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

    [가가도장]

    믿음이 행복이 되는 도심주, 조화도방(곽용삼, 최영미)


    상제님 진리는 우주주재자의 절대 진리요 조화 진리다. “믿으려면 크게 믿어라. 믿음이 없으면 신명들이 흔드느니라.” 하신 상제님의 법언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신앙의 지표가 곧 믿음의 보증이 되는 것이 불변의 철칙이라면 구태여 믿음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은 그 속성상 본질을 쉽게 측량하거나 계량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신앙 혹은 믿음은 전적으로 신념과 의지와 영성과 신령한 교감이 함께하는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여기 자신에게 밀어닥친 일련의 독한 시련을 영성이 충만한 믿음으로 치환하여 조상과의 영적 교감을 이루고, 신앙으로 해야 할 일을 진리의 약속으로 확신하고 주저 없이 실행하는 도생이 있다. 별로 특이할 게 없는 사람으로 비칠지는 몰라도, 그가 말하고 행하는 신앙 행위를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공감의 지지를 보내거나 신앙의 본질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한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진리의 절대성을 온전히 펼쳐내는 무대와 같다. 그것은 고민스런 일도 치장할 일도 움츠러들 일도 아니다. 오직 진리가 명하고 밝힌 그대로를 굳게 믿고 실천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이번 도방 취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새삼스런 사실을 확인해 볼 생각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진리와 신앙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우직하게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군산조촌도장 곽용삼(남, 61세, 교무녹사장), 최영미(여, 57세, 종감) 부부 도생의 이야기다. 부부가 공히 25년의 신앙 역사를 걸어온 선참 신앙인으로 식품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고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다. 곽용삼 도생은 도장에서 부포감으로 봉직 중이기도 하다.

    지난 11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취재진은 전북 군산시 나운동에 위치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9층 가정도장에 들어서서 두 부부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큰아들 곽명근(남, 30세, 교무종감), 둘째 아들 곽알찬(남, 27세, 도감), 셋째 아들 곽채운(남, 27세, 도감) 도생은 모두 타지에 취업해 분가 상태이므로 집에는 곽 도생과 최 도생 두 분만 거주하고 있다.

    거실 옆에 독립된 방 하나를 도방 전용으로 쓰고 있는데, 원목 형태의 깔끔한 단 위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이 크게 모셔져 있고 좌우로는 태을주와 태상종도사님 존영이 위치해 있다. 왼편에 별도로 이어진 백색 단 위에는 조상 선령의 위패가 따로 모셔져 있다. 다소 아담해 보이지만 천신단이 조밀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고 도방의 분위기 또한 안정감이 느껴지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도방에서 예를 표하고 나서 취재진은 부부 도생과 거실에 마주 앉아 신앙에 대한 기본 생각과 진리를 만나고 정착하는 그간의 과정, 그리고 강력한 태을주 체험과 포교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연이 담긴 신앙 스토리를 차례로 펼쳐 보았다.


    진리로 인도하는 선령의 손길


    집안의 공덕과 환경이 말하는 것
    곽용삼 도생은 경기도 동두천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셨던 관계로 곽 도생은 전국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익산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전주에서 수학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취업을 하여 사회에 진출하면서부터는 서울에서 생활을 했다. 곽 도생은 평소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신념이 강하고 어려운 난관에 처하더라도 굳건한 의지와 남다른 정성으로 극복해 내는 저력을 지녔다는 중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성장 과정에서 거주 지역 이동으로 인한 복합적인 생활 환경 체험과 가장으로서 올곧은 군인의 길을 걸으셨던 부친의 가풍 등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최영미 도생은 전북 전주에서 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충남 서천의 종천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으며 학창 시절은 군산에서 보냈다. 최 도생의 외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 알려진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독실한 보천교 신앙을 했던 집안이었다. 때문에 최 도생의 어머니는 15세가 되어 결혼으로 출가하기 전까지는 보천교의 신앙 문화를 생활 속에서 배우고 익히며 살았다. 하지만 시집을 가고 생활 영역이 달라지면서 외가 쪽의 신앙은 묻혀지고 종교적 성향도 달라져 오랜 시간 동안 교회 권사로 봉직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막내아들의 권유로 증산도 신앙을 하게 되면서 보천교 신앙의 맥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아울러 최 도생의 부친은 남에게 음덕을 많이 쌓은 드문 호인이었다고 한다. 남의 처지가 딱하다 싶으면 논도 사 주고 땅도 사 주고 하는 일이 많았다는 일화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부모가 쌓은 이러한 공력과 음덕 때문일까. 최 도생이 곽 도생을 만나고 증산도 신앙도 하게 된 것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첫눈에 반한 만남과 결혼 스토리
    곽 도생이 상제님 진리를 만난 것은 아내인 최 도생과 만나 교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첫눈에 반해 곧바로 결혼을 떠올린 사건도 모자라 배필만큼이나 애정을 쏟으며 평생을 함께하고 있는 진리 또한 운명처럼 같이 다가온 것이다. 그 사연을 옮겨 보자면 이렇다.

    곽 도생은 1984년 12월에 OO그룹에 취직을 하였고 서울 방학동에 있었던 그룹의 본사에 근무를 하게 되면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때에 곽 도생의 둘째 여동생이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는 언니와 살고 있는 전주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근처에 최 도생의 둘째 언니가 거주하면서 딸을 그 피아노 교습소에 보내고 있었다. 당시 최 도생은 둘째 언니 집에 자주 다녔고, 곽 도생의 여동생은 친구와 친구 언니에게 오빠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이야기가 최 도생의 둘째 언니한테 전해졌고 이를 계기로 곽 도생과 최 도생은 맞선을 보게 되었다.

    곽 도생은 최 도생과 만난 날짜와 장소까지 생생히 기억하면서 당시의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맞선을 보기로 정해진 날이 1986년 4월 13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전주 시내에 있는 '고려당'이라는 빵집에서 오후 2시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요. 제가 먼저 가서 문을 바라보고 앉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어떤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그 순간 바로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어요.”

    그것은 서로의 인연을 상징하는 신호와도 같았다. 만남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탓에 두 사람의 교제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흘러갔다. 곽 도생과 최 도생은 1년간의 교제 기간을 거친 후 1987년 5월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사회 생활의 시련과 좌절
    곽 도생은 결혼하기 전 아내와 교제하는 동안에 막내 처남(군산조촌도장 최학우 도생)으로부터 파란색 표지의 책, 『다이제스트 개벽』을 한 권 받았다. 평소 책읽기를 즐겨했던 곽 도생에게 이는 증산도 진리에 입문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회사 일이 발목을 잡았다. 그때는 회사 업무가 폭주하던 시기였고 의욕적으로 일에 몰입을 했던 곽 도생은 너무 바빠서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한 달에 20일은 야근을 할 정도로 정신없이 지냈던 탓에 책을 받았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3년이 지나 대리 진급 시기를 맞아 아무런 이유 없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본사 기획실과 관리본부에 근무하던 동기생 18명은 한결같이 “용삼이 너는 반드시 승진할 거야, 좋겠다.”라고 말했고, 입사 시에 1등으로 합격한 이후 그동안 업무에서 많은 인정을 받았던 곽 도생 또한 승진을 기대하며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8명 중에 16명이 승진을 하고 곽 도생을 포함해서 단 2명만 탈락을 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 들어야 했다. 함께 탈락한 동기가 인사과에 근무하여 알아보니 승진한 16명 모두는 소위 백back이라 불리는 뒷배경을 통해 입사했고 탈락한 2명만 정식 공채를 통해 입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된 말로 출신 성분 때문에 승패가 갈린 셈이었다.

    너무도 큰 좌절과 허망함을 느낀 곽 도생은 그때부터 회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했다. 노력과 성장에 대해 품었던 당연한 기대와 꿈이 깨어지면서 다가온 것은 부당한 현실과 환멸감뿐이었다. 이전에는 ‘회사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생각으로 성심을 다해 근무를 했지만, 일말의 희망과 비전조차 갖기가 힘든 현실을 마주하면서부터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고 했다. 실의에 빠진 곽 도생은 생계 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그럭저럭 근무를 하다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자신의 사업을 해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0년 그룹에서 호텔업에 진출을 하면서 회사 창업 사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접하게 되었다. 곽 도생은 신설 회사에 가서 창업 멤버로 근무하면 대리 승진에서 1년 뒤진 것을 따라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응모해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1990년 2월부터 이천 OOO관광호텔에서 직급은 대리이지만 직책은 기획 및 자금 담당 과장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1992년 봄을 맞아 과장 진급 시기가 되었는데, 곽 도생은 또다시 정식 과장 진급을 하지 못하고 과장 직무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좌절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당시 곽 도생은 1991년 11월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들 얼굴을 자주 못 봐서 얼마 동안 쌍둥이 얼굴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한 결과 간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승진의 장벽을 마주하면서 회사 생활에 다시 환멸을 느낀 곽 도생은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아 한 1년 정도 쉴 생각으로 4월에 사표를 던지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드디어 운명을 바꾼 책을 읽다
    그렇게 집에서 쉬면서 지내던 바로 그때 심심해서 읽을거리를 찾던 곽 도생에게 파란색 표지에 노란 글자의 표제가 선명한 『다이제스트 개벽』 책이 눈에 띄었다. 5년 전에 막내 처남으로부터 받았던 그 책이었다. 곽 도생은 그 책이 집안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했다.

    “책을 읽고 가장 놀란 것은 지구 1년처럼 우주에도 1년이 있으며, 우주의 사계절은 지구 지축의 기울기가 변화함에 따라 지구의 1년 일수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1년은 365와 4분의 1일이라는 고정 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제가 두꺼운 껍질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 들었습었다. 『다이제스트 개벽』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저는 관련 책을 사서 다 읽고 난 후에 상제님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곽 도생의 말 그대로 그 책은 경이로움을 넘어 진리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제까지 의식 속에서 작동하던 기성 관념과 사고 방식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그 자체였다고 표현할 만큼 진리와의 인연도 특별하고 강렬했다.

    곽 도생은 인도자인 막내 처남 최학우 도생과 함께 온 가족을 이끌고 1992년 7월 서울동대문도장을 찾아갔다. 그때는 서울 상계동에서 제과점을 하기 위해 서울 노원구 중계동으로 이사해서 살고 있었고, 최학우 도생은 개업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 잠시 곽 도생의 집에 와 있던 때였다.

    처음으로 일요일에 도장을 방문해서 주문을 읽는 중에 곽 도생은 신기한 체험을 하였다. 집에서 주문 수행을 조금 했던 경험이 있어서 어느 정도 주문을 알고는 있었지만 틀리지 않으려고 일심으로 집중하며 주문을 읽고 있었는데, 칠성경을 읽는 중에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발밑으로 주문을 읽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깜짝 놀라서 이게 뭐지 하는 순간 밑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들면서 상황이 끝났다. 말로만 듣던 유체이탈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동대문도장은 젊은 대학생 위주의 도장이어서, 5살 큰아들과 2살 된 쌍둥이 아들을 둔 가족이 신앙하기에는 도장 분위기가 맞지 않다는 판단을 한 곽 도생 가족은 다시 의정부도장에 찾아갔다. 다행히 의정부도장은 가족 단위로 신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아이가 셋인 가족이 신앙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을 하고 드디어 1992년 10월 14일, 음력 9월 19일 상제님 성탄절에 온 가족 5명이 동시에 도문에 입도를 하였다. 당시에 가족이 한꺼번에 입도한 것은 처음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입도한 곽 도생은 비로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입도와 관련된 감회도 그중 하나였다. 입도 후에 진리 공부를 해 보니, 조상님들께서 자신이 회사 생활에 너무 바빠서 책을 읽지 않으니 온갖 고난과 시련을 내려서 회사를 그만두도록 이끌어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의 시련 끝에 안착한 개벽의 땅


    선령 제사를 다시 모시고
    어렵고 힘들게 상제님 진리를 만나 입도를 한 곽 도생은 자영업으로 새롭게 출발한 제과점 개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며 장사가 아주 잘되는 호황을 누렸다. 또한 아침 저녁으로 봉청수를 하고 수행하는 신앙 생활이 재미있고 즐거웠다고 한다. 처음 입도하고 1년간은 오전에 500배례 오후에 500배례를 하는 방식으로 매일 1천 배례를 올리는 정성을 지속했다. 1992년 7월 상계동에 제과점을 개업하고 첫 1년은 바빠서 도장을 정기치성 이외에는 가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나서는 매일 도장에서 새벽수행을 하였다. 제과점 내 진열대 위에 도장에서 자체 제작한 패널을 죽 걸어 놓고 진리 홍보를 하였다. 남이 보든 안 보든 상제님 진리에 대해 알릴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입도하고 나서 곽 도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상님 제사를 다시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4대 장손인 곽 도생이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제사를 잘 모셨는데, 어머니가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언제부턴가 제사를 모시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곽 도생은 부모님 몰래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고조부모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지내지 않던 제사를 그것도 공개적이지 않은 형태로 모시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힘들고 번거로운 점이 많았다고 한다. 곽 도생은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상님 제사를 잘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가 애써 준 덕분이라며 최 도생에게 너무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음을 고백했다. 이후 곽 도생은 직선조, 외선조 천도식을 바로 올려 드렸다고 한다.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상제님 진리를 만났으니 조상님들을 천도해 드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주가 아닌 군산으로 가라
    1년쯤 지나서 제과점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부터 곽 도생은 도장에서 지금의 집정에 해당하는 총무 역할을 맡아 봉사를 했고 새벽 수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즈음 두 번째 시련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곽 도생은 2년이 지나서 가게 재계약을 하고난 후, 가게를 처분하고 전주로 내려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가족을 먼저 전주로 내려 보냈다. 곧 가게를 처분하고 뒤따라 내려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가게가 팔리지 않아 가족을 다시 서울로 불러 올려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군산으로 가야 했는데 전주로 가려고 했으니 조상님께서 그 행로를 제지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나 1996년에 재계약을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게 주인이 재계약을 해 주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2억 5천만 원이나 들여서 개업한 가게를 보증금 5천만 원만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빚만 떠안고 나오게 된 곽 도생은 잃어버린 것을 만회하려고 다시 여기저기에서 돈을 융통해 그 해 8월에 서울 중계동에 탕수육 전문점을 차렸다. 이 가게는 주문이 밀려 배달을 못할 지경일 만큼 장사가 너무 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 11월부터 외환 위기로 인해 매출이 급감해서 10% 수준으로 떨어지는 위기가 닥쳤고 결국 12월에 가게 문을 닫고 말았다. 거기에서 더 많은 빚을 지게 된 곽 도생은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우선 급한 빚을 일부 갚고 지방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처음에는 익산에 사시는 부모님께 찾아갔으나, 증산도를 신앙하는 한은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쫓겨나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참으로 암담하던 그 시기에 예기치 않은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군산에 있는 큰 처남이 중심이 돼서 돈을 모아 홀로 사시는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조건으로 아파트를 얻어 준 것이다. 그렇게 하여 곽 도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군산에서 살게 되었다. 이후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오면서 결국 자신의 인연은 이곳 군산에 닿아 있음을 곽 도생은 재삼 확인하게 된다고 했다.

    정성과 열성이 빚어낸 활로
    1997년 4월 군산에 내려와서 살 집은 마련을 했지만, 곽 도생은 두 번의 사업 실패로 인해 진 빚에 대한 원리금으로 한 달에 7백만 원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수중에는 돈이 없고 뚜렷한 소득원도 없어서 경제적으로 몹시 힘든 입장이었다. 거기에다 간이 다시 나빠지고 누워서 배를 만져 보면 계란 노른자만 한 딱딱한 멍울 열댓 개가 만져지는 건강 이상도 감지가 되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곽 도생은 상제님 진리가 없었다면 아마 사회 뉴스 면에 온 가족의 자살 기사가 실렸을지도 모를 만큼 완전한 암흑이었다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곽 도생은 자신이 할 일은 우선 건강을 되찾는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을 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경제력을 갖고 빚을 갚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열과 성을 다해 매달렸다. 처음에는 쌀 장사부터 시작해 셈베과자와 멸치 장사를 거쳐 1998년부터는 건강보조식품 판매에 종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삶에 대한 정성과 열정에 호의를 가진 분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일도 생겼고, 만나는 사람마다 성심으로 대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진정한 내면의 자기 치유와 보람을 경험하기도 했다.

    두 번의 시련을 거치며 군산으로 내려와 살게 된 지 어느덧 올해로 만 20년이 지났다는 곽 도생은 최악의 환경에서 일어선 자신과 같이 여러 어려움을 많이 겪은 군산도장 또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지금에 이른 것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 아울러 그 고난의 과정에서도 서로 믿고 위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따뜻하게 신앙을 했던 도반들이 기억에 남는다고도 했다. 곽 도생은 25년간의 신앙을 해 오면서 별로 이루거나 내세울 것은 없지만, 온 가족이 변치 않고 신앙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신 조상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절실했던 도방, 삶의 행복으로 자리잡다


    기적처럼 도방을 마련하고
    과거 곽 도생 부부에게 가정도방은 꼭 성취해야 할 신앙의 꿈이자 목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늘 정갈하고 도기로 충만한 도방을 갖기를 소망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참 어려웠다고 했다. 곽 도생의 경우에는 아들이 셋이라서 방이 4개는 있어야 하는데 방 4개짜리 집을 구하기가 참 힘들었다. 지금의 방 4개짜리 집을 구해 도방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방이 3개밖에 안 돼서 안방 한 쪽에 천신단을 모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2016년에 이사를 가기 위해 그 전년도부터 여기저기 많이 알아보았지만 가지고 있는 돈이라고는 그때 살고 있던 아파트 보증금 1200만 원이 전부였고, 그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방 4개짜리 집은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도방을 마련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방 4개짜리 집만 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금 살고 있는 나운동 삼성아파트가 비어 있어서 구경을 해 보니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너무 비싸게 나와서 형편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있다가, 왠지 마음이 떠나지 않아 다시 한 번 더 둘러본 후 중개사를 통해 보증금과 월세를 할인해 줄 수 없느냐고 주인에게 의사 타진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응답을 해 와서 드디어 2016년 4월에 기적적으로 이사를 하고 꿈에 그리던 도방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하다는 곽 도생 가족은 그만큼 신앙을 잘 보전하고 발전시켜 가라는 의미로 조상님께서 내려 주신 귀중한 선물로 여기고 있다.

    도방은 행복의 도심주이자 핫라인
    곽 도생 부부에게 그렇게 소중한 도방이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물었다. 곽 도생은 이에 대해 “도방은 한마디로 천지일월 사체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hotline”이라는 대답을 했고, 최 도생은 “상제님 태모님 그리고 조상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며, 내 마음의 도심주이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산실”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으로 애정을 짙게 드러냈다. 이토록 소중함으로 채워 나가고 있는 가가도장의 상황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 이 가족은 특별히 ‘가족 카톡방’을 만들어 운영 중이기도 하다.

    진리의 인연을 만드는 부단한 길


    “너는 증산도를 해야 한다”
    곽 도생은 진리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포교에도 열의를 다했다. 가족 모두를 도문에 인도했고, 지인과 친척 및 개척 등 그 유형을 가리지 않고 활동을 벌여 포교를 성사시켰다. 포교한 분들 중에는 2002년에 입도한 갑인생 이준혁 도생이 있다. 현재는 여러 사정으로 도장 참여가 부진한 상태이지만 워낙 조상님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셔서 반드시 회복될 것을 확신한다는 분이다. 이준혁 도생은 사업을 위한 세미나장에서 만났다. 곽 도생이 그때 회사의 제품에 대해 강의를 했었는데 그것에 대해 이준혁 도생이 좋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 2001년에 회사에서 사업우수자를 괌으로 여행을 보내 준 곳에서 다시 만나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제품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는 가운데 너무도 열정적으로 대화가 이루어져서 곽 도생은 하루 종일 다른 프로그램에 참석하지 않은 채 사업 전반에 걸쳐서 개인 강의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진 후 같이 사업을 하는 파트너가 되었고, 매달 사업 협의차 만나는 과정에서 진실된 사람임을 알게 된 곽 도생이 마침내 상제님 진리를 전하게 된 것이다. 이준혁 도생이 입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두 가지의 신기한 체험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준혁 도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나타나서 너는 증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너무 신기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곽 도생은 조상과 자손의 관계에 대한 도전 말씀을 소개하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렇게 점점 무르익어 가던 어느 날 또다시 전화가 왔다. 아침 출근길에 아리랑 노래가 들려오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갑자기 곽 도생이 보내 준 그 전달 <월간개벽>에서 읽었던 아리랑의 의미가 떠오르면서 입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바로 구미원평도장에 연락해 준비 과정을 거친 후 2002년 6월에 입도를 하게 되었다.

    정성이 이어 준 포교 인연
    현재 군산조촌도장에서 같이 신앙하고 있는 김숙례 도생도 곽 도생이 포교한 분이다. 김 도생을 처음 만난 것은 〈전주 환단고기 북콘서트 〉홍보 현장이었다. 2013년 3월에 전주에서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개최하기로 확정된 후, 곽 도생은 2012년 겨울부터 시내 전역에 콘서트 홍보지를 붙이고 다녔다. 사업차 소비자를 만나러 가서도 홍보지 붙이기 좋은 곳이 있으면 늘 붙이고 다녔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온 가족이 다 같이 나가 아파트 가가호호에 홍보지를 부착했다. 홍보는 잘 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사업은 너무 안 되고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 제물치성을 올렸다. 그 결과로 사업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지만 홍보지를 보고 연락이 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군산대 앞에 있는 아파트에 홍보지를 부착하고 있는데, 어떤 여성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참 좋은 일을 하신다면서 자기도 같이 홍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만나 보니 그 이전에 우연히 상생방송을 보고 『환단고기』를 알게 되었고, 그 책을 구입해 읽기도 한 분이었다. 이 분과 함께 홍보를 한 결과 참가 대상자 9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김숙례 도생을 포함한 2명이 북콘서트에 참석을 했고, 2년의 시간 끝에 최종적으로 김숙례 도생이 입도를 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쌓여 열매를 맺는다면
    그런가 하면 2004년에는 군산 은파호수공원 주변 길에서 홍보 영상 차량으로 영상을 보여 주면서 40~50개의 패널을 펼쳐 놓고 책을 대여해 주는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어떤 남성이 『다이제스트 개벽』 책을 빌려 간 후 한 달이 훨씬 지나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가지고 온 책을 보니 너무 읽어서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자기가 그동안 증산도를 사이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증산도가 우습게 볼 데가 아니더라고 하면서 책을 낡아지게 만들었으니 자기가 사겠다고 하면서 구입해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8~9개월 정도 활동을 하고 그만두었는데, 나중에 군산 사람 중에 거기에서 증산도를 알게 되었다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곽 도생은 비록 그 현장에서 열매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후에 다른 도생이 진리 수렴을 하게 된다면 그것도 또한 좋지 않겠느냐며 그렇게 여러 사람의 노력이 쌓여서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최 도생의 경우에는 생업으로서의 사업을 영위하면서 포교에 대한 열망은 갖고 있었지만 종교적 편중이 심한 지역 특성에 따라 인맥을 상대로 포교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차후에는 여러 여건들과 상황을 정비한 후 맹렬히 활동에 나서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저에게 시련은 사람 살리라는 천명입니다


    곽 도생은 인터뷰 말미에 지난 신앙 과정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비교적 긴 소회를 밝혔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과 신앙, 그리고 향후의 계획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여기에 인용을 하고자 한다.

    “제가 1997년에 군산으로 내려와서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를 아주 철저하게 궁지로 몰아서 군산으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조상님께서 저를 군산에서 쓰시기 위해 이곳으로 끌고 내려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마 제 수중에 지하 단칸방을 얻을 수 있는 돈만 있었어도 서울에서 그냥 살았을 것입니다. 수억 원의 빚을 지고 한 달에 원리금만 7백만 원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찔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기도를 한 것이 ‘개벽 1번지 군산에서 개벽 상황을 천지공사 프로그램 그대로 집행하는 데 필요한 200개의 의통구호대와 그 200개의 의통구호대를 수용할 수 있는 10개의 도장을 마련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 후에 ‘밑으로 연맥을 따라서 전 세계에 100개의 도장을 개창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추가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번 상제님 진리를 전해 준 사람은 그 사람이 스스로 멀어지지 않는 한은, 개벽의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리겠다는 각오로 포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태을주 읽는 대상자 100명을 만들라는 종도사님의 명을 반드시 이루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다가온 이 모든 시련이 개벽 1번지 군산에서 개벽상황을 맞아 사람을 많이 살리라는 천명이라 생각하고, 제 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람들에게 널리 상제님 진리를 전하고, 태을주 소리가 군산 전역에 울려 퍼지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곽 도생의 이 말을 굳이 새겨듣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그가 보여 준 진정성과 삶의 굴곡을 토로할 때 역설적으로 부각되던 의지력, 그리고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가족과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정서적 공감대가 한 번쯤이라도 느껴진 바 있다면, 이러한 소회가 마음에 품고 있는 진실 그대로에 가깝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개벽 1번지 군산 땅에서 그가 기원하는 소망에 소박한 격려를 보내거나 그 행간의 함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지향하는 신앙에 동의하느냐의 여부와도 상관이 없다. 감당이 힘든 역경에 직면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올곧이 버티면서 스스로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적용을 하기도 한 삶의 방식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아마도 그에게서 특별함을 찾고자 한다면 이러한 모든 단편들이 어떤 요인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탐색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정신과 영성의 문제이고, 드러난 현상보다는 이면의 본질에 시각을 맞춰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난에 맞선 치유의 노래 태을주

    진리대로 사는 행복한 삶
    곽 도생은 신앙을 하면서 늘 열성을 다해 왔다고 말했다. 본인의 성품도 그렇거니와 삶을 대하는 근본에 있어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빚을 진 것과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제님 진리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인생의 행로를 정한 이후에는 자신과 가족 모두가 증산도 진리의 가르침과 신앙문화의 기틀 속에서 함께하기를 희망했던 것도 열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진리에 대한 깊은 믿음을 바탕으로 신앙의 가치와 근본 이념들을 말없이 실천하여 오는 과정에서 곽 도생은 여러 가지 신앙 체험도 했고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아낌없이 감사함을 주고 은혜를 돌려받기도 하면서 곽 도생 가족은 온전히 진리대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졌을 법했다. 이들의 여러 신앙 체험 중 특히 태을주에 관련된 사례는 중요하고 기억할 만한 부분이 있어 이에 소개하고자 한다.

    아픈 고객에게 신유의 덕을 베풀고
    서울에서 제과점을 운영할 때의 일이었다. 곽 도생은 날마다 가게 내부에 패널을 뺑 둘러서 붙여 놓고 진리 홍보를 하곤 했는데, 여기에 더하여 고객 중에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태을주 신유를 해 줬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가게에 나갔는데 아줌마 몇 분이 가게 밖에서 곽 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전날 가게에서 한 고객에게 태을주 신유를 해 주었는데, 그분이 신유를 받고 아픈 곳이 좋아져서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를 했고, 그것을 들은 다른 분들도 받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다는 것이었다. 곽 도생은 그날 팔을 걷어붙이고 찾아온 모든 분에게 기꺼이 태을주 신유를 해 주었다고 한다.

    아들의 생명을 태을주의 조화로 건지다
    태을주 신유의 힘은 가족에게도 직접적인 치유의 은혜로 다가왔다. 곽 도생은 1992년 입도 후 조금 있다가 태상종도사님께서 태을주 신유를 내려 주신 이후로 집안의 모든 병을 태을주 신유로 이겨 나갔다고 한다. 강력한 믿음에 비례하여 태을주 신유의 기운도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쌍둥이 아들 중에 동생(곽채운)이 아파서 신유를 했는데도 잘 낫지 않고 더 심해져 갔다. 급기야 항문이 벌어지고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곽 도생 혼자서는 도저히 신유를 할 수가 없는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곽 도생은 곧바로 군산으로 내려가 막내 처남인 최학우 도생 집에 갔고 당시 군산도장에서 신앙을 하던 최동규 도생도 오게 해서 셋이서 함께 신유를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몸부림치며 위중한 경계를 넘나들던 아이가 금방 울음을 그치고 편안하게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때 세 명이 두 시간 남짓 신유를 한 결과 병증은 완전히 사라지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 아이는 그 후 쌍둥이인 둘째 형보다도 더 건강하게 자라서 지금은 27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또한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었으나 당시까지도 증산도 신앙에 완연한 확신을 갖지는 못했던 최 도생은 남편인 곽 도생이 가족을 태을주로 치유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 진리에 대한 신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삿된 기운을 물리친 태을주의 위력#
    오랜 수행의 경험을 통해 쌓은 공력으로 삿된 기운을 물리친 사례도 있다. 2003년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던 곽 도생은 아는 분의 도움으로 야간에 빌딩을 지키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성실히 근무를 했었는데, 그 건물이 원한이 많이 맺힌 건물이라서 그런지 밤에 혼자 있으면 서늘한 기운이 많이 느껴졌다고 했다. 어느 날 밤에는 문을 다 잠그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 귓속이 끊어질듯이 아픈 고통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덮쳐 온 그 고통은 통상적인 병증과는 분명히 다른 기운이었다. 곽 도생은 망설일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 태을주를 읽으며 자가 신유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그 어떤 질병과 고난도 태을주로 치유할 수 있다는 진리적 확신을 갖고 있는 곽 도생에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15분 쯤 태을주를 읽자 엄습했던 독한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번 호 가가도장은 삶의 시련과 고난을 사람을 살리라는 천명으로 자각하고 도방을 통해 가족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도심주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곽용삼, 최영미 도생의 절절한 도방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이 부부는 조상의 강고한 의지가 자손을 진리의 성문으로 몰아가거나, 조상의 보천교 신앙맥을 자손이 잇도록 연계하는 큰 그림을 통해, 오직 증산도 신앙을 중심으로 삶의 모든 것을 펼쳐나가는 방식에 순응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곽 도생이 성심을 다해 치열한 삶을 영위한 것도 최 도생이 조상의 조력과 은혜를 느끼며 늘 감사함을 잊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조상과의 교감에서 비롯된 신앙의 공력이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부의 신앙력은 굳건한 진리 신앙과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 나온다. 특히 모든 병마와 고난을 오직 태을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담대히 실천하는 그 행위 속에서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 진리의 말씀대로 성사되고 현실화되었다. “모든 일에 나를 믿고 근심을 놓으라.” 하신 상제님의 법언을 상기해 볼 때 믿음을 굳건히 한다는 경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이제 이 부부가 소망하는 대로 개벽 1번지 군산 전역에 태을주가 울려 퍼지고 사람을 많이 건져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일은 우리 자신이 신앙에 대해 얼마나 절대적 가치와 믿음을 두고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성패의 기준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한 생명 구원의 함수가 최적의 해답을 도출할 수 있도록 상제님 태모님의 성령과 조상선령 및 천지 성신의 가호가 곽용삼, 최영미 도생의 도방에 크게 깃들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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