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상 | 3. 인격적 유일신의 존재는 논증될 수 있을까

[철학산책]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이제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뜯어고치고 신도(神道)를 바로잡아 만고의 원을 풀며 상생의 도(道)로써 선경의 운수를 열고 조화정부를 세워 함이 없는 다스림과 말 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교화하여 세상을 고치리라.” (『도전』 4:16:2~7)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틀 안에서 서구의 전통적인 신관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무슨 문제로 변형되었는가’를 앞에서 밝혀보았을 뿐이지, 완전한 인격적 유일신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째든 인격적인 유일신은 최고의 존재이면서 우주자연을 떠나 있는 초연한 존재가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역사해야 한다는 사실, 즉 우주자연의 진행과정과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 삶의 존엄한 가치문제(행복, 선, 도덕 등)와 관련해서는 완전한 인격적 유일신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좋지 못한 상황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질병, 지진, 폭풍, 홍수와 같은 자연재앙과 인간의 야수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잔악성 때문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다. 전지하고 전능하며 전선한 인격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인간이 왜 그런 고통과 불행을 겪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합당한 변론은 가능한 것일까?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믿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악(惡)으로 인해 몹시 난처한 입장에 직면하게 된다. 즉 이들은 이와 같은 불행과 고통이 자연력과 타인의 수중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설득력 있는 변론을 마련하기가 꽤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세상에 만연해 있는 악은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명백히 반증(反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한 인격적 유일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무신론(Atheism)이 등장한다. 무신론은 이성의 힘으로 탐구해낸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완전한 인격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반면에 유신론은 무신론의 입장을 반증하는 사례를 들면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변증하는 논변을 펼친다. 특히 중세기에는 인격적 유일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인 논증과 우주론적 논증,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인 논증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1) 인격적 유일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의 논변


무신론자들이 완전한 인격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대략 세 관점으로 요약하여 변론해볼 수 있다. 첫째, 인류가 겪는 고통과 악은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 둘째, 우주자연은 선(善)을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물리법칙에 의해 그렇게 되어간다는 것, 셋째,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단순히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통과 악은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견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전쟁, 살인, 재난, 기아 등과 같은, 선(善)이 아닌 고통과 악(惡)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상을 창조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계기가 된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좋지 못한 것들을 총칭하여 우리는 악으로 표현하는데, 악은 자연적인 악과 인위적인 악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적인 악에는 태풍, 지진, 홍수의 범람, 전염병 등과 같은 것들이고, 인위적인 악은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 외고집 등에서 비롯되는 투쟁, 가난과 억압, 전쟁 등과 공포와 심적인 부조리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들이다.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자연적 재해로부터 심각한 고통을 받거나 혹은 나쁜 사람들로부터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이 세계는 비도덕적이고 질서와 선이 지배될 수 있도록 창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재해로 인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행이든, 인위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난과 고통이든, 이것들은 선의 다른 모습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악이다. 인류가 보다 안전하고, 질서 있고, 정의가 실현되고, 보다 나은 가치실현과 이상적인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악들은 분명히 극복되고 저지되고 변형되어야 할 것들이다.

자연적인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이러한 고통과 악을 인격적 유일신이 제거해주지 못한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이들을 제거하고 극복해내야만 할 대상이다. 이는 인간이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사물들의 존재법칙과 질서 등을 탐구하여 알고, 이를 교육함으로써, 홍수로 인한 범람과 지진 혹은 여러 가지 질병 등과 같은 자연적인 악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삶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위적인 재앙이나 불행에 대하여서도 보다 철저한 교육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 있는 것과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왜 도덕적으로 옳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깨우치고 인격도야를 함양하게 하여 악을 선택하지 않고 보다 선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자연은 최고의 인적적인 유일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고, 보다 가치가 있고 선한 세계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특히 인간이 타고난 자유의지도 악을 지양(止揚)하고 선을 선택하여 이 세계를 보다 질서 있고 선한 세상을 만들도록 신이 인간에게 특별히 부여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유의지의 선택과 능력에 따라 악을 위해 행동할 수도, 선을 위해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논의된 선과 악, 가치(價値)와 비가치 등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기억에 근거한다면, 가치의 실현과정에서 기존의 가치보다 높은 수준의 가치가 실현될 때 기존의 가치는 높은 수준의 실현된 가치에 비해 가치가 없는 악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선의 실현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선보다 높은 수준의 선이 실행되면 기존의 선은 높은 수준의 선에 비교될 때 악으로 떨어진다. 왜냐하면 선과 악, 가치와 비가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신론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악이나 비가치가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면, 가치 있고 선한 세계의 실현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의지를 사용하여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할 과정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우주자연은 선(善)을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물리법칙에 의해 그렇게 되어간다는 견해
무신론자들의 논변에 의하면, 절대적인 인격적 존재를 믿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단지 나약한 인간으로서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절대적인 인격자로서의 유일신이 실재한다고 믿는 환상에서 깨어나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자연의 자연법칙에 따라 창조되었고, 이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리법칙에 의한 설명은 오늘날 천체의 운행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의 존재 및 삶의 여러 영역들에까지도 적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물리학과 생물학의 진보, 기계 공학과 컴퓨터 공학 등의 급속적인 진보는 앎의 영역을 더욱더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신성한 신의 영역이 머지않아 속속들이 밝혀질 것이고, 이에 신에 대한 믿음의 영역은 앎의 영역으로 바뀌어 신앙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식의 탐구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우주자연의 세계가 언젠가는 앎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는 정보와의 싸움이고 첨단 과학적 지식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 시대로 각광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은, 현 시점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모든 것이 신이 예정한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인간들이 겪고 있는 모든 것이 절대적인 인격자가 안배해 놓은 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항변한다. 즉 라이프니쯔의 “예정조화설”이 시사하듯이,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세계는 결국 신이 목적한 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항변에 대하여 “무신론자”들의 공격 또한 만만치 않다. 즉 종교를 가진 자들은 지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신의 섭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새로운 과학적 지식에 의해 발견되는 진리들에 대하여서는 새로운 변명들만 늘어놓는다고 공박하면서, 무신론자는 유신론자들을 “변신론자(辯神論者)”들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믿음의 영역이나 종교적인 영역에 관한 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간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다. 증거의 문제와 논리적인 설명의 문제는 분명히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어떤 종교적인 관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으며 또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으로 고통과 불행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도덕이나 예술, 시, 소설, 심지어는 과학적 진리의 발견들까지도 완전한 인격자의 믿음으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서 신앙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이는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인의 소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라면, 이는 매우 위험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능력 부족이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도 위험스런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유물론적 사고에 완전히 물들어 있거나, 기계론적 자연관을 강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래서 자연 과학의 객관적 검증만이 인식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는 “이성”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는 한 완전한 인격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거부할 것이다.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단순한 ‘상징’에 불과하다는 견해
종교적인 진리에 대해 참과 거짓을 따지는 문제는 철학과 논리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에 의해 수십 년간이나 논의되고 분석되어 왔다. 대체로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입장에서는 종교적인 관념을 옹호하는 편에 있고, 논리학이나 실증과학의 입장에서는 그런 진리를 반대하는 편에 있다고 본다.

최근에 실험과학 또는 검증과학을 신봉하는 논리분석 철학자들은 경험 과학적 사실들이 객관적으로 검증되면 진리의 영역에 들어오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그들은, 형이상학적 명제와 신학적 명제들이 사실에 바탕을 둔 검증될 수 있는 진술들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폐기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언어들이란 신비적인 것이어서 진리의 가치가 없는 것이고, 특히 종교적인 진술들이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의미와 호소력을 상실한 ‘상징적인 언어 내지는 감탄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서 지구촌의 사람들은 세계 대전(大戰)이라는 어마어마한 참극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자신의 집단이 믿고 있는 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종교전쟁과 같은 비극과 민족 간의 갈등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것을 지성인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은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개념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와 같은 절대적인 유일신은 철학자들에 의해, 마치 정원을 걷고 있는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인 신, 동양의 전제 군주라는 신, 언젠가는 자기 민족을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구제하리라는 구원자로서의 신, 사람들이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가려서 의지에 따라 벌하는 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즉석에서 만들어냈던 신처럼, 나약한 인간들의 “의존 감정”에 의해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쯤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불안과 절망을 강조하고 부정과 허무의 개념에 탐닉했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부각된 바 있다.

니체(F. Nietzsche)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초인”을 내세웠듯이, 완전한 인격적 존재의 유일신은 죽은 것으로 판정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자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인들에게서 각 분야를 관장한다고 숭배된 인격신이 사라졌듯이, 힌두교의 브라만이 그러하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초월적인 인격신이 인간사회에서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인간의 의존 감정에서 나온 “완전한 인격자”라는 관념은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기 때문에, 먼 미래의 인간들은 다시 새로운 절대자의 개념으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무신론의 주장을 반증 (反證)하는 유신론


유신론에 관하여 탐구할 때, 조심스럽게 기억해둬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신에 대하여 지성으로 알고 있는 ‘관념’과 지성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차이가 있겠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진술이 단지 인간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 관념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 전적으로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는 ‘신이 절대적으로 신성한, 전체를 포괄하는, 최고의 완전한 인격자’임을 전제한다.

신은 완전한 인격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랑의 신이어야 한다. 만일 신이 창조된 인간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만연되어 있는 자연적인 악과 인위적인 악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들을 방치해두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이런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구제할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제하고자 하는 아무런 의지나 행위가 없다면, 정말로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완전한 인격자를 신앙하는 유신론자는, “불협화음”, “위장된 축복”, “최상의 세계”, “죄인”, “도덕적 가치” 등을 들어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신앙과 악의 존재를 조화시키고자 할 것이다.

선과 악이 공존해야 보다 선하게 된다는 “불협화음”의 변론
라이프니쯔의 철학에서 주장된 “예정 조화설”이 시사하고 있듯이, 세상에 고통과 불행을 동반하는 악이 없다면, 아무런 고통이 없고 오직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선은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선하다는 것과 대조시킬 악이 없다면, 경험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선은 선하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암흑의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의 밝음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그래서 전체의 측면에서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선인데, 현실적으로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마치 음악가에게 불협화음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기 위해서 작곡가는 개별적으로 부드러운 음률도 필요하고 그렇지 못한 것도 필요하다. 이렇게 다른 성분의 음률들이 섞여서 전체적인 곡은 마침내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물감과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물감들을 조화롭게 배합하여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고, 이로써 그림의 전체적인 미적 가치가 극대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악한 것들은 선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가치 있고 선한 세계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협화음”의 논변에 대해 고통과 불행의 양(量)과 강도를 과소평가한다는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이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일상의 삶 속에서 행복보다는 불행과 고통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심지어 어떤 종교에서는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은 고해(苦海)의 바다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격자가 인간을 창조할 적에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안으로 아주 적은 고통만을 느낄 수 있도록 창조했더라면 오히려 좋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덜 자주 찾아오는 훨씬 더 적은 양의 고통만으로도 선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선한 것과 조화를 이루는 데에 충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불행은 결국 선을 위한 것이라는 “위장된 축복”의 논변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행을 전적으로 악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인간은 보다 견디기 힘든 어려운 고통을 동반하는 시련을 극복한 후에야 비로소 더 큰 행복과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떤 사람이 맹장염에 걸렸다고 하자. 맹장염을 앓을 때 그는 맹장염에 수반되는 고통들을 매우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고통은 어쩌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경우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미리 알려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맹장염이 걸려도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아마 그는 복막염으로 장(腸)이 다 썩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나간 삶들을 돌이켜 볼 때, 인간은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게 보였던 일이 매우 좋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당면하고 있는 고통과 시련들은 먼 안목에서 볼 때 꼭 악이라고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변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고통으로 위장한 선의 “위장된 축복”에 의거하면, 인간은 고통과 시련을 겪고 난 후에 보다 선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신은, 만일 전능하다면, 보다 힘들지 않고 사소한 시련으로써 보다 많은 선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또한 신은 인간이 먼 훗날의 보다 많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미리 약간의 고통이라는 것을 신호 체계로 고안했다고 하는데, 신은 고통보다 훨씬 더 나은 신호 체계를 왜 개발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마치 마약을 연속적으로 복용하여 고통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죽게 될 수 있는 경우처럼, 인간이 거의 느낄 수 없는 고통이지만 전적으로 마약 같은 악을 동반하는 경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위장된 축복”론을 말하는 유신론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가 어렵게 되거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다.

“최상의 세계”에 대한 변론
만일에 ‘최상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런 세계를 창조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사람들 간의 애정,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용기 및 정의감 등의 도덕적 속성들을 창조의 계획안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도덕적 속성들이 창조된 세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창조된 여러 세계들 중에서 우리가 만든 것이 최상의 세계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창조된 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고통받는 일도 없고, 난관을 겪게 되는 일도 없으며, 요구를 충족시킬 일도 없다면, 모든 것들은 자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통이나 안녕, 욕구나 충족, 용기와 비겁, 정의나 부정의, 행복이나 불행, 옳거나 옳지 못한 것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며, 도덕적 속성들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런 부족한 속성들이 있기 때문에 최상의 세계란 개념은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상의 세계”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 우리는 본성상의 도덕적 측면들을 개발하고, 도덕적 인간성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강구하게 된다. 따라서 신은 최상의 세계 건설을 위하여 도덕적 속성들도 창조에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세계”에 대한 논변도 그럴듯한 변론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적 속성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불행보다는 자연적으로 겪어야하는 고통과 불행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형용할 수 없는 자연적인 재앙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 인간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거나, 불치병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피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면, 아마 인간은 적어도 자연적인 악과 질병 때문에 생겨나는 악으로부터 고통과 불행을 덜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죄인”의 논변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신은 인간을 마치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창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인격체를 창조하기를 원했고,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존중하려 했기 때문에, 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과 불행의 고난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한 것이다.

이 세계에 고통과 불행이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의지자유를 잘못 사용한 탓이지 신의 탓이 아니다. 즉 민족 간의 종교 전쟁이나 세계 대전에서 빚어진 엄청난 재난과 비극의 원인은 히틀러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나 그들의 명령을 추종하는 자들의 결단과 행위에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악들도 모두 인간이 의지자유를 잘못 사용한 것에 기인한다. 마찬가지로 질병, 빈곤 및 무지에서 비롯되는 자연적인 악들도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이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지상에서 추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자신의 이기적인 방향으로 자유롭게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들을 어떻게 신의 잘못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죄인”의 논변도 “최상의 세계”에 대한 변론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신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었을지라도 이기심 때문에 빚어지는 엄청난 고통을 예방하거나 피할 수 있도록 조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은, 종교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이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와 그의 추종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아 그들이 너무도 큰 재난을 동반할 계획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생각들을 다른 마음으로 돌릴 수도 있으며, 나쁜 마음들을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민족 간의 종교 전쟁이나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은 미연에 방지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도덕적 가치”에 대한 변론
물질적인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인간은 태어나면 성장하다 결국 노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죽음이란 결국 신체를 구성했던 요소들이 흩어지면서 곧 생명활동이 없어지게 됨을 뜻한다. 따라서 좋아하는 운동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다. 문제는 신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지속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있는가이다.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신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그 무엇이 그대로 있어 죽지 않는다고 단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인격자가 있다면,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가진 인격신은, 자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에게 인격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하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심어 주어 신체가 죽은 이후에도 인격적 존재가 영속할 수 있도록 하는 충분한 대책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 대책은 바로 인간이 생명을 갖고 태어날 때 어떤 정신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신체가 파멸될 때 정신성도 동시에 파멸되도록 했다면, 이는 곧 신이 고의로 인간들에게 헛된 욕망과 좌절을 부여했음을 의미할 것이고, 곧 완전한 인격자가 충분한 이유 없이 기만적인 행동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이는 완전한 인격자가 가지는 지선(至善)한 본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는 완전한 인격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아야 마땅할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불멸성을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란 신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고유한 정신성이라고 믿으며, 이것이 자신의 신체가 파괴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생존하게 되는 것임을 주장하게 된다.

정신의 불멸성은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의 가치근거를 설정하고, 이를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물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다. 완전한 인격자는, 완전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도 완전해야 하며,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전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만일 완전한 인격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 그 가치기준으로서 근거를 설정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이러한 도덕적으로 올바른 규칙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하여 그 진리기준을 설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최고로 완전한 가치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장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대표적이다.

그는 확실성의 진리인식에 대한 기준을 탐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완전한 인격자는 인간에게 감각적 지각과 추론의 기능을 부여할 때 인간이 끊임없이 오류 속으로 빠져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세계에 대한 참된 진리인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일 완전한 인격자가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이성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았다면, 이는 완전한 인격자의 본성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인격자를 믿는 자들은 인간에게 타고난 이성의 지각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성능력이 바로 인간에게 부여된 불멸하는 사유실체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타고난 사유실체(정신)의 불멸성에 대한 이러한 논구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실체의 불멸성 자체를 아예 부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격자를 믿는 유신론자는 정신실체의 불멸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무신론자나 기계론자의 경우는 신체의 죽음과 더불어 정신의 활동 자체 또한 모두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신론자의 논변은 출발부터 허사가 되어버린다.

3) 완전한 인격자(신)에 대한 존재 논증


지금까지 필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훨씬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완전한 인격자,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진술이 무신론적 입장과 유신론적 입장에서 어떻게 주장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진술들이 참되게 진술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하여 결말이 나지 않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 보았다.

이제부터는 ‘완전한 인격자(신)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논증한 사례들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러한 논증은, 기하학적 증명이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확실성의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처럼, 전제로부터 결론까지 추리의 과정에 따라서 이해되기만 하면, 완전한 인격자(신)의 존재가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증명의 과정은 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존재론적 논증은 순수한 관념을 가지고 이성의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입증하는 것이고, 우주론적 논증은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추론을 통해 입증하는 것이고, 목적론적 논증은 자연현상의 운동변화를 분석하여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증명한 최초의 철학자는 성(聖) 안셀무스(Anselmus)를 들 수 있다. 그의 존재론적 논증은 앞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경험에 근거한 우주론적 논증만을 소개해볼 것이다.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증명이 있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다섯 가지의 우주론적 논증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학자들이 선호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한다.

안셀무스의 우주론적 증명
서양 중세기에 살았던 성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려질 만큼 대단한 신학자이면서 플라톤의 철학을 고수한 실재론자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당시 그리스도교의 이론과 교리에 대하여, 철학적인 사상과 방법을 동원하여 신앙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정립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학자였다.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라는 슬로건은 안셀무스의 학문적인 기본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굳은 신앙에 기초를 두고서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근거를 따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신앙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우주론적 논증은 사물을 통한 경험적인 증명이라 불린다.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사물들은 무수하게 현존하고 있고 또 소멸하여 없을 수도 있다. 선(善)한 것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것들은 실제로 무수히 많고 또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경험적으로 선한 모든 것들은 ‘자체로 선하게 존재’하거나 아니면 반드시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서 선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자체로 선한 존재나 더 선한 무엇이 존재하지 않으면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선한 것들은 선하게 존립할 수 없게 된다. 선한 것들이 의존하는 이것을 선의 “원인(causa)”이라고 하자.

원인은 그 결과로서 나온 경험적인 선한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의 원인을 찾아 무한히 소급해갈 수 없다. 결국 궁극의 원인, 즉 절대적으로 ‘완전한 선’이 궁극의 원인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선한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선’에 의존해서 선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완전한 선’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선 자체’이다. 이것은 내부에 어떠한 정도(degree)가 허용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의 존재’로 다른 모든 것들을 포괄하고 있다. 경험적인 다른 모든 것들은 이것에 의존해서 생성소멸하게 되며, 또한 이것 때문에 정도를 가지고 존재성을 가지거나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체로 존재하는 선은 바로 완전한 인격적 존재로, 우리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증명
서양 중세 말엽에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생전에 천사와 같은 학자로 칭송되었으며, 사후(死後)에도 위대한 철학자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거의 대부분 아니 오히려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해서 자연과 초자연의 문제, 이성과 신앙의 문제, 보편자와 개별자의 문제들을 체계화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교리를 확립하였고, 스콜라 철학을 절정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 여러 방면의 우주론적 논증을 고안한 신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우주론적 논증의 근본이념은, 모든 물체의 존재근거를 설명하기 위해서 혹은 우주 전체의 존재근거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주자체와는 별개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지만 이성의 추리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논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우주론적 증명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논의된 것을 기초로 해서 다섯 종류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① “운동변화의 원인에 의한 증명”, ② “존재원인에 의한 증명”, ③ “우연성에 의한 증명”, ④ “완전성에 의한 증명”, ⑤ “존재 목적에 의한 증명”이 그것이다.

① “운동변화의 원인에 의한 증명 :
자연적인 모든 것들은 운동변화하고 있다. 이는 반드시 ‘스스로’ 운동변화하거나 ‘다른 것에 의해’ 운동변화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물로 존재하는 것은 ‘자체로’ 운동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운동변화한다. 그런데 ‘다른 것에 의해’라고 말할 때, 그 원인을 찾아서 무한히 소급해 올라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운동변화의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최초의 원인은 운동변화하는 것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내재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운동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의 운동 변화를 일으키는 최초의 원인이다. 이 최초의 원인이 바로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이다.

② “존재원인에 의한 증명 :
현실적으로 존재하거나 생겨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존재하거나 생겨난 “원인(aitia)”이 있다. 존재하거나 생겨난 원인조차도 다른 원인에 의해 존재하거나 생겨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에 원인의 계열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원인을 찾아 무한히 소급해 간다면 끝이 없고, 끝이 없다면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더 이상 소급해 올라갈 수 없는 궁극의 존재원인이 있고, 이로부터 현실적인 모든 것들이 존재하거나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의 존재원인이 바로 신이다.

③ “우연성에 의한 증명” :
우주자연에는 수많은 종류의 것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우연적으로’ 존재하든가 아니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우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경험되는 모든 것들은 생겨나서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잠시의 정지도 없이 변화의 과정을 겪다가 결국은 파멸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우연적이다. 반면에 필연적이란 인과(因果)의 계열을 따르는 존재이다.

만일 무한한 시간의 계열에서 우주자연의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래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전혀 없다면, 현실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현재의 우연적인 것은 과거의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던가 아니면 무(無)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무로부터는 어떤 것도 산출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결국 현재의 우연적인 것은 과거의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하는데, 과거의 우연적인 것은 존재했었을 수도 존재하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다시 우연적인 원인을 설정하게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현재의 우연적인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은 항상 존재했고, 존재하기를 시작하거나 멈출 수도 없는 ‘필연적인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의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결과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게 된다면, 어떤 필연적인 존재가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존재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현재 필연적으로 존재하거나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궁극의 원인에 의해서다. 이것을 신이라 부른다.

④ “완전성에 의한 증명”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완성의 정도(degree)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 정도를 가지는 모든 것들은 덜 완전한 것들로부터 더 완전한 것들에로 소급해 간다면, 완전성의 정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선한 것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더 좋다’의 의미를 분석한다면, 정도에 있어서 ‘더 좋다’의 의미를 소급해 갈 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가장 완전히 좋은 것이 존재해야 하고, 완전히 좋은 것은 자체로 좋은 최고의 선을 전제한다. 자체로 좋은 최고의 선은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정도를 가진 좋은 것들이 모두 이것에 의존하는 가장 선한 존재이다. 이것이 신이다.

⑤ 존재목적에 의한 증명 :
우주자연에서 존재하고 생성 변화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존재목적’이나 생성변화가 도달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산출활동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산출활동은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운동변화의 끝점은 결국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질서 있게 일어나며 완성을 목표로 활동하는 것은 합목적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주자연을 합목적이게 설계한 최고의 절대적인 지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 최고의 지성을 신이라 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증은 우주론적 증명과 같이 자연적인 사물들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출발하지만,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주론적 증명방식은 경험적인 사물들의 가사적(可死的)인 본성과 불멸하는 존재의 필연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목적론적 논증방식은 자연적인 사물들이 ‘계획적인 질서’에 따라 일정한 목적을 향해 운동변화하고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일정한 것을 구성하기 위해 수단들을 동원하여 ‘예견된’ 결과를 가져오게 하면서 달성해야 할 목적을 향해 부분들이 움직이고 있다면, 이 과정은 ‘목적론’이라 부른다.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목적론적 논변을 주창하는 자들에 의하면, 그런 운동과정은 생명체를 가진 자연적인 사물들에게서 전적으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기계론적으로 움직인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목적론적인 이론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논변은, 자신의 주요 저서 『자연학』(ta physica)에서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그는 생물학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목적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원자론자들(atomists)의 기계론적 논변에 대한 반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성을 가진 인간이 어떤 사물들을 제작할 적에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산출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의 생물학적 성장과정 또한 일정한 목적을 향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장하고 있는 것은 성장하는 한에서 어떤 것에서 다른 것에로의 성장함이다. 무엇을 향한 성장인가? … 어떤 목적을 향해 성장한다.” 그래서 개미와 거미 등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들에게서조차도 목적을 위해 유익한 것이 생겨나는데, 나무 잎은 과일을 보호할 목적으로 생겨나고, 식물은 뿌리를 위로 향하여 뻗는 것이 아니라 영양섭취를 위해 땅 속으로 뻗는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유기체의 부분들은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러그러하게 존재하고 또 목적에 맞게 기능하는 것이지, 그러그러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러그러하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맹목적인 “우연” 때문에 사물들이 생겨나고 운동한다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하다. 이는 인위적인 산출방식의 과정을 제시해 보면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어떤 기술자가 사진기를 만들었다고 하자. 사진기의 렌즈는 바깥의 상(像)이 필름에 잡혀 사진이 나오도록 광파를 굴절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 밖의 다른 부분들도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협조하기 위해 수단들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目)도 시각 작용이라는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 그 밖의 신체적인 다른 부분들도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각각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한다. 다시 말하면, 사진기의 많은 부품들은 사진기의 전체적인 목적 실현을 위해 작동한다. 왜냐하면 사진기를 만든 사람은 사진기가 전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부품들을 그렇게 배정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눈의 시각작용이든 심장의 박동이든 신체 전체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작동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구성하는 부분들도 전체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심장, 뼈, 살, 피, 눈, 손 등이 그렇게 배열되어 있고, 이 부분들은 전체의 기능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들로서 작동한다. 사진기의 존재가 그것을 설계한 자의 지성에 의존한다면, 마찬가지로 사람의 존재 또한 그렇게 복잡하고 완전한 설계를 한 지적인 자에 의존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논변에 대하여 진화론자들은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생물학적인 유기체의 경우에서 그 부분들과 그 본성은 “자연 도태”와 “최적자 생존”의 원리에 의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눈과 같은 부분들을 갖지 않았던 생물들도 많이 있었을 것인데, 이것들은 생존에 적합하지 못하여 사멸했거나 다른 부분들을 발전시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적 구조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존에 적합한 방향으로 발전시켰고, 필요 없는 부분들은 퇴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론적 입장도 목적론적 논변을 반박하기에는 그리 완전한 이론은 아닌 것 같다. “최적자의 생존은 적자의 출현을 전제하고”, 진화의 과정은 환경과 경쟁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생물들에게는 적합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기보존의 능력뿐만 아니라 유희능력, 가치능력 등을 향상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다. 이런 기능들이 미적 가치, 지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생존을 위한 필연적 결과들로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목적론적 사고에 따르면, 자연세계의 모든 것들은 부분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것에 있어서도 최고의 지적인 설계자에 의해 어떤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안배되어 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운동 변화 또한 그런 목적 실현을 위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자연세계의 생물학적인 개별자들이 ‘낳음,’ ‘성장,’ ‘목적에 이름’이라는 끊임없이 반복적인 재생산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도 결국 가장 좋은 선한 어떤 것을 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라이프니쯔가 우주 전체에 대한 “예정 조화설”(harmonie préétablie)을 주장하듯이, 세계는 신에 의해 최고의 작품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운동 변화하는 모든 것들은 전체적인 형상을 실현할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로 완전한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일에 전체를 위한 수단으로 제공되는 부분들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들을 잘 수행하지 못하고 파괴된다면 이 또한 전체의 실현을 위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최고로 선한 신에 의해 완전하게 설계되었고, 부분들은 전체적인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들로서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체를 위한 수단이거나 보다 큰 악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목적론적 논변은 현실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가장 큰 선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② 목적론적 논변에 대한 난점들
그러나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이러한 목적론적 논변도 물론 난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략 세 관점의 논의가 결정적이다.

첫째, 목적론적 논변은 ‘인위적인 산출’과 ‘자연적인 산출’ 사이의 유사성을 근거로 논의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유비로부터의 논변”이 타당한가의 의심이 따른다. 사진기를 설계할 줄 알고 또 사진기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부분들의 기능과 수단들을 알고 있는 기술자가 사진기를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사진기의 부분들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안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제조 과정을 관찰하였고, 그 쓰임새도 그렇게 관찰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그러나 신이 사람들의 부분들이 - 눈의 정교한 부분들 등 - 사람의 전체적인 기능을 ‘위해’ 작동하도록 설계해두었다는 것을 누가 보증하는가? 그리고 신이 우주 전체를 설계할 때에 이를 본 사람이 있는가?

둘째, 보통 사진기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에는 여러 사람이 동원된다. 즉 설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다음으로 설계에 따라 부품들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리고 타인이 만들어 놓은 부품들을 사용하여 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기가 완성되었을 때 불량품이 나오면 제작자들은 다시 고치고, 새로운 기능을 첨가하여 더 좋은 사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사물들이 산출될 적에도 지성을 갖춘 설계자로서의 신이 동원되며, 사람의 부분들 - 눈, 심장, 피 등 - 을 만들 때에도 여러 신들이 협력하여 만들며, 좀 덜떨어진 사람이 만들어졌을 경우가 발생하면 이를 고치고, 사람에게 새로운 기능을 첨가하여 더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이런 근거에서 볼 때, 신은 완전한 숙련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지어도 되며 불완전성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돌려도 되는 것일까? 이런 책임이 신에게 없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셋째,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사진기와 같은 인위적인 산물들은 최초에 설계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산출물들이 생겼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계 장치를 설계한 사람은 죽고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와 유사하게 자연적 과정의 사물들도 최고의 지성을 가진 완전한 자가 설계한 것들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원래의 설계자가 지금 존재한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공박 또한 예상할 수 있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