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 한 무제의 대對흉노전쟁 쌍두마차 위청과 곽거병

[역사인물탐구]
秋風起兮白雲飛(추풍기혜백운비) 가을바람 부니 흰 구름 날갯짓 하고
草木黃落兮雁南歸(초목황락혜안남귀) 초목은 누렇게 떨어져 기러기 남으로 돌아가네!
蘭有秀兮菊有芳(난유수혜국유방)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롭건만
懷佳人兮不能忘(회가인혜불능망) 고운 여인(선녀, 가인佳人)에 대한 그리움 저버릴 길 없네.
泛樓船兮濟汾河(범누선혜제분하) 다락배를 띄워 분하汾河를 건너는데
橫中流兮揚素波(횡중류혜양소파) 한 가운데 지나려니 하얀 포말 휘날리네!
簫鼓鳴兮發棹歌(소고명혜발도가) 피리와 북을 두드리며 뱃노래를 부르지만
歡樂極兮哀情多(환락극혜애정다) 흥겨움이 더할수록 서글픔도 깊어지누나!
少年幾時兮奈老何(소년기시혜내노하). 젊음은 언제런가 세월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 BCE 113년 한 무제가 후토后土(대지의 어머니)에게 제사 지낸 다음

태원太原 부근을 흐르는 분수汾水에서 뱃놀이를 하며 지은 추풍사秋風辭
임금께서 갑진(BCE 2177)년 열양列陽 욕살褥薩 삭정索靖을 약수弱水(감숙성 장액현張掖縣)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凶奴의 시조가 되었다. - 『환단고기』「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조 기사」



■한 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BCE 156 ~ BCE 87)
●BCE 156년 전한前漢 경제景帝와 왕부인王夫人 사이에서 출생. 아명은 체彘(돼지란 뜻), 자는 통通.
●BCE 141년 경제가 붕어하고 한나라 7세 황제로 즉위.
●BCE 139년 건원建元 2년 흉노를 협동 공격할 동맹결성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국으로 파견.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 주최 연회에서 위자부衛子夫를 알게 되어 후궁으로 삼음. 후에 황후로 봉함.
●BCE 136년 건원 5년 동중서董仲舒의 헌책을 받아들여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교의 국교화 추진.
●BCE 133년 원광元光 2년 마읍馬邑에서 매복해 있던 흉노군의 공격으로 패배함.
●BCE 129년 원광 6년 위자부의 동생 위청衛靑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하여 흉노 원정 착수함. 위청은 BCE 119년까지 일곱 번 흉노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지휘함.
●BCE 121년 원수元狩 2년 위청의 조카 곽거병霍去病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하여 흉노를 대파함. 곽거병은 BCE 123년부터 여섯 번에 걸쳐 흉노 정벌을 단행함. BCE 117년에 곽거병 요절.
●BCE 119년 원수 4년 선박과 수레에 과세하고 염철관鹽鐵官을 두고 소금과 철의 전매를 실시함.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함.
●BCE 110년 원봉元封 원년 물자의 계절적인 가격차 시정에 관한 평준법平準法을 제정,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함.
●BCE 108년 원봉 3년 번조선 위만 정권에 침입하여 내분을 이용해 위만 정권을 무너뜨림. 후에 북부여를 침략하나 동명왕 고두막한에 의해 격퇴당함.
●BCE 106년 원봉 5년 위청 사망.
●BCE 104년 태초太初 원년 명마인 한혈마汗血馬를 얻기 위해 이광리를 파견. 태초력太初曆(지금까지 10월이 한 해의 처음이었던 것을 정월을 일 년의 시작으로 삼고 윤월을 정월에 해당하는 달의 다음 달에 두는) 채용.
●BCE 91년 정화征和 2년 병든 무제를 주살呪殺하려 한다는 누명을 쓴 태자 여가 음모의 주모자인 강충을 죽이고 거병.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태자가 자살하는 무고巫蠱 사건 발생. 태자의 모후 위황후도 자살.
●BCE 87년 무제 70세로 붕어,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 막내아들 불릉弗陵(한 소제昭帝)을 황태자로 삼고 곽거병의 이복동생 곽광霍光과 흉노 출신 투후秺候 김일제金日磾 등으로 보좌하게 함.

들어가는 글


가을의 청명함과 풍성함을 대표하는 고사성어 중 천고마비天高馬肥란 말이 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우리의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으리라. 하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다. 본래는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로 가을이 깊어 가니 변방의 말이 살찐다는 뜻이다. 즉 북방의 흉노족이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먹여 말을 살찌웠는데, 이제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추수철인 가을이 되면 이 말을 타고 변방에 쳐들어와 곡식과 가축을 약탈해 갈 것이니 경계하라는 의미이다. 2천 년간 중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흉노족에 대해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했던 이가 있으니,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7세 황제 한 무제 유철이었다.

웅재대략雄才大略 한 무제漢武帝(BCE 156년~BCE 87년)


『한서漢書』를 쓴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는 무제를 웅재대략雄才大略의 인물이라고 극찬하였다. 위대한 경륜을 지닌 웅대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역대 전후 4백 년간 지속된 전한과 후한의 역대 제왕뿐 아니라 역대 중국의 제왕 중 가장 사랑받는 제왕의 반열에 한 무제가 들어 있다. 그는 55년의 통치 기간 동안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남다른 정열을 바쳤다. 이때 이루어진 영토 관념과 정치 경제 문화적 업적은 역대 왕조의 기본 골격을 만들어 주었다.

한 무제는 BCE 156년 한 왕조의 6세 황제인 경제景帝와 효경황후孝景皇后 왕지王娡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체彘, 태자가 된 뒤 철徹로 바꿨다. 한 무제의 일생은 그야말로 질풍노도라 표현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는 문무를 겸전한 지도자로 기록상 여러 가지를 새롭게 만든 이였다. 문文 쪽으로는 제자백가 중 유교를 국교로 정해 사상과 문화를 통일시켰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황제의 연호와 기원을 사용하였다. 무武 쪽으로는 장건으로 하여금 서역과 교통로를 열어 실크로드를 개척하였고, 위청과 곽거병 등 명장을 기용하여 흉노 원정을 벌여 국경을 크게 넓혔다. 하지만 흉노 정벌전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죄기조罪己詔(황제가 자신의 잘못을 기록한 조서)로 자아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무제가 즉위한 초창기 한漢나라는 70여 년간 휴양 상태였다. 농사도 잘 되었고, 나라는 태평성대였다. 백성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거리가 풍부했고, 수도 장안에 쌓인 돈은 억만금을 헤아려 돈을 꿰는 밧줄이 다 썩을 정도였다. 군량미도 풍부하게 비축되어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이에 선조 때부터 숙적이었던 북방 흉노족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단행할 조건이 성숙한 것이다.

한 무제의 흉노 원정 준비 상황


황하가 크게 구부러져 흐르는 곳 아래쪽으로 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 오르도스 혹은 하남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목민들에게는 훌륭한 생활 거점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천하통일의 기세를 몰아 이곳을 점령하고 흉노족을 황하 북쪽으로 몰아낸 뒤, 그곳에 장성을 쌓았다. 흉노에게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중대 사건이었다. 그들은 본래의 생활 터전을 되찾기 위해 군사적 역량을 결집하였고, 집권화된 강력한 군사 조직이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묵특선우冒頓單于는 동으로는 동호(번조선), 서쪽으로는 월지, 남으로는 백양, 누번을 무너뜨렸다.

초한대전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은 자신감에 넘쳐 30만 정예군을 이끌고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백등白登(지금의 산시성 다퉁大同) 인근의 산에서 포위를 당하여 7일 동안 곤경을 당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진평의 계책에 따라 선우單于(흉노의 황제에 대한 칭호)의 부인인 알閼씨에게 뇌물을 바치고 겨우 빠져나왔다. 이후 한나라는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공물을 바쳤고, 왕실의 공주를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시집보내야 하였다. 한마디로 돈으로 평화를 산 것이었다.

당시 한나라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흉노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흉노는 시베리아 일대와 몽골,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목민족으로 넓은 지역에 한나라의 1개 군 정도의 인구가 넓게 퍼져 살았기 때문에, 전력 거점 공격이 어려웠다. 이들은 늘 3~4마리 말을 끌고 다니며 식량 문제를 해결하면서, 가장 힘 좋은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에 지친 말을 타야 했고 보급 문제로 어려운 한나라 기병을 압도하였다. 흉노는 십진법 단위로 부대를 편제하여 소규모 부대별로 기동전을 펼쳤다. 주된 전법은 소수 기병대가 적을 유인하고 주력 부대가 포위 섬멸하였다. 흉노족 3명이 한나라 기병 100명을 이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군대 40만 명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을 준비하는 데만 2년이 걸릴 정도로 막대한 경제력이 소모되어야 했다. 또한 흉노가 사는 지역은 척박하여 고산병 등의 풍토병에 시달렸으므로 한나라 군대가 최대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약 40일 정도였다. 늘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흉노족에게 40일간 한나라 군대를 피하고, 지친 한나라 군대를 타격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국력의 한계와 여러 여건이 성숙하지 못해 은인자중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여자와 재물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했던 한나라는 무제의 할아버지인 문제와 아버지 경제가 왕위에 있는 동안 국력을 신장하였다. 이를 이어받은 무제는 철과 피를 선택하였다. 적극적으로 흉노 주력 부대를 찾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하였다. 이에 장건을 서역의 대월지국으로 파견하여 흉노를 협공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실패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동서 교통로인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가 열렸다.

이와 더불어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였다. 기병이 주력인 흉노를 상대하기 위해 전마戰馬를 육성하였고, 보병과 기병 사이에 병과 간의 협동이 이루어지게 훈련을 시켰다. 즉 창병과 노병 등의 보병으로 흉노 기병의 공격을 흡수하는 동안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로 하여금 후퇴하는 흉노를 추격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한 무제가 흉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또 다른 전법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다. 흔히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으로 알려진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보다 뛰어난 부분에 대한 수용성에 있다. 즉 전 병력이 기병인 흉노를 상대하기 위해서 비슷한 유목민인 몽골족 등 기마민족의 장점을 수용한 것이다. 기병에게 가장 중요한 전마 육성을 위해 몽골족 말 품종을 수입하고 사육, 훈련하는 법까지 받아들였다. 여기에 후에 곽거병 군에서 꽃을 피운 것처럼 흉노족 방식 그대로 전투를 진행하였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구사한 전차 전격전처럼 정예기병으로 돌파한 뒤 후방을 휩쓸어 타격을 입힘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준비 완료! 난세는 영웅을 낳는 법이다. 이제 잘 훈련된 한나라 대군을 지휘할 명장이 필요했는데, 뜻밖에도 그 적임자는 한 무제의 옆에 있었다.

양치기 소년에서 대장군이 된 위청衛靑(? ~ BCE 106년)


한 무제는 고모인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장공주는 황제의 여동생에게 붙이는 칭호)의 외동딸인 진아교陳阿嬌를 황후로 맞아들이는 조건으로 즉위하였다. 아교(진비陳妃)는 금으로 지은 집에다 고이 모시겠다는 금옥장교金屋藏嬌(여성을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 고사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결정적으로 자식이 없었다. 이에 무제를 동정한 누이 평양공주平陽公主는 기분을 달래 주기 위해 집으로 초청해 즐거운 한때를 보내도록 배려했다. 이때 가녀歌女로 무제의 눈에 든 여성이 있었다.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위자부衛子夫였다. 즉시 위자부를 후궁으로 삼은 무제는 위자부와의 사이에서 3녀 1남을 낳았다. 큰아들 유거劉據(훗날 여戾태자로 이는 잘못, 반역했다는 의미)가 태어났을 때, 무제는 이미 29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 위자부는 나중에 황후에 봉해진다.

위자부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위청衛靑이었다. 그는 자가 중경仲卿으로 평양平陽(지금의 산시성 린펀臨汾) 출신으로 사생아였다. 아버지는 정계鄭季라는 현지 말단 관리였는데, 평양공주부에 파견돼 일을 하면서, 거기 노비인 위온衛媼과 사통해 그를 낳았다. 원래 성은 정씨인데, 씨 다른 누나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서 성을 ‘위’씨로 바꿨다.

어린 시절 위청은 부모 형제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 양이나 치면서 살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는 조숙하였다. 그리고 겸손과 은인자중, 배려심 등을 배웠다. 북송 시대 정치가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위청은 비록 비천한 노비 출신이지만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쐈으며, 능력이 일반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를 만나면 예의로 대했고 병사들에게는 아주 관대했으므로 모두 위청의 지휘를 받기 원했고, 장군의 자질이 있어 매번 출병할 때마다 공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겸겸군자謙謙君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리라. 외척으로 귀하게 되고 총애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재능이 있어서 승승장구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위청은 한 무제가 지휘 감독한 흉노전쟁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BCE 129년 흉노는 마읍馬邑(산시성 숴현朔顯)에서 계략에 걸려 선우가 죽을 뻔했던 수모를 갚기 위해 상곡군上谷郡(지금의 허베이성 장자커우張家口)을 침략하였다. 이에 한 무제는 직접 전략을 세워 네 명의 장수들에게 각각 1만 병력을 주어 적극적으로 상대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한나라의 패배로 돌아갔는데, 위청만이 전과를 올렸다. 그것도 흉노의 심장부인 용성龍城까지 쳐들어가 흉노 병사 70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흉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전까지 전투는 대부분 한나라 변경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번처럼 흉노 심장부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용성은 흉노가 천지신명에게 천제를 올리는 신성한 지역이었다. 여기엔 흉노 각 부족의 왕정이 자리를 잡아,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곳인데, 이곳을 위청이 공격한 것이다.

위청은 이후 일곱 번에 걸친 흉노 원정에 나서 큰 전과를 거두는 연전연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BCE 127년 출정에서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여 흉노를 외몽골 지역으로 내쫓았다
(주1)
. 위청의 전투 스타일은 균형과 안전 위주로 사생결단의 섬멸전보다는 밀어내기에 치중하였다. 마지막 일곱 번째 원정에서는 조카 곽거병을 의식한 탓인지 과감한 작전을 펼쳐, 흉노 선우가 도망쳐 연락이 두절되는 지도자 부재 상태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천성이 착하고 겸손한 위청은 노비 출신에서 대장군까지 승진하였고, 자신의 세 아들은 모두 후侯가 되기도 하였다(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무제의 누나 평양공주는 이때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 아들은 다른 여인과의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이들이다). 비천한 출신으로 승진하게 되면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인데 위청은 그러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노비 시절 주인이었던 평양공주와 혼인-정략결혼인 측면은 있지만-하였다. 무제가 위자부를 알게 된 것은 BCE 139년 17세 때였는데, 위자부는 그보다 어리거나 동갑이었을 것이고 위청은 위자부의 동생이니, 한 무제의 누나 평양공주는 위청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이었을 이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 게다가 과거 노복과 주인의 관계였던 이 두 사람 사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공주와 합장했다는 기록과 위청의 착하고 따뜻한 성격으로 보아, 둘 사이는 해피엔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BCE 119년 그는 조카인 곽거병과 함께 대사마大司馬로 봉해진 다음 무려 14년 동안 집에서 한가롭게 세월을 보냈다. 한 무제는 곽거병이 세상을 떠난 다음 흉노에 대한 별다른 군사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인 휴지기에 진입했다. 위청이 살아 있음에도 이런 상태를 유지한 것은 위청에 대한 신임이 떨어지기도 했었고, 국내외 상황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위청의 세 아들은 잇따라 후侯의 직위를 잃게 되었다. 혹독한 시련기였다. BCE 106년 결국 위청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큰 별이 떨어졌다. 그의 죽음으로 위황후는 조정에서 기댈 수 있는 최대의 기둥을 잃고 말았고, 무제와 태자 사이의 관계를 위협으로 몰고 간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위청은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오만해지지 않았고 신임을 잃었다고 해서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에 취하지 않고 늘 깨어 있었다. 무제가 반대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행동도 하지 않으며 망발도 삼갔던, 무제 시절 가장 걸출하고 겸손한 일세의 장군별이었다.

초립동이 샛별 장군 곽거병霍去病(BCE 140 ~ BCE 117년)


한 무제가 지휘한 흉노 전쟁의 또 다른 영웅은 위청의 생질甥姪이자 한 무제의 처조카 곽거병霍去病이다. 그는 위자부의 언니인 소아小兒와 곽중유霍仲孺 사이에서 위청처럼 사생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출신이 달랐다. 말 그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 때문에 평생 좋은 옷에 좋은 집에서 생활하였다. 위청은 밑바닥 인생을 경험해 보아서인지 높은 자리에 올라도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반면 곽거병은 귀족 자제로 자란 만큼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배려심이 부족하였다. 위청이 산처럼 은인자중했다면 곽거병은 불처럼 뜨거운 성질의 소유자였다.

곽거병이 출현하기 전 병권을 쥐고 있던 이가 위청이었다. 하지만 곽거병의 등장 이후 무제는 의도적으로 곽거병에게 기회를 주어 위청을 견제하게 하였다. 곽거병은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기사騎射 실력이 뛰어났고, 용감하고 침착하여 무장으로서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또한 부하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카리스마도 넘치는 성격으로 과묵하고 남의 말을 하지 않았고 기백이 있어 할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했다고 한다. 무제는 자신의 개성과 비슷한 곽거병의 모습을 보며 아들에게서나 느낄 법한 친근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의 첫 번째 출전은 BCE 123년 외숙부 위청의 제5차, 6차 흉노 원정 때였다. 이때 곽거병은 표요교위剽姚校尉(표요는 굳세고 날랜 모습이란 뜻이고 교위는 한나라 때 장군 다음의 계급 이름임)로 당시 나이 18세의 소년 장수였다. 그는 정예기병 8백 명을 이끌고 기동전을 펼쳤다. 그는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하는 저돌적인 전격전을 전개하여 흉노군 2,028명을 참수하였다. 그 안에는 흉노군 고관과 선우의 측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만심이 강하고 일을 추진하는 데 저돌적인 이런 면모가 한 무제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무제는 그에게 1천 6백 호를 내려 주며 관군후冠軍侯로 삼고 군에서 으뜸의 공이라 치켜세워 주었다. 현대 중국에서 수석이나 우승을 의미하는 관군冠軍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확실히 이때부터 한 무제는 위청보다 곽거병을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BCE 121년 봄과 여름 두 번에 걸친 출병에서 전승을 거둬 곽거병은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었다. 표기장군은 대장군 다음 자리였다. 이때 곽거병 나이는 21살이었다. 그는 1만 기병을 이끌고 농서隴西 지역으로 출정하여 연지산燕支山(간쑤성 산단현 동남쪽) 너머 1천 리나 진출해서 흉노인 8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때 절란왕折蘭王과 노호왕虜胡王의 목을 베고 혼야왕渾邪王 등을 체포하였으며, 흉노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하였다.

이후 곽거병은 흉노족이 주로 목축을 하는 기련산祁連山(간쑤성 주천시酒泉市 이남 부근)에서 흉노군 3만을 참수하여, 하서河西(간쑤성 황하의 서쪽) 지역과 오르도스 지역에서 흉노의 세력을 밀어내고 한나라의 영토를 확대하였다. 천지를 뚫을 기세로 진격하여 외몽골 시베리아까지 쳐들어가 바이칼호湖까지 도달한 곽거병은 마지막 토벌인 BCE 117년에 25세로 급사하였다.

그의 원정은 거의 매년 지속되었고, 행동 범위도 넓어 직선 거리로 계산하면 동서 2천 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였다. 주된 전장은 사막 등지의 불모지로 이동하는 과정도 험난하였기에 아무리 젊은 장군의 체력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무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는 용맹스러움과 영토 확대의 공을 칭송한다는 뜻이다.

한 무제 흉노 전쟁의 결과


한 무제가 실시한 흉노 원정은 태초太初 원년인 BCE 104년을 중심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전기는 위청, 곽거병을 중심으로 하여 한나라의 우위를 점하였다. 하지만 위청이 사망한 이후 진행된 흉노 원정은 흉노의 오른팔 격인 서역 지방을 점령하는 전략을 구사하지만, 결과적으로 흉노 세력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했다.

곽거병 사후 흉노원정은 휴지기를 맞이하였다. 한 무제는 만년에 총애하던 이부인李夫人의 오빠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한혈마가 있는 이사성貳師城을 공격했다고 해서 붙여짐)으로 임명하여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국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한나라는 거듭된 전쟁으로 군마에 대한 수요가 절실했다. 그래서 만 리를 질주할 수 있으며 피와 같은 붉은 땀을 흘린다는 명마 한혈마汗血馬를 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혈마 수십 마리와 어린 한혈마 3천 마리를 얻게 되었지만 이후 진행된 흉노 전쟁에서 한나라는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공을 세우려던 초조함으로 작전을 그르친 이광리는 선우가 이끄는 군대에게 퇴각로를 차단당하여 14만 대군이 궤멸당하고 자신은 투항하였지만 산 채로 제물로 바쳐졌다.

BCE 89년 상홍양桑弘羊 등은 무제에게 특별한 건의를 하였다. 병력을 서역의 윤대輪臺(지금의 신장위구르자치구 룬타이현輪臺縣)에 보내 둔간屯墾(군대가 일정 지역에서 밭을 갈면서 군량을 조달하고 유사시에는 출병하는 형태)을 경작하면서 국경 수비를 나서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한 무제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서詔書 하나를 내렸다. 윤대의 둔간에 대한 내용이었으므로 역사에서는 이를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는 더 이상의 출병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후회하고 있으며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정책은 엄금하고 생산력을 회복하는 조치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제 더 이상 백성을 해치고 백성의 재산을 낭비하는 일은 일절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고 실제 그러하였다. 흉노 원정은 실패하였고, 이로 인한 국력 쇠약으로 제국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 무제가 흉노를 지속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자국의 농경 생산 방식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통치 지역을 확대하고 싶은 야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무제는 발전 확대 전략이 국가 이익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흉노전은 실패하였지만, 이는 세계사적인 영향을 미쳤다. 흉노를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고비사막 건너로 밀어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에 흉노는 분열하였고,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멸망을 이끈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훈족과 흉노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여기서는 같은 족속이나 이웃한 족속으로 본다).

한 무제 대외정책을 지탱하게 한 두 힘, 경제제도와 혹리들


전쟁은 결국 경제력으로 겨루는 천하대사이다. 무제는 진시황제와 자주 병칭되는데 정치는 시황제가 세우고, 경제는 무제가 정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진시황이 진 제국이라는 큰 건물을 완성하고 모든 제도의 시초를 닦았다면 한 무제는 할아버지 문제文帝와 아버지 경제景帝의 안정된 기초 위에 군사, 정치, 외교,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참으로 현란絢爛한 업적을 쌓아 올렸다.

무제 이전 한나라 재정은 굉장히 훌륭하였다. 하지만 무제의 흉노 전쟁으로 국고는 나날이 고갈되었다. 비록 전투에 이긴다 하여도 전투 부대의 유지, 수송 그리고 장졸들에 대한 포상으로 지출은 늘어나기만 하였다. 전쟁 승리 하사금으로만 400억 전 정도가 지불되었다고 한다. 전쟁에 소요된 비용은 왕조의 전체 정상 수입을 몇 배 이상 초과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재정 위기 상황에서는 일 처리를 조금만 잘못하면 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즉시 멸망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국가 성립의 기반이 흔들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재정 정책을 수립하고 재정 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상홍양桑弘羊이었다. 낙양 출신으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무제의 시위侍衛로 들어가 무제가 세상을 떠난 후까지 변함없이 재무를 총괄하는 대사농大司農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그는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전까지는 과세권을 행사할 뿐이었지만, 위청과 곽거병이 동시에 출병한 BCE 119년에 전매제를 확립하였다. 당시 재정 수입의 40%를 이 염철 전매제에서 충당할 정도로 국고 증수增收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 되었다.

여기에 BCE 115년 균수법均輸法을 실시하였다. 이는 정부가 상품의 운반과 물가를 통제하여 대상인의 이윤을 억제하는 정책이었다. ‘균수’란 원래 수송비를 같게 한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평준법平準法은 지방에서 싸게 사들인 물자를 저장하여 물가가 올랐을 때 방출해 물가를 안정시키는 제도였다.

이와 함께 증세책으로 산자算訾(재산세)와 산민전算緡錢(축재 화폐에 대한 과세)을 부과하였고 선박이나 수레, 가축에 대해서도 과세하였다. 또한 정직하게 과세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책으로 허위 신고자와 은닉 자산의 고발을 장려하는 고민령告緡令을 실시하였다. 이에 걸린 사람은 1년간 변방 수비에 복무하여야 했고 재산은 전액 몰수되었으며, 이를 고발한 사람은 그 총액의 반을 포상으로 주었다. 상홍양의 새 경제 정책은 당시 큰 경제력을 소지하고 있던 대상공업자를 겨냥하여 일반 민중에 대한 증세는 극히 피하려 했다는 특색이 있다. 일반 백성들의 원한을 사지 않으려는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화폐 제도를 확립하였는데 이때 새로 제정된 화폐가 오수전五銖錢이다. 중량이 5수銖(1냥 무게의 24분의 1)로 표면에 오수라는 글자를 인쇄하여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동전의 가장자리를 장식한 원형 모양의 방공전方孔錢이다. 이 화폐를 찍는 주조소를 중앙 정부로 통일시켜 위조는 격감되었다. 이 오수전 모양은 중국 화폐의 기본형이 되어 당나라 때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나오기까지 7백 년간 존속하였다.

이와 함께 제국의 통치와 아울러 비록 소수지만 경제력이라는 막강한 무기를 가진 대상공업자의 불만을 피하기 위해 힘으로 누르는 정책을 펼쳤다. 무제는 유교적 통치 질서를 존중하는 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엄격한 통제 정치를 전개하였다. 이런 무제의 명령에 복종하고 이를 시행하는 데 사사로움이 없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등용한 이들이 일군의 검찰 관료들인 혹리酷吏들이었다.

이들은 전제 권력이 그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이들로 대표적 인물이 어사대부御史大夫 장탕張湯이었다. 그는 승상을 능가하는 실권을 잡아 상홍양의 새 경제 정책 집행에 준엄한 태도로 임하여 당시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그를 실각시키기 위한 음모가 꾸며져, 오로지 충실한 법 집행으로 일관하던 그에게 뇌물 수수 혐의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는 모함이었고, 그가 남긴 재산은 봉록으로 받은 5백금뿐이었다. 화려한 무제의 흉노 원정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이런 혹리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판 사도세자의 비극, 무고巫蠱의 화禍


흉노 원정 등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팽창 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생령들을 희생시켰기 때문이었을까? 무제의 말년은 쓸쓸하였다. 한나라 시대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어 합리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유교에도 당시에는 신비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그렇기에 유교를 국교로 삼은 한 무제에게는 합리주의적인 모습과 함께 신비술에 심취된 모순된 모습이 함께 나타났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 「한무제 본기」를 보면 무제가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기록이 있다. 이는 동방 신교 문화를 받아들인 모습으로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 신비적인 미신에 경도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무제는 주변 사람들이 무고巫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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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여 저주를 퍼붓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신과 제국에 큰 불행을 가져왔다.

혹리였던 강충江充은 태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당시 병상에 누워 있던 무제에게 병의 원인이 무고의 주술이라고 부추겼다. 직지수의사자直指繡衣使者로 검찰관이었던 강충은 이전에 태자의 불법을 적발한 적이 있어 그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이미 고령으로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아진 무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태자가 제위를 이으면 자신은 주살당하리라 염려하였다.

무제는 강충의 밀고에 귀가 솔깃해져 궁중을 수색하였는데, 공교롭게도 태자궁 땅 속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이 발견되었다. 이에 궁지에 몰린 태자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강충을 잡아 죽이고, 시민을 집합시켜 자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반란으로 착각한 무제는 진압군을 출동시켰고, 5일간의 전투 끝에 태자군은 진압되었다. 태자는 도망갔다가 결국 자살하였다. BCE 91년의 일로 이때 무제 66세, 태자는 38세였다. 태자뿐 아니라 그의 모후인 위자부는 자살을 권유받았고, 황태손도 죽임을 당하는 한나라 판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졌다.

그 후 태자의 결백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진상을 파악하고 강충 일당을 제거하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무제는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수도 장안에 사자궁思子宮(자식의 넋을 기리는 궁전)을 세우고, 태자가 도망가서 자살한 호현湖縣(지금의 허난성 링바오현靈寶縣 서북쪽)에는 아버지에게 돌아오려 했다는 의미로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쌓고 태자의 혼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BCE 87년 2월 정묘, 무제는 오작궁五柞宮에서 70세를 일기로 그 거대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뒤를 이은 이는 막내아들인 불릉弗陵(당시 8세)이었다. 한 무제는 곽광霍光과 투후秺候 김일제를 유조를 받아 어린 제왕을 보필하는 보정대신補政大臣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한나라 황제 중 가장 규모가 큰 무릉茂陵(53년에 걸쳐 지어졌고 무덤 형태가 웅장하고 오목하여 중국의 피라미드로 불림)에 안장되었다. 주변에 위청과 곽거병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무릉춘몽茂陵春夢


한 무제! 역사상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그 이유는 우선 무제 자신이 대단히 다면적 인물이었다. 그는 출중한 정치적 두뇌를 지닌 정치가였다. 여기에 보통 사람처럼 희로애락을 가졌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생을 일삼았고, 인재나 여자들을 극단적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초개처럼 버리는 변덕도 부렸다. 세상을 덮을 만한 공을 세웠으나, 백성들에게는 거대한 대재난을 안겨 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대범한 겉모습과 함께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쩨쩨함과 주판알을 튕기는 계산속, 불면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는 민감한 마음이 공존하는 속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천고에 길이 빛날 위인’ 또는 ‘죄상이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운 악인’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한 무제에 대한 비난 가운데 으뜸가는 것은 궁병독무窮兵黷武, 즉 무력을 남용했다는 비판이다. 무력의 남용은 바로 백성들에게 가혹한 사역과 재정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 외적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라고 변호할 수 있다. 그의 적극적 자세가 아니었다면 아마 흉노의 말발굽 아래 한나라는 더욱 철저하게 유린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4년에 걸친 장기적인 원정으로 백성들은 피곤할 대로 피곤했고,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의 영토를 광활하게 넓혔다. 장건을 선발해 월지에 사신을 보내 흉노에 대항하는 전략적 동맹을 도모하였다. 이 일은 결과적으로 실크로드를 열어 동서 경제와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널리 인재를 구하였고 뛰어난 장수인 위청과 곽거병을 등용하여 흉노 원정을 지휘 감독하였고, 한나라 영역을 중앙아시아, 서남의 윈난, 구이저우, 쓰촨까지 확대시켰다. 현대 중국 판도의 기본 프레임이 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 무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탁월해서 그의 시대에는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전문 관료 집단이 없던 당시 권력의 중심은 귀족 세력이었다. 이런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책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본위로 사람을 발탁하였다. 또한 한 사람에게 권력이 장기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적정 시점에서 일종의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힘과 힘의 균형을 이룬 정치시스템을 추구하였다. 주된 인재들을 살펴보면 이 글에서 언급한 위청과 곽거병, 상홍양 외에 학자로는 공손홍과 동중서, 관리로는 형벌을 엄격히 집행하는 장탕, 사직을 걱정하며 간언을 올린 급암, 문장으로 사기를 지은 사마천, 사마상여, 외교가로 장건, 소무 그리고 삼천갑자로 유명한 동방삭 등이 있다. 재상 공손홍은 돼지를 치는 사람이었고, 부재상인 복식은 양치기 소년이었다.

흉노 출신 투후秺候 김일제는 신라 김씨의 시조인가?


한 무제의 흉노 원정 과정에서 우리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 이치사선우伊稚斜單于 때 곽거병은 좌현왕인 휴도왕을 토벌하고 일가족을 사로잡았다. 휴도왕의 장남은 당시 14세로 어머니인 알閼씨와 동생 윤倫도 함께 포로가 되었다.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단순히 말을 돌보기보다는 품종 관리와 흉노의 기마술을 보급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에 한 문제는 그를 시중侍中에 두어 호위를 맡겼다. 흉노의 제천금인 풍습에 따라 그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하니, 그가 바로 김일제金日磾(BCE 134년 ~ BCE 86년, 자는 옹숙瓮叔)였다. 훗날 한 무제 암살 시도 사건인 망하라莽何羅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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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막은 공으로, 한 무제는 그를 치하하여 그에게 ‘투후秺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란 뜻이다. 후손 중 왕후(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후 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한 왕망王莽은 김일제의 현손玄孫이라 한다. 외척 가문인 김일제 집안은 왕망 시절에는 최고의 권세를 누렸지만, 이후 왕망이 몰락하면서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후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김일제의 5세손인 김알지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고, 동생 김윤의 5세손 김수로가 가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망의 신나라와 김일제, 신라 김씨 왕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좀 더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최악의 역사 왜곡 날조 사건, 한 무제와 소위 한사군漢四郡


곽거병이 죽은 이후 한 무제의 흉노 원정은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사이 한 무제는 남방 월국과 동방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종주국 단군조선이 와해되고 있었다.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요하 상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인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여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였다(BCE 239년). 북부여가 단군조선, 특히 진조선을 흡수하고 계승하는 과정에서 단군조선의 두 날개인 번조선과 막조선에 큰 변화가 있었다.

단군조선의 서방 진출 교두보이자 외세 침략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번조선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피해 온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자신을 받아 주고 벼슬을 주었던 준왕을 배신하고 정권을 강탈하였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고조선은 바로 이 위만정권일 뿐이다(BCE 194년). 이후 북부여와 위만정권은 치열한 쟁패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요서 지역(번조선)에 살던 대부호 최숭崔崇은 백성을 이끌고 발해를 건너 막조선으로 넘어와 왕검성(지금의 평양) 지역에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BCE 195년 ~ CE 37년). 한국의 강단사학계에서는 이 낙랑국을 소위 한사군이 설치한 낙랑군과 구분을 하지 못한 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북부여는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또는 해우루解于婁) 때 큰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대흉노전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 한 무제는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우거(위만의 손자)가 다스리던 번조선을 침공하였다. 한 무제는 위만정권과 더 나아가 북부여가 흉노와 손을 잡는다면, 한 제국의 존망 자체가 위험하다고 보았다. 또한 스스로 동북아의 진명천자眞命天子가 되겠다는 집념으로 침략을 지시하였다.

바다를 통해 번조선을 침공한 누선장군 양복楊僕의 7천 명과 육로로 침공한 좌장군 순체荀彘의 5만 군은 번조선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무제는 어쩔 수 없이 강화회담에 임하였으나, 사신 위산衛山은 회담에 실패하고 처형을 당했다. 이후 전투를 재개하였지만, 우거의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두 장군은 불화하였다. 이에 무제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하였으나, 임의대로 군사 체제를 바꾼 죄로 처형당했다(수군을 육군에 함부로 병합해 버림). 한마디로 한나라군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번조선 내부 분열을 이용한 이간책으로 왕검성을 함락시켰다(BCE 108년). 그런데 전쟁 후 책임을 물어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사람 많은 곳에서 목을 베어 그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형벌)에 처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평민으로 살았다. 대신 한 무제는 우거왕을 죽이고 위만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번조선의 신하들을 산동 지역 제후로 봉하여 후대하였다. 이른바 조선 5후였다. 한나라군이 이긴 싸움이라면 포상 대신 왜 처벌을 내렸을까? 위청이나 곽거병의 승전에 후한 상을 내린 한 무제의 성향으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한나라의 패전이 명백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종군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천司馬遷(BCE 145 ~ BCE 86?)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조선을 평정하고 군을 설치했다(遂定朝鮮 爲四郡)’고 할 뿐, 4군의 구체적 이름과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을 현장 답사로 꼼꼼히 확인하며 사성史聖이라 추앙받는 역사학자 사마천은 번조선 멸망을 직접 본 당대인이다. 그의 기록은 1급 사료이자 현대사인데, 그런 그가 한사군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은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후 나타난 4군 명칭에 대한 기록들은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한 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 즉 소위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일은 결코 설치된 적이 없는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비록 실속 없는 번조선 정복 전쟁이었지만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욕심을 더 냈고, 그 결과 BCE 108년 요동을 넘어 북부여를 침공하였다. 이에 북부여에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압록西鴨綠(서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자칫 북부여 사직이 사라져 버릴 위기를 구한 고두막한은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북부여의 5세 고두막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년). 고두막한은 단군조선의 47세 고열가 단군의 직계 후손으로 후에 동명왕이 되었다. 동방(東)의 광명(明)을 부활시킨다는 뜻인데, 처음에는 졸본卒本에 나라를 열어(BCE 108년) 졸본부여라 하였다.

그러나 한국 주류사학계에서는 이 동명왕을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 같은 인물로 잘못 보는 우를 범하고 있다. 또한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인데, 일본 식민사학을 그대로 수용하여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혔을 뿐만 아니라, ‘위만정권이 한나라에 망한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로써 주류사학계는 한사군을 확고부동한 역사 진실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위치도 한반도 내에 비정하고 고착시켜 버렸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 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조작한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일제는 우리 역사의 흐름과 관련하여 ‘조선의 역사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였으니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를 세웠고, 이는 현재까지 확고부동한 학계의 정설이 되어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단절시키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식민사학의 마수에서 벗어나 국통맥이 회복되고 올바른 역사가 세워져야 할 것이다.(정리-객원기자 이해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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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본기』(사마천 지음, 신동준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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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역사 7 대제국의 황제 한무제』(오자키 호츠키지음, 윤소영 옮김, 솔출판사, 2000)
『통감절요1』(강지 지음, 김정화 옮김, 충북대학교 출판부, 2015)
『이인호 교수의 사기 이야기』(이인호, 천지인, 2007)
『재미있는 중국제왕 이야기』(서현봉 엮음, 박우사, 1993)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김호동, 사계절, 2016)
『아틀라스 중국사』(박한제 책임집필, 사계절, 2008)
『사기강의 한무제편』(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김영사, 2011)
『사기열전』(사마천, 정범진 역, 까치, 1995)

최초로 연호年號를 사용한 한 무제
한 무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한 황제이다. 이전까지는 무슨무슨 황제 몇 년 이런 식이었다. 연호年號는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이다. 황제국의 상징으로, 군주의 통치권이 물리적 공간인 국토는 물론이고 시간까지 이르게 됨을 상징한다. 이런 연호를 사용하는 의미는 비록 황제국이 아니어도 황제국과 동급임을 나타내는 뜻도 있다. 명나라 이전까지는 필요에 따라 연호를 바꾸었으나, 이후에는 한 군주가 한 연호만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다. 군주제와 연관은 적으나 서기西紀, 불기佛紀, 단기檀紀 그리고 도기道紀 등도 연호에 속한다.

처음에는 한 무제 즉위 다음 해를 초원初元으로 하고 6년마다 이원二元, 삼원三元으로 개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사원四元 1년에 뿔이 한 개 달린 짐승을 포획한 것을 기념하여 원수元狩라 하였다. 오원五元 1년에 주나라의 정鼎(발이 세 개 달린 솥으로 왕권의 상징)을 발견하여 이를 기념하여 원정元鼎이라 하였다. 이를 소급하여 처음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 무제는 제위 중 자주 연호를 변경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BCE 140년 건원建元, BCE 134년 원광元光, BCE 128년 원삭元朔, BCE 122년 원수元狩, BCE 116년 원정元鼎, BCE 110년 원봉元封, BCE 104년 태초太初, BCE 100년 천한天漢, BCE 92년 정화征和, BCE 88년 후원後元 등이다.

바람의 제국 흉노 이야기
몽골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 지대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터전이다. 이들 중 흉노는 중앙아시아인과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인종 및 민족들과 함께 생활을 영위하였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중국 북방 지역을 주로 약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와 중국 한족 간의 갈등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 한족들은 북방민족들을 융戎, 적狄, 호胡 등으로 부르며, 물리치고 억압해야 할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 흉악한 노예라는 모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에 빠진 중국 한족의 편견이다. 흉노는 훈누의 음차어이다. 훈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누는 태양이라는 의미이니 흉노는 ‘태양의 사람들’, ‘광명의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북방 유목민은 분명 정착 농경민과 다른 생활 방식을 채택하였지만 결코 야만인은 아니다. 실제 기마술과 야금술, 금속 가공 기술은 매우 선진적이었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흉노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불렀다. 또는 ‘탱리고도撐犂孤途 선우’라고도 했는데, 이 탱리는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천지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며,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의 춘제春祭와 오월의 용성대제龍城大祭는 대규모 천제였다. 흉노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큰 금상金像을 이용하였는데, 흉노 좌현왕인 휴도왕의 땅에 있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 그것이다. 이는 금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던 흉노족 풍속에서 나온 것으로, 그 실상은 삼신상제님(천신)을 모신 천제 문화와 환웅천황을 모신 웅상雄常 문화에서 기원한 것이다. 제천금인은 곽거병이 탈취했던 그 금상이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는데 이는 동쪽을 중시하는 우리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한다.

흉노가 중국 사서에서는 BCE 4세기인 전국 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흉노는 북방 중국에 있던 연, 조, 진을 늘 침략하는 골칫거리였다. 이 세 나라는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고, 이를 연결한 것이 진시황 때 이루어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대군을 주어 흉노에 반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어 결국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망하였다. 흉노의 위협은 진나라 멸망의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

흉노는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 ~ 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번조선)을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유목 대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 삼신 문화의 고향인 단군조선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즉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했다. 좌현왕이 우현왕보다 우대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진나라를 이은 유방의 한나라 역시 흉노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고, 무제 이전까지는 흉노에게 공주와 공납을 바치며 굴욕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후 무제는 50여 년간 흉노 원정을 펼쳤지만 결과적으로 백성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고 국력이 약화되게 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 정권을 공격하여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고 했던 이유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위만정권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1.
오르도스 지역과 흉노의 축출 - 오르도스 지역은 몽골고원으로 통하는 교통상 요충지로 오늘날 내몽골자치구에 속하는데, 고원과 사막, 구릉과 평원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당시 흉노는 군신軍臣선우가 죽고 선우의 동생인 이치사伊稚斜가 태자 어단於單을 몰아내고 스스로 선우에 올랐고, 어단은 한나라로 도망쳐 오는 등 일대 혼란 상태였다.

주2.
무고巫蠱 - 무고는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형상을 나무 인형(제웅)으로 만들어 흙 속에 묻어 상대방의 수명을 단축하도록 주문을 외는 흑마술의 일종이다.

주3.
망하라莽何羅의 반란 - 한 무제가 황태자를 죽이는 무고의 화 때 태자를 정벌하는 데 참여한 이가 망하라였다. 강충과 친했던 망하라莽何羅는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두려움에 한 무제를 암살하려 했지만 김일제에 의해 제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