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왕과 고구려 건국의 비밀

[세계사]
안병우 / 충북대 교수, 본부도장

들어가는 글

현재 우리나라에 고대사와 관련하여 소위 ‘정사正史’로 인정되고 있는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부다. 두 책 모두 삼국 시대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 엄밀하게 말하면 고대 사서라고 볼 수도 없지만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과 고조선을 이은 북부여,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 왕명으로 편찬된 사서라고 하나 저자 김부식의 중화사대주의적 역사관이 곳곳에 배어 있어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신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제1권부터 12권까지 ‘신라본기’, 제13권부터 28권까지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를 기록하고 있고, 이하 표表, 지志, 열전列傳을 더하여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본기’를 맨 앞에 놓은 까닭은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서기전 57년, 고구려는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신라가 고구려보다 20년 먼저 건국되었으니 신라를 먼저 기술한 것을 타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정말로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건국되었을까? 우리나라의 전승 계보인 국통과 잃어버린 상고 역사를 바로 잡는 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면 이것은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교하면서 파헤쳐 보자.


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몇 해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는 고주몽과 해모수를 부자 관계로 그리고 있다. ‘주몽’의 작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위주로 대본을 구성한 듯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비교하면서 읽어 보면 이것을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편’을 보면 해모수가 유화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아들이 고주몽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좀 다르다. 이와 연관된 내용이 「북부여기」, 「동부여기」, 「고구려기」에 조금씩 나오는데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삼국유사』 원문에는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모두 국명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이들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북부여기」, 「동부여기」, 「고구려기」 등으로 표기한다-필자 주). 「북부여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전한서前漢書」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서기전 58년으로 임술년이 아니고 계해년이다-필자 주)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왕은 후에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즉 고구려高句麗의 시작이다.”라고 하였다.


정리하면 ①‘해모수는 임술년(서기전 58년)에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그의 아들은 (해)부루인데 (해모수가 죽은 후) (해)부루는 상제의 명령으로 북부여를 떠나서 동부여로 옮겨갔다’ ②‘고구려는 시조가 동명제인데 북부여를 이어서 일어났고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여 처음에는 졸본부여라고 하였다’ 정도가 된다.

『삼국유사』 「동부여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동부여의 탄생 과정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터이니 너는 이곳을 떠나가라. 동해의 물가에 가섭원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한 곳이다’라고 해서 아란불이 해부루에게 주청하여 가섭원으로 옮겨 가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게 동부여이다. 정리하면 동부여는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해모수를 이어 북부여의 왕으로 있다가 아란불의 꿈속에 나타난 상제의 명에 따라 가섭원이라고 하는 동쪽 지역으로 옮겨 가서 새로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원래 북부여는 동명제가 이어받았으며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여서 졸본부여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북부여기」와 「동부여기」의 내용을 잘 분석해 보면 해모수, 해부루, 동명제의 관계를 딱히 알기가 어렵다. 「북부여기」에 의하면 해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인 것은 분명한데 동명제는 해모수의 아들인지 아닌지가 분명치 않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서 졸본부여를 세웠는데 이것이 고구려라고 한 바 동명제가 고주몽이고 그가 해모수의 아들이라면 해부루와 고주몽은 형제지간이 된다. 그러나 『삼국유사』 「고구려기」에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해부루가 곤연이라고 하는 곳에서 아들 금와를 얻게 되는 이야기, 해부루가 아란불의 주청으로 동부여로 옮겨 가는 이야기, 금와가 왕이 되고 나서 유화가 낳은 알에서 주몽이 탄생하는 이야기,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라는 이야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이야기 등이 나온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면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해부루왕이 죽고 아들 금와왕이 즉위한 후에 유화부인이 낳은 알에서 태어났으며, 나중에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주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웠으며, 이때의 나이가 22세이며, 서기전 37년이라는 것이다.

두 기록의 결론
현재 국사 교과서에서 말하는 고구려 건국에 대한 정설은 이상의 기록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즉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며, 해모수가 서기전 58년에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서기전 37년에 고주몽이 22세의 나이로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주몽은 서기전 58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은 동부여의 해부루가 죽고 그의 아들 금와왕 재위 시절에 알에서 탄생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시기적으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해모수가 죽고 나서 한참 지난 시점인 금와왕 시절에 고주몽이 태어나므로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 없는데 아들이라고 하고 있으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는 북부여를 그냥 부여라고 하였지만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겨간 이야기는 『삼국유사』 「동부여기」, 「북부여기」와 똑같기 때문에 부여왕 해부루라고 했을 때의 부여는 해모수가 건국했다고 하는 북부여를 말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서기전 58년에 고주몽이 탄생했다고 해 놓고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금와왕 때에 고주몽이 태어났다고 하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 바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주몽의 이야기의 결론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적으로 틀렸다기보다는 이 책들이 편찬되는 시점에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왜곡되어서 잘못 전해져 왔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이러한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환단고기』에서는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환단고기』에서는 임술년 4월 초파일 진나라 시황제 때 해모수가 23세의 나이로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서 북부여를 건국하였다고 나온다. 이때의 임술년은 서기전 239년이다. 연대는 다르지만 『삼국유사』에 해모수가 임술년 4월 초파일에 북부여를 건국하였다는 부분만은 일치한다. 고조선은 초대 단군왕검이 건국한 지 1908년이 경과한 시점에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고, 그로부터 188년 후인 서기전 238년에 2096년의 장구한 역사를 뒤로한 채 문을 닫게 되는데 바로 1년 전인 서기전 239년에 해모수가 등장하여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로서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왕을 단군이라고 칭하였다. 해모수 단군은 재위 45년인 서기전 195년에 67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해모수의 뒤를 이은 단군은 장자 모수리였다. 모수리 단군은 재위에 25년간 머물렀고, 이어서 아들 고해사 단군이 49년을 재위에 있었고, 태자 고우루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고우루 단군 재위 13년이던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 무제가 북부여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한사군 논쟁의 발단이 되는 전쟁이다.

고조선, 북부여, 한사군


고조선은 본래 초대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진한, 번한, 마한이라는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은 북만주, 마한은 한반도, 번한은 요동, 요서,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까지 포함하는 중국 대륙 동부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한은 나중에 삼조선으로 관제가 변경이 되었기 때문에 진한은 진조선, 번한은 번조선, 마한은 막조선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삼조선을 말하고 있다. 한편 해모수 단군이 붕어하던 서기전 195년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번조선의 기준왕에게 망명을 요청하였다. 준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접경 지대인 서쪽 변방의 국경수비대 임무를 맡겼으나, 위만은 그 은혜를 배반하고 1년 뒤에 준왕의 왕험성으로 쳐들어와서 나라를 강탈하였다. 이것이 소위 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은 손자인 우거왕에 이르러 한무제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게 된다. 이때가 서기전 108년이다. 번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서 고우루 단군이 통치하던 북부여로 침공하게 된다. 이때 한무제는 식민지 사군을 설치하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두막한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의병으로 한무제의 군대를 궤멸潰滅하였다. 이 당시의 상황을 현장에서 종군기자처럼 다 보았던 사마천은 『사기』에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두었다(遂定朝鮮爲四郡)’라고 엉뚱하게 기록해 놓았다. 참고로 한사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낙랑이니 진번이니 하는 한사군의 구체적인 지명은 후세의 사가들이 쓴 책에서만 나올 뿐이다. 그러니 한사군이란 실제로는 전혀 없던 것이다.

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


한편 한무제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고두막한은 고우루 단군에게 제위를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고우루 단군이 붕어하자 그의 동생 해부루가 뒤를 이어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 계속 위협하므로 해부루는 국상 아란불의 주청을 받아들여 가섭원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부여이다. 동부여의 탄생은 한무제의 북부여 침공과 구국의 영웅 고두막한이 배경에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이와 같은 장황한 스토리를 모두 생략하고 지극히 신화적으로 기술한 까닭에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절름발이 기록이 되고 말았다. 「북부여」에서 아란불에게 꿈에 나타나 떠나라고 말한 천제 혹은 상제는 바로 고두막한이었던 것이다. 고두막한이 한무제의 침입을 물리친 것은 서기전 108년이고 북부여의 단군으로 즉위한 것은 그로부터 22년 후인 서기전 86년이다. 북부여를 정식으로 넘겨받기 전에 그는 졸본 땅에 나라를 세우고 졸본부여라고 하였으며, 자호를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고두막한이 스스로 ‘동명’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졸본부여의 왕으로 있다가 22년 후에 북부여의 5세 단군이 되었는데 이것은 북부여 단군의 혈통이 바뀌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부여는 북부여이면서 졸본부여도 되고 동명부여도 되는 것이다.

고주몽의 혈통


해모수의 장자인 모수리는 북부여의 2대 단군이 되었고, 그의 동생 고진高辰은 고리군의 군왕(稾離郡王)으로 봉작을 받았다. 북부여의 제후인 셈이다. 고진의 손자 불리지弗離支(일명 고모수高慕漱)가 있었는데 이 불리지가 바로 하백의 딸 유화와 사통한 주인공으로 고주몽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라 고손자高孫子가 된다. 고주몽이 태어난 해는 서기전 79년 임인년壬寅年이고 생일은 5월 5일이다. 이것이 『환단고기』가 밝혀 주고 있는 고주몽의 혈통과 탄생에 관한 비밀이다. 불리지는 요절하였기 때문에 미혼모 유화는 어린 고주몽을 안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동부여의 해부루 왕에게 찾아갔다. 해부루는 혈통으로 보자면 고주몽의 7촌 아저씨였으므로 흔쾌히 고주몽과 유화를 받아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하였고, 나중에 동부여를 탈출하여 다다른 곳이 바로 북부여이다. 이때의 북부여는 졸본부여라고도 했기 때문에 『삼국유사』 「고구려기」에서는 첫 문장에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라고 했던 것이고, 광개토호태왕비에는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환단고기』의 기록이 아니라면 『삼국유사』에서 고구려가 곧 졸본부여라고 한 것이나 호태왕비에서 고구려가 북부여에서 온 것이라는 기록은 미스터리로 남았을 것이다. 북부여에 도착한 고주몽을 본 고무서高無胥 단군(고두막한의 아들)은 범상한 인간이 아니라 말하고는 자기 딸 소서노와 결혼시켰다. 고무서 단군이 재위 2년 만에 붕어하자 유지를 받들어 고주몽이 사위로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도를 서기전 37년이라고 한 이유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이 된 이때가 서기전 58년이다. 서기전 79년생이므로 이때의 나이는 『삼국사기』에서 말한 대로 22세가 된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지 정복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를 창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북부여(졸본부여)의 단군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구려의 시조라고 하는가? 북부여의 단군으로 다물多勿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22년을 지내 오다가 서기전 37년에 이르러 연호를 평락平樂으로 바꾸면서 나라 이름도 해모수의 고향이었던 고구려로 바꾸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의 시조가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때를 고구려의 건국으로 본 것이지만 고주몽으로 볼 때는 서기전 58년에 왕이 되었으므로 고구려의 기원은 서기전 58년으로 보는 것이 맞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러한 사실을 알 수도 있었건만 자신이 경주 출신으로서 신라를 종가집으로 놓고 싶어 신라가 먼저 건국된 것처럼 기술하였던 것이다.

동명성왕 고주몽


고주몽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왕 혹은 동명제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그런 칭호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역사 왜곡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명제는 원래 고두막한이다. 그가 스스로 ‘동명東明’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두막한은 졸본 땅에 부여를 세운 다음 졸본부여라고 했고, 동명부여라고도 했다. 그래서 동명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좁게 보면 고두막한만이 동명왕이 되는 것이지만 넓게 본다면 고두막한을 이은 고무서 단군, 또 그 뒤를 이은 고주몽도 동명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두 동명부여의 왕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칭한 것은 당시에 모두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부르면서 진짜 동명왕인 고두막한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고두막한에게 패한 한무제의 패배의 역사도 사라졌고,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호태왕비는 광개토호태열제의 사후 2년 만인 서기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열제가 세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의 기록은 당대에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후세에 쓰인 사서보다 정확성이 높다고 본다. 호태왕비문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는 정확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비문에 보면 광개토호태왕은 시조로부터 17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은 고주몽으로부터 따지면 왕위로는 19대 왕이요, 혈통으로 따지면 13세손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호태왕비에서는 17세손이라고 하였을까? 호태왕비가 발견되고 그것을 해독한 이후로 누구도 풀지 못하였던 이 미스터리가 『환단고기』를 통하여 풀렸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으로 등극한 후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고구려의 시조는 해모수라는 것이고 고주몽은 해모수의 4세손(해모수-고진-?-불리지-고주몽)이니 광개토열제는 시조로부터 17세손이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부분이다.

결론


고구려의 건국을 주제로 고주몽의 혈통, 북부여, 동부여, 북부여와 한무제와의 전쟁, 한사군 문제 등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한사군은 본래 없던 것을 사마천이 춘추필법春秋筆法(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왜곡된 필법)에 입각하여 거짓으로 기록한 한 줄을 가지고 지금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 주변에 있었다고 학계에서는 야단법석이다. 이 같은 딱한 실정은 우리 역사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본래 자랑스러운 것이었으나 주변국의 침탈과 그에 편승한 일부 학자들의 잘못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회복 불능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 선생은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했다. 사람이 혼을 잃어버리고 살 수가 없듯이 나라는 역사를 잃어버리고 존속할 수 없다. ‘한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be a part of China)’고 하는 중국 최고 지도자의 거침없는 망발을 보면서 역사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오늘의 우리와 미래 후손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것임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