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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도장]

    가족의 염원, 도방의 거울이 되다.(김진만, 한선미 도생)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친숙한 사람들이 모인 혈연집단이다. 사랑과 애정을 가득히 주고받음으로써 삶의 윤활유가 되어 주고, 때로는 서로의 고통마저 아낌없이 공유하며 그것을 극복할 무한한 동력까지 제공하는 것 또한 가족만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은 저마다 각자의 개성을 전제로 구성되고 결합되지만, 가족으로 만나는 인연과 존재의 이유를 도적道的 입장에서 들여다보면 진리의 실현을 함께하는 도생들의 소망과 뜻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조상 선령이 공력을 들여 내놓은 자손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각이 있고, 그런 내가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건사하며 진리 속에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면, 가족을 향한 나의 염원과 기도는 곧 내 가정 내 도방의 거울이 되고 현재가 되며 미래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조상과 자손의 확연한 관계 인식을 바탕으로 도방을 삶의 일부분으로 삼아 기도와 염원을 통해 가족을 융합시키고 진리를 실천해 가고 있는 강릉옥천도장 김진만(남, 46세, 교무종감), 한선미(여, 38세, 종감)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김 도생은 전기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이고, 한 도생도 대형 마트에서 관리자로 종사하는 직업인이며, 이 부부는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다.

    지난 12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취재진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 위치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2층 가정도장에 들어서니 두 부부와 둘째 딸 김도연(여, 17세, 교무도감) 도생, 그리고 ‘빠기’라는 개성 있는 이름을 가진 5개월 된 비숑프리제 견공이 취재진을 맞아 주었다. 장녀 김나영(여, 18세, 사감) 도생은 사정이 있어 참여할 수 없었고, 김진만 도생의 어머니 최정희(여, 83세, 교무사감) 도생도 건강 관리 문제로 함께하시지 못했다.

    집 구조상 거실 공간의 한쪽 벽면 하단에 위치한 넓은 3단 책꽂이 단 위에 청수그릇이 놓여져 있고 그 위쪽에 모셔진 천신단은 중앙에 상제님 어진, 태을주 액자, 태모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以義報本(이의보본)과 以道耕世(이도경세) 액자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공개된 공간임에도 규모가 적정하고 깔끔해서 단정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천신단에 예를 표하고 나서 취재진은 부부 도생과 김도연 도생, 그리고 개구쟁이 애완견 빠기와 함께 거실에 마주 앉아 상제님 신앙을 만난 경로와 가족에게 닥친 시련과 극복, 부부의 목숨을 지켜 준 조상의 가호와 도방의 의미 등에 관련된 이 가족의 신앙 스토리를 하나씩 들어 보았다.


    영적인 분별이 참진리로 이어지고


    동생을 잘 보살피라
    김진만 도생은 경북 울진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네 명의 누나가 있고 아래로는 한 명의 남동생이 있어 아들로는 첫째였다. 늦게 본 아들이라 그런지 부모님은 김 도생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네 딸들에게 동생 진만이를 잘 보살펴 주라고 수시로 말씀하실 정도였다.

    이렇게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비교적 순탄한 소년기를 보내는가 했는데, 김 도생은 추억의 가출 소동을 벌인 여파로 중학교를 4년 동안 다녔다고 했다. 한 번쯤 괜한 일탈의 욕구가 생겨나기도 하는 사춘기 시절에 슬며시 다가오는 통과 의례를 피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은 이후부터는 상당히 착실한 학생으로 변모해 고교 및 대학 시절을 무사히 보냈고 졸업 후에는 강원도 동해에서 직장에 취업을 했다. 바로 그 직장에서 김 도생은 동료였던 한선미 도생을 만났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에 이르면서 인생의 동반자와 한 길을 걷게 되었다.

    영적인 분별이 있었던 할아버지
    아내인 한선미 도생은 강원도 동해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출생해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오빠들과는 다르게 유치원도 다니고 피아노, 태권도, 미술 학원 등을 다니면서 생기 있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 도생의 어머니는 아들만 낳았다가 마침 딸을 얻고 싶었던 시기에 낳은 자식이어서인지 한 도생을 딸이자 친구처럼 여기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경험과 생각, 소소한 옛 이야기들까지 들려주시곤 했는데, 그 가운데는 뭔가 영적인 분별이 있으셨던 할아버지 얘기를 간혹 하시곤 했다. 한 도생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던 탓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뵌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집안에서 벌어졌던 괴이한 일과 그 이면을 감지하고 계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도생이 어려서부터 살았던 집은 큰 기와집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고도 못 보는 장님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평소에 종종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이 터를 누리고 살 수 있으려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그때 당시 어머니는 시집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그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몰랐는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방 안 구석구석에 흉칙한 귀신이 서 있는 것이 보여 집에 있을 수가 없었고, 밤이면 천장에서 뭐가 구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가 하면 주방에서는 도마를 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등 기괴한 현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족들은 견디다 못해 결국 그 집을 팔고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도생은 지금도 그렇지만 머리만 바닥에 누이면 곤히 자는 편이라 그런 이상한 일들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서도 별로 무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상님, 그리고 신앙의 길
    한 도생은 초등학교 시절 ‘신앙’의 길로 들어선 사건에 대해 뚜렷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느 일요일에 어머니와 목욕탕에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그날은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평소 알고 지내던 한복집에 들렀다고 한다. 몇 마디 일상적 얘기를 주고받다가, 한복집 아주머니는 ‘60년 동안 조상님들이 자손을 구하려고 기도를 한다’는 등 주로 조상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불현듯 한 도생은 그 자손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마치 마법에 홀린 것처럼 두 모녀는 그 아주머니의 얘기를 귀를 기울이며 들었고, 어머니는 그 논리에 충분히 공감하는 반응을 보이셨다.

    집에 돌아온 그날 저녁, 한 도생의 집에는 지금까지 봐 온 것 중에 제일 큰 제삿상이 차려졌고, 그걸 시작으로 ‘OO진리회 신앙’이 시작되었다. 초를 밝히고 향을 피우고 주문을 읽는 모습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한 도생은 어머니를 곧잘 따라 하게 되었다. 모든 주문을 다 외우고, 어머니를 따라 여러 회관에 다니면서 신앙의 재미를 찾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워낙 열성으로 신앙을 하셨다. 며칠씩 집을 비우며 철야 수행을 하기도 했는데, 본래 영성이 밝은 분이셔서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영적 현상을 체험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수행 중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눈을 뜨려고 그러시는지 심하게 깜빡깜빡 거리는 모습을 뵈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고, 집에서 수행을 할 때는 앞에 분명히 사람이 앉아 있는데 눈을 감으면 다른 여성이 옛날 옷차림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또 몸이 아픈 분을 집으로 모셔 와서 며칠씩 같이 지내며 병을 낫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만난 증산도 진리
    이렇게 나름의 신앙 문화에 젖어 살던 한 도생은 어느덧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했는데, 첫 직장에서 동료로 만나 교제 후 결혼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남편 김 도생이었다. 1999년 결혼 후 두 딸을 낳고 직장도 다니면서 그저 열심히 사느라 바쁘게 지내던 한 도생은 우연히 인터넷 온라인 공간을 통해 증산도 진리를 접할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인 예언이나 개벽의 키워드로 검색을 자주 하던 한 도생은 그 과정에서 연관된 몇 개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이 되어 있었고, 가끔씩 그런 카페들에 접속해 게시된 이런저런 글들을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카페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가입되어 있는 온라인 카페에서 메일이 왔다.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영상을 보고 답변을 주면 선물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선물이라는 조건에 끌려 무심코 보기 시작했지만, 시청에 돌입한 후에는 너무나 흥미를 끄는 내용이어서 중단을 할 수가 없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동영상을 본 후에 곧장 답 메일을 보냈다. 동영상을 보면서 같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동서남북도 쓰고 숫자도 써 놓고 하면서 화면 속의 강사가 하는 걸 그대로 그려 보았다. 바로 ‘우주 1년’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하여 도문으로 이끈 인도자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답 메일에 대한 선물도 받았다. 『다이제스트 개벽』과 『개벽을 대비하라』, 그리고 만화로 된 몇 권의 책이었다. 제일 먼저 만화로 된 책을 읽었고 그 다음 『다이제스트 개벽』 책을 보았다. 그 책은 어머니가 어디서 받아 오셨는지는 몰라도 기존에 집에 있던 책이었고, 중간중간 읽고 이해하는 부분은 이해했지만 어려운 부분이 많았던 기억이 있는 책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접한 새로운 진리 정보는 한 도생에게 많은 생각과 자극을 안겨 주었다. 책을 보내 준 인도자와의 만남도 계속 이어 가면서 꾸준히 배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인도자의 권유로 증산도 동해천곡도장에 방문할 기회를 얻었지만, 뭔가에 구속된다는 느낌이 들었던지 쉽게 마음이 내키지 않아 주저하며 버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인도자는 정성스럽게 도장으로 인도하고자 계속 노력했고 이에 감응한 한 도생은 결국 인도자와 ‘100일은 도장에 간다’는 약속을 하고 처음으로 도장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다소 설레기도 하고 약간의 부담과 긴장감도 지닌 채 들어선 도장에는 너무도 반갑게 맞이하는 포정님과 포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들 덕분에 부담이나 긴장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정말 몇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책으로 이해하던 진리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알찬 실담이 되어 한 도생의 가슴에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이후 한 도생의 생활은 이전과는 다른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매일 직장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도장에 가서 수행과 배례를 하고 교육을 받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빨리 집에 귀가해도 밤 12시였을 정도로 정말 열심을 다해 진리 공부에 매달렸다.

    아내를 돕다가 함께 동참한 진리 공부
    그 당시 한 도생은 울진의 시댁에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동해와 울진은 차로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이동하는 왕복 2시간 동안 한 도생은 차 안에서 도전 테이프 등 여러 가지 청취 자료들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진리의 참된 의미와 개벽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가끔은 우울함에 빠지기도 하면서 삶의 목적과 방식 등에 대해서도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물론 도장을 오가는 과정에서 한 도생이 차를 직접 운행한 것은 아니었다. 든든한 가장이자 지원자인 남편 김 도생이 아내의 진리 공부를 위해 차량 운전을 전담했다. 차가 없이 도장에 오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아내를 도장에 들여보내고 혼자 되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김 도생은 늘 도장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나중엔 김 도생도 진리 공부에 동참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당시의 스토리 상황을 김 도생의 입을 통해 들어보았다.

    “언젠가 하루는 아내가 두꺼운 책을 사서 보고 있길래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된 분이 도전을 읽어보라고 해서 샀다고 했습니다. 서점에 없어 주문까지 해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심성이 착하고 남에게 싫은 거절도 잘 못해서 집에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들로부터 상품을 사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또 책을 사느냐, 그 책 다 읽나 보자라며 타박도 했어요. 그런데 아내는 무척 진지하고 신중했습니다. 책을 대하는 분위기나 태도가 달랐어요. 뭔가 다른 느낌이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부턴 동해에 있는 도장에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아내에게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잘못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기에 아내를 위해 차를 운전해 매일 동해와 울산을 왕복했습니다.

    처음에는 교육이 끝날 때까지 도장 밑에서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저도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궁금하여 함께 도장으로 올라갔어요. 함께 앉아 진리 얘기를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보니 저 역시 도장에서 도담을 나누고 배례와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500배례도 하고 또 어떤 날은 1000배례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가 함께 1000배례를 한 날이 있었어요. 한여름 때였는데, 700배례를 하고 나니 온몸에 비 오듯이 땀이 흐르고 목도 말라서 잠시 도장에서 먹던 인진쑥 다린 물 1.8L를 다 마시고 1000배례를 채웠습니다. 배례가 끝났을 땐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처럼 몸이 촉촉하고 산뜻했습니다.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체험이었어요. 평소에 땀을 흘리면 끈적거리고 개운치 않은데 그런 거 없이 보송보송하며 기분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모든 게 잘된 거지요.”

    지난 과정과 체험을 얘기하며 소탈하게 웃는 김 도생의 묵직한 미소는 그 어떤 것도 휘감아 굳게 지켜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져다준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
    남편 김 도생의 지원과 합류에 힘입어 진리 교육 과정을 무난히 마친 한 도생은 때가 되어 입도 이야기가 나오자 망설일 것 없이 2005년 5월에 입도를 했다. 한 도생이 입도를 한 그 다음 달은 김 도생이 바로 입도를 함으로써 부부는 증산도 신앙인으로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부가 입도를 한 이후 도장 포정님과 포감님이 함께 당시 울진에 있던 김 도생 집에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집에 계셨던 김 도생의 어머니께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진리 도담을 들려 드리는 기회가 있었는데, 개벽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뜻밖에도 예전에 그 말들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반응을 보이셨다고 한다. 장차 십 리에 사람 하나 볼 듯 말 듯 한다거나 앞으로 전쟁이 있다는 그런 표현들을 분명하게 기억해 내셨다. 평소 진리 관련 말씀을 드린 적이 전혀 없었는데, 아들과 며느리보다 먼저 개벽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 것이다. 김 도생의 어머니는 3년 전 김 도생 내외가 도방이 마련된 현재의 평창 집에 모셔 오면서 마침내 도문에 입도를 하셨다. 이분이 바로 83세 되신 최정희 도생(강릉옥천도장)이시다.

    시련 끝에 확인한 가정이라는 이름


    “신앙 안 하실 거예요?”
    그렇게 열심히 신앙을 해 나가던 시절, 김 도생은 그 당시 운영하고 있던 식품 대리점 사업에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결국 그 사업을 접고 PC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아 부부가 함께 힘을 모았다. 김 도생은 밤을 새우며 영업을 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집에 와서 잠을 잤고, 한 도생 역시 낮에는 자신의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PC방에서 밤을 새웠다. 둘이 교대를 해야 누구 하나는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한 도생은 삼척도장 소속이었다. 한 도생은 도장에 어쩌다가 나가는 날 잔잔한 미소를 띤 포정님이 건넨 한마디 말을 기억하고 있다. “한선미 성도님, 신앙 안 하실 거예요?”

    경책하거나 나무라는 말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이해하며 수행이나 신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와 준 분이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표현이었다. 한 도생은 그 말이 틀에 박힌 흔한 위로보다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한 도생은 감사한 마음을 이제야 밝힌다며 지금도 힘이 들거나 나태해질 때면 가끔씩 스스로에게 물어본다고 한다. “한선미 도생님, 신앙 안 할 거예요?”

    “나는 왜 떨어져 살아야 해?”
    모든 힘을 쏟아 매달린 PC방 운영이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자, 김 도생은 그것도 정리를 하고 결국 파산 신청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충격과 여파는 무척 큰 것이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함께 있지 못하고 흩어져야 하는 슬픔을 안게 되었다. 한 도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남편은 어떻게든 난관을 헤쳐 나가려고 대관령 지역으로 이동했고, 저는 친정집이 있는 동해에서 조금이라도 더 일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이들 둘은 울진에 있는 시댁에서 어린이집을 다녔어요. 그러다가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해서 동해로 데리고 왔습니다. 작은아이는 그대로 울진에 둔 채였는데, 그때 둘째랑 통화를 하고 끊으면 아이가 주방으로 달려가 흐느껴 울었다는 얘기를 한참 뒤에서야 듣게 되었어요. 나는 왜 엄마랑 떨어져서 살아야 하냐고 말이지요...”

    시간이 또 흘러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한 도생은 둘째 역시 동해로 데려왔고 친정집에서 아이를 맡아서 키워 주셨다. 한 도생은 가슴 아픈 현실이 가져온 중압감을 이겨 내기 위해 가급적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자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문득 마음은 무겁지만 몸은 가벼워져 오히려 신앙을 하기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받는 시련이나 고통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상제님 신앙이 있으므로 이를 견뎌 내고 극복하면 될 일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한 도생은 처음으로 새벽수행을 도장에서 해 보았다. 도장에서 새벽 수행을 하고 출근을 하는 날이면 그날 하루는 펄펄 날 정도로 기운이 넘쳤다.

    10년 만에 다시 모인 가족
    이렇게 견디며 힘을 내는 한편으로 김 도생이 파산하며 보증을 섰던 것이 넘어오면서 한 도생 역시 파산신청을 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 다시 어려움이 가중되는 형편에 놓였지만 주위에서는 가족이 이렇게 다 떨어져 사는 건 아니라고 간곡히 설득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에 한 도생은 결심을 하고서 아이들과 함께 2009년 겨울 김 도생이 있는 대관령으로 합류를 했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대략 결혼하고 10년 만에 다시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어차피 어려움은 각오하고 합류한 터라 어지간한 것은 불편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네 식구가 12평 남짓 되는 집에서 1인용 매트를 깔고 겨울을 보냈고, 집이 좁아 청수 모실 곳도 마땅치 않아 작은 책장 위에 청수를 모셨다. 당시 한 도생은 청수를 모신 후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면서 그간 떨어져 살았던 네 식구가 다 같이 도장에 가는 모습을 매일같이 머릿속에 그려 봤다고 한다.

    도방에 안착하기까지
    여러 형태로 다가온 시련들을 하나하나 이겨내고서, 이 가족은 늘 그리던 그 모습대로 네 식구가 도장에 가는 일이 잦아졌고, 그 가운데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진리 교육을 해 주신 도장 도생님의 조력으로 두 딸 김나영, 김도연 도생도 2013년 무사히 입도를 할 수 있었다.

    김 도생은 가족이 함께 신앙을 하게 된 과정을 되돌아볼 때 누구보다 큰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가장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가슴에 쌓인 그 아픔과 부담들을 스스로 달래느라 애도 많이 썼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유일한 원천은 가족뿐임을 매번 절감하곤 했다. 또한 사업이 기울어 대관령에 오게 되면서 새롭게 부딪치는 현실 문제들에 직면해 이를 풀어 가려 신경을 쓰다 보니, 마음과 달리 신앙에서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가족이 대관령에 함께 모여 살면서도 처음에는 도장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죄스러워 한 도생만 도장에 들여보내고 김 도생은 도장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곤 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안정을 찾은 지금은 신앙 참여를 우선시하면서 업무를 보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할 때면 늘 태을주와 운장주를 주송하며 다니고 있다. 대관령에서 다시 모인 가족은 이후 세 번의 이사를 거쳐 네 번째 만에 지금 살고 있는 평창 집에 안착을 하게 되었다. 또 김 도생은 고령이신 어머니를 집에 모셔 와 함께 살고 있는데, 태을주를 알려 드리고 도장에 인도하여 입도를 하시도록 해서 현재 함께 가족신앙을 하고 있다.

    여기에도 증산도가 있네
    김 도생은 도장 차원의 포교 활동이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노력 중이며, 늘 생활 속에서 포교를 하고자 애쓰고 있다. 생각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는 마음먹고 시간을 정하여 대관령에서 『천지성공』과 『한민족과 증산도』 책 100권을 주변 지인들에게 홍보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반응은 다양했다고 한다. 간혹 증산도를 알아보는 분들이 있었고, ‘여기에도 증산도가 있네’ 하면서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 또한 상생방송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는 걸 보고는 무슨 방송이냐며 유심히 물어보는 분들도 나타났다. 김 도생은 사람들이 증산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심이 생각 이상으로 큰 것을 목격함과 동시에 진리를 제대로 원활하게 전하는 능력이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고 한다. 향후에는 진리를 온전히 전하고 수렴을 잘 할 수 있도록 좀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입공부도 갈고 닦을 작정이다.

    삶과 가족, 도방의 의미를 묻다


    도장은 가고 싶은 고향과 같아
    이들 부부 도생은 각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 도장 치성에 함께 참석하려면 차량을 움직여야 가능하다. 도장이 있는 강릉 지역까지 평일 버스 운행은 일정한 한계가 있어 차량을 이용해야 오가는 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차량을 갖고 있는 김 도생이 기본적인 업무에 직책 수행과 총무 역할까지 겸하다 보니 퇴근 후에도 바쁘게 지낸다. 평일은 평일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챙길 일이 많아 도장에 자주 참석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한 도생은 월 4회 휴무일이 되면 평일에 못했던 일들을 처리하고 꼭 해야만 하는 두 가지 일을 한다고 한다. 고령의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서 목욕도 시켜 드려야 하고, 병상에 누워 계신 친정어머니에게도 가서 돌봐 드려야 한다. 친정어머니는 2016년 1월 심정지가 와서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로 요양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발병해 쓰러지시기 전날 오후 한 도생은 친정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요즘 감기가 무서우니 조심하라는 당부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일하느라 바빴던 한 도생은 “엄마,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라고 말하고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서 미처 전화를 드리지를 못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시 전화를 할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한 도생은 한 달에 한두 번 요양병원에 찾아가 의식이 없는 어머니 곁에서 손을 잡아 주거나 주물러 주고, 태을주도 읽어 드린다고 한다.

    이런 가정사로 인해 도장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한 도생은 도장이 자신에게는 늘 가고 싶은 곳이고 누구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더라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평소 도장 참여가 부족해 늘 아쉽고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 기회가 생겨 가끔이라도 도장에 가는 날에는 수호사님과 포감님 그리고 여러 도생들이 안부를 물으며 편안하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어서 돌아올 때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상쾌한 마음으로 귀가한다고 했다.


    도방은 삶의 일부분이요 가족의 모습 자체
    그 감사함과 배려를 기억하면서, 한 도생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정신을 바로 하며 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자신과 가족이 행여 도장과 멀어질까, 정확히는 신앙과 멀어지지 않을까 늘 걱정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역도장에 나갈 기회가 적더라도 가정 도방에서 청수 모시고 기도하고 수행하고 배례하는 걸 결코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한 도생과 가족에게 가가도장은 단순히 천신단을 중심으로 신앙의 기본을 다하는 정도를 넘어선 특별한 의미가 있을 법했다.

    “저희에게 가가도장은 삶의 한 부분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을 때도 항상 함께하며 마음을 만져 주고 힘을 준 것이 바로 도방입니다. 우리 가족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화목하게 살게 된 것도, 부부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것도 모두 도방에서 반복해 온 오랜 기도와 염원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가족의 이 모습 이 상황 자체가 곧 도방 기도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한 도생이 말하는 가정도방의 의미이다. 도방이 곧 가족의 현재 모습 자체라 말하는 것은 가족과 신앙과 도방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도생이 가가도장을 당연히 있어야 하는 삶의 일부분이요 생활과 일과의 중심이라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조상님이 꿈꿔 온 그 자손이 될 터


    도방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에 대해 물었다. 한 도생이 부부의 소망을 함께 모아서 몇 가지 얘기로 마무리를 했다.

    “근본을 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조상님이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며 꿈꿔 온 그 자손이 제 자신임을 잊지 않고, 조상님이 원하신 그 일꾼의 모습으로 이곳 대관령에서 상제님 진리를 펼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돌보고 존재하게 해 주신 조상님께 대한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저희 두 딸을 위해 기도와 정성을 쏟을 생각입니다. 이번 도방 인터뷰를 계기로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부모로서 저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근본신앙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아이들을 보며 우리의 정성이 부족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진리 의식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고, 진리 전달 공부와 준비를 더 충실히 잘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진리를 전하는 참 일꾼이 되겠습니다.”


    삶과 죽음, 조상의 공력과 인연을 생각하다
    교통사고에서 체험한 기적
    흩어진 가족들이 다시 모여 밝은 가정의 모습을 찾은 그 이듬해인 2010년, 김 도생과 한 도생은 단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강릉도장으로 가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김 도생이 뒤에 한 도생을 태운 채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달려오는 차와 충돌을 한 것이다. 꽝 하고 부딪쳤을 때는 그 충격으로 별다른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단지 몸이 튕겨져 나가 공중에 날아오른 후 땅에 닿는 그 순간 한 도생은 자신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통과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마치 공중 부양 마술에서 떠 있는 몸에 링을 통과시켜 확인해 보이는 것처럼 몸 전체를 온화한 기운이 죽 훑어서 지나가는 것을 확연히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크게 다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 현장 주변의 사고 목격자들은 두 사람이 모두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강력하고 큰 사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고로 김 도생은 쇄골 뼈가 부러지고, 한 도생은 여름철에 입은 반팔 옷 밖에 노출된 양쪽 팔 살갗이 쓸려 가면서 벗겨진 상처와 머리, 무릎 등이 찢어지는 상처가 나서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 감은 정도에서 그쳤다.

    이전 사고의 기억을 떠올리다
    그런데 한 도생은 사고의 충격과 아픔을 겪는 와중에, 이번 사고로부터 한 달 전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 도생과 한 도생이 상갓집에 들렀다가 차를 몰고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돌아오던 중, 밤 12시 전후의 시각에 신호 위반을 한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달려와 김 도생의 차 옆쪽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고, 오토바이에 탄 학생 중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고등학생 두 명이었는데 오토바이를 훔쳐 타다 사고가 났고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사고 수습 결과 오토바이를 몬 학생들의 과실로 매듭이 지어졌지만, 한 도생은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 학생에게 너무나 미안했다고 한다.

    자손을 살리려고 애쓴 조상님
    더불어 한 달 전의 그 사고와 아주 유사한 사고를 이번에는 내가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한 도생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상제님 진리 말씀을 통해 원한이 가져오는 척신의 살기와 보복에 관해 이해하고 있던 터라 이 사고들이 결코 예삿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과 남편이 똑같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사고였고, 더구나 한 달 전의 경우에 비해 더욱 크고 중한 사고였기에 잘못될 가능성도 훨씬 높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도생과 한 도생은 작은 부상에 그치며 목숨을 부지했고,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 또한 직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상제님 도문에 들어온 자손을 조상님께서 지키고 도와주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담당한 의사 선생님도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보통 오토바이 사고는 중상 이상인데 이번 일은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서 많이 부족한 저와 남편을 살리려고 조상님들이 힘드셨겠구나 싶었어요.”





    이번 호 가가도장은 조상과 자손의 운명적 관계를 잘 이해하고 상제님의 진리 속에서 가족에게 닥친 시련과 난관을 도방에서의 염원 기도를 통해 극복함으로써 도방을 생활의 일부요 삶 그대로의 모습으로 일체화시킨 김진만, 한선미 도생의 도방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이 부부는 조상이 오랜 공력으로 받아 내린 자손이 자신임을 굳게 믿고 조상 선령이 이루기를 원하는 자손으로 살아가기 위해 서로를 돕고 고통을 견디며 가족의 평안과 진리 실천을 위해 염원의 기도를 꾸준히 지속함으로써, 마침내 흩어진 가족을 하나로 모으고 가족신앙의 틀을 정립하는 결과를 이루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조상 선령의 가호를 받아 치명적인 위기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은혜도 입었고, 가정도방의 의미가 곧 신앙과 가족의 현재 모습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혜안을 얻기도 했다.

    이 부부는 도방의 진정한 모습은 가족의 신앙력과 기도의 염원이 결합되고 뭉쳐서 그 모습 그대로 표출이 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그 의미를 설정할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가족의 염원과 신앙의 산물이 곧 도방의 거울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 가족은 늘 욕심이 없이 소박한 신앙 의지와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이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제로 분명한 의식을 갖고 도방을 신앙과 일체로 자연스럽게 운영하려면 꾸준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일관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가족들을 둘러싼 여러 가지 변수와 상황들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가족 신앙이 도방이고 도방이 가족 신앙 자체인 ‘생활 신앙’을 지향하며 꾸준한 노력과 기도와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이 부부의 가정도방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 부부가 가족과 함께 이루어 가려는 생활 신앙의 목표가 본인들의 다짐대로 근본을 망각하지 않은 채 잘 진척이 되어서, 마침내는 상제님 태모님의 성령과 조상선령 및 천지 성신의 가호로 반드시 소기의 결실을 맺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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