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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X파일]

    박물관에서 본 우리 역사 | 가야사 복원을 기원하며(2) 강철의 가야사

    김용호 / 역사 스토리텔러


    지난여름에는 남도의 가야 박물관 몇 군데를 탐방했습니다. 밤늦게 함안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아침 일찍부터 함안, 합천, 고령을 차례로 더듬어 수많은 가야 고분들과 많은 유물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5백 년 동안 지속했던 가야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가야 역사에서 중요하게 평가 받는 철기와 금속 기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비록 역사 기록은 부족하지만, 가야 선조들께서 남겨 주신 유물은 적지 않습니다. 특히 ‘강철의 제국帝國’이라 불리었던 그 흔적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김해평야를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가야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농경 국가, 힘없는 작은 나라 가야입니다. 그런 오해는 김해평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해평야를 발판으로 건국된 가야, 김해평야만으로는 세勢를 확장하기에 너무도 부족했다는 식의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 가야사를 공부해 보니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천 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가야 사람들에게 김해평야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저를 아픈 사람으로 취급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아서 김해평야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김해는 배가 드나들던 항구였습니다.

    가야인 들의 금속 가공 예술


    ■황금관과 금동관
    한민족이 탄생시킨 황금관冠 10개 중 2개가 가야 황금관입니다. 신라 금관이 7개, 고구려 금관은 1개입니다. 가야 황금관 2개 중 하나는 고령에서 도굴 된 것으로 삼성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동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동경 박물관의 가야 금관(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라는 일본인이 수집한 금관)은 정확하게 어디에서 발견된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구라가 창녕군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들을 집중적으로 매입했기에 창녕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안타깝게도 도굴을 통해서 세상에 나온 가야 황금관들은 정확한 연대 추정도 그 소유자도 알 수 없습니다. 금속은 탄소연대 측정법이나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으로 계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이 매장된 유물(토기나 목재 등)이 있다면 어느 정도 연대 추정이 가능한데, 도굴된 장소나 해당 고분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

    가야 황금관은 신라 금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고 덜 화려한 편입니다. 가야 제국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삼엽문 으로 구성된 고령 금관은 열매처럼 ‘굽은 옥’이 달려 있고 나뭇잎처럼 ‘달개’ 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무늬들이 테두리를 섬세하게 꾸미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신라 금관과 다르지만 제작 기법은 거의 동일합니다. 창녕 금관은 굽은 옥이 없는 교동 금관, 호림박물관 금관, 금령총 금관과 거의 제작 기법이 유사합니다.

    합천 옥전 고분에서 발견된 출出 자형 금동관은 신라의 출 자형 황금관들과 아주 유사합니다. 소재만 ‘금동’일 뿐 개략적인 디자인은 신라 황금관에 못지않습니다. 다만 5~6세기 고분에서 발견되어 신라의 영향을 받은 금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귀걸이 및 장신구
    김해, 고령, 합천, 함안 등지에서 발견된 가야의 금 귀걸이나 장신구들을 보면 섬세한 세공기술에 놀라게 됩니다. 아마도 가야에는 놀라운 금속 가공 능력을 가진 장인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들은 단순히 정교한 기술만 가진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종교성과 철학을 작품으로 표현해 내는 천재들이었습니다.

    ■둥근 고리 손잡이
    합천 박물관에 가 보시면 정말 예술적인 가야 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환두環頭는 대표적인 한민족 검 손잡이 디자인입니다.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도검 손잡이 끝부분에는 둥근 고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아프로시압 벽화에 등장하는 새 깃털을 머리에 꽂은 이들을 고구려 사신이라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 허리에 찬 환두대도 때문입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칼은 어떤 칼에는 둥근 고리 안에 봉황 머리가, 어떤 칼에는 봉황과 용 머리가, 어떤 칼에는 두 개의 용 머리 장식이 들어 있습니다. 봉황과 용 무늬가 손잡이 전체에 멋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대 장인들은 어디서 이러한 영감을 얻었을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승이나 선대 작품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분 유물은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고객입니다. 고객들은 독창적이면서 멋지고 화려한 작품을 원했습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시대 지배층의 주류 종교, 사상, 철학, 전승되어 온 설화, 전설, 영웅담을 담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제왕의 상징이 바로 봉황과 용입니다. 무엇보다도 한민족은 예로부터 봉황과 용을 같이 사용했습니다. 옥전 고분 환두대도에는 이러한 한민족 전통(음양오행 사상과 용봉 문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입니다. 합천 지역에 옥전 고분을 조성한 가야인들의 자부심과 기상이 어떠했는지 환두대도에 새겨진 용봉 문양으로 소리 없이 과시하는 듯합니다.

    ■ 미늘쇠
    가야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면 꼭 한 번쯤은 ‘미늘쇠’를 만나게 됩니다. 녹슨 철판 조각 같은 모습이 그다지 호감형 유물은 아닙니다. 더구나 유물을 보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감잡기 어려워 쉽게 친해지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게시된 설명문을 봐도 속시원한 설명이 없습니다. ‘미늘’이라고 하면 낚시 바늘처럼 굽은 갈고리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갑옷에 다는 비늘 모양의 가죽 혹은 철 조각을 말하기도 합니다. ‘미늘쇠’ 라는 단어만 들으면 어떤 용도였는지 모호합니다. 납작한 형태의 이 철제 유물에 대해 일본인들이 붙인 한자 명칭은 유자이기有刺利器(가시가 돋친 날카로운 물건)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기마병을 상대하는 보병의 무기쯤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철판 두께나 장식물(회오리나 새 모양)을 볼 때 병기兵器가 주는 강인함이나 날카로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무기보다는 제의祭儀에 사용한 도구 정도로 설명합니다. 이 역시 즉흥적인 의견이라 제의에 어떻게 사용했으며, 왜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의 있고 논리적인 연구 자료조차 희박합니다.

    가야 건국신화를 그려낸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미늘쇠를 깃발처럼 긴 장대 위에 꽂아서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STB상생방송에서 경주 환단고기 콘서트가 방영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알타이 파지릭Pazyryk 고분에서 발견된 흉노 얼음공주의 관식冠飾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는 새 장식 미늘쇠와 아주 유사한 모습입니다. 흉노 공주는 15마리 금 그리핀(봉황) 장식으로 꾸며진 관식을 머리에 장식하고 있습니다. 가야 강역에서 나온 작은 미늘쇠는 파지릭 고분의 공주처럼 머리에 꽂아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그러나 얼음공주의 관식보다 그 자체의 상징성에 대한 것에 더욱 관심이 생겼습니다. 회오리 모양이나 새 모양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새 장식이나 회오리 동심원 모양은 충분히 종교성을 드러낸 상징이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새 모양 장식 미늘쇠를 환국, 배달,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는 역사 문화 유산 ‘솟대’와 연결 지어 생각해 봤습니다. 솟대란 소도蘇塗에 세우는 상징물입니다. 소도란 하늘 임금님(천제天帝, 상제上帝)께 제祭를 모시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솟대에는 새 모양 장식이 꼭대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 새는 바로 천제께 인간 세상의 소식을 전하고, 상제께서 내려 주는 메시지를 인간 세상에 퍼뜨리는 메신저Messenger를 의미합니다. 가야인들의 미늘쇠는 솟대의 변형이 아닐까 하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듭니다. 인류사에 철기 문명을 처음 열었던 히타이트인들에게 철은 종교적 예술품을 만드는 귀한 소재였습니다. 가야인들도 ‘철’을 이용하여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상징물로서 미늘쇠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미늘쇠와 솟대의 관계를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좀 더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철기 기술은 어디에서 왔을까?


    ■철기 문명은 전해졌나? 아니면 자생적으로 발전했나?
    한국 강단 사학계의 가야사 연구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제 식민 사학의 ‘답습’입니다. 식민 사학이 주입한 장치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가야사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야 초기 역사 연구 결과들을 보면 ‘가야’는 간데없이 남삼한 소국들 이야기로 얼버무려 놨습니다. 이것은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 원삼국론과 동일한 전략입니다. 가야사 연구 논문들을 찾아봐도 ‘전기前期 가야’라는 단어만 있을 뿐 실제 내용이 너무도 빈약합니다.

    이번 글에서 자세히 살펴볼 가야 철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확인해 보면, 강단 사학계는 철기 기술을 선진 문화로 규정짓고 한사군 성립으로 외래(한나라)에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남부 지방의 ‘가야’가 그 ‘혜택’을 받아 성장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가야 철기의 우수성은 인정하면서도, 심도 있고 설득력 있게 가야 철기 문명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나마 4세기 이후부터 가야 쇠퇴기까지만 연구하고 결과를 내는 모양새입니다. ‘임나일본부’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 두려는 걸까요?

    철광석에 고온을 가해 녹여서 철을 추출해 내는 설비인 ‘노爐’를 만들려면 강한 열기를 이겨 낼 수 있는 내화 설비 기술을 체득해야 하고, 단순 목재보다도 고온을 낼 수 있는 연료(목탄, 숯)도 마련해야 합니다. 순수한 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료, 철광석(혹은 사철)을 채취하고 선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제의 탄소 함유량도 조절해야 하며 제련, 제강, 열처리 등등 수많은 공정 과정을 거쳐야 쓸 만한 강철(중간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기나 공구, 농기구 같은 완제품을 만드는 것도 각기 다른 노하우를 필요로 합니다. 2천 년 전 가야 사람들은 복잡한 금속 가공 기술과 수많은 노하우를 학교에서 배웠을까요? 아니면 외래에서 기술서가 보급(전파)되어 습득했을까요? 아니면 고급 기술자가 와서 알려 줬을까요?


    ■기밀인 금속 가공 기술
    금속 가공 기술은 고대 국가의 핵심 역량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인들은 고분 상층부(천상세계를 의미함)에 대장장이의 신을 그려 넣었습니다. 어느 나라가 중대한 철기 기술을 쉽게 제공했을까요? 어느 나라 지배층이 기술 인력이 가야로 ‘이민’을 가도록 순순히 허락했을까요? 금속 가공 기술 특히 철기 기술은 자연스럽게 전파될 수 있는 기술 분야가 아닙니다. 한사군의 혜택? 한족漢族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철기 기술이 없는 한민족을 안타깝게 여겨서 기술 상세 설명서를 만들어 선물했을까요? 아주 순진하고 유치한 생각입니다. 비슷한 예로 고대 왜(일본)의 철기 기술 발달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백제, 가야 멸망 후 제철 기술을 가진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비로소 왜의 제철 기술 수준이 급격하게 발전합니다. 그전까지 백제와 가야는 철기를 비싸게 수출할지언정 기술을 절대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가야 ‘철기’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철기 기술은 어느 날 갑자기 높은 수준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문명 혹은 기술은 ‘발달 과정’이 있습니다. 절대로 갑작스러운 비약은 불가능합니다. 가야가 자랑하는 ‘철기’ 기술 수준에 도달하려면 여러 가지 문제들을 경험적으로 해결하고 노하우를 축적해야 합니다. 가야의 철기 기술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가야 철기 문명은 곧 고조선, (북)부여로부터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된 철기 금속 기술이 계승되고 발전된 역사적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식민 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단 사학계는 가야사 혹은 고대사 연구에서 고조선과 부여를 고의로 배제했기에 철기 기술 발달의 연속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야 철기를 고조선, 부여, 남삼한으로 이어지는 기술 계승과 발달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가야 이전의 철기 유물과 유적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기원 후 47년보다 훨씬 이전 시기 제철 기술 흔적이 남부 지방에서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 2~1세기로 추정되는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철기 유물이 발견되었고, ‘창원 성산 패총’에서도 철기류와 함께 제철 흔적(송풍관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전북 장수군 남양리 유적에서도 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가야의 제철 기술은 외래에서 유입된 ‘선진 문화’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발전된 기술입니다. 물론 북방민(부여계, 흉노계)들이 유입되면서 특징적이거나 독특한 ‘기법技法’이 전파됐을 수 있지만, 제철 기술 전체가 한꺼번에 가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미 남부 지역 사람들의 철기 기술도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남삼한에서 가야 성립 이전부터 철기를 생산하고 유통했었다는 내용이 『삼국지』, 『후한서』 등 한족 사서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 왜에서 모두 와서 가져갔다. 사고 팔 때에 모두 철을 사용하였으니,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
    -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 ‘변진弁辰조’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市之. 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예, 왜, 마한에서 모두 와서 사 갔다. 무릇 모든 교역은 모두 철을 통화로 삼았다.
    - 『후한서後漢書』「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전韓傳」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철기류에는 칼, 창, 화살촉, 도끼 같은 무기 외에도 괭이와 낫 같은 농기구와 망치 같은 공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미 철기가 실생활까지 파급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도구를 만드는 중간 재료인 납작 도끼(덩이쇠처럼 중간재)도 발견되었습니다. 창원시 성산 패총에서는 제철製鐵(혹은 야철冶鐵)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송풍관 조각과 노지爐址 철재, 쇠망치와 도끼, 철제 도구류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두만강 지역 함경북도 범의 구석, 연해주, 강원도 홍천 등에서도 철기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가야의 제철기술
    철 슬래그slag는 토속적인 표현을 빌면 ‘철 똥’이라고 부릅니다. 자석을 갖다 대면 철 성분이 있어 달라붙습니다. 철광석을 녹여서 철을 얻는 과정에서 배출된 철광석에 포함되어 있던 불순물입니다. 철광석을 녹여서 이러한 불순물들이 흘러내리게 하려면 얼마나 뜨거운 열을 가해야 할까요? 무려 1천 도가 넘는 열을 지속해서 가해야 합니다.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온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보면 가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됩니다. 밥을 짓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작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매캐한 연기를 참으면서 열심히 부채질하는 장면을 보다 보면 제 눈도 매운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손 선풍기를 활용하여 좀 더 쉽게 아궁이 불을 살리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이 장면은 가야 제철에서 풀무와 같은 송풍 설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장작 같은 연료가 잘 타려면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부채나 선풍기를 사용하여 빠르게 산소를 공급하면 금세 연료들이 타올라 높은 온도에 이르게 됩니다. 고대 제철 공정에서도 산소 공급이 아주 중요합니다. 철이 녹을 정도로 높은 고온을 만들고, 오랜 시간동안 고온을 지속하기 위해서 송풍 설비(풀무와 송풍관)는 아주 중요합니다. 인류 역사상 철기를 처음 만들어 썼다는 3200년 전 ‘히타이트인’들도 송풍(산소공급) 장치를 만들지 못해, 아나톨리 고원의 강한 바람에 의존해 사철이나 철광석을 녹여냈습니다. 2천 년 전 가야의 고대 장인들은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풀무와 송풍관을 만들었습니다.

    ■가야는 어떻게 강철의 왕국이 될 수 있었나
    이 글을 준비하면서 김해 대성동 철기유물(가야 초기)을 분석한 몇 편의 논문들을 살펴봤습니다. 그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단조에 의한 형태 가공’ ➔ ‘표면침탄법에 의한 제강’ ➔ ‘열처리 과정’을 거쳐서 철기鐵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표면 침탄법’이니 ‘단조’, ‘제강’ 같은 전문 기술용어가 독서를 방해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가야 제철의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드리고 싶지만, 사전 지식이 필요한 전문적인 부분이기에 뒷부분의 참고 자료로 대체하고 생략하겠습니다. 가야인들은 2천 년 전 수준 높은 철기 기술을 보유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야는 어떻게 강철의 가야가 되었을까요?

    가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고조선, (북)부여, 남삼한에는 독자적인 제철 기술을 갖춘 장인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 기반 아래서 가야는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기술력을 갖춘 장인들이 많아도 철광석 산지를 보유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야인들에게 큰 축복인지 낙동강 유역만 살펴봐도 알려진 철의 산지로 상동광산(김해광산), 무척산 생철리, 양산 물금광산 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술력과 철광 자원이 있다고 철기가 뚝딱 생기지 않습니다. 사철砂鐵이나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설비 장치인 노爐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고온을 낼 수 있는 연료를 충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야는 지리적으로 산과 숲이 많은 곳이라 목재가 풍부했으며, 일찍이 목탄(숯) 제작 기술까지 가지고 있어 화력 좋은 연료 조달이 가능했습니다.

    장인 집단, 제철을 위한 제반 기술, 입지 조건을 갖췄으나 더 중요한 것은 ‘철기 수요’입니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가야는 광대한 영토와 많은 국민을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체적인 철기 수요는 한계가 있습니다. 양질의 철기를 필요로 하는 인접 지역과 세력들 사이에 교역로(판매 유통 루트)가 없다면 가야의 제철은 금방 시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 제국의 사람들은 이러한 수요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수백 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군사력입니다. 스스로 지켜 낼 힘이 없다면, 지리적인 입지 조건이나 철광 산지 같은 크나큰 혜택이 재앙이 될 뿐입니다. 가야 제국은 오백 년이나 이러한 지위를 지속했습니다.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가야 제국이 보유한 정치 문화적 역량, 경제력, 군사력이 절대 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해金海 지명의 유래
    김해金海는 유적과 유물,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단순한 어업 항구가 아니었다. 김해는 그 당시 발해와 황해의 양쪽 연안(현재 중국 산동성, 하북성에서 한반도 서해안)부터 일본 열도까지 연계하는 무역항이었다. 이 무역항의 주요 교역품은 철鐵이었다. 후기 신라에서 ‘금해소경金海小京’ 이라는 행정 구역 명을 부여(757년)한 이후부터 ‘김해’라는 지명이 시작되었다. 처음 ‘금해소경’이란 명칭을 부여한 사람의 속뜻을 알 수 없지만, 가야 시대 김해가 철을 교역하던 무역항이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금金이라는 글자를 성씨姓氏로 쓸 때는 ‘금’이라고 소리 내지 않고 ‘김’이라고 읽는다. 이러한 독음은 조선의 건국 시기부터 유래된다. 조선의 왕은 성姓이 “이李”이다. 이李라는 글자는 음양오행 중 목木으로 분류된다. 음양오행 상극 원리에 따르면 금극목金克木, 금이 목을 극克하게 된다. 따라서 ‘金’씨 혹은 金이란 글자가 들어간 지명은 제왕들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성씨와 지명에서 ‘금’을 ‘김’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황금의 의미
    황금은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는 종교적인 이유가 더 컸다. 예로부터 태양에는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념에서 태양신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태양이 뿜어내는 빛에는 신의 권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상고 시대부터 왕王이란 신의 대리자(천자天子)이다. 사람들이 금속(구리)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태양광太陽光(신의 권능)을 반사시킬 수 있는 (청동)거울이 제왕의 상징물이 되었고, 점차 금속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작고 무거운 청동거울에서 벗어나 고귀하고 번쩍이는 황금이 신의 대리자 천자의 상징물이 되었다. 고대의 제왕들, 특히 북방민족의 제왕들은 황금관과 귀걸이, 허리띠, 신발 등 온 몸을 황금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동서양 모두 황금 빛깔은 ‘신의 빛(신성, 광명)’을 의미한다. 교권(카톨릭 교황)이 왕권보다 우위에 있었던 중세 유럽 성화聖畵를 보면 성모와 예수 그리고 천사들의 배경이 온통 황금색이다. 황금색은 ‘신神의 광휘光輝’ 혹은 ‘성령의 고귀한 빛’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옥전 고분은 다라국多羅國 유적인가?
    합천 박물관 측에서는 옥전 고분과 그 유물을 ‘다라국多羅國’으로 단정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 전반을 살펴보고 각종 자료를 연구해 보면, 합천 지역에 다라국이 있었다는 확정적 증거는 없다. 다만 가야사를 다루는 영향력 높은 몇 명의 학자가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다라국명과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多羅里라는 지명을 가지고 추정할 뿐이다. 반면에 최재석(전 고려대) 교수는 다라국의 위치를 규슈의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다라마을(多良村), 다라산(多良山) 일대로 비정하는 주장을 했다. 합천과 다라국의 관계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철기문명론
    금속기술이 문명의 흐름을 바꾼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강단 사학계는 철기 기술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 철제 농경 도구를 보유하면 노동력과 생산력이 엄청나게 증대된다고 단정한다. 철제 무기에 대한 환상은 더욱 심하다. 철제 무기만 있다면 전쟁에서 청동기 석기 무기들을 부수고 압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철기만 보유하면 천하무적이 될까? 전쟁에서 무기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정유재란 당시 강력한 화포로 무장하고 강력한 공격선인 거북선을 가진 원균이었지만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몰살을 당했다. 반면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13척의 판옥선으로 엄청난 대승을 거둔 사실이 있다. 화포나 거북선 같은 무기가 절대 승리 요인이 아니었듯이 철제 무기 제작과 보유 여부도 승리의 절대 요인은 될 수 없다.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된 철기문명론과 철기 외래 유입설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자리와 비중을 찾는 것이 우리의 숙제로 생각된다.

    풀무
    풀무의 사용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단어가 일본서기에도 나옵니다. 일본서기는 사서로서 신뢰하기 어렵지만 풀무와 관련된 용어가 언급되기에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신라 눌지왕에게는 미사흔이라는 아우가 있었습니다. 박제상이라는 신하가 왜에 잡혀있던 미사흔을 구해 오는 이야기가 일본서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미사흔을 추격하던 왜 장수가 점령했다는 ‘도비진蹈鞴津’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도비’란 제련로에서 쓰는 ‘발로 작동하는 풀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를 일본에서는 ‘타타라(たたら)’라고 읽는데, 현재도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제련 기술을 ‘타타라 제철’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금관가야 권역이었던 ‘다다라多多羅’라는 지명과 ‘타타라(たたら)’는 연관된 용어로 추정됩니다. 가야 사람들이 열도와 철기 무역을 했던 무역항 혹은 중간재를 완제품으로 가공하기 위한 대장간이 있던 장소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왜인倭人들은 ‘다다라’를 고대 제철 기술의 대명사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도비진’이라는 지명과 ‘타타라’라는 용어를 볼 때, 가야 제철 기술에서 ‘풀무’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한국 강단 사학계와 일본 학계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도비진을 부산 다대포로 추정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왜 장수가 점령했다는 도비진이 부산 다대포라는 증거나 기록이 없다. 열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각기 다스리던 분국들이 많았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한반도 안에서 그 위치를 비정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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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1월 홈 | 기사목록 | 되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