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혁명의 자원 부국 우크라이나 Ukraine

[세계지역문화탐방]
편집부

유럽 동부와 흑해 연안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고대부터 여러 종족들이 명멸을 거듭하다가 9세기경 동슬라브 민족의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가 세워져 우크라니아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3세기 몽고의 지배에 이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카자크 집단을 통해 지속적인 독립 운동을 벌였고, 소련 연방에 참여해 사회주의 공화국을 거친 후에 마침내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계가 주목한 오렌지 혁명을 거치며 성숙된 정치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민족과 언어 등에서 이질적인 동부와 서부 지역이 경제정책 및 정치적 입장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여 2014년에 크림자치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와 합병을 선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여러 국가적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여 정국 안정과 경제 회복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우크라니아의 현재를 찾아가 본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우크라이나Ukraine(Україна)는 러시아 서부 흑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 공화국으로, 유럽 동부와 러시아연방에 접경해 있다. 위도상으로는 북위 44°20´~52°20´, 경도 상으로는 동경 22°5´~41°15´이다. 남북 길이는 총 893㎞이며 동서 길이는 1316㎞이다. 국토 면적은 총 603,550㎢로 유럽 대륙의 5.7%에 해당하며 전 세계 육지 면적의 0.44%에 해당된다. 한반도 면적과 비교하면 약 3.5배 크다.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인접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서쪽으로 몰도바와 루마니아에 인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에 인접해 있고 흑해와 아조프해 쪽의 접경국은 터키와 불가리아, 조지아Georgia이다.

우크라이나의 지형은 국토의 95%가 평지이고, 전 국토의 80%가 경작 가능 지역이며 이 중 60%의 토지가 비옥한 흑토 지대이다. 서부의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과 크림 반도 등은 최고 높이 2,061m의 산악 지대이다. 수도 키예프Kyiv를 가로 지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주요 천연자원은 철광석, 망간,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원유, 마그네시아, 소금, 유황, 흑연, 티타늄, 마그네슘, 고령토, 니켈, 수은, 목재 등이다.
우크라이나의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이지만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이다. 카르파티아 지역은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은 우기이다. 겨울 평균 기온은 -5 ~ -10℃인데 남부지역은 0℃이다. 여름 평균 기온은 15 ~ 26℃이며 최고 기온은 39℃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고대 정착민 역사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고대부터 여러 민족들이 명멸하며 이동을 거듭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 전후에 이르는 기간 중에는 킴메리,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인들이 거주했고, 기원후 첫 1,000년 동안에는 고트족, 훈족, 불가리아인, 아바르, 하바르, 마자르, 페체네그 민족 등이 지배의 역사를 남겼다.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지역에는 기원전 수세기 동안 타우리,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이 거주했고, 기원후 중세까지는 아르메니아, 슬로박, 제노아, 투르크, 타타르 인들이 거주하였다. 현재도 크림 지역에는 이들의 후손과 문화가 잔존해 있다.

우크라이나 내 슬라브 민족의 형성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 북부 지역이 본거지로 추정되는 슬라브 민족이 7세기 초 사방으로 분산, 이동하면서 7세기경 드니프로Dnipro 강 서안에 동슬라브 민족이 정착했다. 8~9세기에는 동슬라브 민족의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키예프 공화국)가 키예프Kiev(Kyiv)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남북으로는 흑해에서 발트해까지, 동서로는 볼가Volga 강에서 티사Tisa 강에 이르는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키예프는 1,5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10~12세기경에는 인구가 약 15만 명에 이르렀다.

키예프 루시는 9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200여 년간 봉건국가로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특히 볼로디미르 대공(Volodymyr the Great) 치세(980년~1015년)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988년)하고 비잔틴 문화를 도입하여 문화적으로도 크게 융성하였다.

번영을 구가하던 키예프 루시는 1132년 므스티슬라프Mstyslav 왕의 사후, 왕자들 간의 후계 다툼이 발발하면서 여러 공국으로 분할되었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223년부터는 세 차례에 걸쳐 몽고족의 침입을 받았고, 1240년 결국 몽고족에 의해 키예프가 폐허로 변하면서 키예프 루시도 멸망한다. 키예프 루시는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킵차크한국의 제 1대 군주였던 바투 칸에 의해 몰락했는데 이후 2세기에 걸쳐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3세기 이후부터는 현 우크라이나 영토 대부분이 할레치안 볼리니안Halytsian-Volynian 공국의 영토가 되었고 할레치안 볼리니안 공국은 왕국으로 번성하며 14세기 중반까지 이 영토를 다스렸다. 그러던 것이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점차 리투아니아, 폴란드, 터키, 몰도바에 의해 분할, 예속되었고, 1569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합병됨에 따라 드니프로 강 서안은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의 형성
중세에 동슬라브 민족이 확장 분화되면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몽고의 지배를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우크라이나인은 16세기부터 카자크Cossacks 집단을 형성하였다. 카자크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와 러시아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면서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부류의 집단을 지칭한다. 우크라이나 중앙을 가로지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무장 조직인 자포로쟈 카자크 시크Zaporogian Cossacks Sich의 주도하에 1648~1654년까지 우크라이나인들의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과 카자크 집단은 상호 깊은 연관이 있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민족성(ethnicity) 개념이고, 카자크 집단은 사회계층적 성격의 집단을 의미한다. 카자크 집단은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 변방 지역에 대한 수비 임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치 및 조세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은 사회 집단으로, 대부분 범법자나 도망한 농노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자포로쟈 카자크, 러시아 지역에는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 등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카자크 집단이 존재했었다. 제정러시아 시절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 내에는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자포로쟈 카자크 집단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대對폴란드 독립 투쟁도 이들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집단이 주도했다.

폴란드 점령지가 아니었던 드니프로 강 동쪽은 1654년 잠시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카자크 지도자 흐멜니츠키Khmelnitsky와 러시아의 황제 차르 사이에 페레야슬라프Pereyaslav 협정이 체결되면서 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지역에 대해 처음에는 카자크를 중심으로 하는 자치권을 인정하였으나 점차 자치권을 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카자크 간부에 대한 귀족 특권의 부여, 농노제의 도입 등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772년 폴란드가 해체됨에 따라 드니프로 강 서쪽의 폴란드 점령 지역 대부분도 러시아에 편입되었고, 갈리치아, 볼리니아,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등 일부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곳 드니프로 강 서안의 우크라이나에서는 18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폴란드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농민에 대한 폴란드계 지주의 지배가 폴란드적인 행정 및 토지제도 등과 함께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귀속된 일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역사
그러다가 1905년 이후 제정 러시아 내에서 반 황제 혁명 움직임이 확산되자 우크라이나에서도 노동자,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빈발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에도 인민대표 회의가 결성되었으며 1917년 12월 25일 하리코프Khar’kov를 수도로 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갈리치아-볼히니아Galicia-Volhynia)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퇴에 따라 1918년 11월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민족의 봉기와 신생 폴란드 정부의 무력 개입으로 독립에 실패하였고 이 지역은 1919년 7월 폴란드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한편 이바노프란코프스크Ivano-Frankovsk 지역은 신생 헝가리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Greater Ukraine)에서는 1917~1921년 사이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볼셰비키파 등 6개 정파 간의 내란이 발생하였고 독립 쟁취에는 실패하였다. 1917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선포되어 활동을 벌였지만 수개월 후 볼셰비키 세력에 패하여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란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의 반反러시아 의식과 민족 의식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1921년 모스크바 볼셰비키 정부의 전략적 양보 하에 조약체결권과 영사관할권 등이 주어진 제한적 외교 주권을 가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창설 조약에 서명하여 창립 회원국이 되고, 이로써 외교 주권을 일부 상실하게 되었다. 소련 연방 가입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민족 의식은 꾸준히 지속되었으며 모스크바 중앙 정부는 이러한 민족 의식 말살을 위해 강력한 억압 정책을 시행했다. 1932~1933년에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실시한 집단 농장 추진 과정에서 인위적인 기아 정책이 집행되어 우크라이나 농민 800만 명이 아사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또 전쟁, 기근 등으로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1939년 당시 4,100만 명의 인구가 1945년에는 2,700만 명으로 대폭 감소하게 되었다.

1934년 키예프는 소비에트연방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소비에트연방 당시에는 모스크바Moskva,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다음으로 큰 제3의 도시로 성장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비에트연방은 폴란드에 귀속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과 벨라루스, 베사라비아, 북부 부코비나를 병합했다. 이 병합으로 인해 1941년 당시 소비에트연방 내 우크라이나 영토는 56만㎢였다. 한편 1941~1944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전역이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1945년 소비에트연방 내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국제연합UN(United Nations) 회원국으로 참여하여 유엔 창설 회원국이 되었다. 1954년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우크라이나 합병 3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이양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우크라이나에 로켓, 전자, 화학, 조선 산업 등 중화학 시설이 건설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의 역사
1980년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vich Gorbachyov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비에트연방 중앙 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됨에 따라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선언법’을 채택하고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독립을 최종 확정했다.

1991년 12월 5일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91년 12월 8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3개국 정상이 소비에트연방 탈퇴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독립 후 1994년 3월과 1998년 3월, 2002년 3월에 각각 제 2, 3, 4대 총선이 있었으며, 1996년 6월 28일에는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1994년 5월 제2대 대통령으로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가 당선되었으며, 그는 1999년 10월에 제3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004년 11월에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는 부정 선거 시비가 발생했다. 이 선거에 대해 야권이 불복함으로써 대대적인 저항이 유발되었는데, 시민들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이나 목도리, 깃발 등을 휘두르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이어갔다. 온통 오렌지색으로 뒤덮인 시위대의 물결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의 결과, 세 차례나 대통령 선거를 치른 끝에 2005년 1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가 제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우크라이나는 성숙된 역량을 과시하며 평화적인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이후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러시아 혈통으로서 친러시아 성향을 갖고 있던 야누코비치는 취임 이후 가장 중요한 국정 사안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재정 위기 타개를 위해 나섰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EU의 경우 200억 유로의 차관을 제공하되 재정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강도 높은 개혁을 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고, 러시아는 조건 없이 150억 달러의 차관 제공 제시와 함께 저렴한 가격의 가스 공급을 제안했다. 이에 야누코비치는 친러시아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3년 11월 21일 유럽연합EU과의 경제 협력 추진 백지화 정책 실시를 공표했다.

이에 대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수도 키예프에 있는 ‘독립광장’(우크라이나어로 ‘유로마이단Euromaidan’)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유럽연합에 편입되길 희망했던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야누코비치는 EU와 다시 협상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번복을 하고 반정부 시위를 막기 위한 '반시위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에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시위가 격화되었고 정부는 강경 유혈 진압으로 대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축출되어 키예프를 떠나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건’의 결과 여당도 야누코비치에게 등을 돌렸고, 국회는 인권침해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탄핵을 가결해 그는 대통령직을 상실하였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검찰은 야누코비치와 측근들을 직권을 이용한 공금 횡령 및 탕진혐의로 기소하였으며 2015년 1월에는 인터폴에 의해 국제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야누코비치는 현재 러시아에 망명 중이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정세
유로마이단 사건과 야누코비치 축출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 조기 대선을 결정하였고, 한때 전 총리이자 야당의 지도자인 율리아 티모셴코Yulia Volodymyrivna Tymoshenko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2014년 5월에 치러진 대선의 승리는 54.7%의 지지율로 당선된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에게 돌아갔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포로셴코는 ‘쵸콜릿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크라이나 7위의 재벌로서, 정치적으로 중도 성향을 보이고 있어 분열된 우크라이나를 통합시킬 수 있는 인물이고 외교적으로는 친서방적 성향으로 러시아로부터 독립적인 우크라이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대통령으로 평가받은 것이 선거에서 승리한 요인으로 분석되었다.

하지만 포로셴코는 친러 성향의 분리 독립 운동에 대응한 평화 회복 문제와 침체에 빠진 국가 경제 회복 문제 등 주요 현안에 대해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야누코비치를 축출한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건으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우크라이나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요소로 회자되고 있다. 이미 EU와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적 이해 관계가 맞물린 흑해의 요충지 크림반도(크림 자치공화국)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와의 합병을 선택했고, 이후 도네츠크와 루칸스크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도 격화되는 등 쟁점으로 부상해 있다.

2. 정치 및 행정


헌법과 정치 제도
우크라이나 헌법은 1991년 12월 독립 이후 소비에트연방 시기의 우크라이나 공화국 헌법을 일부 자구만 수정하여 적용해 오다가 1996년 6월 28일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2004년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다소 축소한 헌법 개정안이 채택되었으나 2010년 10월 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는 이 헌법개정안에 대한 위헌 및 무효 판정을 내림으로써 1996년의 헌법 체제로 다시 복귀하였다. 우크라이나 헌법에 의하면 정치체제는 공화국이고 3권 분립과 법치주의를 골자로 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를 인정한다. 국적은 단일국적으로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헌법이 명시하는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러시아어 및 기타 민족 언어의 자유로운 발전과 사용 및 보호를 보장하고 있다. 또 우크라이나 헌법은 영토 내 외국 군대 기지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단, 영토 내에 이미 주둔하고 있는 기존 외국 군대는 국제조약에 따라 결정되고 의회에서 비준하는 내용의 임차 조건 하에서 당분간 계속 주둔이 가능하다.

행정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은 국가원수 겸 행정수반이다. 직접 및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고 1회 이상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권한은 국가 대표로 외교 활동을 수행하며, 조약을 체결하고 외교 사절을 파견하거나 접수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투표를 공고할 수 있으며, 의회해산 및 특별선거 실시를 공고할 수 있다. 국회의 승인을 받아 내각의 총리를 지명할 수 있으며, 내각 및 지방주지사, 검찰총장, 헌법재판소 위원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반독점 위원장 등 주요 기관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또한 대통령은 국가 안보·국방회의 의장 및 통수권자로서 주요 지휘관을 임명할 수 있으며, 전쟁 선포 대의회를 제안하고, 계엄을 선포하며, 군대 동원과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통과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은 임기 중 탄핵에 의해서만 해임될 수 있으며 해임 시에는 신임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총리가 권한을 대행한다.

우크라이나 내각(Cabinet of Ministers)은 행정 권한 수행 기관 중 최고 기관이다. 헌법상 의회의 통제하에 있으며 대통령과 국회 모두에 책임을 진다. 총리, 제1 부총리, 부총리를 포함하여 총 3명의 총리를 둔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거나 총리 사임 및 국회의 내각 불신임시 내각 전원이 사퇴한다. 단, 신新내각을 구성해야 하는 법정 시한인 60일 이내에 한해서 신내각이 구성될 때까지는 업무를 계속 수행한다. 각 부처 및 기타 중앙 행정기관의 재조정이나 해체는 총리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한다.

입법부
우크라이나 국회는 단원제 최고회의(Verkhovna Rada of Ukraine)이며 정원 450명에 임기는 4년이다. 선거는 4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정기 선거와 국회가 조기 해산될 시 60일 이내 대통령이 소집하는 특별 선거로 구분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국회는 1997년 선거법을 개정하여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지역구에서 225명을 선출하고 225명은 전체 투표자의 3% 이상의 지지를 얻은 정당에게 배분한다. 정기회기 개시일은 2월 첫째 화요일과 9월 첫째 화요일이다.

우크라이나 국회는 법률의 제정, 국가 예산안 심의 및 채택, 국정 감독에 관한 권한을 가지며 내각의 업무 계획 승인 및 채택, 국내와 대외 정책 원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또 국제조약을 비준하며,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전쟁 선포 및 강화 조약 체결, 대외 원조 공여 및 접수, 군대 해외 파견 및 외국 군대 주둔을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 탄핵, 총리 인준, 주요 정부 기관 인사의 임명동의권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개정안 발의와 대통령의 계엄 및 비상사태 선포를 사후 승인할 수 있다. 국회는 내각 불신임권을 가지고 있다.

정당제도 및 현황
우크라이나에는 독립 직후부터 특정 지역 및 계층을 중심으로 한 군소 정당들이 출현하여 수많은 정당이 난립해 있다. 이들은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편승하여 결성된 각종 사회·인권단체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지역당이 대부분이다. 전국적 영향력을 가진 정당은 소수에 불과하며, 우크라이나 정치에서 정당이 차지하는 역할은 아직 미비하다. 지역구 직접선거에서 많은 의원이 당선되더라도 정당 비례대표제에 의한 득표율이 전체 유권자의 3%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 불가능하다. 주요 정당으로는 포로센코블록(여당), 국민전선, 야당블록, 자조당, 조국당 등을 들 수 있다.

사법부
우크라이나의 대법원(Supreme Court)은 일반법원이 최고심 법원으로 20명의 판사로 구성된다. 대통령, 국회, 판사협회, 변호사 협회, 고등 법률대학 및 기관 등이 각각 3명을 임명하고, 검찰협회가 2명을 임명한다. 일반 고등법원(Regional Court)은 24개 주, 크림 자치공화국, 키예프, 세바스토폴 등 지역별로 설치되어 있다. 특별 고등법원은 특별법원의 최고심 법원이다.

우크라이나의 지방법원(District Court)은 행정구역별로 설치되어 있다. 그 외 국내외 상거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상사중재원(Commercial Arbitration Board)이 있다.

헌법재판소 판사는 대통령과 의회, 법관회의가 각 3분의1씩을 임명하며 총 18명이다. 임기는 9년이며 연임은 불가하다. 대통령, 국회, 대법원 등이 제소하는 헌법 관련 사항을 심의 결정하고 대통령 탄핵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3. 경제


경제 개관
우크라이나는 603,550㎢에 달하는 광활한 국토의 80%가 경작이 가능하고, 90여 종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인구는 4,403만 명에 달하는데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소비에트연방 시대의 우크라이나는 연방의 분업 체제 가운데에서 철강, 조선, 항공우주 산업 등 주요 전략 산업을 담당했다. 이러한 산업 기반은 독립 후 우크라이나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연방 당시 전체 소련 산업 생산의 20~25%, 군수산업의 30~40%를 생산했다.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철광석 및 석탄을 활용하기 위해 주요 군수산업을 우크라이나에 집중 배치하였다. 그 결과 1991년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 공업은 전체 소비에트연방 GDP의 46%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주항공, 조선, 탱크 등 우크라이나 소재 군수산업은 전 소비에트연방 군수품의 25~30%를 생산했다. 기타 철강, 기계화학 공업 등 전략산업의 집중 육성으로 정유, 비철금속, 시멘트, 비료, 건축자재, 자동차, 공구류, 화공설비, 전기제품, 섬유, 화학섬유, 의료기기가 발전했다.

우크라이나는 전통적으로 항공과 조선, 국방산업이 발달되어 세계 7대 항공 및 8대 우주강국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석탄과 철광석 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바탕으로 한 중공업이 국가 핵심 산업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유럽의 최대 곡물 생산 국가이자 4천만 명이 넘는 인구의 커다란 내수 시장을 보유하고 있을 뿐더러 대륙을 통해 러시아와 유럽을 잇고, 흑해와 아조프 해를 배경으로 한 해양 물류도 활발하여 CIS 지역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성장 잠재력이 큰 시장으로 각광을 받아왔다.

자원 현황
주요 매장 자원은 철광석, 망간, 티타늄, 니켈, 흑연 등으로, 이 광물들은 세계적인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석탄은 456억 톤, 철광석은 259억 톤, 망간은 23억 톤에 이른다. 또 천연가스가 1조 1천억㎥, 석회석이 12억 5천만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타늄, 수은, 유황, 화강암, 고령토 외에도 희토류, 금, 다이아몬드, 형석, 베릴륨, 리튬, 납, 아연, 중정석, 인회석, 인광석 등 희소 광물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원유 및 천연가스는 국내 생산이 되고 있으나 국내 소비 충당에 태부족이다. 2008년 기준, 원유는 총수요의 19%에 해당하는 420만 톤을 국내에서 생산했으며, 천연가스는 26.5%에 해당하는 201억㎥를 국내에서 생산했다. 흑해 대륙붕에서 원유 탐사를 추진하고 있으며 내륙 지역에서는 천연가스의 일종인 셰일 가스(Shale Gas)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경제 정책
우크라이나는 국가 재정의 악화로 인해 받아들인 국제통화기금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관리 체제의 조기 극복 및 경제 회복을 위해 유럽연합EU, 러시아 등과의 경제 협력 강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국제통화기금의 권고 사항 이행을 통해 제도적 개혁에도 주력하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으로의 통합을 최고 국정목표로 설정하고, 통합의 일환으로 2017년 유럽연합과의 협정 체결을 타결했다. 그 밖에 물가 및 환율 안정화에 신경을 쓰고 있고, 재정 지출을 축소하고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해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국내 산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다양한 영역에서 산업 육성 정책도 펼치고 있다.

주요 산업
2010년도 기준 우크라이나 산업구조는 농·임업이 8.2%, 제2차 산업이 29.4%, 제3차 산업이 62.4%이다. 광업 및 제조업이 75.9%를 차지하는데 광업은 에너지광물이 12%, 제조업이 63.1%, 유틸리티 산업이 24.1%이다. 2010년도 기준으로 제조업에서는 철강산업이 22.5%, 석유화학산업이 6.4%였으며 목재가공업은 0.6%, 기계산업이 10.1%, 섬유 산업이 0.5%, 식품가공업이 12.8% 등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철강, 우주, 항공, 조선 분야 산업은 세계 10위권이다. 우크라이나는 농업가공 산업과 정보·통신 산업을 육성하고 있으며 에너지 절약과 기술 집약적 생산을 위해 기계공업을 육성하고 있다. 또 수입대체 제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비효율적인 낙후 산업은 폐쇄하고 있다. 한편 산업 현대화 및 에너지 효율화 산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최근 경제 현황
우크라이나의 최근 경제 동향은 대내외 여건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여 왔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GDP은 2009년 -14.8% 성장에 머물렀다. 2010~2013년에 걸쳐서는 1~2% 대의 완만한 성장기조로 전환되었으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동부지역 분쟁에 따른 정정 불안으로 2015년 경제성장률은 -9.9%를 기록했다. 이후 동부 지역 분쟁이 다소 진정되어 경제 여건이 호전되면서 2016년에는 다시 플러스 성장세로 전환하여 완만한 성장세를 타고는 있지만 여전히 정정 불안 등의 요소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IMF 기준으로 2017년 우크라이나의 명목상 국내총생산(GDP)은 1,040억 달러이고 명목상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49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4. 사회와 문화


민족 구성과 인구
우크라이나는 오랜 역사에 걸쳐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온 나라이다. 그런 결과로 100여 개가 넘는 민족들이 우크라이나 내에 섞여 있으며, 이들 소수 민족 중에서는 러시아인, 폴란드인, 불가리아인 등이 많은 편이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슬라브계 민족 중에서 키가 큰 편에 속하고, 흑갈색 머리털과 같은 색깔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피부도 흰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은 우크라이나계 77.8%, 러시아계 17.3%, 기타 소수민족(벨라루스계, 몰도바계, 크림 타타르계, 불가리아계 등)이 4.9%이다. 크림 타타르, 유대, 루마니아, 몰도바, 벨라루스,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그리스, 아르메니아, 집시, 독일, 아제르바이잔, 가가우스, 우즈베키스탄, 리투아니아, 카자흐, 체코, 슬로바키아, 고려인 등 130여 개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4,403만 명으로 유럽 내에서는 제5위이며, 전 세계적으로 보면 제32위이다. 우크라이나 외교부 통계에 따르면 해외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은 약 1,769만 명이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수인 1,009만 명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다음으로 미국에 223만 명이 카자흐스탄Kazakhstan에 139만 명, 벨라루스Belarus에 131만 명이 각각 거주하고 있다. 또 캐나다 107만 명이, 폴란드 85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루마니아에도 50만 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지역에도 다수 거주하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에 15만 명, 브라질에 10만 명 등이 거주하고 있다.

소비에트연방 시절 ‘여성 완전고용 달성’ 목표에 따라 우크라이나에선 여성의 교육 수준 및 사회활동 참여가 매우 활발하다. 여성의 학위 취득률은 72%로 남성보다 우위를 점하며 전체 취업 인구 중 여성 비율도 52%나 된다. 여성 취업률은 80%로 취업여성 중 43%가 고등교육 이수자로, 고등교육 이수 남성 34%에 비해 매우 높다. 정년인 55세 이후에도 취업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으며 중소기업의 30%를 여성이 운영한다. 다만, 여성이 고위직에 진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일반 직종의 급여 수준도 남성의 80% 수준이다. 독립 후 약 40만 명의 여성이 구직을 위해 해외로 이주했다.

언어와 종교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나 벨라루스어와 같은 동슬라브계 언어로, 키예프에 있던 9세기 슬라브어와 가장 근접한 언어이다. 1987년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 황제에 의해 지배를 받던 제정 러시아 시대 때는 우크라이나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우크라이나어 사용은 금지되었으나 우크라이나어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 보존되어 오다가 1991년 독립 후에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서부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을 순수한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대부분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 동부 지역에는 약 1,000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도 서부 지역 우크라이나인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약해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종교 분포를 보면 먼저, 모스크바 관구의 우크라이나 정교가 50%, 키예프 관구의 우크라이나 정교가 14.9%, 우크라이나 동방전례 가톨릭은 8%이다. 기타 키예프 교구, 모스크바 교구에 속하지 않는 정교는 2.8%이다. 이 외에도 개신교, 유대교, 무교 등이 24.3%에 이른다. 소비에트연방 체제하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거의 없었는데 독립 이후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 중에는 정교를 중심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여타 종교 및 선교 활동도 활발해 지고 있는 상황이다.

언론과 교육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후 각종 언론사가 무수히 창간되었으나 대부분의 신규 언론사들은 빈약한 재정과 경험 부족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노정했다. 2010년 기준으로 22,557개의 신문·잡지사가 있으며 이 중 2,354개 사가 전국적 규모이다. 1,096개 공중파 방송사가 등록되어 있는데 이 중 국영 텔레비전과 국영 라디오로는 42개 사가 등록되어 있다. 주요 신문으로는 최대 종합일간지인 팍티 아이 코멘터리(Fakty I Komentarii) 외에 세고드니아(Segodnia), 호로스 우르라이니(Holos Ukrainy), 유드랴도비쿠리어(Udryadoviy Kurier) 등이 있고, 잡지로는 이코노미카 우크라이니(Economika Ukrainy), 폴리티츠나 둠카(Politychna Dumka), 폴리티카 차스(Polityka Chas) 등이 있다. TV방송사로는 국영 1채널(UT-1), 국영 2채널(UT-1)과 스튜디오 1+1, 인터(INTER), 아이씨티브이(ICTV) 등이, 라디오 방송으로는 국영 라디오 방송인 UR1, UR2, UR3 등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교육은 소비에트연방 체제의 평등 이념에 따라 전반적인 교육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경제난에 따른 교육 재정의 어려움으로 상당수 학교가 폐교되었는가 하면 직장을 이탈하는 교사들이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소비에트연방식 교육 학제에서 미국식 학제로 교육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교육 개혁을 실시 중에 있으며, 일부 초·중·고와 대학에서는 이미 미국식 학제를 시행 중이다.

문화 예술
중세의 우크라이나 문학 작품은 12세기의 이고리원정기Slovo o polku Igoreve 같은 중세 슬라브의 연대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독자적인 문학은 우크라이나의 소크라테스로 불리는 18세기의 흐리홀리 스코보로다Hrihorli Skovoroda가 쓴 시와 철학에서부터 출발한다. 19세기 작가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는 농노 출신의 타라스 셰프첸코Taras Shevchenko는 우크라이나어로 된 문학 작품을 쓴 최초의 대중적 작가이다. 셰프첸코는 우크라이나 문학의 황금기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20세기 초 이반 프랑코Ivan Franco는 소설과 시, 드라마, 철학과 동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다작으로 유명하다. 소비에트연방 통치 당시 많은 우크라이나 작가들이 소련의 억압과 지배에 대한 고통을 주제로 시를 썼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가가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사망한 바실 스투스Vasyl Stus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음악에 흔히 쓰이는 악기는 현악기인 코즈바Kozba인데 기타와 비슷한 악기이다. 16∼17세기에 코즈바를 연주했던 음유 시인들을 코브자르Kobzar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연주한 카자크 영웅들에 관한 노래가 우크라이나 음악의 기원이다. 음악의 내용은 백 년 이상 된 서사시와 카자크인들의 업적을 찬미하는 발라드 서정시인 두마스Dumas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45개의 현으로 된 반두라Bandura라는 악기가 코즈바를 대체하게 되며, 반두라 성가대가 유행함에 따라 결국 반두라는 우크라이나의 상징적인 악기로 대두되었다. ‘카자크 바로크’라고 불리는 17∼18세기 우크라이나의 문화 전성기에는 보르트냔스키Bortnyansky, 베레조프스키Berezovsky, 베델Vedel 등의 우크라이나 클래식 음악가들이 활동했다. 1867년에 초연을 한 네오 르네상스 풍의 중후한 국립 오페라 하우스(National Taras Shevchenko Opera House of Ukraine)가 오페라, 발레 등 우크라이나 공연 예술의 중심지이다.

우크라이나의 중세시대 미술은 종교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 모자이크, 성상(Icon)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중에서도 성상이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미술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카자크 집단의 부흥시기에는 민족주의를 주제로 한 종교 미술이 성행했으며, 이를 위한 전문 미술학교도 등장했다. 20세기에는 현실주의의 등장과 함께 전통적인 성상과 비잔틴 풍이 조화된 보이축(Mykhailo Boichuk)의 네오비잔틴 양식 등 실험적 작품이 성행했다.

5.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


정무관계
한국은 1991년 12월 30일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승인했고 1992년 2월 10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에 주駐우크라이나한국대사관이, 1997년 10월에는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양국 간에는 1994년 과학기술협력협정이 체결된 이래 외교, 정보, 무역, 투자, 사증, 항공, 원자력, 관광,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협정이 체결된 바 있다. 또한 양자 간 협의체도 정책협의회와 무역공동위원회, 과학공동위윈회 등이 개설되어 운영 중이다.

경제관계
한국과 우크라이나 양국 간의 교역에서 한국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흑자를 기록하였다. 특히 2008년도에는 양국 간 교역 규모가 26억 달러였는데 9억 5천만 달러의 흑자를 냈다. 그러나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불안정해지면서 2010년까지 교역량은 15억 달러로 격감하였으며 6천 6백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하지만 2012년은 19억 달러의 교역에 3억 9천만 달러의 흑자를, 2013년에는 10억 달러 교역에 1억 8천만 달러의 흑자를 내다가, 다시 2014년에는 9억 8천만 달러 교역에 3억 6천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대對우크라이나 수출에 있어 주요 품목은 자동차 및 차량부품이 대종을 이루고 있으나 TV,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등 가전제품 및 특수합금철, 의료용 전자기기, 플라스틱 제품도 수출 증가세로 교역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입 품목은 강반제품, 합금철, 중후판 등이며 2008년부터는 사료용 곡물, 비철금속 제품 및 정밀화학 원료, 무선통신기기 부품 등도 새로운 수입품목으로 추가되었다.
한국의 대對우크라이나 투자는 주로 자동차, 이동통신, 교환기, 가전제품 판매 등이 주종을 이룬다. 현재 우크라이나 내에는 한국의 현대·기아 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종합상사 및 현대 로템, 영산코퍼레이션, 대우 인터내셔널 등 20여 개의 지역 상사가 활동 중이다.

양국 간 협력사업
한국 정부는 2008년과 2009년에 우크라이나 정부와의 협조 하에 한국의 경제 발전과 에너지 정책 개발 경험을 우크라이나와 공유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경제 발전과 에너지 전략 수립에 기여하는 지식공유사업을 실시했다.

또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협력사업도 벌여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지난 1991년 우크라이나에 지원 사업으로 연수생 초청 사업을 소규모로 실시하였다. 이후 기자재 지원 사업과 봉사단원 파견 사업 등 주로 인력 협력 사업을 위주로 협력 사업을 추진했다. 2005년 10월 한국 국무총리의 우크라이나 방문 시에는 무상원조 및 기술 협력 협정(Agreement on Grant Aid and Technical Cooperation)이 체결되어 체계적인 협력 사업 기반을 구축했다.

문화 관계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양국 간의 문화 교류 활동도 꾸준히 지속해 오고 있다. 2006년 이후부터 학술 교류 대회, 고려인 문화 축제, 한국영화제, 친선 음악회 등의 행사를 개최 또는 지원해 왔고, 한국과 우크라이나 간의 친선 협회도 결성해 운영 중이다. 그밖에 키예프 국립대 동양어대학, 키예프 국립 외국어대, 키예프 국제대, 클로브스키 외국어학교, 동양어 특수학교 등에 한국어 교육 과정도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내의 고려인 및 재외국민
1950년대부터 우크라이나 내 고려인들은 유학이나 직장 이동 등으로 우크라이나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이주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이 계절 농업을 목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 국적 고려인은 12,711명이며, 타 국적 고려인을 포함하면 약 3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 전 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 각 지역별 고려인협회, 도라지 무용단 등 20여 개의 동포 단체가 결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은 2015년 기준 392명이다. 우크라이나 주재 상사와 개인 사업 때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국민은 약 220여 명이다. 그 외 선교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국민이 100여 명, 유학생이 40여 명이며, 대사관과 코트라KOTRA(Korea Trade-Investment Promotion Agency) 등 정부 기관 종사자가 약 40여 명이다.

우크라이나와 북한의 관계
우크라이나는 북한과 1992년 1월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관을 1992년 10월에 개설하였다가 1998년 1월에 철수했다. 북한과 우크라이나는 여러 가지 협정을 체결했는데 과학기술 협정과 무역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했고, 영사 협약도 체결했다. 또 무역·경제 및 과기협력 정부 간 공동위원회 설립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외교부 간 정례협의 개최 의정서, 항공 협정 등을 체결했다. 또 2003년 10월 북한 중앙재판소 법률 대표단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우크라이나 법무장관과 민사 및 형사 법률 공조조약을 체결했다.

2010년 북한과 우크라이나의 교역량 중 북한 기준 수출액은 2백 5십만 달러였고 수입액은 2백 7십만 달러였다. 양국 간의 교역 액수는 미미한 수준이다. 지속적으로 수·출입되는 특정 품목은 없으며 특히 대對북한 수출이 대폭 격감하고 있는 추세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북한으로부터 전체 수입의 45%를 차지하는 천연탄산 마그네슘을 주로 수입하고 동 및 동합금, 당밀 등을 수출하고 있다. 2011년 9월 현재 북한과 우크라이나 간 현재 상호 투자는 일어나고 있지 않다.

1997년 8월 우크라이나는 대북 식량지원을 결정했으며 1998년에 80만 달러 상당의 식량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원된 식량은 총 1,000톤이며 지원 품목은 밀 500톤, 기타 잡곡 200톤, 동물유 100톤, 육류 100톤, 설탕 100톤 등이다. 1999년에도 밀 15만 달러 상당과 육류 및 설탕 24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는 식량 원조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수송료 부담에 대한 양측의 이견으로 무산되었다.





지방 정부와 크림 자치공화국 문제
우크라이나는 오블라스티Oblast라고 불리는 24개 주와 크림 자치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와 크림 자치공화국의 수도 세바스토폴Sevastopol은 특별 지위를 갖는다. 각 주 및 군대 등의 행정 권한은 각 지방 행정부에서 수행한다. 지방 행정부의 직원은 지방 행정부장이 임명하며 지방 행정부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방 행정부장은 대통령 및 국회에 책임을 진다.

크림 자치공화국은 인구의 70%가 러시아인으로 1954년에 소비에트연방에서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행정적 소유가 이전된 후 우크라이나 영토로 편입됐다. 크림 자치공화국은 크림 국회에서 채택되고 우크라이나 국회에서 승인되는 자체 헌법을 보유할 수 있다. 크림 국회 및 내각의 제반 조치는 우크라이나 헌법 및 법률을 위배할 수는 없다.

그런데 2014년 국가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친유럽과 친러시아로 국론이 분열되는 와중에, 친러시아로 정책 선회를 했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로마이단Euromaidan 시위 사건으로 축출되어 러시아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러시아 성향을 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의 움직임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크림 반도에 위치한 크림자치공화국이 독립 선언을 하고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정한 사건은 우크라이나의 기틀을 뒤흔든 사건이 되었다.

크림자치공화국은 원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해 있었으며 크림 타타르족의 자치 공화국이었다. 그러다가 1944년 크림 타타르족이 강제 이주되면서 크림 주로 격하되었고, 1954년에는 페레야슬라프 조약 300주년을 기념하는 우호의 표시로 소련이 크림 주를 우크라이나에 넘기게 되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크림 주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자치 공화국으로 인정을 받았다. 크림 자치 공화국의 수도는 심페로폴이며 세바스토폴 특별시를 제외한 크림 반도의 모든 지역을 관할한다. 우크라이나어가 거의 쓰이지 않고 대부분 러시아어가 사용되며 크림 타타르어도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편입 이후 크림 자치 공화국은 1992년 완전한 독립을 위한 개헌안을 채택했다가 그해 6월 중앙정부와의 합의를 통해 우크라이나 존속을 유지한 바 있다. 하지만 2014년 키예프에서 시위 사태에 이어 친서방 임시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던 크림반도에서는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특별시가 2014년 3월 11일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6일 주민 투표를 통하여 러시아와의 합병을 추진하였다. 3월 18일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합병 조약, 3월 20일 러시아 연방 하원의 비준, 3월 21일 러시아 연방 상원의 비준에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종 서명함으로써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크림공화국은 2014년 3월부터 사실상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 상태에 있으나 국제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여겨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은 이 합병을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엔 총회는 2014년 3월 27일 캐나다, 코스타리카, 독일, 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주도로 제출된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유엔 총회 결의 68/262)을 통과시킨 바 있다. 크림공화국의 독립 선언 및 러시아 합병 사태 이후 도네츠크와 루칸스크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 움직임도 가속화되어 정부군과 친러시아 반군 간에 교전이 이어지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