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3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가가도장]

    마음을 열고 신앙으로 쌓은 가정도방

    대구수성도장 강계훈, 신갑연 도생

    이 세상에는 많은 가족이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가족 공동체 속에서 늘 무탈하게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며 가족이 함께하는 의미라 생각한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이 불고 시련의 파고가 몰아치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그런 역경에 마주하게 될 때 어떤 마음과 자세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가족의 진정한 행복지수가 매겨질 것이고 가정의 의미도 새롭게 정립될 것이다.

    부모가 하는 신앙을 자식이 함께 따라 하는 평범한 경우는 많다. 그런데 자식이 큰 병으로 앞날을 기약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남은 가족들이 오로지 신앙에 매달려 마음을 열고 하나로 뭉침으로써 마침내 그 난관을 이겨 내고 각자의 신앙 성숙마저 이뤘다면, 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사례이자 주목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바로 그러한 가족의 융합과 힘을 보여 준 대구수성도장 강계훈(남, 71세, 종감), 신갑연(여, 63세, 종감) 부부 도생과 그 가족의 신앙 이야기다. 두 도생은 슬하에 장남 강봉수(남, 41세, 종감) 도생과 차남 강봉민(남, 38세, 종감) 도생을 두고 있으며, 강봉민 도생과 결혼한 며느리 김선미(여, 35세, 종감) 도생까지 다섯 명의 가족이 견실한 가정도장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 가족은 각기 직업을 갖고서 일을 하고 있고, 강봉민 도생 내외가 분가해 살고 있지만 사실상 하나의 도방 문화를 형성하며 가족의 신앙 기틀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족이 말하는 가족 신앙과 도방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지난 2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취재진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위치한 이 가족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2층에 위치한 가정도장에 들어서니 가장이신 강계훈 도생과 신갑연 도생을 비롯해 강봉수, 강봉민, 김선미 도생이 하얀 수도복을 차려 입은 채 취재진을 맞았다.

    내부로 들어서서 왼쪽 방에 별도로 마련된 도방의 천신단은 순백색 벽면 상단 중앙에 상제님 어진, 우측에 태모님 진영, 좌측에 태상종도사님 존영이 자리를 잡고, 오른쪽 끝에는 조상신과 가택신 신위가 걸려 있다. 아래쪽에 놓인 청수 단 위에는 백색 자기로 된 청수그릇이 정결하게 놓여 있다. 벽면과 신단 및 바닥이 깔끔하고 색감의 대비와 중량감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신단에 예를 올린 후 다섯 가족과 함께 거실에 마주 앉아 어린 시절 가족이 고향을 떠나 이주한 사연과 운명적으로 상제님 신앙을 만난 과정, 그리고 차남의 희귀 난치병에 맞서 가족이 결집해 신앙으로 이겨낸 스토리 등에 대해 하나씩 경청해 보았다.


    가족이 떠나 찾아간 극락 세계


    이유도 모른 채 떠난 고향
    강계훈 도생은 우리나라 최대의 섬 제주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온난하지만 바람도 많이 부는 제주 땅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저 평화롭고 활력에 넘친 나날들이었다. 강 도생은 한없이 순수하고 해맑았던 까까머리 어린 시절 그 모습을 생각하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고 했다.

    그 아련한 기억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6학년 가을의 그 시점에 이르면, 철없던 어린 시절의 반전이 펼쳐지는 상황과 만나게 된다. 열세 살의 나이인 1961년 당시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만추의 계절 늦가을을 만끽할 무렵이었다. 그때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후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둘째 형님과 둘째 누님은 이미 제주를 떠나 타지에 가 있는 상황이었고, 오래 전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가 정착해 살고 있던 스무 살 차이의 큰 형님을 제외하면, 남아 있는 가족이 왠지 허전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우리도 이제 떠나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어린 막내였던 강 도생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고향을 계속 지키며 살고 싶다고 한 큰 누님을 혼자 남겨 두고 강 도생은 정든 땅, 정든 친구들을 뒤로한 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극락을 찾아가다
    처음으로 이별이란 걸 배운 그때, 친구들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조차 못하고서 떠난 발걸음은 이후 새로운 세계와의 연이은 만남에 정신 차릴 새도 없을 만큼 분주해졌다. 난생 처음 타 보는 트럭과 연락선, 말로만 듣던 기차, 처음 승차한 버스, 처음 맛보는 잔칫상보다 더 화려한 밥상 등등 정말 별천지요 극락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출발한 강 도생과 어머니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극락이라는 전라북도 김제 안양동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늦게 도착하였기에 주위의 풍광을 알 수가 없었다. 늦가을의 저녁은 이미 해가 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눈을 떠 보니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집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을 뿐 오직 하늘만이 뻥 뚫려 있는 그런 곳이었다.

    말 그대로 산도 설고 물도 설고 사람도 설고, 게다가 말까지 설었던 뭐가 뭔지 도통 모르는 상황이 펼쳐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골짜기에 일곱 가구가 살았는데 모두가 제주가 고향인 사람들이었다. 극락을 찾아 이 먼 곳까지 이미 와 있었던 것이다.

    하루를 쉬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아간 곳은 바로 청련암이었다. 천왕보살이라 불리는 분에게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니 어릴 적에 산처럼 높아 보이던 둘째 형님이 머리를 깎고 그곳에 서 있었다. 먼저 집을 떠난 형이 거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단체 생활을 하는 형님 또래의 청년들 10여 명이 머리를 깎고 불경을 외우며 극락을 기다렸던 것 같다. 물론 그곳에는 낯설긴 했어도 강 도생 또래의 아이들도 많았다. 철없던 그 아이들은 불경 같은 데는 관심이 없고 장난치면서 놀았고 예불이 끝나면 하얀 쌀밥,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다. 누구 하나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굳이 할 일도 없었기에, 먹고 놀고 먹고 자고 하는 그곳이 어린 시절 그때는 바로 극락이요 천국이었다. 가을이 가고 봄이 오고 또 한 해를 안양동에서 보냈다. 말이 좋아 극락, 천국이지 지금 생각하면 그런 귀양살이가 따로 없었다. 외부의 소식 같은 건 아예 없는 감옥, 정말로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용화동의 추억과 탈출
    다시 한 번 이사를 해서 이번에는 용화동 새터에 또 터를 잡았다. 2년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이제 강 도생의 나이는 15살. 철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강 도생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언제 마련했는지 용반골에 논 5마지기 밭 2마지기가 있었고, 그때부터 강 도생은 농사일을 배워야 했다. 안양동에서는 현지어인 전라도 말이 필요 없었으나, 용화동은 정말 큰 동네였고 제주도 말 그 사투리 가지고는 언어가 통하질 않았다. 말 배우기도 쉽지 않았고 농사일 또한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강 도생은 이렇게 술회했다. “용화동은 지금 생각하니 추억도 많은 곳이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 한마디로 도회지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용화 세계를 찾아온 사람들, 미륵을 찾아온 사람들, 청련암을 찾아온 사람들, 하운동 서백일이라는 사람이 창업한 용화사를 찾아온 사람들, 증산교, 증산법종교 등등 수많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물론,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고 그때는 아무 관심도 없었어요.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상황이 그랬다. 열다섯 소년의 눈에는 2년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여전히 생소했다. 지각을 갖고 어떤 믿음이나 신앙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스스로의 정체성이 분명치 않은 나이였고, 자신이 또래의 평균적인 삶과 달리 특별한 행로를 걸어가야 한다는 당위성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시간이 자꾸 흐르다 보니 학교에 다니는 친구도 하나 둘 생기고 삶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갑자기 강 도생은 지게 짊어지고 산에 가고 논에 가고 하는 그런 생활에 염증이 생겨났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17살이 된 1964년 그해, 강 도생은 드디어 탈출구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둘째 누님과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 강 도생은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강 도생은 그곳에 살았던 그 몇 년이 오늘을 있게 해 줄 줄은 정말 몰랐다고 했다.

    조상과 어머니의 뜻을 깨달은 입도


    어머니를 천상으로 보내고
    강 도생이 대구에 있다가 군에 입대를 하자 용화동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마침내 대구로 나와 누님과 함께 사시다가, 용화동을 떠나온 지 만 20년 뒤인 1984년 장마가 한창인 7월 1일 천상으로 가셨다. 강 도생은 그렇게 어머니를 천상으로 보내는 과정에 대해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역시 운명은 내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면 잠깐인 세월이지만 그 20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가정을 꾸렸고 아들도 둘이나 있었어요. 한창 생업에 여념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웠고 저 또한 외롭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나 외톨이였고 친구나 그 흔한 동창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형제들이 있다고는 하나 모두가 흩어져 살았으므로 모두가 제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곡기를 끊고 말을 끊었다. 갑작스런 중풍이 찾아오면서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23세에 강 도생과 결혼해 8년간 시어머니를 모셨던 신갑연 도생은 며느리로서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보살폈지만 기울어진 건강은 회복이 어려웠다. 장례를 치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정말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이웃에 살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신 도생에게 봉수네는 외롭고 형제도 없으니 성당에 가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처리해 준다며 성당에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는 말이 없으시고 거동도 못하시니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더니 대세代洗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 뒤 그 할머니를 통해 대세를 받고 나니 7~8명의 신도들이 찾아와 하루 종일 기도를 하고 갔다. 정말로 고맙기 한량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날 며칠 정말 천상으로 가는 그날까지 기도를 해 주었다. 결국 1984년 7월 1일 발병한 지 6개월 만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성당에서 모든 절차를 알아서 하는데 그 고마움을 말로서 표현하기가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 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집행하고 묘지로 가서 또한 영구차까지 대고 나서니 어머니를 보내는 슬픔보다는 같이 슬퍼해 주는 성당 신도들에게 고마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서 장례식 후 강 도생의 네 식구는 성당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았다.

    진리책을 읽고 받은 충격
    어머니를 보내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강 도생은 삶의 현장에서 내일도 없이 부지런히 살아가느라 성당 가는 것을 잊은 지 이미 오래 된 채 살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엔 늘 미안한 마음만 간직한 채로 세월은 흘렀고 1998년 IMF로 나라가 온통 어수선한 시절을 맞았을 때 강 도생은 이미 50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50이면 지천명이라는데,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친구의 권유로 오성택시라는 회사에 들어가 택시의 핸들을 잡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사납금을 납입하러 간 강 도생은 수납 업무를 담당하던 직원이 『증산도의 진리』라는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직원이 바로 강 도생을 상제님 진리로 이끈 인도자 신미영 도생이었다. 뭔가 강한 느낌을 받은 강 도생은 주저 없이 그 책을 빌려 달라고 해서 집에 가져왔고, 그날 저녁 그 진리책을 읽으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말세의 밤 열차를 타고서, 천지공사란 또 뭐고 개벽이란 뭐란 말인가? 철없던 어린 시절 뛰놀던 그곳이 상제님 천지공사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 도생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도록 그 책을 읽고 난 다음 날 강 도생은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미영 도생에게 도장이 어디냐고 물어 일을 마친 후 바로 도장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너무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그날 도장에 찾아가서 만난 젊은 청년 세 명과의 대화에서는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그 다음 날은 인도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역시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단지 태을주 수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수행을 한번 해 보자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입도로 씻어 낸 어머니에 대한 원망
    하지만 이것 또한 운명이었는지,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던 그 당시 수요일로 기억되는 어느 날, 도장 치성에 참석을 했다. 지금이야 잘 아는 도생이지만 그분의 조상 천도식을 올리는 날이 그날이었다. 강 도생은 그냥 뒤에서 구경하는 상황이었는데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하얀 장갑을 끼고 식순에 따라 천도식을 거행하는데 참으로 보기 좋았다고 한다. 또 천도 발원문 읽는 것을 듣고 있자니 자신도 괜히 감정이 격해지고 눈물이 나면서 “아, 나도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천도식을 한번 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자 강 도생은 겨우 1주일간 억지 수행을 한 후 1998년 9월 24일 대구신천도장 소속으로 도문에 입도를 했다. 지금 같았으면 턱도 없는 일이지만, 마음속에 뜨거운 자각과 영적 감응이 밀려들면서 결국 증산도 신앙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운명이었고, 조상의 손길로 인도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님이 저세상으로 떠나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그 먼 길을 떠나 전라도 청련암으로 찾아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다 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다. 그 철없던 시절 고향을 떠나 잠시 새로운 삶을 경험하면서도, 또 그러한 생활에 불안을 느끼고 이해보다는 원망을 앞세운 채 그곳을 벗어나면서도 강 도생은 어머니가 왜 가족을 이끌고 그곳에 들어가셨는지 그 이유나 배경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상제님으로부터 태모님, 그리고 보천교로 이어진 하느님 신앙이 저 멀리 제주에도 크게 물결쳤던 엄연한 역사의 과정이 있었던 만큼, 그 계열과 종파가 어쨌을망정 상제님 진리와 인연의 큰 틀 속에서 자식들이 삶을 영위하기를 어머니께선 바라지 않으셨을까? 강 도생이 상제님 신앙의 종가 증산도에 진입을 하게 된 요인도 결국 알고 보면 열세 살 소년기에 찾아 들어간 안양동과 용화동에서의 체험이 기반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강 도생이 어머니와의 삶에 함축된 메시지를 이해하고 조상님의 지원에 힘입어 도문에 들어왔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강 도생의 독서 습관도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 역할을 했다. 강 도생은 한창 바쁘게 살면서도 책과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40대에는 원효결서나 충격대예언, 터 등의 책과 정감록 같은 예언서들도 읽었지만 명확한 결론이 없어 아쉬웠는데, 증산도 진리를 만나고서야 그 결론을 얻을 수가 있었다는 말도 부가했다. 결국 진리가 온전히 체계화된 서책을 읽을 기회를 가져야 진리와의 인연도 깊어진다는 점 또한 구도의 법칙으로 불가결한 요소임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의 신앙 결집이 이룬 가가도장


    마음을 열고 신앙으로 뭉친 가족
    애당초 취재진은 도방 취재 과정의 당연한 수순으로 부모인 강 도생과 신 도생으로부터 신앙 정착의 과정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묻고 정리하다 보니 결국 그 얘기의 대부분은 10년 가까이 병마와 싸운 둘째 아들의 투병 이야기, 그리고 그에 대응해 가족들이 손을 잡고 신앙으로 결속한 스토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은 지나간 상처를 헤집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당사자인 강봉민 도생의 투병 과정 이야기를 들었고, 부모와 형의 입장에서 느꼈을 ‘가족’의 생각과 역할 내지는 그 의미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었다.

    이미 정리를 한 바와 같이 강봉민 도생은 마치 드라마 속 줄거리를 무심코 설명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쏟아냈다. 하지만 아버지인 강계훈 도생은 가슴 아픈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서인지 말을 아꼈다. “그때 심정이야 말로 다할 수 없지요. 평소 잘 들어보지도 못한 병이 내 자식에게 현실로 닥친 거니까. 그때 제 아내와 둘이 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짧게 말을 마친 강 도생은 아내인 신 도생에게 말문을 넘겼다. 신 도생은 “둘째 아들이 급하게 응급실에 입원한 후 11일 만에 퇴원을 했을 때 저는 정말 답답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내가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졌기에 이런 병을 자식에게 물려주나 싶고...” 신 도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눈시울을 붉히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11일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자식이 그렇게 된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서... 그때부터 천도식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런 마음을 먹고서 두 달 정도 후에 천도치성을 올리게 된 거지요.”

    너무도 저린 가슴을 다스려야 했던 부모와 달리 형인 강봉수 도생은 조금은 더 차분하게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중 동생의 큰 병을 알게 되면서 부모님과 저는 충격과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우리 가족에게는 상제님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누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어 신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형편 중에도 큰 병이 있는 동생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 기도하고 수행하고 간간히 조상님께 천도식을 올려 드리는 일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즈음 다시 천도식을 올려 드리고 난 후에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을 접하게 된 거예요. 천지일월 부모님과 조상님들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신앙 성숙의 계기가 되면서 우리 가족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신앙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마음고생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장남인 강봉수 도생은 동생의 치병에 소요되는 비용 등을 감안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면서 가족의 현실적인 문제에 보탬을 주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강봉민 도생이 건강을 회복한 지금은 동생과 함께 업체를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한편 강봉민 도생은 2년 전 신앙 동료인 김선미 도생과 결혼을 하며 분가를 해서 가까운 곳에 따로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 다른 신앙 동료가 소개하면서 정식 만남을 갖게 되었다. 본격적인 만남은 강봉민 도생의 건강이 회복되고 나서였는데, 김 도생은 같은 신앙인으로서 대화가 통하고 강 도생 가족의 신앙 모습이 괜찮아 보였으며 서로 위로가 되기도 하고 해서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결혼 후 시댁 가족들 간의 끈끈한 애정과 효자인 두 아들의 언행을 목격하면서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고도 했다. 시어머니인 신 도생은 새롭게 가족의 일원이 된 김 도생이 마치 딸과 같은 느낌이 들어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며느리를 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가화만사성의 근원, 가정도장
    강계훈 도생은 “도전의 성구 중에 ‘나는 해마를 주장하는 고로 나를 따르는 자는 모든 복마가 발동하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이겨야 복이 이어서 이르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차남 봉민이가 난치병을 앓으면서 가족들이 신앙에 매달리며 병마를 극복했고 모두가 함께 치성을 올리고 정성을 드리는 과정에서 우리 가족들의 신앙이 다져지고 확고히 정착되었습니다.”라는 말로 그간의 제반 과정을 정리했다. 이제 신앙은 이 가족이 살아가는 중심 주제요 생활 방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그 속에서 감사와 보은의 마음가짐으로 행복의 가치를 실현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가족에게 가가도장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강계훈 도생은 “2002년부터 가정에 그런대로 모습을 갖춘 도방을 마련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람은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지역도장은 물론 가정도장을 통해 가족이 모두 하나가 돼서 신앙을 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듯이 신앙을 통해 가족 간에 화합도 되고요. 그게 제게는 제일 큰 자산이지요.”라고 했다. 가정도장이 가족을 화합시키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은 신갑연 도생도 적극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장남 강봉수 도생은 이를 다시 압축하여 ‘가가도장은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항상 힘을 얻게 하는 근원’이라고 표현했고, 강봉민 도생 역시 ‘위로 받고 힘을 얻는 공간이자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성취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는 곳’이라고 했으며, 김선미 도생은 ‘(지역)도장 외에 가정에서도 신앙문화를 펼 수 있는 좋은 터전’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취재를 통해 알게 된 가정사의 배경과 그것의 해결 과정을 종합해 보면 가정도장이 가족을 결집시키는 1차적 공간이자 신앙의 동력이 된 곳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가화만사성’의 의미도 이 가족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의미가 남다른 말임도 알 수 있다.

    신앙 정착에서 신앙 발전을 향하여


    도방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가족 모두에게 향후의 신앙과 삶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먼저 강계훈 도생은 직장에서 하는 일이 너무 바빠서 신앙 활동을 열심히 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그랬던 것보다는 신앙을 더 잘해야겠다는 결의를 보였고, 차남이 신앙하며 그 속에서 배우자를 만난 것처럼 장남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여 안정을 찾고 더욱더 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신갑연 도생도 지금보다는 신앙을 더 잘하고 싶고 무인거치대 활동도 더 개선해서 포교 활동에 힘을 내고 싶다고 했다. 더불어 둘째 아들이 아팠을 때 막내동생이 도움을 주었는데, 앞으로 진리를 꼭 전해서 신앙으로 인도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강봉수 도생은 직장 근무로 인해서 포교 활동은 잘 못하고 있지만 틈나는 대로 함께 활동할 때가 참 좋았던 기억이 있어 더욱 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고, 특히 앞으로는 가가도장을 통해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을 수렴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또 도장에서 맡은 재감 보직에도 더 집중하여 맡은 바 책임을 다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강봉민 도생은 직장 생활이 바빠 도장에서 함께 하는 포교 활동 등 조직과 함께 하는 부분에 대한 참여가 많이 부족하고, 포감이라는 보직을 맡고도 직장 생활에 바빠 구역 도생들을 더 살뜰히 챙기지 못하는 것은 늘 스스로 반성하고 아쉬운 부분이라며, 이런 점들을 계속 보완해 나감과 동시에 도장 성장을 위해 더 힘쓰는 봉직자가 되겠다고 했다. 또한 가족이 모두 신앙하고 신앙 정착은 잘 되어 있지만 결혼 후 처가 식구들에게 아직 진리를 전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기 때문에 올해부터 처가에도 진리를 전해 함께 신앙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김선미 도생 역시 친정 식구들의 신앙 합류를 간절히 희망하는 염원을 전하면서 예정하고 있는 직선조 보은치성이 그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가족을 신앙으로 결속시킨 난치병 스토리
    아픈 손가락이 된 둘째 아들
    강계훈 도생과 신갑연 도생에게 두 아들 강봉수, 강봉민 도생은 아픈 손가락과 같은 자식들이다. 부모에게 모든 자식은 다 같이 소중한 존재이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난치병을 앓아 고통을 당한 아픈 기억을 가족이 함께 갖고 있기에 그 존재와 소중함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남 강봉수 도생은 2001년 2월 어머니 신 도생의 인도로, 차남 강봉민 도생은 2001년 7월 아버지 강 도생의 인도로 증산도 신앙을 시작했다. 강봉수 도생은 입도 당시에는 어머니의 신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족들과 신앙 문화를 함께하고 있다는 공속 의식 등이 작용하여 무작정 신앙을 시작하는 상황이었고, 강봉민 도생은 어린 시절 성당이나 교회를 다닌 적은 있었지만 성장하면서 신앙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도장에 따라가서 도장 책임자의 안내로 태을주 수행과 진리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진리라면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과 가족들의 신앙 영향으로 무난히 입도를 하게 된 경우이다. 신앙인인 부모와 함께 자연스러운 가족 신앙이 이루어진 케이스로 남을 수 있었던 이 가족은 차남 강봉민 도생이 갑작스럽게 난치병 진단을 받으며 거친 풍파에 직면하게 되었다.

    태을주 수행으로 치병을 결심하고
    강봉민 도생은 입도 이후 일상생활 속에서 도장 치성 참석이나 진리 공부 등이 자연스레 소홀해지게 되었고, 구도 생활보다는 군 입대 등 앞으로의 진로나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선호하던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린 후 헤어지던 길에 몸이 정상이 아님을 느꼈다.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도 있었고 이전부터 계속 이어진 컨디션 저하 증세도 있었기에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혈액암이나 다른 질환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 후 2000년 12월 영남대학교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서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과 함께 계속 놀라운 얘기들만 듣게 되었다. 쉽게 치료도 되지 않는 희귀 난치성 질환이고, 골수 이식을 받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가족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해 보니 형인 강봉수 도생과는 조직이 50%밖에 맞지 않아서 이식도 안 되고, 골수은행에 찾아보니 미국에 한 명이 있는데 기증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일주일 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수혈을 받은 후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재생불량성 빈혈로 군대도 면제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공군하사관에 지원해서 그 경력으로 항공사에 취업하려는 인생의 꿈과 설계를 무산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너무나 허탈했다고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던 그때 당시 도장 책임자분과 포감님들이 집에 와서 신유와 함께 위로도 많이 해 주었고, 어머니의 계속된 설득과 간청을 받아들여 새벽 5시에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도장에 가서 수행을 시작했다.

    며칠 수행을 이어 가던 중 도장 책임자분이 꼭 한번 읽어 보라며 전해 준 『태을주로 개벽된 나의 생명 나의 인생』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강봉민 도생은 그 책을 통해 소개된 여러 도생들의 생생한 수행 체험담들을 읽으면서, 불현듯 ‘만병통치 태을주라니 나도 해 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론 계속 어머니와 도장에서 수행을 하고 집에선 도전과 진리 도서들을 조금씩 보며 생활을 했다.

    첫 천도식과 정성, 그리고 방심
    이즈음 강봉민 도생의 건강 문제도 걸려 있고 해서 가족들이 모두 합심하여 2002년 첫 천도식을 올리게 되었다. 강봉민 도생은 자신이 아픔으로 인해서 오히려 가족들 간에 신앙의 틀이 만들어지고, 그동안 무심하고 대화도 없었던 가족들이 신앙 속에서 화합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고 표현했다. 비록 자신이 병마로 고통을 받으며 어떤 위험이 닥칠지 예상하기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위기가 가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상제님 신앙의 근본 기틀을 다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천도식도 하고 계속 수행을 하다 보니 건강도 조금씩 좋아졌다. 1주일에 한 번 받던 수혈도 2주, 3주 뒤에 받게 되고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100일 정성 공부를 하면서 완치도 해 보리라 굳게 다짐하고 정성 공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70여 일이 지나고 건강이 조금씩 좋아지자 아르바이트하면서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수행 시간도 점점 짧아졌고, 긴장을 풀어 버려서인지 결국 정성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그러자 혈액 수치도 그렇고 건강 상태가 나빴을 시점으로 원상 복귀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강봉민 도생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을 해 봐도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구나, 좀 살 만해지니 일심하지 못하고 딴 생각을 해서 스스로 일을 그르치다니.. 하는 후회도 많이 했다고 했다. 그 이후론 작은 체험이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나을 수 있다는 자만심 같은 게 있어서 그랬는지 수행을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하진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생활은 완전히 정착이 되었다. 좀 힘이 들기는 했지만 병원에 다니면서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에도 익숙해졌고, 도장에선 보직도 맡아서 해 보게 되었다. 도장 도생들과 포교 활동도 같이 나갔는데, 금방 피곤해지곤 했지만 이 생활도 익숙해지니 괜찮다 싶었다. 그리고 언제든 수행을 열심히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계속된 기원과 보은치성, 기적을 부르다
    그렇게 계속 생활해 오던 중 강봉민 도생은 신천도장에 새로 부임하신 책임자분으로부터 제물치성을 지속적으로 해 보라는 말씀을 듣고 일주일에 한 번씩 건강 회복 기원 치성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그렇게 하면서 직선조 외선조 천도식도 한 번씩 더하여 7~8회를 올리며 몇 년을 그렇게 해 나가다가 2009년 직선조 보은천도식을 마치고 나니 조상님들의 음덕이었는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영남대병원 담당 의사 선생님이 바뀌었고, 바뀐 그분은 서울 아산병원에서 근무하다 오신 분이었는데 골수 이식이 가능하다며 서울 아산병원에 추천서를 써 줄 테니 그곳으로 가 보라고 했다. 아산병원에서는 형과 50%가 맞으니 이제는 ‘반일치 골수 이식’이 가능하다고 했다. 수년 전 불가능하다고 했던 판정이 뒤집힌 것이었다. 그래서 2010년 3월 드디어 형 강봉수 도생의 골수를 이식받게 되었다. 이식을 받고 숙주반응(거부반응)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2년이 지나고부터는 병원에 가지 않고 회복되어 지금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

    강봉민 도생은 근 10년이라는 투병 생활과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며 이 모든 것이 늘 자손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조상님들과 어려웠던 매 순간을 항상 함께해 준 가족, 그리고 함께 신앙하며 격려해 주셨던 여러 도장 봉직자분들과 도생님들 덕분이라 생각한다며 가슴 깊이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어린 시절 신앙을 위해 가족이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품은 원망을 후일 상제님 도문에 들어와 비로소 씻어 내고 가족의 난치병을 남은 가족이 똘똘 뭉쳐 신앙으로 이겨내 신앙과 화합의 도방 문화를 구축한 강계훈, 신갑연 도생 가족의 도방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소년기에 영문도 모른 채 타지로 이주해 생소한 신앙 문화 속에서 살다가, 나중에 사회에 나와 가정을 이루고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상제님 진리의 종가 증산도에 입도를 하면서 비로소 지나온 모든 원망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서 시작한 가족들의 도문 인도와 신앙이 그런대로 이뤄졌다고 믿을 무렵, 차남에게 다가온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치료 방법마저 난감한 현실과 대면한 이 가족은 10년의 세월을 신앙으로 뭉쳐 정성을 지속한 끝에 마침내 회복의 순간과 만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었다는 가족은 천도치성을 통해 조상선령과 소통하고 태을주를 읽으며 신성한 기운을 받아 내린 결과 치병의 은혜와 함께 ‘가족화합’과 ‘신앙성숙’의 선물도 얻었다.

    우리는 이 가족이 시련의 과정에서 응대한 신앙의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은 닥쳐온 고난에 당황하거나 허둥대거나 다른 힘에 의지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이 상제님 신앙인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마음을 열어 신앙의 본질을 실천하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기적을 부르고 치유의 기회와 힘을 내려 받아 마침내 건강 회복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한 가장 강력한 행동만이 행복과 화합으로 도방을 채울 수 있는 도구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 가족은 서로를 위해 진정과 소통으로 임했고, 신앙을 기반으로 한 정성에 뜻을 같이했으며 때로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 정신과 기운이 응집되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성취가 되고 새로운 차원의 성숙도 열리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강계훈, 신갑연 도생과 강봉수, 강봉민, 김선미 도생의 가정이 더욱 강고한 화합과 성숙을 이뤄 도방에 큰 기운을 붙여 나가시기를 바라고, 무술년 한해 상제님 태모님의 성령과 조상선령 및 천지 성신의 가호 속에 신앙의 큰 진전을 이루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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