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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보는역사]

    근대사 | 민영환의 충의로운 죽음에 혈죽을 내려 주신 상제님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을사년 늦가을에 김자현의 집에 계시면서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大人輔國正知身(대인보국정지신)이요 磨洗塵天運氣新(마세진천운기신)이라
    遺恨警深終聖意(유한경심종성의)요 一刀分在萬方心(일도분재만방심)이라

    이 글을 자현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민영환閔泳煥의 만장輓章이니라. 시세時勢를 짐작해 보건대,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으로 세상일을 알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4장)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하였는데 벽혈碧血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청죽靑竹이 생겨났다 하니 이는 어떤 연고입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혈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하시니라. (5편 140장)


    상제님께서는 명부를 정리整理하심으로부터 세상을 바로잡으셨다. 명부에서 역사적 인물을 지상으로 내려보내고 천상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그 시기와 모양새에 따라 역사의 방향이 크게 바뀌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민영환의 만장輓章을 직접 지어 명부 공사를 처결하심으로써 역사의 대세를 돌리셨다. 민영환의 의로운 순국殉國 이후 극도로 쇠잔해진 민족정기가 자주독립을 향한 충정으로 혁신되어 삼천리강토와 민족의 혼 속에 불붙어 갔다.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은 1861년 8월 7일 서울 견자동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민겸호閔謙鎬였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閔台鎬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당시 세도를 구가하던 여흥驪興 민씨 척족 세력의 총아寵兒로서 젊은 나이부터 출세 가도를 달렸다. 국내의 여러 고위 관직을 경험했고, 특명전권공사가 되어서는 잦은 외유를 다니며 구미 제국의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學部大臣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대신參政大臣·외무대신外務大臣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였다. 그러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결국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단도로 몸을 찔러 자결하였다. 세 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 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 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이 같은 선생의 죽음과 유서는 일제히 각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튿날, 함께 상소를 올린 조병세가 극약을 먹고 자결했다. 같은 날 전 참판 홍만식도 자결하고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군인 김봉학 등 각계각층에서 순국이 이어졌다. 민영환의 집 행랑에 거처하던 인력거꾼은 뒷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선생의 순국은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운동과 구국 계몽 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선생의 부인 박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잠겨 무료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듬해 7월 어느 날, 부인은 선생의 유품을 보관해 두었던 방에 환기라도 시킬까 하고 문을 여는데,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진다. 남편이 죽을 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모셔둔 마루방의 틈새에서 난데없이 ‘푸른 대나무’가 솟아 있는 게 아닌가. 이 청죽靑竹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한다.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선생의 집으로 몰려왔다. 사람들은 “대나무가 선생이 순절할 때 흘린 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하여 ‘혈죽血竹’이라 부르며 용기를 갖기 시작한다. 4줄기 9가지에서 45장의 잎이 피어난 대나무는 선생이 순국할 당시 나이와 같아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른바 ‘민영환의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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