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 충주忠州 지씨池氏


    성씨의 유래


    뿌리공원에 새겨진 충주 지씨 유래
    시조 선의공宣懿公 지경池鏡(903~1003)은 송宋나라 단명전端明殿 태학사太學士로서 960년(고려 광종 11년)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관직이 금자광록대부 태보평장사金紫光祿大夫太保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다. 그 6세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지종해池宗海는 충원백忠原伯에 봉封하여져 충주가 관향이 되었으며, 또한 6세손 평장사平章事 지중익池重翼은 겨드랑이에 인갑鱗甲이 있어 어魚씨로 사성賜姓을 받아 충주忠州 어魚씨로 분파하였다.

    지씨는 고려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고려 말 지문사걸池門四傑이라 하여 원의 세력과 왜구, 홍건적 등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 상원수上元帥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 형제 및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 등이 있다.

    조선조에도 효행孝行 충절忠節 문학文學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던 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판결사判決事 지하복池河福, 분의장奮義將 지달원池達源,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철산도호부사鐵山都護府使 지여해池汝海, 충성군忠城君 지계최池繼催 등이 있고, 개화기에는 종두법種痘法을 보급하고 자전석요字典釋要를 편찬한 선각자 한성부윤漢城府尹 지석영池錫永과 조국 광복에 헌신한 광복군총사령관光復軍總司令官 지청천池靑天 등이 있다. (참고-대전 뿌리공원)

    성씨의 변천


    시조 지경池鏡
    시조 지경池鏡(903~1003)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弘農(하남성 영보지방)의 기주岐州 주악산周樂山 아래에서 당 소종昭宗 3년(903)에 출생하였다. 5대(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혼란기를 지나 960년 송이 대륙을 평정하던 시기에 송이 파견하는 사신으로 단명전端明殿의 팔학사八學士와 더불어 고려국에 왔다가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를 추진하고 있던 광종光宗의 간청에 의해 귀화하였다. 고려에 정착하여 지배 계급으로 기반을 닦았고 만년에는 중화당악(현 평안남도 중화군 당정면 당촌리)에 살았다고 전한다. 그 지명도 당에서 온 귀화인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계해癸亥 10월 15일 해시亥時에 태어나 사주가 사계해四癸亥라 하며 계묘(서기 1003년) 9월 9일에 수 101세로 졸卒(사망)했다고 한다. 어느 족보에는 공이 동래할 때에 신경辛鏡, 홍경洪鏡, 곽경郭鏡, 노경盧鏡, 장경張鏡, 이경李鏡, 원경元鏡 등 칠학사七學士와 더불어 같이 오면서 호를 팔경八鏡이라 하였다 한다. 현재 영산靈山 신씨辛氏, 현풍玄風 곽씨郭氏는 시조의 휘가 경鏡이고 여타 성씨는 이들 후손으로 추정되는 분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이전 역사 속의 인물들
    지씨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신라 초기 호족 지충강池忠江이라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지충강은 충주 지씨의 시조인 지경보다 973년 전인 신라 시대에 한반도에서 이미 터를 잡고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에는 신라 진성여왕 시대인 서기 892년경에 기록에 등장하는 지훤池萱 장군이 있다. 현재 광주 지씨에서 지훤을 시조로, 지충강을 원시조로 모시고 있다.

    당시 무진성 성주(전라도 광주 지역) 지훤池萱은 후백제 왕 견훤의 사위로서 후고구려 왕건과 끝까지 싸워 이겼다는 사실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 박영규(순천 박씨 시조)는 지훤의 손아래 동서이다. 광주의 토착 세력이었던 만큼 고려 건국 후 왕건의 고려 정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였으나 유화 정책으로 인해 후손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왕의 호위대장으로 2만 명의 장졸들과 평양성을 끝까지 지키고자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한 지명천池明天 장군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 기록이나 계대系代를 찾을 길이 없어 역사의 그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한편 중국 문헌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는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 하북성)에서 나서 거주지居住地의 이름으로 성을 삼으니 치음徵音에 속한다’고 하였다.

    고려 시절의 지문사룡池門四龍
    지경의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부의 정2품)를 지내고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한편 충주 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忠州 어씨魚氏로 성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지경의 6세손이다. ‘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에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지낸 지해관池海貫과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를 지낸 지도관池道貫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로 안렴사安廉使(지방장관)를 지낸 지윤池胤, 부원수副元帥를 지낸 지영池瀛 형제가 있다. 부원수 지영의 아들에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지득상池得尙과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지응상池應尙이 있으며 지득상의 손자가 평장사平章事 지종해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池重翼, 즉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어중익魚重翼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지씨는 고려조에 36명의 평장사를 배출하여 명문거족으로 발전하였는데 고려말 지문사걸池門四傑이 유명하다. 이는 원의 세력과 왜구, 홍건적 등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찬성사贊成事(정2품 부총리) 지윤池奫, 상원수上元帥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 형제 및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 등을 일컫는 말이다. 지윤池奫은 우왕 때 서북면도원수都元帥(전시에 두던 임시 총사령관)가 되었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정2품 재신 반열 부총리)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특히 지용수池龍壽는 고려 공민왕 때 서북면병마사로 홍건적을 물리쳐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또한 지용기池湧奇는 고려 우왕 때 이성계 휘하에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후에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에 봉해져 가문을 빛냈다.

    본관과 분파 현황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지씨는 충주忠州, 단양丹陽, 광주廣州 등 89본까지 전하나 충주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현재는 충주忠州 지池씨 단본만이 존재한다. 주요 파명派名으로는 참의공윤원파參議公允源派, 충성군계준파忠城君繼准派, 경력공윤온파經歷公允溫派, 소윤공호파小尹公浩派, 현령공명파縣令公溟派, 익안군대파翼安君臺派, 감역공을현파監役公乙賢派, 군사공덕용파郡事公德龍派, 태학사공용하파太學士公龍河派, 주서공정파注書公淨派, 찬성공윤파贊成公奫派, 상원수공용도파上元帥公龍圖派, 절제공봉원파節制公逢源派, 상원수공용수파上元帥公龍壽派, 군사공백파郡事公栢派, 감찰공결초파監察公結楚派 등이 있다.

    충주 지씨의 세계는 크게 11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40여 파로 분파된다. 11대파는 충의군파忠義君派 충무공파忠武公派 충의공파忠義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주서공파注書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판형공파判形公派 주서명천공파注書明川公派 봉사영흥공파奉事靈興公派 낭장공파左營公派 등이다. 이 가운데 충주 지씨의 주축을 이루는 충의군파忠義君派 충무공파忠武公派 충의공파忠義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는 전체 충주 지씨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지석영 가문과 현대의 인물들


    효행, 충절, 문학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던 충주 지씨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판결사判決事(노비문서 등을 관장한 장례원의 정3품) 지하복池河福, 분의장奮義將 지달원池達源과 별장別將을 거쳐 철산도호부사都護府使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국방장관)에 추증된 지여해池汝海 등이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이다.

    문장에도 뛰어나 학명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지달원池達源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 최배천 등과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이밖에 충성군忠城君 지계최池繼催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지덕해池德海는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다. 충주 지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10명, 무과에 39명, 사마시(생원, 진사를 뽑는 시험)에 31명, 역과譯科에 1명, 음양과陰陽科에 14명, 율과律科에 5명 등 10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의학과 한글에 큰 업적을 남긴 지석영 가문
    구한말의 충주 지씨 인물로는 천연두(시두) 퇴치와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문체 변혁이라는 두 개의 큰 선물을 현대인에게 안겨준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 유명하다.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그 해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種痘를 시행했다. 1895년에는 관립의학교 초대 교장을 지내고 1899년에는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이후 10년간 의학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한글 보급에도 힘써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였다. 이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져 공포되었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옥편의 효시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 연구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1917년에는 조선병원 원장에 취임하니 의학과 국문학에 걸쳐 달통한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다. ‘지석영국문법’을 토대로 1933년에 나온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의 형인 지운영池運永(1852~1935)은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불리워졌으며 유불선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했다. 1884년(고종 21년) 사대당事大黨 수구파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김옥균, 박영효를 암살하려다 붙잡혀 영변에 유배되었다. 지운영이 이곳에서 은거할 때 바윗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 귀龜 자를 새겨 놓았는데, 그 우측에는 ‘관음몽수장수영자觀音夢授長壽靈字’, 좌측에는 ‘불기 2947년 경신 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佛紀二千九百四十七年庚申重陽佛弟子池雲英敬書’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지운영이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 1920년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유배 후 삼악사 위에 백련암을 짓고 기거하며 운영雲英으로 개명하고 미술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지석영의 부친 지익룡池翼龍은 한의학에 정통했고, 지석영의 큰아들 지성주는 1919년 경성의전(내과 전공)을 졸업한 후 개업했는데 1927년과 1928년에 동아일보에 독자를 위한 의학 관련 기사를 실을 정도로 장안의 명의로 소문났다. 그의 장남 지홍창池弘昌은 서울의대를 나와 군의관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바 있다. 또 지홍창의 장남 지무영은 가톨릭의대를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에서 지내과의원을 경영하고 있으니, 고조부로부터 따지면 5대째 의사 가문인 셈이다. 지무영 원장은 그동안 소장해 오던 지석영의 유품 133점을 지난 2007년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 기탁했다.

    현대 인물과 집성촌
    그 외 현대사의 주요 인물로는 천주교 원주대교구장을 지내면서 사회 운동은 물론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한 지학순 주교, 국립묘지 터를 잡은 역술계의 거목 지창룡, 17대 국회의원과 전남대 총장을 지낸 지병문, 전 여성부 장관과 덕성여대 총장을 역임한 지은희가 있다. 정치인으로는 국회의원과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지연태, 지갑종, 지대섭 전 국회의원, 배우 심은하의 남편으로 유명한 바른정당 대변인 지상욱 의원이 있고, 기업인에서는 삼성스포츠 지대섭 사장, 대명루첸 지승동 회장, 한성실업 지성한 회장이 있다. 법조계에는 전 대법관 지창권, 현 대전 고등법원장 지대운이 있으며, 연예인으로는 지창욱, 지진희, 지석진, 지상렬, 지일주가 있고, 스포츠 분야에는 축구 선수인 지동원과 지소연, 프로야구 선수 지석훈 등이 있다.
    집성촌은 광주 등 전라도 지역에 많다. 후백제 견훤의 사위 지훤池萱의 후손들과 고려말 지용기池湧奇 장군이 왜구를 격퇴하면서 거주한 덕에 그 후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일제 때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려 말 충신 정몽주, 고려 말 공신 지용기, 조선조 공신 정충신, 조선조 충신 지여해, 지계최 장군 등 5인을 향사하는 광주 병천사秉天祠가 유명하다. 그 외 충청도 청주, 괴산, 아산, 서산, 부여, 경기도 양평, 이천, 고양, 양주, 경상도 남해, 창원, 통영, 강원도 원주 홍천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軸馬骨皮, 그 오해와 진실
    항간에는 ‘천방지축(추)마골피’라는 성씨가 천계賤系라는 속설이 떠돌아다닌다. 원래 ‘천방지축’이라는 말은 못난 사람이 종작없이 덤비는 경우를 말하는데, 특정 성씨가 천한 혈통이라는 이 속설도 그러한 말투와 비슷한 성씨를 호사가들이 갖다 붙인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이는 성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근거도 없는 말이다. 지금까지 지地 축軸 골骨은 성씨로 쓰인 사실이 없으며, 다만 비슷한 용어와 음을 가진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곤 하였다. 천·방·마·피의 경우에는 유래가 뚜렷한 성씨임에도 불구하고 오랑캐의 후손이라는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천민은 성이 없었다. 성姓이 있다는 것은 천민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이 보편화된 것은 갑오경장(1894) 때로 이 시기에 전 국민이 성을 갖게 되었으며(그 전에는 약 30%만 성을 보유), 1909년 일제에 의해 민적법民籍法으로 호적이 정리되면서부터는 천민들도 주인의 성을 쓰거나 원하는 성으로 호적을 등록하여 누구나 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천민이 성을 갖게 될 때, 김金 이李 박朴 등등 기존의 대성大姓이거나 보편적인 성씨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유명 성씨는 더욱 흔해지게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민임을 숨겨야 하기에 흔한 성을 쓸 수밖에 없었고 인구수가 적은 성을 쓸 까닭이 없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이들이 입지 보전책으로 퍼뜨린 유언비어란 설이 있고 일제가 조선 민족 간의 이간질을 위해 만들어 낸 루머라는 이야기도 있다.

    ‘천방지축마골피’와 발음이 유사한 성씨의 인물들 중 높은 벼슬을 한 분들이 상당히 많다. 천天씨는 밀양 등 6개 본관에 8,416명(2000년 인구조사)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天命翊이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이 있고, 영양潁陽 천千씨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千萬里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을 받았으며, 방方씨는 고려 공민왕 때 온양부원군에 봉해진 방절方節, 조선 중종반정 뒤에 대사헌을 지낸 방유령方有寧, 이순신 장군의 장인인 보성군수 방진方震 등이 있다. 한자가 다르지만 지池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맞사돈을 맺을 정도로 고려 말 높은 관직에 있었다. 마馬씨(장흥 마씨)는 백제 개국공신 마려馬黎가 시조이고, 피皮씨(홍천 피씨)의 시조 피위종皮謂宗은 중국 송나라의 장군이며, 축軸씨와 골骨씨는 개화기 이후 사라져서 현재는 없는 성씨이다. 이렇게 볼 때 이들 성씨는 모두 고려 이전부터 존재했던 귀한 성씨였던 것이다. 단지 소수였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70%의 성이 없던 천민들이 흔치 않았던 이들 성을 택하지 않았으므로 순수 혈통이 그대로 보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충주지씨 대종회
    통계청 홈페이지
    위키 백과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2017년 1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