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견甄씨

[한국의 성씨]

황간黃磵 견甄씨·상주尙州 견甄씨


시조는 아자개
「조선씨족통보」와 각종 문헌에 의하면, 견씨의 본관은 남양南陽, 상주尙州, 청양靑陽, 전주全州, 남원南原, 경주慶州, 안주安州, 선산善山, 황간黃磵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황간과 상주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세거하는 지명이라고 한다. 상주 견씨와 황간 견씨는 같은 계통이다. 상주 견씨의 시조는 원래 이李씨였던 아자개阿慈介로 전하며, 그의 아들 견훤甄萱이 황간 견씨의 시조이다.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래의 성씨가 이李씨였다. 농사를 짓다가 신라 말기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시)에 웅거하면서 스스로 장군이 되어 고을을 다스리는 호족이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본래 성은 이李씨였으나 뒤에 견甄씨를 성으로 삼았다(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기와 유사에서는 견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면서 견훤을 숲 아래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먹여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견甄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견’, 질그릇장인 ‘진’ 두 가지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고대 한국에서는 진훤 이름 앞 글자의 음이 ‘진眞’이라는 주장과 함께 고대 한국에서는 甄은 ‘견’보다는 ‘진’으로 발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견훤의 탄생 설화와 뿌리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견훤의 출생에 대한 이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침실을 찾아옵니다.” 하니 그의 아버지는 딸에게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 하여 딸은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기를 잉태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한다.〉

견훤의 선계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는데, 먼저 견훤이 백제 부여扶餘씨의 후손으로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직계 9대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와 연관 있는 내용이 『환단고기』에도 나온다.

“時(시)에 李萱(이ㅣ훤)이 起兵武珍州(기병무진주)하고 乃聲言於衆曰(내성언어중왈) 吾原三國之始(오원삼국지시)컨대 馬韓先起(마한선기)에 赫居世(혁거세)가 後興(후흥)하고 弁韓(변한)이 從之(종지)에 百濟開國(백제개국)하야 傳世六百(전세육백)이러니 新羅(신라)가 與唐(여당)으로 合攻滅之(합공멸지)하니 今予雖不德(금여수부덕)이나 欲雪義慈之憤(욕설의자지분)이라.”[이때 이훤李萱(견훤)이 무진주(지금의 光州)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여 밝혔다. “내가 삼국이 시작한 근원을 살펴보니 마한(중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신라)가 뒤에 일어나자 변한(가락)이 뒤따라 일어났다. 백제가 나라를 열어 6백 년을 전해 오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의자왕의 분을 풀어 드리겠노라.”]

재밌는 것은 문경 가은에는 견훤의 집안을 백제계로 연결 짓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나라가 망하자 백제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에서 경제력이 있는 일부가 산간벽지인 가은 아차 마을로 피란해 살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이비가기李碑家記’를 인용하여 견훤 집안의 가계도가 진흥대왕眞興大王-구륜공仇輪公-선품善品-작진酌珍-원선元善(아자개)-견훤으로 이어져 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아자개는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고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에서도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의 현손이라 하였고, 그 조부 선품善品이 가은현加思縣에 숨어 살면서 이씨李氏로 개성改姓하였는데 훤이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견훤의 출생지에 대해서 상주와 광주, 그의 조상에 대해서도 백제 왕손, 신라 왕손으로 두 가지 상반된 설이 전하고 있다.

후백제 멸망 후 몰락한 견씨
견훤은 신라에서 서남해 지방의 방어에 공을 세우고 비장이 되었으며, 신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서기 892년(진성여왕 6년)에 무리를 모아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900년(효공왕 4년)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 왕이라 칭했다.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고 궁예의 태봉과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견훤의 후백제는 이후 왕건의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으며, 935년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왕건에 투항하여 양주揚州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듬해인 936년(태조 19년) 왕건에게 아들인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케 했으며, 충남 논산시 연산면의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악화돼 숨졌다. 논산 지방의 전설에는 견훤이 숨질 때 무진주가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해서 논산에 묘를 썼다고 한다, 현재의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그의 묘소로 추정되는 능이 있고 비석에는 “후백제 왕 견훤 능”이라 음각되어 있다. 또한 경북 문경聞慶(당시는 상주尙州)에는 견훤이 태어났다는 집터가 있다.

그 뒤 견씨 일족은 고려 왕조의 미움을 사 원래 성의 음인 ‘진’을 ‘견’으로 바꾸면서 숨어 살았다. 이때 후손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전전하였는데 이는 각처에 흩어진 선대의 묘소 위치를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견씨가 이렇게 쇠락함으로써 견훤 뒤의 세계는 흩어져 정확한 계통을 밝힐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를 알 수 있는 견윤甄胤을 1세조로 삼는다. 현대 인물은 견영종(한의사), 견종구(사업가), 견담종(일력택시회사 사장), 견길종(사업가), 견종우(사업가), 견석남(약사, 보룡약국), 견계남(약사), 견진필(약사, 나나약국), 견기종(종친회 회장), 견미리(탤런트, 가수) 씨 등이 있다(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일연, 『삼국유사』
김부식, 『삼국사기』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