 이야기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한다는 표식을 위해 계백은 가장 소중한 이들의 피로 백제군의 사기를 붙잡았다. 결국 지옥도와 같던 날씨 속에 벌어진 악귀 같은 전투는 계백의 가족 피가 준 힘으로 버티고 있던 것인가?

    김유신은 백제 결사대에 대응하기 위해 극단의 작전을 쓰기로 했다. 자신이 젊은 시절 낭비성 전투에서 패배 직전의 신라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 방법, 화랑 돌진이었다. 화랑이 단신으로 또는 소수의 낭도와 함께 적진에 돌격해서 죽는다. 그 죽음 앞에 병사들이 감동하고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목숨을 던질 젊은이를 찾았다.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이었다. 반굴은 김유신의 친동생 흠순欽殉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딸이며 사촌인 영광令光과 혼인한 사위였다.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인 반듯한 청년 반굴은 적진으로 돌격해서 죽었다. 아마 김유신이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제일 먼저 돌격하였을 것이다.

    관창은 김품일金品日의 아들이다. 품일은 진골 출신 좌장군으로 김유신 다음가는 군부 2인자였다. 신라 군부를 대표하는 최고급 장교들의 아들이 백제 진영으로 돌격하였고 젊은 피를 황산벌에 뿌렸다. 신라군의 속셈을 알았지만,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신라군 진지로 돌려보냈다. 비정한 아버지들은 아들들에게 죽음으로 향한 길을 재촉했다. 당연히 마음속으로는 깊은 슬픔이 있었겠지만 그런 표현을 못하는 게 아버지의 모습이다.

    가족을 죽이고 온 계백만큼 독한 신라 장군들이다. 이런 젊은 화랑의 죽음은 순진한 청년들에게는 감동을, 눈치 빠른 노병에게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전해 주었다. 아들까지 죽였다. 아들의 목숨도 버린 마당에 병사들 목숨 따위가 눈이 보이겠는가? 오늘 내로 전투를 끝내라. 몸을 사리거나 돌격에 실패하면, 이 길이 뚫릴 때까지 무모한 돌격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목숨을 건질 최선의 수는 단 한 번 돌격으로 전투를 끝내는 것이다.

    어찌 됐든 잠시 휴식도 취하고, 사령부의 독기가 전 장병에게 전파되었다. 기회가 열렸음을 직감한 김유신. 불타오를 때가 싸울 시간이다. 북을 울리고 함성으로 사기를 돋우며, 독한 사내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함으로 결국 백제 진지를 점령했다. 계백 정도의 고관이라면 사로잡히기 마련이지만, 그는 처음 신념대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계백 장군의 묘가 있는데, 이곳에서 계백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영이 무너지고 패퇴하게 되자 논산천 앞까지 밀리고 밀리다가 강변에서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듯 보인다. 결사대 대장다운 장렬한 죽음이었다. 오천 결사대가 모두 황산벌에서 산화한 반면 고관인 좌평 충상은 살아남아 신라의 백제 정벌에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덕분에 이들과 비교되어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계백과 오천 결사의 명성은 충절의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사비성泗泌城 함락
    소정방의 당군은 신라군에 비해 수월하게 백제군의 방어선을 뚫고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7월 10일 황산벌 싸움으로 신라군이 하루 늦게 도착하자 소정방은 ‘옳다구나’ 하고 신라군을 압박했다. 소정방은 백제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번 일을 빌미로 신라의 기세를 꺾고자 했다. 하지만 노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김유신은 소정방의 의도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우리는 속국이 아니고 동맹국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업신여긴다면 여기서 당장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일갈한 김유신의 강경한 행동에 소정방은 한 발 물러서야 했다.

    기세 싸움이 진정된 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도망갔으나 5일 만에 항복을 했다.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처절한 약탈 속에 가혹한 여성들의 운명과 불타는 사비성을 탈출하려는 백성들의 이야기는 낙화암 3천 궁녀 이야기로 와전되었고,
    [주2]
    국보 287호로 백제 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 백제금동향로도 이때 급하게 웅덩이 속에 묻어 둔 채로 사라졌다가 1,400여 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백제의 최후는 이처럼 급작스럽고 허망했다. 서기전 18년 온조대왕溫祚大王이 나라를 연 이후 31세 678년 만이다. 의자왕을 포함한 귀족층과 백제의 상위 계층은 모두 당으로 끌려갔다. 이후 치열한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라 대장군 김유신


    신라 화랑 김유신
    황산벌에서 계백과 오천 결사대를 넘어서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 그는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의 정복 전쟁을 완수하여, 대조영의 대진국과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근 80년 생애 동안 다섯 왕을 모셨다.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을묘년 595년에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의 부임지인 만노군萬弩郡(현 충청북도 진천군)
    [주3]
    에서 태어났다. 그는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으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이 증조부다. 현재 지리산 자락 산청군 왕산王山에 있는 피라미드 형식의 능은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조부인 무력武力은 백제 성왕聖王을 잡아 죽이는 등 한강 유역 영토를 신라의 것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1등 관위인 각간角干까지 올랐다.

    어머니 만명萬明은 신라 중흥 군주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숙흘종肅訖宗의 딸로, 서현과 만명은 야합하여 사랑의 도주를 했다. 만명은 당시 신라 최고의 혈통인 성골이었고, 서현은 가야계 왕족의 성공한 무장 집안이지만 진골 중 가장 낮은 등급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릴 만큼 급이 맞지는 않았다. 당시 권력층 대부분은 정략적 행위의 혼인을 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를 어긴 두 사람의 로맨스는 서현의 과감한 행동과 당돌한 측면이 있는 만명의 행동으로 당시에 꽤 주목을 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천군에는 그가 무술 수련과 말달리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10세 무렵까지는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진천은 신라와 백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국경 접경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는데, 소년 김유신은 귀하게만 자란 왕경 귀족들과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고,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익히게 되었다. 신라와 백제의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와 여기서 얻은 다양한 경험은 그의 두뇌를 복잡하고 남다르게 발전시켜 난세에 처하여 난국을 타개하는 데 가장 적합한 머리를 갖추게 해 주었다. 기존의 당연한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세상을 정립하게 되었고, 과감한 현실 판단력과 결단력을 지니게 해 주었다.

    그의 결단력을 보여 주는 사건은 왕경에서 일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 집단을 이끈 그는 검술로 국선國仙(화랑의 우두머리)이 될 정도였다. 진골로 가야 출신이고 여기에 신라 왕실의 피도 섞인 모순적 존재였기에 그에게는 작은 약점도 허용되지 않았다. 기존 기득권층은 신흥 세력들의 작은 죄도 크게 부풀려 앞길을 영원히 막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절제였다. 그런 그가 10대에 방황을 했는데, 바로 유명한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이었다. 기존까지는 기생으로 알려진 천관녀는 최근 신교 문화 전통에서 여제사장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흥성해지면서 고유의 신교문화가 위축되었다. 주류에서 밀려나는 신교문화의 여제사장과 이어진 사랑. 하지만 이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인연이었다. 어머니 만명의 단호한 태도 앞에 사랑하는 여인을 버려야 했고, 이에 대한 결단으로 자신이 아끼던 애마의 목을 베었다. 그에게 주어진 가문의 무게, 가야계 무장 세력과 자신을 따르는 낭도들의 인생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실패는 수많은 이들의 실패를 의미했다. 말의 목을 베어 버린 사건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게와 압박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이겨 내겠다는 적극적 의사의 표현이었다. 이후 첫사랑 천관이 죽자 그를 위해 천관사라는 절을 세웠다. 첫사랑에 대한 추억과 안타까운 이별은 한 남자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잊히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이후 역경을 만나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상황을 역전시키는 단단한 마음을 지니게 된 것도 어쩌면 이 사건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역사 속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629년 35세 때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양쪽에서 신라를 조여 왔다. 무왕은 경남 지역까지 밀고 왔고, 고구려도 함경도 지역을 탈환하고, 충북의 낭비성娘臂城(현 청주 상당산성으로 추정)까지 점령했다. 이는 551년 이전의 국경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고, 신라의 영토 확장에 앞장섰던 진흥왕의 공적이 완전히 사라져 한강 유역을 포기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유신은 중당中幢 당주幢主라는 지위로 김춘추의 부친인 김용춘과 부친을 따라 출진하였고, 고구려 진영을 향해 세 번이나 돌격했다. 그의 활약으로 낭비성을 탈환하고 한강 유역을 지켜 내자, 그와 가야계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신라 대장군 김유신
    이 무렵 김유신은 평생지기를 만난다. 바로 김춘추金春秋로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다. 김춘추는 차기 왕위 계승이 유력하였던 만큼 여러 진골들의 견제가 심했기에 신흥 진골이 된 김유신을 편하게 대했을 것이다. 둘은 축국(축구)로 친해졌고,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가까워졌다. 그 시기에 공주의 신분이었던 선덕여왕의 지원으로 김춘추는 문희와 혼인하였고, 법민法敏, 인문仁問 등 아들만 6명을 낳았다.

    당시 신라는 내우외환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혜로운 선덕여왕의 즉위는 다른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여왕 주변에는 친위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친왕 세력에 대한 후원을 강하게 했는데 왕실 가족, 특히 김춘추 집안을 아꼈다. 여기에 백제의 공격은 갈수록 집요해져서, 국경 근처를 침입해 영토 획득을 하는 게 아니라 수도를 직접 함락시킬 목적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전쟁의 규모와 잔혹함이 커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무력을 기반으로 김춘추를 지원하는 김유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641년 백제가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는 사건이 발생해 낙동강 서쪽 방어선이 무너졌다. 신라는 새롭게 낙동강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는데 지금의 대구와 경주 사이인 경산시에 위치한 압량주押梁州가 바로 그곳이었다. 김유신은 이곳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압량주는 옛날 압독국으로 한때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과 패권을 다투던 중요 지역이었다. 금관가야의 땅과 백성에 대한 영향력을 지녔던 김유신이 이 지역까지 장악하면서 신라 최대의 군벌이 되었다. 압량주는 서라벌과도 지근거리로 백제 방어를 위한 최적지였고, 기존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도 가능했다. 실제 이 압량주 군사로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의 난 진압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는 대야성이 부하의 변절로 무너졌다는 점을 절감하고 자신만을 따르는 용사들을 모았다. 이들은 주로 가야계 인원과 압량주 출신들이었다. 마치 사병 같은 분위기의 3천 용사를 모은 김유신에게 신라 정부는 다른 여러 군단을 제공했다. 이곳이 뚫리면 바로 서라벌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김유신은 병사들에게 전공을 세우면 왕이 왕경 시민과 같은 특권을 나눠 줄 거라 약속했다. 자연스럽게 왕의 친위군이라는 자부심도 부가되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당시 이런 차별 대우에 한恨이 있던 경주 외곽 지역민들은 김유신의 약속을 믿고 선덕여왕에게 충성을 보였다.

    선덕여왕이 위독해진 인평仁平 14년인 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난을 일으켰다. 구세력 상당수가 비담 측에 붙어 선덕여왕 측은 병력이 부족했다. 이때 낭도들이 대거 김유신 측에 가담하여 전세가 역전되었고, 구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김춘추가 전방위적인 외교 활동을 하는 동안, 김유신은 백제의 파상 공세에 맞서 치열한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대야성을 탈환하고, 이때 포로로 잡은 백제 장군 8명과 김춘추의 사위 및 딸의 유해를 교환하여, 김춘추의 마음을 사기도 했다.

    비담의 난과 백제의 파상 공세 속에서 시작된 진덕여왕의 치세는 김유신의 전쟁 승리와 김춘추의 외교술로 후반기 치세는 비교적 평화롭게 운영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으로 국가 총동원령 상태라 신라를 공략할 여력이 없었다. 신라는 재정과 법률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부서를 만들고, 왕의 직속 기관인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했다. 귀족의 대표직인 상대등에 비견되는 힘을 집사부에 실어 주었는데 이는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기 위한 빈틈없는 준비의 일환이었다.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김유신은 무력을 앞세워 화백회의 결정을 무력화시키며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다. 무열왕은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다른 아들들도 각기 높은 관등을 부여했다. 이제 신라는 서라벌 왕경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가야와 그 외 지역민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어 김유신을 대각간大角干에 임명하고, 셋째 딸 지소智炤를 환갑이 된 김유신과 혼인하게 한다. 이중, 삼중의 혼맥으로 김유신은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이런 교차 혼인 동맹은 당대만이 아니라 대를 이어 영원토록 함께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남북국 시대를 연 태대각간太大角干김유신
    무열왕은 생전 숙원이었던 백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에 앞서 김유신은 부산현령夫山縣令으로 있다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백제 좌평 임자任子의 가노가 된 급찬級湌 조미압租未押을 통해 임자와 연계를 맺고 백제의 내부 사정을 염탐했다. 무열왕 7년 660년 경신庚申 상대등으로 승진한 김유신은 백제 정벌에 나섰다. 김유신은 신라 모든 군단들과 직간접적인 끈이 닿아 있었다. 신라군은 김유신에 의해 길러진 군대라 할 수 있었다. 경력, 나이, 혈통 모든 면에서 신라 군단 전체를 하나로 묶고 통솔하기에 최상의 인물이었다. 비담의 난 이후 14년이라는 세월을 인내한 끝에 귀족 최고의 꽃인 상대등과 대장군이 된 그는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군신이자 경외감과 권위를 함께 가진 인물이 되었다. 계백의 오천 결사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당군과 합류한 후 백제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 멸망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너무나 기습적인 공격으로 고구려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백제 부흥군이 일어나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661년 6월 무열왕이 59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태자가 즉위하니 문무왕文武王이었다.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로 고구려를 공략했다. 소정방은 수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에워쌌지만, 여전히 고구려는 만만치 않았다. 당은 신라에게도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문무왕은 출병을 차일피일 미뤘고, 태전 지역 백제 부흥군이 있던 옹산성甕山城(현 대전시 계족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웅진성의 당군을 끌어들이는 고단수 계책을 발휘했다. 가기 싫은 게 아니고 당과 작전 중이라 못했다, 이런 핑계였다. 그사이에 고구려군은 사수蛇水에서 방효태군을 전멸시켰고 소정방군은 고립되었으며 식량 부족으로 전멸 위기에 처했다. 당나라 고종은 평양까지 식량을 수송할 것을 명령했다.

    지금까지 고구려와의 방어전에서는 성공했지만, 감히 공세에 나선 적이 없던 신라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 내부 깊숙이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오는 이 작전에 68세의 노장이 자원했다. 바로 김유신이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당시 신라 최고 영웅이자 왕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지위에 있던 그였다. 어찌 보면 생애 최후의 작전을 수행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662년 정월 김유신은 식량 수송 작전을 지휘했다. 한겨울이라 길이 얼어 수레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식량을 소와 말에 실었다. 이는 기병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신라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고구려였다. 국경선인 임진강 여울 앞에 이르렀지만 나서는 자가 없자, 김유신은 제일 앞에 서서 강을 건넜다. 발은 내딛었으나 앞길은 암담했다. 고구려군을 피하기 위해 산길과 샛길로 돌고 돌아 앞으로 전진했다. 김유신 자신이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들어 말을 몰아 달려 나가며 지휘관의 솔선수범을 보였다. 신라군은 황해도 수안쯤에서 진군을 멈췄다. 겨울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추위와 눈보라가 이어지면서 말이 죽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김유신은 열기裂起와 구근仇近이 이끄는 15명의 특공대를 보내 당군과 연락을 취했고, 극적으로 식량과 구호품을 수송하였지만 당군은 철군했다. 이렇게 특공대의 소임을 완수한 15명의 용기와 무공에 감격한 신라는 골품 규정을 무시하고 이들에게 급찬 벼슬을 하사했으며, 후에 8위 관등인 사찬沙湌으로 올려 주고 평생 특별 대우를 해 주었다.

    고행 끝에 식량 수송 작전을 마쳤지만 신라군에게 있어 돌아가는 길은 험난한 철군의 시작이었다. 노련한 김유신은 식량 수송이 끝난 소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북과 북채를 소의 허리와 꼬리에 묶어 소리가 나게 하고 장작을 잔뜩 태워 주둔하는 것처럼 속인 뒤 철군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강 언덕을 붙잡고 울었을 게 틀림없었을 만큼 신라군의 귀환은 그 자체가 기적의 생환이었다.

    비록 동족의 나라를 침공한 이민족의 군대를 지원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평가가 좋지는 않지만, 순수하게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이 작전은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신라군의 조직 훈련 전술 운영 능력이 다른 어느 군대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이고, 이런 군대였기에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김유신은 백제 부흥군 진압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얼마 후 중풍에 걸려 더 이상 군사 작전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668년 고구려 평양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문무왕은 그에게 태대각간(또는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라는 최고 관직을 하사했다.

    평가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2년 문무왕 12년 황해도 석문石門(지금의 황해서 서흥) 평야에서 신라 주력군이 대패를 했다. 이후 임진강 방어선인 호로하에서도 신라군은 대패를 당했다. 신라의 충격은 상상 초월이었다.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방어전을 제안했다. 민심은 어수선했고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후 673년 7월 1일, 김유신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를 이루었던 그였지만 마지막 순간은 불행했다. 평생에 걸쳐 이룬 대업이 무너져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왕조의 운명까지도 바람 앞의 촛불인 상황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조카인 문무왕에게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며 조정을 화목하게 하고 백성을 사랑하라는 식의 원론적 말만 남겼을 뿐이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인다. 진흥왕부터 시작된 신라의 정복 전쟁이 여러 대에 걸쳐 지속되면서 가야,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이르렀다. 이제 당唐만 물리치면 누대에 걸친 공적들이 영원히 사람들에게 남아 전해질 것이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어 달라. 최후의 순간을 걱정하지 말고 미래를 보는 원대한 구상과 원칙을 고민하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어떤 계책보다는 힘이 되어 주는 태도를 보여 주었던 것 같다. 아마 죽음을 앞둔 김유신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울며 다짐한 문무왕은 그 뜻을 이어갔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유신! 그는 신라의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주축인 신하였다. 당대 신라인들에게는 사후에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과 함께 신라를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사대주의자라고 평가되지만, 당군과는 언젠가 결전을 치러야 한다는 인식을 처음으로 한 이가 그였다.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그와 그의 집안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함으로써 가문의 신분과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볼 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어린 화랑의 희생을 담보로 대치 상황을 돌파한 것이 비인간적이고, 전술 구사가 부족한데도 대단한 전략가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비판과 더불어 백제 멸망은 당군이 주도했고 고구려는 내분으로 인해 자멸한 측면이 있는데 김유신의 역할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여기에 왕가의 외척이 되고자 누이들을 이용한 출세 지향적인 인물이라는 비판도 있다.

    나당전쟁 승리의 주역 문무왕


    긴 전쟁이 끝났다. 아니 끝난 것 같았다. 668년 9월 26일 고구려 평양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가야연맹이 해체된 562년 이후 100년간 지속된 삼국 갈등의 최대 희생자는 백성들이었다. 전쟁은 너무 길었다. 애국심, 탐욕, 동료애, 복수 등 어떤 말로도 이 긴 전쟁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원과 한, 그리고 슬픔과 분노가 쌓여 가고, 가장을 잃은 가족의 가난은 또 다른 고통과 비극을 낳는다. 서로를 미워하는 상극의 마음은 세대를 이어져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이 당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숙적 고구려를 무너뜨려 세계 최대 제국이 된 당唐나라는 이제 주체할 수 없는 영토욕을 부리기 시작했다.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할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에 맞서는 신라의 수장은 태종 무열왕의 장자이자 김유신의 조카 김법민,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젊었을 적에 당에 가서 국제적인 식견을 익혔다. 태종 무열왕 시기 30세가 채 안 된 나이에 4등 관등인 파진찬과 병부령으로 일하며 군사 행정적인 일도 경험했다. 태자로 책봉된 뒤 백제 정벌에 임하였고, 이후 백제 부흥군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적지 않은 경험을 쌓고 36세의 나이에 신라 30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긴 전쟁의 끝매듭을 지은 인물로 신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었다. 무열왕에 비해 당의 눈치를 덜 보며 국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의 비위는 동생 김인문이 맞춰 주었다.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되자 신라와 당 사이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사실 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세우고 설인귀薛仁貴에게 이 지역 통치를 맡겼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땅과 유민들을 야금야금 신라의 것으로 만들며 실질적인 영향력 확대에 힘을 쏟았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결전을 결심한다. 당시 정치와 군부의 중추인 김유신도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자는 생각은 문무왕의 결심과 같았다.

    신라 주력군 궤멸. 석문石門 전투
    고구려 평양성은 함락되었지만, 몇몇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668년 9월 21일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大仲象이 동쪽 동모산東麰山(현재 길림성 돈화시 남쪽 현유현에 있는 성산자산城山子山으로 비정)에서 웅거하고 세운 후고구려였다. 이후 699년 태자 대조영大祚榮이 국호를 대진국大震國으로 하여 고구려 옛 땅을 거의 회복했다. 또 다른 흐름은 황해도에서 일어난 검모잠과 안승이었다. 그리고 671년까지 안시성은 항복하지 않았고, 다른 지역에도 저항 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구심점이 될 인물들은 미리 당이 자국으로 끌고 가 버렸고, 처음부터 고구려를 강하게 제압하려는 당의 움직임으로 인해 부흥 운동이 조직력 있게 전개되기는 힘들었다. 유일하게 대진국 건국이 성공한 것이다.

    아무튼 이런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신라의 대당對唐 전선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서전은 신라군의 기습 공격이었다. 670년 3월 신라의 사찬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가 인솔하는 신라, 고구려 연합군 2만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당은 설인귀의 주력군을 토욕혼 정벌에 투입하여 만주에는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근행李謹行의 말갈족을 투입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격하게 대립했던 속말말갈족 일부 세력인 그들은 당태종 이세민에게 투항했다. 이근행은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한 장수였다. 신중하고 정치력과 지도력도 지니고 있었다. 봉황성(개돈양皆敦壤)에서 일진일퇴를 벌인 끝에 연합군은 패배했고,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등 고구려 부흥군은 내분에 휩싸였다.

    그사이 신라는 전력을 기울여 백제 지역 공격에 집중했다. 항복해 온 안승의 고구려 유민을 보덕국(지금의 익산 지역)이라 하여 영지를 내려 주고 대對백제 전쟁에 투입했다. 671년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제압했다. 이제 모든 힘을 대당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비축미도 거의 바닥났고 식량 사정은 심각해져 갔다. 빨리 전투를 끝내야 했다.

    신라와 당의 전투는 672년 황해도에서 펼쳐졌다. 신라는 대방 들판에, 당군은 석문石門 들판에 주둔했다. 여기에서 신라는 비장의 무기인 장창당長槍幢을 투입했다. 특별한 장창과 기술로 무장한 창병을 거느린 부대로 보인다. 장창의 특징은 대對기병전에서 기병 돌격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초전에는 장창당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초반 승리에 고무되었는지 투입된 신라군들은 자신감에 충만하여 저마다 공을 세우기 위해 분산해서 진을 설치했다. 다양한 편제로 구성된 신라군들을 조정하고 위기 상황 때 이를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김유신 같은 이가 없었다. 노련한 이근행의 말갈 기병은 빈틈을 파고들었다. 놀란 신라군이 자리를 이동하려는 실수를 범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전멸을 각오하고 제자리에서 버티거나 공세적으로 나가 주었다면, 다른 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면 참혹한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군은 대아찬 효천曉川을 위시한 신라의 주력군이 궤멸되었다. 개전 이래 최대의 패전이었다. 이 전투에 김유신을 대리해서 둘째 아들 김원술金元述이 비장裨將으로 참전했는데 이는 김유신 가문이 여전히 신라 전장에서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화랑인 그 역시 화랑 돌격을 하려 했으나 부하의 만류로 후일을 기약하고 도망쳤다. 죽는 것도 기회가 주어져야 가능했다. 엄청난 충격 속의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고구려 부흥군은 결국 소멸했지만, 신라는 지구전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김유신은 원술을 죽일 것을 문무왕에게 요구했으나, 왕은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유신은 원술을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반전反轉, 매소성買肖城 전투
    그동안 김유신 가문은 많은 전쟁을 수행했고, 수많은 용사와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지휘관은 죽을 줄 알면서도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려야 했고, 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김유신이 보기에 원술의 행위는 자신이 내린 명령과 희생들에 대한 배신과 다름이 없었다. “결국 당신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당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이중적 잣대를 적용했구나”라는 비판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석문전투 패배의 원인은 군 병력이 조직적이지 못하고 제멋대로의 무모한 행동을 한 점과 대규모 병력을 운용해 보지 못한 신라군 자체의 약점, 그리고 지휘부의 자질 문제였다. 이는 진골이 관과 군의 고위직을 독점하는 데서 나오는 폐단 때문이었다.

    피해 규모가 엄청났다. 빠른 수습이 필요했지만, 백전노장 김유신도 방법은 없었다. 일단 요소요소의 요새에 박혀 방어전을 굳히는 수밖에 없다는 김유신의 대답에 따라 지구전으로 방향을 틀었고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수비 진지를 겹겹이 구축했다. 여기에 문무왕은 최후의 방법을 써서 당唐고종에게 빌었다. “신이 죽을죄를 짓고 삼가 말씀 올립니다.”로 시작하는 길고 낯 뜨거운 반성문 겸 사죄문을 올린다.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로 끝나는 이 글은 확실히 비굴하다. 굴욕적이지만 백제 땅을 반환한다는 이야기는 없다. 비굴한 만큼 문무왕의 무서운 성격을 느끼게 해 준다. 고개를 숙일 때는 확실하게 숙임으로써 끈질긴 투쟁 심리를 보여 주고 있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이고 복수도 하는 것이다. 시간을 벌고 살아남으면 반드시 역전의 기회가 온다. 지금의 치욕은 그때 갚으리라. 엄청난 예물과 함께 당군 장수에게 뇌물도 보냈다. 위기의 순간 당군은 진군을 멈추었다. 그사이에 백제인으로 편성된 백금서당이 탄생했다.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황금서당
    [주4]
    은 신문왕 때 탄생하지만 이미 고구려군은 합류하고 있었다.

    이후 여러 전선에서 신라군과 당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아무튼 문무왕은 사과할 땐 사과하고 칠 때 치면서 행정 체계를 잡는 등 내실을 다져 갔다. 지방관 파견으로 백제인들의 마음을 잡았고, 673년 김유신이 죽은 후에도 당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유신의 죽음은 오히려 분위기를 전환시켜 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675년 드디어 설인귀와 이근행의 대군이 남하하였고, 신라도 병력을 총동원했다. 설인귀의 당군을 문훈文訓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격파했다. 9월 29일 신라군은 이근행군이 주둔한 매소성(매초성 또는 매소천성, 현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산성으로 추정)을 공격했다. 태백산에서 은둔 생활을 한 원술도 명예 회복을 다짐하며 이 전투에 참전했다. 이근행 병력은 20만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3만 정도의 기병이었다. 당시 전투 양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의 대승이었다. 노획한 말만 3만 3백80필이었다고 한다. 원술도 대활약을 펼쳐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어머니 지소는 남편의 뜻을 어길 수 없다며 면담조차 하지 않았다. 원술은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

    종장終章 기벌포伎伐浦 전투
    매소성 전투 이후 산발적인 대세는 넘어갔다. 승기를 잡은 신라는 당에 국서를 보내 당을 달랬다. 내용은 사죄한다는 것이지만, 전쟁을 그만둘 명분을 준 것이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당군과 말갈군은 더 이상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당은 토번 침공을 저지하는 데 더 주력해야 했다. 그럼에도 당군은 끈질겼다.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군은 임진강 북쪽에 주둔하면서 여기저기 성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늙은 설인귀의 노욕이 갈수록 심해지고 신라의 희생은 커져 갔다. 설인귀는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또는 군산)에 상륙했다. 설인귀의 목표는 웅진과 사비였다. 이곳을 점령하고 웅진도독부를 재건하여 백제를 신라에서 분리해 내려고 했다. 이곳에서 신라는 무려 22회나 전투를 치르며 당군을 격퇴했다. 아마 기벌포 상륙 작전과 함께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발발한 것으로 보인다. 설인귀는 해전에서 시득施得의 군대를 이겼지만 여기까지였다. 신라군은 사방에서 당군을 몰아냈다. 기병을 이용한 기동전과 유격전 앞에 당군은 철저히 소탕을 당했다. 이 전투로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신라는 초강대국 당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당은 신라의 영역 확보를 인정하고 대신 요동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힘을 썼다. 당이 두려운 것은 요동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결집이었는데, 이 두려움은 대진국의 흥성으로 현실화되었다. 이후 신라와 당은 냉랭한 관계였지만 최소한의 교류는 이어졌고, 대진국의 발흥으로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732년 대진국에 대한 당군의 공격에 신라가 협력하는 등 관계가 좋아졌다. 신라는 당 중심의 천하관을 인정한 채 서라벌을 중심으로 가야계, 한강 유역 주민, 백제와 고구려, 일부 말갈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은 평가가 좋은 왕이었다. 선왕인 무열왕보다 더 힘든 전란의 시기를 보냈고,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생각보다 복잡하고 위험했다. 그는 투지와 지혜로 그 과정을 넘어갔다. 만년에는 현재의 안압지를 조성하였고 수도 방어를 위한 성을 새로 쌓거나 증축했다. 681년 그는 김유신이 죽은 날과 같은 7월 1일 승하했다. 신라의 정복 전쟁을 완수한 그는 김유신과 더불어 신라인들에게 최고로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을 받았다.

    삼국 중 최약체였던 신라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진화하는 신라군이었다. 초기에 백제군과 호각지세였던 신라군은 여러 전투 및 당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했다. 뛰어난 수용성을 바탕으로 당군의 기본 진법인 육화진법六花陣法을 신라에 맞게 육진병법으로 응용하고 변용했다. 육회진법은 24장 중 한 명인 이정이 창안한 것으로, 보병 기본 대형을 사각형에서 삼각형으로 바꿔 다양한 형태의 진형 운용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또한 신라군은 당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장창부대를 신설해 수비하고, 당唐고종도 탐낸 1천 보를 날아가는 쇠뇌와 같은 특수 무기로 공격했다. 잘 훈련된 병사와 더불어 임진강 유역에 촘촘하게 구성된 약 150여 개의 성으로 구성된 방어선도 전쟁 승리의 요인이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지도부의 솔선수범이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내분이 적었고, 우리 역사상 드물게 지도층의 희생이 두드러졌다. 특히 대를 이어서 정복 사업을 완수했다. 무열왕과 문무왕, 김유신과 김원술 부자가 그러했고, 김흠순과 그 아들 반굴 및 손자 영윤令胤은 3대에 걸쳐 희생을 했다. 물론 이런 희생에 대해서 국가는 아낌없는 지원과 보상을 해 주었다. 황산벌에서 계백과 맞섰던 관창은 후에 급찬級湌에 추증되고, 곡식 등을 포상으로 받았다.

    신라 정복 전쟁의 주역, 화랑花郞


    고구려, 백제에 비해 열악했던 신라가 발전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화랑이다. 본래 배달 신시 시대의 천왕랑(또는 국자랑)에서 비롯하였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도 삼랑三郞이 있었으며,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도 천왕랑이었다. 신라 화랑은 진흥왕 때 그 명맥을 이어 국가적으로 편제한 데 불과하다. 화랑의 지도 이념인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소도의 계율인 오상五常(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과 내용이 같다. 화랑도를 일명 국선도國仙道, 풍월도風月道, 풍류도風流道라고도 했다. 진흥왕 37년인 576년에 사회 통합과 인재 양성을 위해 조직, 운영했다. 당시 신라는 금관가야를 넘어 새롭게 가야연맹을 대표하던 대가야를 병합했으며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이전 영토보다 세 배 가량의 크기를 단번에 획득했다. 이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인재들을 화랑에서 충당했는데, 그만큼 화랑에게 부여하는 국가적 책임과 가문의 기대감은 상당했다.

    화랑은 십대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진골 출신 화랑에 이를 따르는 낭도가 하위 조직이 되는 방식으로, 많을 경우 서너 명의 진골 화랑이 존재하여 서로 경쟁하며 노력했다. 재주를 보이고 눈에 띄어야 진급이 되고 더 나아가 가문의 가치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화랑과 낭도는 일종의 주군과 가신 같은 관계로 평생 지속되었고, 공을 세우면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고 했던 것 같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했다. 용화향도는 미륵불彌勒佛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미륵불이 부처가 될 때 용화수龍華樹 아래에 앉게 된다 하여 유래된 말이다. 즉 이들은 미륵불을 신앙하는 단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종교적인 열의가 십대의 순수함과 만나면서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의 치열함과 잔인함은 성전을 수행하는 기사단이라는 인식으로 승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물러섬이 없다’는 이런 정신은 죽음을 두려워 말고 싸우라는 종교적 안심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유신 자신도 젊었을 때 낭비성 전투에서 돌격을 감행했었다. 이때 돌격은 단신 돌격보다는 자신들이 이끌던 낭도와 함께한 소수 정예의 돌격대(중장기병대로 보임)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김유신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 돌파구를 만들어 내면서 이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반굴이나 관창 같은 화랑과 그들이 이끌던 낭도들도 황산벌에서 그런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돌격은 단신 돌격에서 오는 감동뿐 아니라, 적진을 돌파하여 진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진형을 양분시켰고, 이로 인해 생기는 적의 빈틈이나 측면을 아군이 파고들게 하여 승기를 잡도록 해 주는 역할이었다.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김춘추金春秋


    진골眞骨 김춘추
    진흥왕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신라는 위축되어 갔다. 위기가 가중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신라에는 변화가 발생했다. 두 사람의 신진이 정권을 장악하고, 젊은이들이 최고의 정치 조직으로 부상했다. 작고 속 좁고 고리타분하던 나라의 회춘이었다. 두 인물은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다.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같이 희고 대단한 미남에 쾌활하고 말솜씨와 매너가 뛰어난 귀족 남성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미자안선담소美姿顔善談笑(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 사서에는 개인의 용모나 개성에 대해서는 거의 묘사를 하지 않았다. 김유신만 해도 그의 용모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만큼 김춘추는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폐위된 진지왕이었다.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금륜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동륜이 일찍 죽어 금륜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진지왕이다. 진지왕의 폐위 사유는 폐정과 음행이었다. 하지만 『화랑세기』를 보면 이 시대는 왕비도 간통을 해서 사생아를 낳는 게 다반사였고, 촌수를 논하기 민망할 정도로 혼인 관계도 복잡하고 근친혼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왕의 음행은 유흥이나 단순히 여색을 밝히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여러 왕족과 귀족을 분노케 한 간통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진지왕 폐위를 주도한 사람은 사도태후와 미실궁주였다. 진골 정통이었던 진지왕은 미실궁주와 관계를 맺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면 대원신통계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원신통大元神統은 법흥왕 이후 왕비를 배출하는 인통(혼인 상대의 계통) 중 하나로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에서 시작하여 진흥왕비 사도태후와 미실궁주로 이어지고 있었고 모계 계승이었다(사도와 미실은 모두 박씨). 그러나 진지왕은 약속과 달리 미실을 왕후로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사도와 미실이라는 두 여걸의 반발을 산 진지왕은 폐위되고, 왕위는 진지왕의 형인 동륜태자 계열로 넘어가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에게로 이어졌고, 이 동륜 계열 혈통을 성골이라고 했다.

    여기에 맞서는 제1야당 세력이 진골 정통, 즉 김춘추 가계였다. 왕위 계승에서 진지왕의 두 아들 용수와 용춘은 화랑 쪽으로 진출했다. 여기서 용춘이 명성을 얻자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가 숙부인 용춘을 사랑하여 태어난 이가 김춘추이다. 진흥왕 이후 복잡해진 왕실 가족 구도의 결론에 위치한 이가 김춘추이기도 했다. 진지왕과 진평왕으로 갈라진 금륜과 동륜의 혈통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으며, 능력과 추진력도 국제적으로 인증을 받았다.

    평생의 동지 김유신과 만나다
    당시 신라에는 동륜과 금륜 이외에도 진흥왕의 후손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미실로 대표되는 박씨와 석씨, 진흥왕 이전 김씨 왕 후손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름의 정통성이 있고 세력도 있었다. 여기에 몰락한 가야파 왕족까지 존재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김춘추가 왕이 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김춘추에게 접근한 이가 금관가야의 정통 왕손이자 가야파 화랑의 우두머리 김유신이었다. 이 둘은 확실한 혈연관계를 맺는다. 혈연의 매개체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文姬였다.

    이미 김춘추에게는 정부인으로 김보종金寶宗의 딸 보량공주가 있었다. 김보종은 미실궁주와 설원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보량공주 사이에 태어난 딸이 고타소이다. 문희와 밀애만 즐기고 차일피일 시간을 끄는 김춘추에게 김유신은 강수를 둔다. 처녀가 애를 뱄다는 죄로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는 쇼였다. 당시 김유신의 집은 남천 가에 있어 남쪽 전망이 탁 트여 있었고 남산에서 보면 훤하게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 집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사연을 알게 되었고,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이 갖는 의미를 알아채고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김춘추와 문희는 남산 기슭에 있는 포석사鮑石祀(포석정)에서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

    김유신, 김보종, 김춘추는 각기 제 15, 16, 18대 풍월주(우두머리 화랑)를 역임했다. 그중 김보종은 가장 종교적인 인물로 평생 김유신의 후원자가 된다. 김춘추와 김문희의 혼인은 진골 정통과 대원신통, 가야 왕족의 세 세력이 왕위 계승자인 김춘추를 축으로 해서 하나로 뭉쳤음을 말해 준다.

    대야성 함락과 복수 혈전
    백제 의자왕은 즉위한 642년 신라를 향해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서쪽 변경 40성이 백제에게 떨어졌다. 그중 대야성 함락으로 인해 신라는 낙동강 동쪽으로 철수하고, 옛 가야 지역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대야성은 현재 합천군 합천읍에 위치한 매봉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봉산은 해발 90m의 작은 산으로 성벽은 300m 정도다. 성 앞으로 하천이 흘러 해자垓子 역할을 하는데, 강에 인접한 하안 절벽은 상당히 가파르다. 공격군에게는 마땅한 엄폐물이 없고, 수비 측 시야는 넓게 트여 있는 난공불락의 대야성. 이곳에 검일黔日과 모척毛尺이라는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 백제와 내통하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 대야성 도독은 이찬 품석品釋으로 김춘추의 외동딸 고타소의 남편이다. 그가 권력을 남용해 검일의 아내를 겁탈한 것이 화근이었다. 성은 함락되고 성주 부부는 살해되었다. 고타소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충격을 받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그러던 중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었다.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고구려와 백제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상황에서 신라는 두 가지 방안을 냈다. 고구려와 백제 동맹을 분리시켜야 하고, 더 강하고 많은 병력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국가 운영 방식을 바꿔야 했다. 이 부분을 김춘추와 김유신이 나누어 담당했다.

    연개소문은 백제 성충과 동맹을 맺고, 사신으로 온 김춘추에게도 같이 힘을 모아 당을 쳐서 연합 정권을 세울 것을 여러 번 권유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의 분리에 실패한 김춘추는 적극적으로 대당 외교에 매달렸고, 결국 당태종과 밀약을 맺게 되었다. 김춘추가 당에 방문했을 때 당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식량과 시간이었다. 만약 신라가 고구려 남쪽 국경을 돌파해 식량을 운반해 준다면, 그게 아니라도 고구려군 병력을 분산시키거나 대동강 하구로 진입하는 당 수군을 엄호해 준다면, 이런 상황에서 김춘추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식량을 가지고 평양성 앞에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제를 먼저 정벌하자. 그런 다음 고구려를 정벌하고 대동강 이북은 당이 차지하고, 이남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신라와 당과 밀약은 성사되었다. 김춘추가 귀국한 태화太和 3년(649년)부터 신라는 관복을 당풍으로 바꾸고, 신라의 고유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쓰는 등 친당 정책을 더욱 가속화했다. 하지만 김춘추의 복수가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은 길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밀약을 맺은 다음 해에 죽어 버린 것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그사이 654년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에 사망하고 김춘추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즉위 이전 발휘한 능력과 성과가 무색하게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 공격으로 33개 성을 빼앗겼다. 신라 국경선이 허물어지는 조짐이 나타났다. 무열왕은 주위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심한 걱정과 근심에 휩싸였다. 그러던 660년 드디어 당군이 출병을 결정했다. 고민과 근심으로 날을 지새우던 무열왕에게 낭보가 날아든 것이다. 무열왕은 경주와 한산주의 군대 5만을 동원하여 대장군 김유신을 사령관으로 해서 백제 사비성으로 진군하게 했다. 김유신은 황산벌을 넘었고 당군이 기벌포를 넘어 사비성을 함락했고 의자왕을 사로잡았다. 전승 축하연에서 18년 전 대야성 함락의 주범인 모척과 검일을 붙잡아 처형하기도 했다. 백제가 망했다고 하지만 사실 당군은 사비성과 웅진성만을 차고앉은 데 불과했다. 8월에 백제의 부흥군이 일어서기 시작했고 무열왕은 이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해 와서 군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던 661년 음력 6월 무열왕은 59세로 사망했다. 아직 미완의 상황을 정리할 책임은 태자 법민과 김유신에게 넘겨졌다. 시호는 무열武烈,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했다. 태종이란 묘호에 대해 당唐고종이 너희 같은 소국이 태종이라는 묘호를 참칭僭稱하니 불충이라고 고칠 것을 요구하자, 당시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양신良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一統三韓)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는 응답을 했다고 한다.

    평가
    김춘추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일단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 자체가 신라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했다. 이후 김춘추의 후손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계속 추모하였고 이후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도 대체로 통일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근대에 들면서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사 강역을 축소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대표적으로 단재 신채호는 형제의 나라인 고구려, 백제를 외세인 당과 손잡고 공격한 행위를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격이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가했다. 이와 함께 안재홍은 김춘추의 이런 행위는 사대주의의 발로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김춘추, 김유신의 행위로 일어난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대신 그 불완전함과 함께 ‘남북국 시대’라는 시대의 성격을 강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물론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으나, 과연 김춘추에게 고구려, 백제를 통일한다는 인식이 있었는지조차도 의문스럽다. 백제 멸망은 딸 고타소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복수의 집념이 더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 부흥 세력에 대한 군사 작전을 스스로 하는 모습에서 김유신과 큰 방향에서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이전까지 군사 작전은 김유신이 도맡았는데, 이후 백제 부흥군과의 전쟁에서는 다른 장수들이 등장을 하지만 김유신은 배제되었다. 당과도 맞서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 김유신과 달리, 당에 좀 더 사대적이고 기대는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이유다. 흔히 그 당시에는 동족 의식이 없었다고 하지만,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어느 정도의 이질성이 존재했더라도 공통의 신앙이 신교문화를 지키고 있었다면 김춘추와 같은 행동을 변호하기에는 뭔가 결여되고 부족한 점이 많다고 본다. 단지 현대인의 시각이 아닌 당시 신라인의 시각, 그리고 신라라는 나라의 존망을 책임진 김춘추의 처지를 고려해 본다 하여도 김춘추는 우리 역사에서 영웅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인물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하리라 생각한다. (정리: 객원기자 이해영)




    해동증자 의자왕義慈王과 백제 패망
    백제 역사상 신라에 가장 맹공을 퍼부은 사람이 의자왕이다. 즉위 후 진두지휘해서 신라의 성 40여 개를 빼앗았다. 김춘추에게 비통함을 안겨 준 대야성 함락도 이 공세의 결과였다. 그는 성격이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고 전하고 있다. 즉위 전에는 부모에 대한 효심과 아우들과의 우애가 깊어 공자의 제자인 증자에 견주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했다. 이런 그가 백제의 마지막 왕이라는 게 기막힌 반전이다.

    641년 3월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그는 1차적인 정적 숙청을 단행한다. 동생 교기翹岐와 여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등을 섬으로 쫓아냈다. 이들은 왜로 망명했다. 657년 2차 숙청 때는 최고위직인 좌평직의 인물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자신의 아들들로 채웠다. 귀족들의 땅을 왕실에 편입시켜 버리고, 왕자들로 친위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화끈한 결단력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귀족들의 이반을 사게 되었다. 건국 이래 백제를 괴롭혀 온 만성 질환은 이주 집단인 부여씨 왕족과 토착 귀족 세력 사이의 갈등이었다. 백제의 역사에는 결단력 있는 왕도 많지만 암살당한 왕이 더 많을 정도로 암살과 숙청 등이 반복되곤 했다. 의자왕 대에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의자왕의 숙청은 귀족 그룹만이 아니라 처가, 외가 ,형제들에게까지도 향하고 있었다. 과감하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고립시켜 갔다. 그래서 의자왕 대의 백제는 겉으로는 강하고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정치적 알력과 혼란이 미처 수습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에 신라 공격에만 치중하여 당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덕분에 신라와 당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어 버렸다. 그나마 성충이나 왜를 통해 알아내던 정보마저 성충이 죽고 신라와 당이 왜와의 교류를 막아 버리자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은 백제 정벌을 결정하고, 이를 3월에 신라에 통보한다. 5월 말에서 6월 초에 좌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군 13만 명이 내주萊州(산둥성 액현)를 출발하여, 6월 21일 신라 태자 법민과 덕적도에서 조우했다.

    백제는 당군의 침공을 6월경에야 알아차리고 대책 회의를 열었지만 결단력 있는 의자왕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의견이 대립되면서 시간은 허비되었다. 의자왕은 대신들의 말을 따라, 당군을 백강 안으로 끌어들여 일시에 공격하여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먼 길을 달려 온 당군은 속전속결을 목표로 하였는데, 백제의 결정은 그런 의도를 도와준 꼴이 되어 버렸다. 황산벌에서 계백과 오천 결사대가 충혼의 피를 뿌릴 때 장항 부근 강어귀에서는 당군과 백제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백제군은 금강 어귀를 막아 당군의 상륙 자체를 저지해야 한다는 안과 당군은 대군이고 금강은 좁기 때문에 일렬로 들어오는 당군을 강 안쪽으로 끌어들여 요격하자는 안이 맞섰다. 결론은 후자를 택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그것은 탁상공론이었다. 당군이 상륙한 기벌포는 진한 갯벌이었다. 임시방편으로 그들은 돗자리를 깔고 상륙했다. 당군은 육군으로 한쪽 강변을 휩쓸어 버리면서 전진했고, 육군의 엄호를 받으며 수군은 길이 30미터 정도의 중형선을 타고 차례로 강으로 진입해 육지에서 전투 중인 백제군의 후미를 쳤다. 이른바 수륙병진책이었다. 좁은 강폭과 평탄한 강변은 당군의 전략을 매우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 결사대를 무너뜨린 신라군과 백제 저항군을 밀고 들어온 당군은 마침내 사비성泗沘城으로 진군했다.

    사비성 부근에서 수도 방위전이 전개되었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고 포위되었다. 의자왕은 사자를 보내 교섭을 시도했으나 당군은 거절했다. 당군은 백제에 오래 주둔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그들의 주적은 고구려였다. 신라군이 퇴각해 버리면 당군 단독으로는 전쟁이 불가능했다. 치명적인 백제의 판단 착오였다. 의자왕은 태자 융과 함께 7월 13일에 웅진熊津으로 피난했다.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이내 항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마침내 18일 웅진에서 항복을 했다. 불과 열흘 만에 백제라는 나라가 멸망한 것이다.

    8월 2일 사비성에서 무열왕과 신라 및 당의 장군들이 함께 승전 잔치를 벌였다. 의자왕과 아들 융은 잔치가 벌어진 마루 밑에 앉았고, 가끔씩 술을 따라야 했다. 당군은 승전 기념으로 사비성에서 한바탕 대대적인 약탈을 했다.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아들들, 대신 및 장군 88명과 백성 1만 287명을 당으로 끌고 간다. 당唐고종에게 끌려간 의자왕은 놀랄 정도로 수척하고 초라해져 있었고, 이 모습을 왜의 사신이 목격했다(『일본서기』권 26 사이메이 천황 6년 추 7월 조).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당은 의자왕을 낙양 북망산에 장사 지내 주었는데 그가 묻힌 장소는 삼국 시절 오나라의 마지막 왕 손호孫皓(손권의 손자)와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의 마지막 왕인 진숙보陳叔寶의 묘 왼쪽이었다고 한다. 이는 의자왕에 대한 예우이면서 모욕이었다. 손호와 진숙보는 다 망한 나라의 군주로 포악함과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왕들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조선상고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
    『삼국사기』 (이재호 역, 솔, 2006)
    『삼국사기』 (이병도 역, 을유문화사, 1997)
    『삼국사기』 (이강래 역,한길사, 2012)
    『삼국유사』 (일연 지음, 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 1998)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황윤, 어드북스, 2013)
    『한국고대전쟁사2,3』 (임용한, 혜안, 2012)
    『그 위대한 전쟁 1,2』 (이덕일, 김영사, 2007)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KBS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2003)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인디북, 2004)
    『한민족전쟁사』 (온창일, 지문당, 2001)
    『신라인 이야기』 (서영교, 살림출판사, 2009)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이종욱, 김영사, 2000)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박영규, 웅진씽크빅, 2008)
    『일본서기』 (성은구 역, 고려원, 1993)

    [주1]
    주역 몽괘蒙卦의 육오동몽길六五童蒙吉을 말한다. 육오는 괘의 육효 가운데 제5효의 음효를 말한다. 동몽은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이르니, ‘어리고 몽매한 사람이니 길하다’는 뜻이다. 이 제5효는 유순한 음으로 군왕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제2효와 음양 상응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그에게 위임하고 순응하는 형상이다. 즉 무지한 이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겸손한 태도로 유능한 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린아이같이 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김유신 자신의 위대한 무공보다는 이를 가능하게 한 신라 왕실의 지원과 당시 신라의 조직력에 대해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주2]
    백제가 멸망하던 날 당군을 피한 의자왕의 3천 궁녀가 낙화암 절벽에서 그 아래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게 낙화암 전설이다. 낙화암은 부여 부소산성 안에 있고, 그 아래에 고란사皐蘭寺가 있다. 부소산성은 뒤로는 백마강을 끼고 남쪽으로는 부여 정림사지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쪽으로 갈수록 산이 높아지는데 낙화암은 북쪽 끝 정상부 바로 아래의 강변 절벽이다. 지형으로 보아 적군이 산성 안으로 진입해서 사람들이 뒤로 도망친다고 했을 때 막다른 골목에 해당하니 전설이 정말 그럴듯해 보인다.

    이런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비슷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태종춘추공조에서는 타사암墮死巖(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3천 궁녀라는 말은 없다. 이야기의 주제는 의자왕과 후궁들이 이곳에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 시대에 들어서 3천 궁녀로 바뀐 듯하다. 현재까지 알 수 있는 기록은 15세기 후반 김흔이 쓴 시가 최초다. 김흔은 낙화암을 노래하면서 “삼천 궁녀가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고 읊었다.

    의자왕의 궁녀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의자왕이 방탕한 폭군이었으며 그의 방탕과 음란함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해석이 후세에 유행하면서 나온 이야기 같다. 실제로는 당군의 대대적인 약탈을 피해서 도망친 사비도성의 주민들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전쟁이나 망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일반 민중이고,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약자들이기 때문에.

    [주3]
    무제산武帝山을 주산으로 하는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1975년 을묘년에 정비되었다. 태령산胎靈山은 김유신의 탯줄을 산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주4]
    신라군의 편제 - 신라의 정규 군단은 모두 금衿이라고해서 상징하는 표식을 달고 색깔로 부대를 구분했다. 신라의 상징은 반달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고구려가 태양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니 원圓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백제는 삼각이나 사각형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2018년 09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