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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지역문화탐방]

    커피와 마라톤의 나라 케냐 Kenya


    유철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케냐는 고고학적으로 최초 인류의 터전으로 불릴 만큼 역사적 뿌리가 깊은 곳이다. 5세기경까지 아프리카인들이 케냐 지역에 이주하여 원주민으로 정착하였고, 15세기 초부터 외부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해 19세기 말엽부터는 독일과 영국에 의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저항 운동을 거쳐 마침내 1963년 독립국(영국 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케냐는 다당제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시행하는 아프리카에 몇 안 되는 국가로서 주변국들의 경우와 달리 내전이나 쿠데타도 없는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 운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격심하고 종족 간의 갈등이 뿌리가 깊으며 이슬람 테러, 소말리아 해적과 주변국 내전으로 인한 난민 문제 등으로 시달리고 있는 점이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부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냐는 국가의 자존심 커피처럼 깊고 진한 개성과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전통을 기반으로 중진국 이상의 국가 발전을 목표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케냐 공화국Republic of Kenya(스와힐리어로는 ‘잠후리 야 케냐Jamhuri ya Kenya’)은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하며 적도 상에 있는 국가이다. ‘케냐’라는 국명은 케냐 내에서 최고봉이며,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인 케냐 산Mlima Kenya에서 따온 것이다. 수도는 나이로비Nairobi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한 대도시로 꼽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케냐에서 왕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사망했을 때 케냐를 방문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엘리자베스 2세가 묵었던 트리탑 호텔은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케냐는 북쪽으로 에디오피아, 동쪽으로 소말리아, 남서쪽으로 수단, 남쪽으로 탄자니아, 서쪽으로 우간다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국토는 나이로비, 중부, 동부, 해안, 계곡, 북동부, 은얀자, 서부 등 8개의 지역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인도양의 해안을 끼고 있으며 중앙 고원 지대 사이에 저평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원 지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로 나뉘며 서부에는 비옥한 토양이 나타난다. 케냐의 고원 지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토질로 손꼽힌다. 케냐 산Mount Kenya은 고도 5,199m에 이르며 빙하가 있기도 하다.

    국토의 면적은 580,367㎢로 마다카스카르 다음의 넓은 면적인데 세계 49위로 넓은 편이다(한반도의 2.6배). 케냐 고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성공한 농업지대이며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대이다.

    케냐는 야생동물이 많기로 유명한데, 많이 서식하는 동물은 사자·표범·들개·코끼리·물소·코뿔소·얼룩말·앤틸로프·가젤·영양·하마·악어 등이다. 가경지는 국토의 약 4%밖에 안 되는데, 가경지의 거의 전체가 경작되고 있다. 국토의 약 7%는 소·염소·양의 방목지로 이용된다.

    케냐의 기후는 적도를 걸치고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 기후이며 내륙 지방은 고지대로 건조한 기후이다. 내부일수록 건조하고 해안에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케냐-탄자니아 국경 지방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일대는 서늘하다. 케냐의 기후는 지구 반대편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바뀌어서 나타난다. 우리의 여름인 6~8월은 케냐의 겨울이다. 그러나 케냐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겨울과 매우 다른 풍경이다. 눈이 내리지 않으며 날씨 또한 영하로 거의 떨어지는 일이 없다. 단지 일교차가 매우 심해 새벽과 밤에는 매우 쌀쌀하게 느껴지며, 낮에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정도이다. 물론 아프리카이기에 겨울 햇살은 뜨겁다. 그러나 나무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차가워서 땀이 금세 마르고 겨울임을 느낄 수 있다. 케냐는 적도에 있지만 연평균 기온은 16도 정도이다. 해안과 바로 인접한 내륙에서는 연평균기온이 약 27℃이다. 케냐에는 대체로 비가 많이 내리는 3월말에서 5월까지와 그보다 적은 비가 내리는 10월부터 12월까지의 2차례 우기가 있다. 고지에서는 광대하게 펼쳐지는 대나무 숲의 여기저기에 상록수림의 작은 구획들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케냐의 역사
    최초 인류의 터전 케냐
    케냐의 한 지역은 “인류의 요람”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많은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이 지역이 현대 인간의 탄생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케냐 조상이 2백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투르카나 호 근처에서의 최근 발굴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호미니드인hominid이 260만 년 전 이 나라 땅에 존재했었다.

    식민시대 이전의 케냐
    기원전 500~기원후 500년 사이에 아프리카 대륙 각지에서 이동한 부족이 케냐에 정착하였다. 케냐 원주민은 고대로부터 해안가 지역에서 이슬람, 인도 상인들과 상아와 노예무역을 했다. 내륙 지방은 반투족, 마사이족 같은 호전적인 부족들이 주로 있었다. 14세기에는 동부 해안 지대에 아랍계 스와힐리 공동체(Swahili Community)가 정착하였다.

    1400년 초 케냐에 도착한 최초의 외국인은 중국인으로 해안도시 라무Lamu에 정착하였다. 1593년~1698년에는 포르투갈이 케냐의 몸바사Mombasa 항을 점령하여 예수의 요새(Fort of Jesus)를 건설하고 몸바사를 비롯한 해안가 지방을 지배했다가 오만 해상 제국의 산하로 들어갔다.

    식민시대와 독립
    케냐의 식민 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고, 1890년 영국과 독일은 동아프리카 지역을 분할하는 데 합의하여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 지역을, 독일은 탄자니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1895년 7월 베를린 회의에 의해 영국은 케냐에 대해 보호령을 선포하고 케냐 공동체로부터 비옥한 토지를 빼앗아 유럽인들이 고지대에 정착하였다. 결국 1920년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 시대에 케냐인들은 정치 과정에의 참여를 점차 증대시켜 나갔다. 1906년에는 유럽인으로만 구성된 입법 위원회(Legislative Council)가 구성되었지만 1920년에는 아프리카인의 각종 정치·사회단체가 결성되었다. 1944년 5월에 이르러 케냐 국민의 정치 참여가 허용됨에 따라 입법 위원회에 최초로 케냐인이 진출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케냐아프리카인동맹K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마우마우Mau-Mau단은 케냐 키쿠유족(族)이 1950년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했던 무장투쟁단체로 백인과 백인에 협력하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산발적인 테러 활동을 벌였다. 영국은 마무마우 단원들에 의한 테러와 태업怠業이 잇따르자, 1952년 10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그 결과 1956년까지 키쿠유 저항세력 1만 527명이 사망하고 2만 6,625명이 체포됐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마우마우 지도자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1894~1978년)도 1952년 10월 체포됐다. 그는 마우마우 조직의 관리자라는 혐의로 기소됐고, 1953년 4월 법원에서 7년간의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사태가 점점 확산되자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가 이끄는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모 케냐타는 1960년 5월 4일 KANU의 대표로 선출됐으며, 1963년 5월 총선에서 124석 중 83석을 확보했다. 영국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키쿠유 저항군의 무장투쟁으로 케냐는 마침내 1963년 12월 12일 독립을 쟁취했다. 마우마우 투쟁 과정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각된 조모 케냐타는 케냐공화국의 초대 총리(1963~1964년)와 초대 대통령(1964~1978년)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 1만 3500명의 케냐인이 피살되고 약 10만 명이 구금되었다. 1963년 6월 케냐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 같은 해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이후의 역사
    케냐의 독립 이후 1964년 11월 키쿠유Kikuyu, 루오Luo, 캄바Kamba족 대표인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과 소수 부족 대표인 케냐아프리카민주당연합KADU이 합당하여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의 일당 체제를 구축하였다. 1964년 12월 12일에는 케냐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케냐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1978년 8월 케냐타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소수 종족인 칼렌진 출신의 대니얼 토로이티치 아랍 모이Daniel Toroitich arap Moi 부통령이 대통령 및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KANU 당수로 취임하였고, 1979년 대통령선거에서 단독 입후보로 나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12월에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을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 국가가 되었다. 이후 모이 대통령은 1983년 무투표로 재선에 성공했고, 1988년에도 무투표로 3선에 성공하였다.

    1991년 8월 라일라 오딩가Raila Odinga, 마틴 시쿠쿠Martin Shikuku 등이 민주회복협의회FORD을 결성하였고 12월에는 다당제 헌법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1992년 10월 모이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였고 12월에는 다당제 아래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어 모이 대통령이 4선에 성공하고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이 의회 다수당으로 재집권하였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총선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에 힘입어 재선되었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득했다.

    하지만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 및 총선거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무지개연립NARC(National Rainbow Coalition)을 결성, 므와이 키바키Mwai Kibaki를 대표로 내세워 제3대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무지개연립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므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

    2007년 총선거(대통령, 국회, 지방 의회)에서는 키바키Mwai Kibaki 대통령이 재선하였으나 부정 선거 시비로 전국적인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1,500여 명이 사망하고 35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2008년 2월 28일 코피 아난Kofi Annan 전前 국제연합UN(United Nations) 사무총장의 중재로 여당과 야당은 권력을 분할하는 대연립정부(Grand Coalition) 구성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2008년 4월 국민연합당PNU-오렌지민주화운동ODM 사이에 대연립정부 내각이 출범하여 라일라 오딩가Raila Odinga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2010년 8월 새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통과됨으로써 새 헌법 공포 및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 헌법은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로 케냐 국민들이 스스로 제정한 것으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완화하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지키며, 사법부를 개혁하고, 인권을 강화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2011년 9월에는 대통령선거 폭력 사태 주모자(6명)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조사 절차가 개시되었다.

    2013년 3월에 치러진 케냐 대통령선거에서는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가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4월 9일에 취임을 했다. 우후루 케냐타는 초대 대통령인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의 아들이다. 케냐타 대통령은 안정적으로 국정 운영을 해 오고 있으며, 2013년 9월 21일 나이로비 내 웨스트게이트 쇼핑몰에서 발생한 알샤바브 테러 사건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인질들을 구출해 국내외에서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전 국민의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종족 및 정치적 분열을 다소 완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케냐타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대선 후 개표 부정 시비를 계기로 폭력 사태를 조장했다는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기소된 바 있으나 2014년 12월 ICC가 추가증거 확보 난항을 이유로 케냐타에 대한 공소를 철회하였다. 또한 2016년 4월에는 같은 혐의로 기소된 윌리엄 루토William Ruto 부통령의 공소를 ICC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기각하였다.

    2. 정치 및 행정


    케냐의 정치구조
    케냐는 독립 이후 47년 만에 대대적인 헌법 개편을 시도해 2010년에 신헌법을 제정했다. 신헌법의 핵심 내용은 35세 이상 대통령 출마 규정 폐지(성년 이상이면 출마가능), 선출직 기구의 3분의 2 이상이 한 성(gender)로 구성되지 않도록 규정, 인권 및 평등 위원회(Human Rights and Equality Commission) 설립, 소외된 커뮤니티의 생필품 접근권 개선을 위한 펀드 설립, 공무원 급료 및 보수 위원회(Salaries and Remuneration Commission)설립 등이다.

    신헌법 내용 중 이전과 달라진 것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삼권분립, 상원제도의 도입(47개 광역지방자치단체에서 각 1명씩 배출),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개별 선거 실시, 남성과 여성의 정치참여 평등 및 외국국적 취득자의 케냐 국적 상실 폐지 등이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대해서 신헌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먼저 행정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회의원이 될 수 없으며, 국회의 사전 동의를 거쳐 내각사무처장 임명, 국회의 사후 동의를 거쳐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임명한다(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된 경우, 국회의원으로 출마 자격 박탈). 입법부에 대해서는, 47개 지방정부(County)에서 선출한 상원의원(Senate)과 290개 선거구(Constituency)에서 선출한 하원의원(The National Assembly)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사법부는 대법원(Supreme Court) 및 최종항소법원(Court of Appeals)으로 구성하며, 검찰총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에서 승인을 거치며, 임기는 6년으로 한다.

    한편 케냐는 외교정책에 있어 친서방 비동맹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정당제도 및 현황
    케냐의 주요 정당은 현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 대통령이 소속된 국민연합당TNA(The National Alliance Party)과 라일라 오딩가가 이끄는 오렌지민주화운동당ODM(Orange Democratic Movement), 그외에 United Republican Party, Wiper Democratic Movement-Kenya, United Democratic Forum Party 등의 정당이 있고 Federal Party of Kenya, People's Democratic Party 등 군소 정당이 존재한다.

    행정부
    케냐 행정부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의해 권한이 행사된다. 대통령은 부통령과 총리, 내각의 지원을 받는다. 케냐의 대통령은 국가원수 겸 군 통수권자로 국회 해산권을 보유하고 있다. 임기는 5년이고 직접비밀투표로 선출하며 대통령 입후보자는 당의 추천이 필요하다. 대통령 유고 시에는 부통령이 권한대행을 하며 90일 이내에 새 대통령을 뽑는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될 수 없으며, 국회의 사전 동의를 거쳐 내각의 장관을 임명하고 국회의 사후 동의를 거쳐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임명한다.

    2017년 10월 현재 대통령은 여당인 국민연합당TNA 소속인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이다. 케냐의 내각은 대통령이 내각 임면권을 보유하며, 각 부처 장관은 국회의원을 겸직한다.

    케냐의 행정 구역은 2013년에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 이전까지 8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47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법부
    케냐의 의회는 양원제(하원 350석, 상원 68석)로 운영된다. 2010년 제정된 신헌법에 의해 기존의 단원제 의회가 양원제로 변경되었다. 지역별 카운티(County)에서 선출하는 상원의원과 전국 지역 선거구(Constituency)를 중심으로 선출하는 하원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법부
    케냐 사법부는 형사와 민사상 제약이 없는 재판권을 가지고 있다. 형사와 민사 사건의 경우 지방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하며 상급 법원은 해군재판소의 역할도 한다.

    상주 행정 법원은 전국적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구금 또는 벌금형의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고, 지방 행정 법원은 삼심제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법원은 지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며 구금 또는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밖에 카디Kadhi 법원은 지역 내에서 이슬람법에 따른 사항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이웃국과의 관계
    케냐는 남수단과 일레미 삼각지구 영토 문제로 갈등이 깊다. 케냐가 남수단의 독립을 지지하긴 했어도 영토 문제로 이전 수단 시절부터 국경에서 총격전을 벌인 적도 있으며, 남수단 난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난민들을 받아줬지만 수시로 케냐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밀수를 단속한다면서 생필품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여성 성폭행 및 난민 구타같은 일을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수단에서 케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케냐 해역에서도 약탈 및 납치극을 벌이는 벌여 케냐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2011년 9월, 케냐 관광지인 라무Lamu 섬에서 영국인 관광객 내외가 해적들의 공격을 받아 남편이 살해당하고 아내가 납치되었다가 결국 돈을 주고 풀려났다. 이어진 10월에는 프랑스 관광객들이 관광지인 만다Manda 섬에서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는 일까지 벌어져서 케냐에 찾아오는 유럽 관광객들이 급감했다. 결국 케냐 해군도 열악한 무장 상태임에도 소말리아 주둔 다국적 해군에 참여하고 있다.

    3. 경제


    케냐는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1963년 독립한 이래 아프리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급증하는 인구는 일거리와 토지 및 사회복지사업 제공능력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다. 실업이 큰 문제이며, 정부의 지출 확대와 관련하여 인플레이션이 잦다.

    케냐의 산업구조
    케냐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독립 이래 완만히 증가해왔지만 여전히 낮다. 농업은 GNP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약 5분의 4가 고용되어 있다. 관개용수를 이용하는 농지가 드물기 때문에 농업생산량은 일기에 크게 좌우된다. 농업 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자급용의 생산이며, 종종 주식인 옥수수·밀·우유 등이 부족하여 식량 수입이 불가피하다. 커피(주로 아라비카 커피)와 차는 케냐의 주요 수출품이며, 국제시세의 변동은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밖의 작물로는 사탕수수·감자·카사바·밀·사이잘삼·제충국·파인애플·덩굴강낭콩 등과 그 밖에 채소류·종면種棉 등이 있다. 가축과 낙농품은 내수용·수출용으로도 중요하다.

    공업은 GNP의 약 9분의 1을 차지하고 노동력의 10분의 1이 고용되어 있는데 케냐는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공업화된 나라로 꼽힌다. 제조업 부문의 성장은 엄중한 수입통제와 동력의 부족으로 둔화되었다. 발전은 주로 수력에 의존하는데, 강우량이 적은데다가 댐이 막히는 일이 많아 연간 전력생산이 제약을 받는다. 원유는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수입되어 몸바사에서 정제된다. 주요 제조품으로는 식품과 음료용 제품, 담배, 직물, 조립 수송수단, 시멘트와 석유 제품이 있다. 공업 투자의 약 절반이 외국인 소유이다. 서비스업은 GNP의 약 절반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약 8분의 1이 고용되어 있다. 꾸준히 성장하는 관광산업은 케냐 최대의 외화 소득원의 하나가 되었다.

    연료 수입과 정부의 공공사업에 드는 비용의 증대는 생산의 불안정성 및 커피와 차의 국제시세 변동과 더불어 예산적자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영국·독일·미국 등이다. 케냐는 상당한 규모의 운송체계를 갖추고 있다. 몸바사에 항만시설이 있고, 몸바사와 나이로비에 국제공항이 있으며, 도로망도 상당하다. 케냐는 1980년대 말에 세계은행과 유럽의 여러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아 철도를 개량하기 위한 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케냐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제가 발전한 나라이며 경제 운용의 측면에서 뚜렷한 강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가격 규제가 없는 완전 자유 경제이고 케냐 거주자나 비거주자의 국내외 대출에 규제가 없다는 점, 케냐를 동부와 중앙아프리카에서 제조업 및 상업 경제 부분의 중심지로 만드는 숙련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는 점, 개발된 사회 간접 자본과 주변 지역에 접근이 용이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케냐가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 공동 시장(COMESA)과 동아프리카 공동체(EAC), 다자 개발 연합회(IGAD), 사하라 공동체(CEN-SAD)의 회원국이라는 점 등이다.

    경제성장률 및 외채
    2017년 여전히 6%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률이 전망 되며, 대선 및 총선 결과의 불확실성으로 경기 둔화 가능성도 있다. 2016년 12월 기준 케냐의 물가상승률은 6.30%로, 9월 6.50%에 비해 약간 하락하였다. EIU 국가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케냐의 물가상승률을 6% 미만으로 전망했지만 2016년 말부터 이어지는 강수량 부족과 국제 유가 상승, 케냐 실링의 약세 지속으로 인해 실제로는 7%까지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케냐의 외채는 2015년 말 307억 달러로 GDP의 48.4% 수준이었으나, 2016년 말 363억 달러로 GDP의51.3%를 기록, 케냐 정부의 총체적 예산 운영에 가장 큰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무역현황
    2015년 말 기준 케냐의 수출은 60억 달러, 수입은 156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2016년 말 기준 수출은 64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약 7%가 증가하고, 수입 역시 16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가 증가하였다. 주요 수출품은 차(Tea)·커피, 원예작물, 석유제품·광물성연료, 채소류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원유, 산업기계류, 전자기기, 차량, 플라스틱제품 등이다.

    한국과 케냐의 교역 현황을 살펴보면 우리 제품의 대對케냐 수출은 2016년에 감소세를 겪었으며, 2017년에도 호전될 것 같지 않다. 2016년 1~11월까지 총 1억4580만 달러로 2015년 동기대비 무려 25%나 감소했으며, 100만 달러 이상 수출품목은 MTI 2단위 품목분류 기준 총 21개 품목으로, 이 중 오직 4개 품목(가정용 전자제품, 섬유사, 섬유원료, 직물)만이 전년대비 수출이 증가했다. 한국의 대對케냐 주요 수출품은 기타자동차, 합성수지, 기타석유화학제품, 건설중장비, 기타 정밀화학원료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동괴 및 스크랩, 커피류, 화초류, 기타 전자응용기기, 알루미늄괴 및 스크랩 등이다.

    경제정책 동향
    케냐의 경제정책 동향을 들여다보면, 높은 인구증가 추세로 볼 때 투자확대는 실업해소를 위한 고용창출 및 지속적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며, 매년 50만 명에 달하는 신규 노동력 흡수를 위해서는 향후 10년 간 매년 7~8%의 높은 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내·외국인 투자확대가 절실하다.

    4대 대통령 당선자 우후루 케냐타는 선거전부터 케냐의 경제적 성장 원동력으로 제조업 활성화를 주장, 2011년부터 추진해온 경제특별구역법안(Special Economic Zone Bill 2012)를 2012년 말 법제화시켰다. 경제특별구역 활성화를 통해 국내외로부터 기술유입 및 투자의 촉진 등을 통해 경제 성장과 수출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케냐 경제정책은 전력과 교통 등의 인프라사업을 확대, 지역통합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됐으며, 석유탐사와 지열발전 또한 추진되고 있다. 특히 2014년 3분기에는 지열발전이 확대됨에 따라 기존 수력발전 초과, 최대 전력원으로 등극했으며 이로 인해 전기료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석유관련 투자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IEA의 보고서는 케냐 원유 확인매장량 6억~29억 배럴과 60~100달러의 국제유가를 가정해 계산시 케냐의 연간 기대수익을 연간 7억 6,000만~41억 달러로 추산했다.

    그러나 2014년 12월 배럴 당 60달러 이하로 국제유가가 급락함에 따라 케냐 내 석유산업 관련 투자 감소를 우려하며 해외 석유 시추 기업에 부과예정인 자본소득세(양도소득세) 감세 요구 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케냐의 경제추진 플랜
    케냐의 경제추진 청사진은 케냐 중장기 발전 마스터플랜인 ‘Vision 2030’이다. ‘Vision 2030’은 경제, 사회, 정치 발전을 케냐 중장기 발전의 3대 축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연평균 10%의 경제성장, 평등하고 갈등 없는 사회발전, 인간중심의 정치체제 발전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이러한 목표 아래 빈곤해소를 위한 부의 창출 기회 확대(Enhanced Equity and Wealth Creation Opportunities for the poor), 사회간접자본 발전, 안정적인 에너지자원 확보, 과학기술 혁신, 국토개발, 인적자원 개발, 위험 없는 사회, 공공서비스 증대 등을 세부 프로그램으로 추진하고 있다.

    2014년 9월 단행된 케냐 자체 GDP산정기준 변경에 따른 2015년 GDP 산정 결과는 약 638억 달러로 전년대비 약 4.7% 증가했다. 이에 따라 케냐는 1인당 GDP 3,081(구매력 기준)달러를 기록, 중진국(세계은행 기준 1인당 GDP 1,036달러 이상)으로 발돋움했다. 이는 중산층 증가로 인한 소비증가, 유전탐사와 인프라투자 지속, 외국인 투자 증가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4. 사회와 문화


    민족 구성과 인구
    케냐의 전체 인구는 47,615,739명(2017년 7월 추정치 기준)이다. 케냐의 출산율은 높은 사망률을 월등히 초과함으로써 이례적으로 높은 인구의 자연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인구 성장이 완화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주민의 평균연령이 낮아 전체의 4분의 3 이상이 29세 미만이다. 기대 수명은 남자 51세, 여자 55세이다. 인구의 대다수가 촌락에 거주하지만, 1970년대 초부터 도시 인구가 급성장했으며, 20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전체인구의 5분의 1이 도시민이었다.

    케냐에는 30∼40개의 인종 집단이 있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로 구별된다. 다수 집단은 키쿠유족·루히야족·루오족·캄바족·칼렌진족 등이다. 키쿠유족이 22%이며, 루히야족이 14%, 그리고 루오족이 그다음이다.

    언어와 종교
    케냐의 2010년 헌법 제7조에서는 공화국의 국민어는 스와힐리어이고, 공화국의 공식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이며, 국가는 케냐 인민의 언어의 다양성을 증진, 보호하며 토착어, 케냐의 수화, 점자 및 장애인에게 접근 가능한 다른 의사소통의 형식과 기술의 발전과 사용을 증진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규정이고, 모든 영역에서 하위 단계 사회는 스와힐리어, 고위 단계 사회에서는 영어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법정의 경우 대법원에서는 영어를 전용한다.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 스와힐리어로 된 ‘잠보 브와나’라는 노래가 케냐를 상징하는 노래로 유명하지만 국가는 아니다. 기타 언어로 만투어와 쿠시틱, 니로틱 등 40개 이상의 부족어가 존재한다.

    2009년 인구조사(2010년 08월 발간)에 따르면 케냐의 종교에 있어 기독교 인구는 82.99%인데 그중 개신교(47.66), 로마 가톨릭(23.46), 기타(11.87) 기독교이다. 이슬람교는 11.21%로 나타났다. 이외 힌두교도와 정령신앙도 있다. 90% 이상의 무슬림이 라무섬-말린디 그리고 몸바사를 잇는 동부 쪽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다수를 차지하는 기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0년 8월 샤리아법을 포함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이슬람 지역에서는 쿠란의 고유 경전에 기초한 독자적인 재판을 시행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획득했다. 이것은 케냐에 대한 소말리아 알샤바브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의 공격과 더불어 케냐의 국내 정치상황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언론과 교육
    케냐에서는 신문이 자치적으로 발행되고 대개 검열을 받지 않으며, 일간신문과 주간신문이 각각 발간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시설은 정부 소유이며 프로그램은 스와힐리어와 영어로 방송되는데, 많은 프로그램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수입된다.

    케냐의 국민 교육 제도는 의무제가 아니며, 8년제 초등교육, 4년제 중등교육, 대학교육의 3단계로 되어 있다. 사립학교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보조를 받는다. 나이로비대학교는 현재 케냐의 자주적인 대학교이다. 유럽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 교육 제도가 케냐에 도입되었다. 최근 교육부와 고등교육부, 과학 기술부는 교육 부분의 모든 정책의 시행 상황을 점검하고 교육발전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케냐는 기본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국가여서 영연방국가들의 교육제도의 골자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케냐의 헌법 개정과 함께 교육적 리빌딩을 요구하고 있으나 한 번에 바꾸기는 그리 쉽지 않은 듯하다. 

    빈부 격차가 극명한 케냐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육에 대한 국가적 예산 투자이다. 월드뱅크의 보고서 및 각국의 케냐 교육에 대한 보고서에서는 국가의 교육 투자가 불가피하므로, 사립학교 개설을 개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케냐에는 영국 GCSE(영국의 중등교육 자격시험) 교육제도를 운영하는 고급사립학교들이 많이 있으며, 해당학교 입학을 위해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자녀들을 보내고자 하는 부모들이 많다. 한국에서 사교육비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케냐의 교육현장에서 역시 사교육은 상상을 초월한다. 케냐 내에서 국제기구 활동을 위해 들어온 다수의 외국인들과 케냐의 중상류층 집안의 자녀들은 케냐 내 국제고등학교에 진학함으로써 영국식 교육을 배워 나가며 부를 대물림받고 있다.

    복지정책
    케냐의 공공의료는 정부 기관들과 사설 개인병원들에서 제공하는데, 말라리아·위장염·성병·설사·이질·트라코마 등의 질병에 걸릴 위험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전국적인 보험 조직은 없지만, 가족과 아동 복지사업의 개발, 생활력 상실자의 보호와 재활, 장애자에 대한 지원 등에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

    주택 마련은 인구 팽창으로 인해 전국의 대소 도시들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케냐 주택공사는 여러 도시에서 임대 아파트와 단독 주택들을 건설하고 있다.

    문화 예술
    케냐는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 전통을 가진 나라이다. 음악과 춤은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음악과 춤을 공연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전문기관이 있다. 미술은 주로 목각품의 대량 생산에 국한되고 있다. 스와힐리 문학은 구비문학이나 저술문학이나 모두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전통적이며, 현대 소설들은 전통사회와 현대사회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국립박물관은 야생생물의 수집물, 고고학적인 유물, 케냐의 물질문명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소장되어 있다.

    스포츠
    육상, 장거리 종목이 강하기로 유명하며 마라톤은 세계 최강국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새뮤얼 완지루Samuel Wanjiru도 케냐인이다. 케냐는 2001년 세계적인 대회인 보스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이봉주가 우승할 때까지 10연패를 이어갔고, 이봉주 이후로도 6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단거리에선 미국과 자메이카가 라이벌이다.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종합 3위를 달성했을 정도로 육상강국이다. 또한 남자 3000m 장애물 달리기에서도 68년 이후 단 두 차례를 제외하고 전부 제패했을 정도로 강호로 손꼽히고 있다. 2015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400m 허들과 창던지기에서도 우승하며 중장거리뿐만 아니라 육상의 다른 종목까지도 케냐출신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5. 한국과 케냐의 관계


    정치관계
    한국은 케냐가 독립하기 직전인 1963년에 나이로비에 총영사관을 세웠고 케냐가 독립하자 바로 승인하였다. 케냐는 한국과 1964년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같은 해 수도 나이로비에 있던 한국총영사관이 주 케냐 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는데, 동아프리카에 세워진 한국 공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다.

    양국은 1982년 2월 전두환 대통령의 케냐 방문과 1990년 9월 케냐의 모이 대통령의 방한으로 더욱 긴밀해졌으며, 이후 케냐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우방국으로 자리를 굳혔다. 2016년 5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동아프리카 3개국 및 프랑스 순방의 일환으로 케냐를 방문한 바 있다.

    케냐는 북한과 1975년 수교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사실상 한국과 우방국인 관계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북한의 상주공관 설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케냐와 북한은 2008년 9월에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주 남아공화국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양측은 1973년 10월에 무역 협정을, 1976년 5월에 경제기술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북한의 대 케냐 수출액은 2007년 현재 62만 4000 달러로 주 종목은 양탄자와 모자, 가방 등이며, 수입액은 144만 2000 달러로 커피와 귀금속 등이 주 종목이나 규모는 아주 미약하다.

    경제관계
    최근 들어 한국의 대기업이 케냐 곳곳에 진출하고 있다. 특히 삼성과 LG가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대륙 공략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실질적 협력관계를 증진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으며, 경운기·자동차 등을 무상원조하는 한편, 기술연수생 초청훈련과 전문가 파견, 태권도사범 파견 등을 실시하고 있다.

    양국은 1973년 9월에 의료협력 협정을, 1977년 8월에 무역 협정을, 1980년 12월에 문화 협정을, 1981년 1월에 항공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케냐는 잠비아(1968년), 덴마크(1972년), 노르웨이(1972년), 스웨덴(1973년), 영국(1973년), 독일(1977년), 캐나다(1983년), 인도(1985년) 등과 이중과세방지협정을 체결했으나 한국과는 그동안 지지부진했었다. 그러나 2014년 7월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가 케냐를 방문해 한-케냐 간 이중과세방지협정, 투자보장협정, 무상원조포괄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의 대對케냐 수출은 2016년에 감소세를 겪었으며, 2017년에도 호전될 것 같지 않다. 2016년 1~11월까지 총 1억4580만 달러로 2015년 동기대비 무려 25%나 감소했으며, 100만 달러 이상 수출품목은 MTI 2단위 품목분류 기준 총 21개 품목으로, 이 중 오직 4개 품목(가정용 전자제품, 섬유사, 섬유원료, 직물)만이 전년 대비 수출이 증가했다. 한국의 대對케냐 주요 수출품은 기타자동차, 합성수지, 기타석유화학제품, 건설중장비, 기타 정밀화학원료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동괴 및 스크랩, 커피류, 화초류, 기타 전자응용기기, 알루미늄괴 및 스크랩 등이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케냐에서 103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바 있으며, 2015년 8월 현재 케냐에는 1,158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무상원조
    한국의 대對케냐 무상원조 사업은 1991~2015년 사이에 총 3,676만 달러가 시행됐다. 2008년 3월 코이카 케냐 사무소 설립 이후 그 규모가 증가해 2011년 약 500만 달러 무상원조 사업을 지원했으며 2015년에는 256만 달러 무상원조 사업을 지원했다. 2016년 대케냐 원조 지원액은 총 45억 원이었다. 현재 국제개발협력 사업 추진 방향은 아시아 중점 기조를 유지하며 아프리카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이나 2014~2015년까지 최근 무상원조 추세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2016년 동아프리카 내 무상지원 순위는 에티오피아 83억 원, 르완다 73억 원, 우간다 46억 원, 케냐 45억 원 순이다.

    한류동향
    전반적으로 한류 기피 추세는 없으나, 음악, 음식, 의료 부분에서 약간의 매니아 계층이 형성됐을 뿐, 한류가 대중적 인기를 끌기에는 아직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한국 선교단체에서 2009년부터 선교를 목적으로 Good News Broad Casting(GBS)이라는 현지 방송을 하고 있으며, 한국 TV드라마 정규프로그램에 포함, 매일 1시간씩 방영 중인데, 한국에 유학하거나 방문한 적이 있는 현지인들에게 한국어 공부 효과 등 인지도를 높이는 중이다. 

    2011년 11월 11일 나이로비에 "세종학당”이 공식 출범 한 후 2012년 3월부터 케냐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서 “한국어검정시험(TOPIK)”을 시행하고 있다. 2013년부터 나이로비 대학교에 한국학과가 정식으로 개설됐으며, 60여 명의 학생이 한국어와 한국문화, 역사 등의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2014년 3월 세종학당은 케냐타 대학(케냐 제2위 국립학교) 한국어 센터를 개설해 한국어 과정을 정식 교과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2015년 6월 현재 수강생은 40여 명 수준이다.

    2016년 10월 주 케냐 대한민국 대사관은 한국문화주간 행사의 일환으로 나이로비 한국 영화제를 개최했다. 과속스캔들, 박수건달, 해운대 등 한국에서 흥행했던 영화들을 중심으로 상영했으며, 4일 동안 약 200명이 참가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및 인터넷 사용에 유리한 중산층 이상 전문직 여성들 중, 한국 드라마와 음악 방송을 시청하는 소수 층이 존재하며, GBS 외에는 공식적으로 한국 드라마가 송출되고 있지 않아 다른 유통경로를 통해서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
    나이로비Nairobi는 마사이족 말로 맛있는 물, 차가운 물을 뜻하는 ‘에와서 나이로비’ 또는 ‘엥카레 나이로비’에서 유래하였다. 케냐 중남부 해발 1676미터의 고원지대에 위치한다. 기후가 서늘하며 상쾌하고 적도에서 남쪽으로 150키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연평균 기온은 18도이다. 아프리카의 도시인 나이로비는 원래 마사이족, 키쿠유족의 거주지였으며 동쪽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인들이 빅토리아 호수와 우간다로 놓은 기찻길이 케냐 고원 앞에 다다르면서 이곳에 중간 기착지를 건설하였고, 아시아 상인들이 옮겨 오면서 훗날 케냐의 수도가 되었다.

    나이로비에서는 매년 ‘지상 최고의 레이스’인 마라톤이 개최된다. 이 마라톤은 영국계 은행이 가장 산소가 적은 도시로 나이로비를 선정하여 벌이는 국가 단위 경기이다. 케냐인이 스포츠 중에서 유독 마라톤만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세계를 석권하는 이유는 2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생활하면서 얻는 강인한 심폐 기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로비는 1890년대 말 철도선로 부근에 식민촌으로 세워졌고, 1899년 그곳에 철도수송 종착지가 생기자 영국 식민지인 우캄바 주의 수도가 마차코스(오늘날의 마사쿠)에서 나이로비로 옮겨졌고, 1905년에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 영국보호령의 수도가 되었다. 1900년경 인도인들이 나이로비에 작은 시장을 세운 뒤, 이 도시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케냐의 시골에서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와 나이로비는 열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나이로비는 1919년에 자치체임을 선언했고, 1954년에는 시가 되었다. 케냐는 1963년에 독립했는데, 새로 제정한 헌법에 따라 나이로비 자치시의 면적이 넓어졌다. 나이로비 지구라고 알려진 이 광역 자치단체는 나이로비 시 참사회가 다스리는 독립된 행정단위이다.

    나이로비는 케냐의 산업중심지이며, 철도는 가장 많은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단일산업이다. 경공업으로는 음료와 담배 및 식품가공 등이 있으며, 관광업 또한 중요하다. 이 도시는 동부 아프리카의 농업중심지 가까이에 있으며, 많은 농산물이 몸바사를 통해 수출된다. 또한 동아프리카 공동체(East African Community)의 철도와 항만 및 항공회사의 본거지로서 동아프리카 국가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제연합의 지역봉사 활동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나이로비는 철도망과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있는 도시이다. 간선幹線은 몸바사와 탄자니아로 가는 남동쪽과 남쪽, 그리고 고지대를 거쳐 빅토리아 호와 우간다로 가는 북서쪽으로 나 있다. 남서쪽에 있는 엠바카시 공항은 아프리카의 국제공항 가운데 하나이다. 주요 건축물로는 근대적인 케냐타 회의소, 국회의사당, 시청, 법원 그리고 로마 가톨릭 대성당 등이 손꼽히며, 잘 설계된 상업지구도 있다.

    케냐의 자존심 커피
    케냐는 에티오피아 인접국으로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커피생산지다. 케냐의 이름을 건 Kenya AA는 세계 최고급 커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진하고 깊은 향과 건포도와 와인을 연상시키는 고급스러운 신맛이 특징으로, 주변의 에티오피아 및 탄자니아산 커피보다 더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그 상큼한 맛으로 인해 아이스커피는 케냐로 정해놓는 커피 전문점도 있을 정도다.

    케냐의 화폐
    화폐는 케냐실링으로 2015년 기준 한국 돈 1000원당 88케냐실링이다. 한국이나 케냐에서 원화와 케냐실링의 환전이 안 되므로 여행 시 유로나 달러로 환전해가는 것이 좋다. 의외로 모바일 뱅킹이 굉장히 잘 발달된 나라로 사파리콤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모바일 뱅킹 서비스인 엠페사(M-pesa)가 엄청나게 흥하고 있으며, 2007년에 사파리콤과 케냐상업은행을 통해 처음 출시된 이후로 급속히 보급되어 현재는 케냐 성인의 70%가량이 이용하고 있다.

    케냐의 사회문제
    빈부격차
    케냐는 빈부격차가 엄청나다. 특히 세계 최대의 슬럼가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코로고쵸(Korogocho)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쓰레기 마을이 뜰 정도로 심각하다.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와 그것을 뒤지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고 ‘현실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래도 케냐는 그나마 중부와 동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람이 살 만한 나라로 꼽히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여기는 내전이 없다는 게 가장 장점이다. 주변 나라들이 독립해서 몇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내전과 쿠데타가 흔한 일상인데도 여긴 유달리 내전이 거의 없다.

    종족갈등
    아프리카의 또 다른 고민인 종족 갈등이 문제이다. 특히 2007년 대선을 전후해서 극심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2007년 대선에서는 키쿠유족 출신의 므와이 키바키 후보와 루오족 출신의 라일라 오딩가 후보가 맞붙었는데, 공식 결과에 의하면 키바키 후보가 47%를 득표하면서 44%를 득표한 오딩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데 선거 이후 부정선거 의혹이 발생하면서 양 민족 간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고, 최대 1500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2013년 대선에서도 키쿠유족 출신의 우후루 케냐타 후보와 오딩가 후보가 다시 맞붙었는데 케냐타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대선에도 부정 선거 시비가 있었으나 다행히도 2007년처럼 대규모 폭력 사태로 이어지진 않았다. 케냐타 후보는 대선 당시 2007년 폭력사태 때 반인륜 범죄 혐의로 ICC에 제소되었으나, 2014년 12월 추가증거 확보 난항을 이유로 ICC가 케냐타에 대한 공소를 철회하였다.

    테러
    주변 국가들의 문제가 케냐로 번지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소말리아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2000년대 들어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또한 문제이다. 2013년 케냐 쇼핑몰 테러로 한국인을 비롯한 61명의 해외 관광객이 사망했기에 해외 관광객도 많이 줄었다. 게다가 알 샤바브가 2015년 4월 2일 케냐 북부 가리사 대학교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난민
    주변에 여러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고 그 주변 나라들에서 내전이 자주 발생하기에 난민들이 많이 모여든다. 유엔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난민촌인 다다브와 카쿠마 캠프가 케냐에 있다. 남수단이나 소말리아 난민들이 많이 있다.

    케냐의 마사이족
    케냐에는 건강한 걸음걸이로 유명한 유목민족인 마사이족이 분포하고 있다. 케냐의 국기에 그려진 방패도 마사이족의 방패이다. 알다시피 마사이 족은 동부 아프리카에 있는 케냐와 탄자니아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 살고 있는 종족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이며 모든 씨족은 남자들이 우선권과 결정권을 가지고 움직인다. 흑인종에 속하며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평균 173cm의 큰 키에 고수머리이다. 피부색은 짙은 갈색이며 말은 마사이 어를 사용한다. 이들의 사회는 많은 부계씨족으로 이루어지지만 전체적으로는 2개의 반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사회통합의 기초는 연령 집단이다. 이들은 같은 성년식 기간에 할례를 받은 다음 하나의 연령 집단을 형성하는데 죽을 때까지 이 연령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맨발로 걷는다고 알려진 마사이족의 워킹이 디스크를 예방하는 등 몸에 좋다고 해서 이를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세교정 기능성 신발의 일종인 마사이워킹 슈즈가 2천 년대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마사이족들은 대부분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나 조리를 신으며 우리가 마사이워킹 슈즈라 알고 있는 신발은 스위스 기업에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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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