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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탐구]

    명장열전 | 상하협일上下協一로 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종顯宗과 강감찬姜邯贊

    *공우가 “막내아들 주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상제님께서)말씀하시기를 “강감찬姜邯贊이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337장 7절).


    *상제님께서 하루는 구릿골 약방 마루에서 남쪽을 향해 앉으시어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강감찬이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7편 78장 1절).


    * 一條流出白雲峰(일조유출백운봉) 萬里滄溟去路通(만리창명거로통)
    莫道潺湲巖下在(막도잔원암하재) 不多時日到龍宮(부다시일도용궁)

    한 줄기 흐르는 물은 백운봉白雲峰서 솟아 나와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천천히 졸졸 흘러 바위 아래에만 있다고 업신여기지 말게나.
    머잖아 용궁龍宮까지 도달할 물이어니.
    (고려 8세 현종이 지은 시 「시냇물溪水」
    [주1]


    * 孤鶴寵衛軒(고학총위헌) 雙鴛入毛論(쌍원입모론)
    秋風無限恨(추풍무한한) 不能共一尊(불능공일존)

    외로운 학은 위나라 초헌軺軒에 태우는 총애를 받고 한 쌍의 원앙은 모론에 들었네.
    가을바람에 무한한 한은 한 잔 술 함께 할 수 없어서라오.
    [주2]



    ■ 고려 현종과 강감찬 관련 연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거란 제국 즉 요遼 나라 건국
    ●918년 왕건王建, 고려高麗 건국
    ●926년 요, 대진국大震國 멸망시킴
    ●936년 고려 후삼국 통일
    ●942년 요, 고려에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냈으나, 사신은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임(만부교 사건)
    ●948년 강감찬 금주衿州(현 서울시 관악구)에서 문곡성文曲星 정기를 받고 태어남
    ●979년 대진국 유민 수만 명 고려에 귀순
    ●992년 현종,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 황보씨의 사생아로 태어남. 이름은 순詢, 자는 안세安世, 12세에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봉해짐.
    ●993년 요나라 소손녕 고려 침공, 서희의 활약
    ●994년 고려 강동 6주 축성과 북방 방어선 구축
    ●1009년 강조의 변란으로 현종이 즉위함 18세
    ●1010년 요나라 성종의 고려 친정, 고려 현종 남쪽으로 몽진
    ●1011년 요나라 개경 함락, 화의 성립 후 퇴각, 양규의 분전
    ●1018년 요나라 소배압 10만 군대로 침공, 강감찬 흥화진에서 요군 격파
    ●1019년 요나라 개경 접근, 현종 결사항전을 준비(현종 27세), 요군이 철군하던 도중 귀주에서 강감찬(71세)이 요나라 군대를 격파(귀주대첩龜州大捷)
    ●1020년 고려 요나라와 강화회담
    ●1031년 5월 신미일 현종 붕崩, 향년 40세, 재위 22년, 시호는 원문元文, 묘호는 현종顯宗, 능은 선릉宣陵
    ●1031년 8월 을미일에 시중侍中 강감찬 세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됨, 향년 84세, 시호는 인헌仁憲, 충청북도 옥산면 국사봉 기슭에 묘가 있고 그 근처에 사당인 충현사忠顯祠가 있음

    들어가는 글


    고려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대 중 하나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북방 유목민족들이 흥기하였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고려와 대결하여야 했고, 고려는 이들과의 대결에서 한 치의 밀림이 없었다. 그 첫 상대는 대진국을 멸망시킨 거란 즉 요遼나라였다. 거란과는 크게 3차례 26년간 전쟁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실수와 실패를 거듭했지만, 상하가 단결하고 민관이 합심 합일하여 결국에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평화를 가져왔다. 여기에서는 뜨거웠던 고려인들의 항전 역사와 승리 요인, 그리고 여러 명장들을 지휘해 고려 중흥을 이끈 현종과 상원수 강감찬에 대해서 알아본다.

    기도祈禱- 1019년 2월 귀주龜州의 강감찬
    [주3]


    일배!
    북녘 산하의 추위는 새벽이 다가올수록 더욱 매섭다. 북두칠성은 그 맑고 차가운 별빛을 대지에 내뿜고 있었다. 백발白髮 백수白鬚의 상원수 강감찬은 천상의 상제님께 기도를 올리며 깊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작년 1018년 9월 거란은 최후의 대전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개경으로 직공하며 결정적 타격을 가하려는 작전으로 내려온 것이다. 즉 고려 현종을 포로로 잡고 고려를 항복시켜 버리려 했던 것이다. 거란 최고의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황제 친위군을 비롯해 10만 정예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이에 고려도 최대한 준비를 하였다. 거란 황제 성종聖宗의 친정親征이었던 지난 2차 침입 때 정확한 판단력과 지도력을 보여준 강감찬을 서북면 최고 책임자로 파견하여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거란의 선전포고가 도달하자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안주를 사령부로 하여 20만 8천 명을 북계에 배치했었다.

    지난 2차 침입 때도 실질적 사령관이었던 소배압은 중원의 송나라와 전쟁에서는 상승장군이었다. 하지만 고려에 와서는 제대로 그 기량을 발휘 못했다. 그는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고 늘 거란을 괴롭혔던 의주의 흥화진興化鎭을 우회하는 결단을 내렸다. 12월 10일 흥화진을 뒤로 하고 남행하는 거란 군을 고려는 고진강古津江으로 추정되는 하천에서 수공작전을 펼쳤다. 이미 흥화진을 우회할 것을 예상했고 하천변에서 매복,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빠른 기동과 기습이 장기인 거란군은 거꾸로 고려군에게 당했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소배압은 안주성 이북에 쳐 놓은 고려군의 봉쇄망을 모조리 따돌리고 청천강을 건너 남하를 해 버렸다. 개경이 위험해졌다.

    재배!
    겨울밤 북풍은 매서웠다. 봄이 오고는 있지만, 북녘은 봄도 더디었다.

    고려군 총 사령관 상원수 강감찬. 70세 노구인 그에게 고려는 명운을 걸고 있었다. 그는 금주(현 서울시 관악구, 금천구, 광명시, 시흥시 일대) 지역의 호족인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948년 무신戊申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었다. 36세 되던 983년 성종 3년 과거에 응시해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중추원사中樞院使, 이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인이었다. 거란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올라 있었다.

    강감찬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지략이 뛰어난 비범한 인물이었다.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고,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며 위엄이 있어 적을 만들지 않았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체구가 작은데다가 얼굴이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낡아서 보통 사람보다 낫지 않았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로 조정에 서서 큰일에 임하여 정책을 결정지을 때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이 되었다. 훗날 풍년이 들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라 안팎이 평안하니, 사람들은 그 모두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하였다. 북두칠성 중 학문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하늘의 이치를 거슬리는 자에게 벌을 주는 일을 주관한다고도 한다)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출생 설화에서 보여 주듯이 그는 선가仙家의 수행을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삼배!
    소배압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군이었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세계 최강의 기동력을 보유한 군대였다. 그들은 이런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고려의 심장부를 향해 달려갔었다. 강감찬은 다급했지만 여유롭게 대처하였다. 우선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부대는 거란군 한 부대를 따라잡아 격파했다. 하지만 거란군은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을 우회하여 빛의 속도로 남진했다.

    급하게 내려가는 거란군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모하고 저돌적인 공격으로 그들은 급격한 체력 손실을 입고 있었다. 보급 기지 하나 없이 자체의 수송 부대와 현지 조달(약탈)에 의지하여 진군하였다. 고려군의 생사를 건 추격을 받으며 진군해야 하는 거란군에게 있어 현지 조달을 하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런 상태로 혹한기에 행군하는 병사들의 피로감은 급격히 높아진다. 그래도 소배압은 중단하지 않았다. 희생이 클수록 그것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더 커지는 법. 강감찬이 마지막으로 거란군의 위치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는 더 이상 거란군의 개경 접근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최후의 한 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에게 1만 2천명의 정예 기병을 내주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란군을 따라잡으라는 특명을 내렸다.

    사배 그리고 심고心告
    1019년 2월 2일 길고 긴 추격전과 고려군의 대응으로 이제 그 거란군이 이곳 귀주벌까지 쫓겨 와 있었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 북풍이 부는 뿌연 아침,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상원수 강감찬은 깊은 기도 뒤에 상방검尙方劍을 들고 군막을 나섰다. 이제 최후의 전투만 남았을 뿐이다.

    강조康兆의 정변 1009년
    서경도순검사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와 외척 김치양이 불륜을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이를 기화로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강조는 행영도통사가 되어 군사 30만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1009년 12월 통주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거란으로 끌려가 죽었다.


    회상回想- 1019년 1월 고려 황도 개경의 현종


    1019년 정월 개경 및 인근 경기 주민들은 설맞이를 전쟁 준비를 하며 지내야 했다. 2차 침공인 1009년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시키고 초토화시킨 후 9년, 겨우 궁을 복원한 지 3년 만에 다시 거란군이 개경에 육박하고 있었다. 1019년 1월 3일 개경 북방 40km 지점인 신은현(신계)에 거란군이 나타났다. 이 정도 거리면 거란에게는 하루 여정에 불과했다. 지난 2차 침입 때 현종은 거란군이 개경 근처에 오기도 전에 도주했다. 즉위 1년이었고, 강조康兆에 의해 허수아비로 세워져 기반이 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현종은 그동안 착실하게 정권 기반을 닦아 갔다. 중앙 관제는 외삼촌이자 선대인 6세 성종成宗 때 마련되었다. 하지만 지방 관제는 정비되지 않았다. 이래서는 조세 징수나 병사 징발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겨우 75개 도에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할 정도였다. 현종은 2차 침입 이후 일진일퇴 공방전을 계속하면서도 지방 행정망을 정비하였다. 이는 명칭에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 시대까지 우리나라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전비를 증가시켜 거란 침공 대비를 위해 북계에만 10만 이상의 병사를 상주시켰다. 계속해서 거란과의 크고 작은 충돌로 희생은 있었지만, 그 와중에 유능한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마침내 시작된 최후의 전쟁에서 현종은 청야전술淸野戰術로 결전의 의지를 밝혔다. 개경 주변을 비우고 주민을 성 안으로 집결시켰다.

    이번 전쟁에서 거란군은 개전 이후 여러 번의 전투에서 타격을 입어가면서도 진격만 했다. 그래서 이전에 비해 현전하게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전격전으로 밀고 내려와야 했기에 이동에 장애가 되는 공성 기구도 제대로 운반하지 못했다. 거기에 후미에는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김종현의 부대와 다른 고려군들이 압박을 가했다. 여기에 여진족을 방어하면서 단련된 고려군 최강 동북면(지금의 함경도 일대) 방어군 3,300명이 개경 방어를 위해 때맞춰 도달할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고려군 장수들도 상당히 노련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현종은 하루 이틀만 버티면 개경을 방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그러나 개경에는 하루 이틀 버틸 만큼의 병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개경을 버리고 몽진하는 경우 그 후유증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역대 군주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용기로 최후의 시련에 맞섰다. 이런 배짱이 소배압의 용기와 결단을 꺾었다. 소배압은 최후의 도박으로 척후기병 300명을 금교역까지 파견하였다. 개경의 군대와 병력 규모를 알아볼 심산이었다. 거란은 선봉군이 가장 정예한 부대였다. 이들을 고려군은 100기騎를 출동시켜 몰살시켜 버렸다. 고려도 모험을 한 것이다. 얼마 안 남은 개경에 있는 군사는 대부분 현종 친위대였는데 이들은 지휘관급으로 수는 적지만 질은 높았다. 이들을 특전대로 삼아 거란 척후대를 전멸시켜 버렸다.

    어떻게 해 볼 엄두도, 시간도 거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소배압은 회군을 결정했다. 여기서 그대로 더 밀고 내려왔다면 방어력이 약한 개경은 함락되고 현종은 포로가 되어 고려판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란은 돌아갔다. 그들이 단 한 번의 공격 없이 스스로 물러서자 개경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날 개경의 수호신인 송악의 산신에게 제를 올리니, 밤에 송악의 수만 그루 소나무가 사람 소리를 내니 거란군은 지원군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병력을 퇴각했다는 전설이 생겨날 정도였다.

    버림받은 왕손에서 중흥군주로 거듭나는 현종
    고려 8세 황제 현종! 그는 사생아였지만 혈통은 고귀했다. 부친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여덟 번째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이었다.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모친은 5세 황제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였다. 신라와 고려 왕실의 피를 모두 받은 유일한 왕자였다.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사가에 머물다 이웃에 살던 아저씨뻘인 왕욱과 사통하여 임신하였다. 이를 알게 된 6세 황제 성종은 왕욱을 사수泗水(현 사천시)로 귀양 보냈다. 그 후 임진년인 992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낳다가 산욕으로 죽었다. 태어난 아이 이름은 순詢으로 대량원군에 봉해진다.

    대량원군의 이모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 즉 천추태후는 당시 김치양과 사통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7세 황제 목종은 유약하였고,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여 자신들의 아이로 대통을 이으려 했고, 조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숭교사崇敎寺로 출가시킨 뒤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현 서울시 북한산 자락 은평구 진관사津寬寺)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지만, 신혈사 노승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목종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충주부사 채충순蔡忠順(971?~1036)에게 대량원군을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고, 서경 도순검사 강조康兆로 하여금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강조는 목종이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됐다고 잘못 알게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목종은 살아 있었다. 자칫 반역으로 몰릴 처지에 몰린 강조는 이끌고 온 군대로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하였다.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낮추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고려 8세 현종으로, 당시 18세였다. 1009년 2월의 일이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었다. 고려의 주력 30만을 이끌던 강조는 통주에서 성급하게 거란군과 대회전을 펼쳤으나 패하였다. 이에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였는지,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이제 마지막 시련이 될 소배압의 거란군에 대해서 결사 항전의 자세로 개경사수로 맞서서 이겨낸 그. 이제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전쟁은 북방 귀주에서 펼쳐질 것이다.

    거란 2차 침입때 당한 현종의 고난과 그 수습
    1011년 정월 개경을 탈출한 현종의 어가는 말 그대로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다. 사생아에 고아로 자랐고, 이모에 의해 죽음의 위협을 당한 현종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이성과 자제력이 남달랐다. 보통 사람의 경우 그런 고생을 하면 성격과 정서가 이상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험난한 여정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현종은 후비들과 몇몇 신하, 호위군 50여 명만을 거느린 채 개경을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숱한 고난을 겪었다. 맞이하여 호위해야 할 역驛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습격하기도 하고, 지방의 향리가 위협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은 평상복으로 왕을 맞이하고 부하들을 시켜 위세를 부리는 무례를 범하였고, 급기야 쿠데타를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지채문智蔡文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끝까지 호위하여 겨우겨우 나주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나주는 태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었기에 고려 왕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비로소 현종은 이곳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남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현종은 하공진河拱振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란에 화친을 청했다.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는 상황에서, 현종은 자신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다.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식적으로는 2차 전쟁이 종결되었고, 현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전決戰- 거란 전쟁 최후의 싸움, 귀주대첩龜州大捷


    팽팽하게 대치한 고려와 거란군
    과감한 결단으로 개경 직공을 선택했던 소배압과 거란군 최강 전사들은 귀주성 앞에 집결하였다. 더 이상의 도주는 위험했다. 여기서 최후의 승패를 지어야 했다. 귀주성 동편에는 두 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들판이 있다. 동문천과 백석천이다.

    이 하천을 끼고 고려군과 거란군은 팽팽하게 맞섰다. 이 싸움은 1010년 강조와 소배압이 부딪힌 통주성 전투에 다음 가는 벌판에서 하는 싸움이다. 지난 20년간 세계 최강 거란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고려군은 전투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번 원정에서 거란은 계속 지고 있었다. 과도한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그렇기에 고려는 더욱더 공세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거란군은 황제 친위군이라는 자부심과 실력을 갖춘 최정예 부대였다. 이 전투만 잘 치르고 하루만 더 가면 국경이다.

    거란군에게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서로를 향해 진격한 군대는 공평하게 하천 하나씩을 건너 두 하천 사이의 개활지에 마주 보고 도열하였다. 양쪽 다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측 다 우세를 점하거나 돌격의 전기를 잡지는 못했다. 사격전을 하고 서로 간에 기병 돌격을 해 보았지만 승패가 나지 않았다.

    회심의 일격 김종현 부대 출현
    이때 갑자기 김종현의 부대가 나타났다. 김종현 부대는 작년 12월부터 소배압 때문에 고생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강행군으로 소배압을 한 달 이상 추격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이가 갈릴 만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다행이었다. 단독으로 소배압의 대군과 만났다면, 병력 부족과 무리한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감으로 오히려 몰살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배압 군을 압박하는데 성공하였고, 거란군과 고려의 정예군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쟁터에 도달하였다.

    피아 균형이 팽팽할 때는 사소한 차이로도 승패가 갈린다. 고수의 세계는 그렇다. 그런데 1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이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강감찬으로부터 개경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았던 부대다. 정예 기병에 전력과 사명감이 투철한 최강의 부대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거란군을 추격해 왔기 때문에 거란군 등 뒤에서 출현한 셈이 되었다.

    하늘이 도왔다-동남풍이 불다
    전세가 일거에 고려군에 유리해졌다. 여기에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남풍으로 바뀌었다. 계절로 따지면 북풍이 정상인데, 강한 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불기 시작했다. 이를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어 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아군(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나 더해졌다.


    천재일우! 고려군 20만은 한 세대에 걸쳐 지속한 이 전쟁의 끝을 보려 했다. 여기서 끝을 보지 않으면 이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몰랐다. 강감찬의 진격 명령이 떨어졌고, 진군의 북소리가 높이 퍼져 나갔다. 거란군을 향한 고려군의 깃발과 함성은 귀주 벌판에 가득 찼다. 고려군을 맞이한 거란군 전위는 천운군과 우피실군이었다. 이들은 2차 침입 때 통주에서 강조 군대를 격멸할 당시 선봉에 섰던 부대였다. 고려군의 돌격에 거란군은 전열이 무너졌다. 대형은 무너지고, 퇴로를 잃은 천운군과 우피실군은 강으로 뛰어들었고, 이곳에서 쫓아온 강민첨의 고려군에 의해 수많은 병사들이 살해되었다. 고위급 장수들 피해가 커서 천운군의 지휘관급인 천운군 상온 해리, 발해 상온 고청명, 요령 상온 아과달, 객상사 작고 등이 전사했다. 거란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거란은 이처럼 처참한 패배를 당한 사례가 없다. 그것도 황제 친위군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역사는 이 전투를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고 한다.

    웅비雄飛-고려와 거란 전쟁이 동아시아 역사에 남긴 영향


    거란의 흥망
    1019년 2월 2일, 기나긴 거란 전쟁이 끝났다.

    거란 성종은 격노하여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리겠노라고 극언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고, 삭탈 관직만 하였다. 이후 소배압은 1023년 사망했다. 거란은 먼저 고려와 여진을 평정하고 중원을 정복한다는 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지금까지의 승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서 이듬해 고려와 우호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한 순간 거란은 제국을 형성해 온 목표와 에너지를 잃어버렸다. 현실적으로는 제국의 핵심 세력을 고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상실하는 타격을 입었다. 결국 거란은 1122년 여진의 금나라에 의해 허망하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고려와 현종
    개경으로 귀환한 강감찬과 고려군은 거국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 현종은 친히 도성 근교 영파역迎波驛(우봉, 황해도 금천군)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그를 위로하고 찬양하였다. 거란과 전쟁에서 희생한 이들을 위해 24절기의 망종 때 제사를 지냈는데, 이 날이 지금의 현충일顯忠日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 현종은 27세 청년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죽음의 공포를 넘나들던 젊은 황제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와 인생을 되찾았다. 이후 현종은 큰 사건이나 잘못 없이 국가를 통치하여 고려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부모를 위해 1020년 현화사를 창건하였고, 거란, 여진과의 외교 관계도 실리적으로 잘 맺어 나갔다. 군사 제도를 정비하였고,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 개경에 외성인 나성을 축조하였다. 완성된 성은 둘레가 23km로 18km인 한양 도성보다 컸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 큰 고생을 해서인지 1031년 5월에 붕어하였다. 향년 40세, 재위 22년이었다. 현종은 총명하고 인자한데다 배움에 능하고 서예와 문장을 좋아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후세의 대유학자 이제현李齊賢은 현종에 대해서 간결하게 자신의 감동을 표현하였다.

    “군주가 천명만 믿고 자기 마음대로 제멋대로 법도를 무너뜨리면, 비록 천명을 얻었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잘 다스릴 때에도 환란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도 위기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하늘이 주시는 복을 기다려야 한다. 현종 같은 분은 공자가 말씀하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으로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는 분이도다.”


    현종의 파란만장한 삶과 대對거란 전쟁의 승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후 고려는 120년간 태평성대를 구가하였고, 이후 모든 고려의 황제는 현종의 직계 후손이었다.

    별이 된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의 진정한 면모
    길고도 치열했던 거란 전쟁을 종식시킨 강감찬은 전후에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 되었다. 현종 21년에는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덕종은 그를 개국후開國候로 올리고 기존의 공신 호에 봉상奉上이란 명칭을 더해 주었다.
    강감찬이 살던 시대는 동아시아 국제정치 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던 때였다. 이전까지 중국을 차지하던 힘은 서북쪽에서 나왔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의 근거지가 그랬다. 하지만 대진국이 멸망한 10세기 이후로는 동북쪽 즉 지금의 만주 지역으로 힘의 중심이 이동했다. 거란의 요나라가 그 서막을 열었다. 거란이 중원을 안정적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를 굴복시켜야 했다. 요동의 지배자가 중원까지 지배할 경우 동아시아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이는 훗날 여진의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기 전 반드시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던 점을 비교해 보면 극명해진다). 그래서 줄기차게 고려를 침공했지만, 귀주대첩을 계기로 고려와 거란은 관계는 평화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는 고려-거란(요)―송나라의 세력 균형이 공고해졌다. 거란에 이어 요동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여진족의 금나라도 이런 구도를 깨지는 못했다. 이런 구도는 약 250년 뒤인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강감찬은 단순히 구국의 영웅을 넘어 동아시아 평화 구도를 정착시킨 성웅으로 부각될 수 있으리라!




    고려 문하시중 상원수 강감찬 탄강지, 낙성대落星垈
    대거란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은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금주衿州로 현재는 관악구와 광명시 등으로 나뉘어 있다. 그가 태어난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낙성대라고 부른다. 낙성대는 서울뿐 아니라 개성에도 있었다. 즉 강감찬 일가가 본래부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남경에 있던 곳이 서울 낙성대이다. 이후 관직에 오른 뒤 당시 수도 개경에 있던 집을 개경 사람들은 또 낙성대라고 불렀다. 궁성 남쪽 양온방으로 태평관 근처였는데, 여기서는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낙성대는 관악산의 정기를 그대로 받는 곳에 위치해 있다. 관악산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다. 그 봉우리가 마치 큰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이 갓 모양을 닮아 ‘갓뫼’ 또는 관악冠岳이라 하였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화강암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울려 철따라 변하는 산의 모습이 마치 금강산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 하였다. 예부터 이곳에서 기우제와 산제를 지냈다. 뾰족한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붓을 거꾸로 세웠다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고 한다. 과연 그 기운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문곡성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과거에 장원급제한 강감찬이 탄생했고, 그 자락에는 서울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낙성대는 1960년대 초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3년부터 이듬해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본래 출생지에 있던 삼층 석탑도 이동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강감찬의 옛 집터를 알리기 위해서 13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4.48미터의 사리탑 형식으로 남면으로 향한 탑신에 ‘강감찬낙성대’라고 새겨져 있다. 원래 이 탑은 현재 낙성대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봉천동 농가 마당에 서 있었다. 고고학자 김희경金禧庚의 오랜 수소문과 현지 답사 끝에 발견되어 1960년 세상에 소개되었다. 석탑이 있던 본래 자리에는 유허비를 세웠다. ‘안국사安國祠’라는 사당을 지어 매해 10월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한편 강감찬의 묘소는 의외에 장소에 있다. 즉 강감찬의 29세손인 강우건姜祐根씨 형제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끝에 1963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구암동 국사봉 뒤쪽 기슭(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國仕里 산 26-2)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써 묘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재 보라매공원(옛 공군사관학교 자리)이 본래 묘역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있다.




    만주의 강자 거란제국(대요제국大遼帝國)

    등장
    10세기 초 시라무렌 강과 랴오허 강 유역에 살던 거란인들이 국가를 건설했다. 자유롭게 살던 유목민들은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면 단결하여 나라를 만드는데 그 최대 목적은 풍요로운 중원 대륙 정복이었다. 거란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복 왕조라 부른다.

    이들을 한자로는 계단契丹이라 표기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글안’ 혹은 ‘거란’ 등으로 불렀다. 의미는 ‘철’이다. 본래는 키탄Qitan 혹은 키타이Qitay에 가까운 발음이다. 거란의 황제족은 알루트족 즉 야율耶律씨와 황후족인 사르무트족 즉 술율述律씨(또는 소씨蕭氏)의 부족연맹체 형태를 고수했다.

    성장
    거란제국 건설자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야율은 성이고 이름인 아보기는 원음이 아부치로 ‘약탈자’라는 뜻이다. 그는 당이 멸망하던 907년 거란을 다스리는 8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916년 다른 8부 대인들을 잔치에 초청하여 암살해 버린 후 그는 새로운 거란의 텡글리칸天可汗이 되어 분권적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고 독점적 지위에 올랐다. 여기에 한족들이 거주하는 한성漢城을 세워 여기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고, 여러 부족 중 가장 용맹한 자 2천여 명을 뽑아 친위군으로 만들었다. 대내적 통합을 이룬 야율아보기는 대외 원정에 나섰다.

    10세기 초 중원은 대당제국大唐帝國 붕괴로 혼란하였고, 대진국大震國은 쇠약하였다. 남쪽 한반도는 왕건과 견훤이 대치하는 후삼국의 형세였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 거란은 924년 몽골초원 원정, 925년에는 동방의 강자 대진국 원정을 단행하였다. 이 원정은 황후, 황태자 등이 참여한 거국적 규모였다. 당시 백두산 화산 폭발로 국가 체제가 와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진국은 별다른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거란에 항복하고 만다. 대진국 15세 애제哀帝 청태淸泰 26년 서기 926년 정월의 일이다.

    이후 아보기는 병사하고 차자 야율덕광이 태종으로 뒤를 이었다. 마침 북중국에서는 936년 후당의 하동 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키며 거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거란 태종은 대군을 몰아 낙양에 입성하여 석경당을 황제로 세워 주고(후진後晋), 그 대가로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
    [주4]
    를 할양받고 막대한 세폐를 받으며 재원을 확보하여 제국 발전의 기틀을 확고히 했다.

    군사조직과 전술
    거란군은 크게 금위제군과 부족군, 향병의 세 종류가 있다. 금위제군은 거란 최정예군으로 어장친군御帳親軍과 궁위기군宮衛騎軍으로 나뉜다.

    어장친군은 황실 직속 군대로 전국에서 뛰어난 전사를 뽑아 편성한 부대다. 이들은 다시 황제 직속 부대인 피실군皮室軍과 황후 직속 부대인 속산군屬珊軍으로 나뉜다. 피실군은 30만 명에 5개 부대로, 속산군은 20만 명에 2개 부대로 구성된다. 고려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이 최정예 군대가 투입되었다가 괴멸되었다.

    궁위기군은 황제 근위부대로 평소에는 궁과 관청을 경호하고 왕이 출정하면 호종한다. 최고 대우를 받으며 유사시 소집 명령을 받으면 여타 부대의 징집이나 편성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수도에 집결하여 순식간에 10만 대군을 형성한다.

    부족군에는 왕족과 대신이 거느리는 사병 성격이 강한 대수령부족군大首領部族軍과 한 단계 낮으며 국경 방어를 하는 중부족군衆部族軍 등이 있다.

    향병은 5경(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의 방어를 담당한 군대로 거란족 이외의 민족으로서 5경에 거주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한족이 많고, 다음은 대진국 유민이다.

    거란군 기초 단위는 대隊로 500~700명 정도다. 10대가 1도道를 10도가 1로路를 이룬다. 1도가 전투 부대의 기본 단위로 하여 대 단위로 진형을 구성하여 2진, 3진이 축차적으로 공격하였다가 전진에 틈이 생기면 전군이 일제히 돌격하여 적을 타격하는 전법을 썼다.

    기병 위주로 된 거란군의 강점은 뛰어난 기동력뿐 아니라 수송력에도 있었다. 전쟁은 보급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먹지 않고는 아무리 강군이어도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에 보병은 이동 반경도 좁고,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보급량도 많지 않았다. 반면 기병 위주의 거란군은 무기와 갑옷, 식량 등 다양한 장비를 재보급 없이 며칠 혹은 몇 번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기병 한 명이 여러 마리의 말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병 역할을 하면서 식량과 마초의 현지 조달을 하는 타초곡병 1명이 붙어 있었다. 거란군은 주 이동로를 벗어나 광범위한 지역을 약탈하고 약탈물을 풍부하게 실어올 수 있는 말이 있었다. 게다가 말 자체가 훌륭한 식량 창고 역할도 했다. 말 젖과 함께 비상시에는 고기도 제공했다.

    한편 전술적으로는 기만과 양동, 기습 돌파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거란군은 후방 사령부의 재가를 받지 않고, 공격 부대가 현장 상황을 판단하여 즉석에서 병력을 이동해 공격 방향을 바꾸거나 수세에 몰린 인접 부대를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즉 거란군은 빠른 기동력과 현장 지휘관의 재량권을 존중하는 소부대 단위의 기동이라는 전술적 특징을 지녔다.

    거란의 정치제도 중 오경제五京制
    거란은 몽골계 유목민과 중원의 한족, 여진계 여러 족속, 대진국 유민, 티베트인 탕구트족 등 다양한 족속을 포괄한 제국이었다. 그래서 여러 족속을 다스리기 위해 5경 제도를 채택했다. 키타이(거란)족 본거지인 시라무렌 강에 인접한 상경임황부는 거란의 수도였다. 그리고 키타이와 동맹 관계인 해奚족 땅에 중경대정부, 대진국 유민을 겨냥한 요령평원에 동경요양부, 후당을 세운 투르크 계통의 사타족 근거지였던 운雲 땅에 서경대동부, 그리고 한족 지역인 연燕 지역에는 남경기진부를 두었다. 제국의 토대가 되는 5개 지역마다 하나씩 거점 도시를 설정하여 유목지와 도시 복합체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 한 단계 발전된 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거란전쟁의 최대 수훈 공신, 서희徐熙(942~998)

    거란 1차 전쟁
    993년 고려 성종 12년 8월 거란 동경유수 소손녕이 자칭 80만 대군(실제는 6만 정도)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26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봉산 지역에서 선발대가 패배하였다. 봉산에서 패배하자 성종은 당장 서경으로 되돌아가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 주제는 어떻게 싸울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항복하느냐에 있었다. 무조건 항복하자는 안과 그러기에는 염치가 없으니 절령(황해도 평산 자비령) 이북 땅을 떼어 주고 강화하자는 안이었다. 결국 땅을 주고 강화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서경까지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 조정 전체가 공포에 젖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거란군의 약점을 파악한 이가 바로 서희였다. 소손녕이 항복만 권유할 뿐, 제대로 된 전투를 회피하고 있으니 실제 병력이나 전투력은 강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에 서경을 내주면 당장 위기는 극복할 수 있어도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일단 한번 제대로 붙어 본 후에 항복이나 다른 대응책을 논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거란군은 고려의 결정을 재촉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나섰다. 청청강 하구에 위치한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다. 안융진은 광종 때 쌓은 둘레 755m의 작은 토성이었다. 당시 책임자는 대진국 태자 대광현의 아들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태조 왕건 때 최고의 명장 유금필의 후예로 추정)이었다. 여기에는 대진국 유민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진국 유민의 최고지도자 집안이 이끄는 부대였으니, 휘하에는 유능한 장수와 용사가 많았고, 충성심과 단결력 거기에 거란에 대한 투지도 높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기록은 없지만, 안융진 전투는 고려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성전守成戰에서는 고려를 따를 군대가 없었다. 이후 소손녕은 더 이상 군사행동을 하지 못했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안융진의 낭보가 전해지자 고려는 강화 회담을 추진했고, 그 대표가 서희였다. 서희는 초반 기 싸움에서 소손녕을 압도하였다.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워낙 유명하지만 핵심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첫째 주제는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고, 만주의 원 소유주가 누구냐는 것이다. 이 부분은 명분 싸움이고 약간 형식적인 부분이다. 말 한마디로 영토를 양보하는 국가는 없기 때문이다. 양국 간 회담의 핵심은 두 번째 주제에 있었다.

    두 번째 주제는 서희의 현실적인 제안으로 빛을 발하였다. 즉 압록강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가 동시에 여진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자는 것이다. 거란의 당면 과제는 이때까지도 여진족 평정이었다. 이전까지 노골적으로 거란과 적대시해 온 고려가 동맹을 맺고 여진을 협공하자고 하니 소손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 안융진 전투에서 보인 고려의 전투력이 꽤 만만치 않았음도 작용하였다. 이 회담 결과로 고려는 강동 6주를 얻었다. 소손녕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끝내 몰랐던 것 같다. 잔치를 베풀고 예물까지 남기고 갔으니 말이다.

    거란전 최고의 방어선 강동 6주
    서희가 얻은 강동 6주. 지금 평안북도에 있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귀주(구성), 통주(선천), 철주(철산),곽주(곽산) 6개 군을 말한다.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이 지역은 해안 쪽으로 붙은 도로라고 할지라도 산지가 많고 지형이 험해서 방어에 유리하고 대부대 이동이 쉽지 않다. 한반도 서북 지역 방어에 있어 이 지역은 최고의 방어벽이다. 옛날 고구려와 당의 전투를 보아도 당나라군이 일단 압록강 방어선을 뚫으면 평양까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내려오곤 했고, 조선 시대 방어망도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누구보다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았던 서희는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요지와 주요 지역에 성을 쌓거나 보강하여 북방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과정은 백성들 처지에서 보면 대단히 고통스럽고 무리한 과업이었다. 여기에 이를 추진한 서희 자신도 무리해서인지 대업을 마친 후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하지만 이후 전개되는 26년간 대거란 전쟁에서 이런 고생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받았다.

    만약 이 방어망이 없었다면 거란군은 그대로 서경 앞에서 전쟁을 시작하였을 것이고, 몇 번이고 개경을 함락하고, 중부 이남 지역까지 진출하여, 고려는 그 명운이 다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거란 전쟁 최고의 수훈자는 서희였다. 그가 구축한 완고한 방어선과 험로가 없었다면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고려와 후손을 구한 것이다.

    고려 최고 전략가 서희
    서희는 942년 내의령 서필徐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이고 호는 복천福川이다. 대쪽 재상으로 이름난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매사에 절도가 있었다. 96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갖추기도 했다. 강동 6주 획득 후 평장사平章事가 되어 북방 방어선 구축에 혼신을 힘을 쏟다가 998년에 57세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장위章威로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덕종 2년에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거란전쟁 최고의 영웅, 양규楊規

    욱일승천하는 거란과 강조의 정변
    1차 고려 침공에서 형식이나마 고려를 신속臣屬시킨 거란은 눈부신 성장을 했다. 1004년 거란 성종聖宗은 대망의 중원 원정을 단행하였다. 1005년 허베이성 복양현에 위치한 전연澶淵까지 쳐들어갔다. 송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밀고 들어가지 못했지만, 송 진종眞宗은 거란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중국사 최대 수치로 남는 이른바 전연의 맹澶淵之盟이다. 송은 거란을 형님으로 모시고, 매년 막대한 세폐를 바쳐야 했다.

    거란에게 전연의 맹은 중원 정벌의 제1보였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방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다져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증명된 바같이 중원으로 진출한 요나라는 배후에서 일어난 여진족에게 멸망당했다. 이참에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은 성종에게는 천재일우 같은 기회였다. 단순한 침공이 아니라 친정親征을 통한 정복이 목적이었다.

    2차 거란 전쟁- 통주성 회전에서 대패하는 고려
    원정군은 40만. 실제 사령관은 도통都統 소배압蕭排押이었다. 그는 지략과 무용이 뛰어난 장수로 기사騎射에 능했다고 한다. 그의 최대 장점은 탁월한 결단력으로 985년 송이 침공해 왔을 때, 오히려 송군을 격파하였고, 전연의 맹을 이끈 인물이었다. 탁월한 무공으로 부마로 선택된 그는 대송 전선을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고려도 나름 준비를 하여 30만이란 대군을 소집하였고, 당시 실권자인 강조가 지휘하였다. 출전하기 전 고려는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팔관회를 재개하여 민심을 하나로 모았다.

    1010년 11월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흥화진이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백마산성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병자호란 때 이곳을 지킨 임경업 장군은 수비 적정 인원을 4,235명으로 산정하였다. 내부에는 물이 풍부하였다. 이 성에는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 진사鎭使 정성鄭成, 부사副使 장작將作, 주부主簿 이수화李守和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주둔하였다.

    거란군은 7일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자 거란군은 공격군의 절반을 남기고 남진하였다. 남진한 거란군 주력은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정예병을 통주성通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선천宣川) 앞에서 대회전을 통해 살육에 가깝게 궤멸시키고 총 사령관 강조를 사로잡았다. 고려의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후 장기였던 수성전을 바탕으로 통주성을 지켜 냈다. 거란군은 전략적 요충지 서경 공격에 나섰다. 서경은 지휘부가 도망쳐 버리는 황당한 상황에서 중간급 간부들이 나섰다. 통군녹사統軍綠事 조원趙元,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등이었다. 이중 강민첨은 진주 출신 서생으로 무술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의지가 굳고 과감해서 군사 지휘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두 사람은 훗날 강감찬과 함께 종군하여 귀주대첩을 일구어 내는 데 크게 공헌했다. 동요하는 민과 군을 수습하여 서경 방어에 임하였다.

    양규의 분전
    이때 가장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서경이 거란군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16일, 흥화진의 포위망을 뚫고 양규와 700명의 결사대가 통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고려군을 수습한 이들은 맹렬히 진군하여 6천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곽주郭州를 탈환하였고, 생존 주민 7천 명을 모조리 통주로 이주시켜 통주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거란군은 압록강에서 대동강 사이에 있던 유일한 중간 기지를 상실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은 충격에 빠졌다. 성종은 과감하게 개경 직공을 선택했다. 서경과 개경 사이에 고려군은 없었다.

    1011년 음력 정월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인 현종은 개경을 탈출하였다. 현종은 후비들과 몇몇 신하, 호위군 50여 명만을 거느린 채 개경을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숱한 고난을 겪으며, 악전고투를 벌여 가며 도주로를 열어 나주로 향하고 있었다. 정월 초하루 거란군 본대는 개경에 입성하였다. 거란군은 도성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약탈하고 초토화시켰다. 신라 때부터 내려온 귀중한 보물과 소중한 역사서, 자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고려는 강화를 제의하였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현종을 코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그들은 마지막 전략적 목표를 상실했고, 더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도 없었다. 지나온 모든 길이 초토화되었다. 개경에서 약탈한 물자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보급품이었다.

    거란군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 갔다. 그들은 곽주와 통주를 거쳐 가는 해안 길이 아니라 귀주를 통과하는 내륙 길을 택했다. 하지만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고려 무인의 매운맛을 보여주리라.

    고려 무인의 기개를 보여준 양규와 김숙흥 부대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한 별장 김숙흥金淑興과 중랑장 보량保良은 거란군을 급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양규도 바쁘게 움직였다.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연락이 있었는지 남북에서 동시에 거란군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양규는 의주 남쪽인 무로대無老代에서 기습 공격하여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해 냈다. 이후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향하는 길을 거꾸로 내려가며 전투를 전개하였고, 김숙흥은 역방향으로 올라왔다. 정황상 양규는 기병 중심의 소수 정예부대를 이끌었던 것 같다. 비록 화친을 맺고 가지만 고려의 정예군이 괴멸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에 특별히 가혹한 징벌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 거란이 함부로 고려를 침공하지 못하게 하려면 가장 격렬하게 싸워 최대한 타격을 입혀야 했다. 이수梨樹에서 거란군을 공격하여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고려인 1천여 명을 구해 냈다. 3일 후에는 여리참餘里站에서 세 번이나 전투를 벌여 포로 1천여 명을 구출해 냈다. 양규는 거란군을 타격할 뿐 아니라 고려 백성도 최대한 구해 내려 했다. 값비싼 전리품인 포로를 거란군은 단위 부대별로 배속하여 압록강을 향해 왔을 것이다. 이런 소수 부대를 최대한 찾아내어 공격하고 빠르게 추격하여 거란군이 포로를 버리고 도주하게 하였다.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 부대는 애전艾田에서 새로운 거란 부대를 상대로 한바탕 신나는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직후, 성종이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불쑥 나타나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산줄기가 이어져서, 사면으로 완전히 포위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기에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탈출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 부대원들은 구출한 포로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고자 했던 것 같다. 진정한 정예부대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으로 그들은 전투를 택했다. 죽을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분전하였고, 전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줄기차게 그들을 괴롭힌 양규 부대를 제거했지만, 압록강을 눈앞에 둔 지점에서 겨울비가 내렸다. 한겨울 북부 지방에서 내리는 비는 눈보다 더 무섭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얼어붙고, 비에 젖은 병사들은 피부까지 얼어 버린다.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그들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강을 도하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린 것은 흥화진에 있던 본대였다. 양규 부대의 전멸은 고려군에게 큰 감동과 비애를 함께 안겨 주었다. 그들은 교과서적 방법대로 반쯤 도강한 거란군을 매우 맹렬하게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거란 2차전의 영향
    고려 무인의 매운맛과 자존감을 보여 준 참군인 양규는 후에 공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아내 은율군부인 홍씨에게는 종신토록 매년 벼 100섬을 주게 하고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으로 임명하였다. 양대춘은 문무를 겸전한 인재로 후에 재상을 지냈는데, 일생 동안 고려가 평화와 안정을 누려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을 추증하고 모친에게 매년 벼 50섬을 주게 하였다. 현종은 두 사람을 공신으로 삼았고, 건국 공신과 다름없는 공을 세웠다는 의미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하였다.

    현종은 교서에서 양규를 이렇게 평가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을 공신각에 봉안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전쟁 초기 놀라운 기동력과 세련된 부대 운영으로 고려 수도를 침공하고 큰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다. 하지만 압록강 이남에 단 한 개의 성도 자신의 영토로 만들지 못했고, 정예군 5만 정도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 고려는 현종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란과 치러진 26년간의 전쟁 중 이때가 거란군 규모가 가장 크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아슬아슬하게 이 위기를 넘겼고, 최고 용장 양규를 잃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전투 경험과 실전을 통해 발굴한 젊은 장수들은 고려가 대對거란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팔관회八關會
    신라 때 시작된 팔관회에 대해서 태조 왕건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제님을 위시하여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우리의 고유 신교神敎문화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때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즉 중동仲冬에, 그리고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베풀어졌다. 봄에 하는 연등회가 축제의 성격이 강한 반면 팔관회는 국가 의례의 의미가 강해서 신하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였다. 송나라나 여진, 탐라耽羅의 사절이 축하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다고 한다. 팔관회는 987년 성종 6년에 폐지되었다가 현종 원년인 이때 부활되어 고려 전 시기에 걸쳐 행해지던 중요 국가행사였다.




    [주1.]
    고려 왕실은 자신들을 용의 후손이라고 하여 용을 왕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용궁’이라 표현한 구절에는 고려 왕실의 적통이라는 현종 자신의 자각과 야심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주2.]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오세창吳世昌이 고려에서 대한제국 말까지 선인들의 필적을 모아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에 수록된 강감찬의 오언절구. 여기에서 초헌은 대부들이 타는 수레이고 외로운 학은 춘추시대 위衛나라 의공懿公이 학을 기르기 좋아하여 초헌에 태우고 다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는 승헌지학乘軒之鶴의 고사를 가리킨다. 원앙은 짝을 지은 새라는 『시경詩經』「소아小雅 원앙鴛鴦」편의 모전毛傳에 나온 구절을 의미한다.

    [주3.]
    고려 국운을 건 귀주에서의 큰 싸움에서 당연히 상원수 강감찬은 모든 전투 준비를 마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제례를 올렸을 것이다. 이에 강감찬의 심경과 당시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전황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투 전날 긴장되고 경건한 분위기를 천상에 계신 상제님과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는 장면으로 상상하여 글을 꾸몄다.

    [주4.]
    연운 16주 - 북경(燕)과 대동大同(雲)을 중심으로 한 만리장성 이남 16개 주를 말하며, 요동과 중원을 잇는 전략적 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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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06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