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진정한 화랑은 역사의 원형정신을 회복하여 새 역사 문을 여는 주인공, 태을랑(1)

[종도사님 말씀]
道紀 146년 6월 12일(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 대회의실
[말씀요약] 결론은 근대사의 출발점에서 선언된 개벽으로 가는 동북아 역사 대전쟁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의 근원을 바르게 알고 살아야 되는 이유는 시원 역사가 우리들의 삶의 원천이요 영감의 근원, 삶의 동력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라 천년 역사의 비밀, 둘째는 신라 역사 문화의 원형정신, 셋째는 통일문화를 여는 근대사의 새 울림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라문화에서 그 역사의 근원을 찾을 때 중요한 것은 ‘신라는 진한辰韓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근원을 체계적으로 바로 세울 수 있는 역사문화의 근본 주제입니다. 중국의 『진서』와 『후한서後漢書』에서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신라도 전부 중국인들이 지배했다고 왜곡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단군조선이 망하고 그 유민들이 내려와 신라의 본래 이름인 진한의 여섯 촌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고 『환단고기』에서도 이 신라의 전신을 진한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근원과 뿌리에 대한 역사 왜곡에서 또 하나의 아주 심각한 문제는 신라의 건국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가 중국 황실의 사람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을 『삼국유사』, 『삼국사기』에서 함께 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는 선도산仙桃山 성모로 불리는 북부여의 5세 고두막高豆莫 단군의 따님 파소婆蘇입니다. 또한 『삼국사기』는 신라를 정통으로 놓기 위해서 고구려를 폄하하고, 고구려의 시조에 대한 천륜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삼국 건국의 결론은 신라 혈통의 근원이 북부여와 직접 연관이 있고, 고구려도 북부여 마지막 단군을 계승한 정통 왕조이며, 백제는 고주몽의 아들이 세웠으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한 계통입니다. 삼국이, 크게 보면 가야伽倻까지도 단군조의 정통을 계승한 한 형제이고, 직계로 보면 바로 북부여를 뿌리로 한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라 왕가 전체 역사를 보면, 김씨 왕조 서른여덟 분이 나오는데요. 그 시조는 북방 유목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무제에게 생포됐다가 한무제의 목숨을 구했던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왕자 김일제金日磾의 동생이 김륜金倫이고 그 5세손 중에 형인 김알지金閼智가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이고, 그 동생 김수로金首露가 가야의 시조입니다. 이 북방 유목문화는 어디서 나갔는가? 『환단고기』 「단군세기」 기록에 의하면 3세 가륵嘉勒 단군이 열양列陽 욕살褥薩인 색정索靖을 귀양을 보냈다가 사면을 해서 흉노 시조, 왕으로 임명했고,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 때는 그 동생을 몽골의 초대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3세 단군 때는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켜서 단군께서 지백특支伯特을 평정했는데, 강거는 돌궐의 시조입니다. 대세를 보면 이 동서 유목문화의 큰 세력권은 바로 환국·배달·조선을 계승한 동방 우주광명 문화, 삼신사상, 우주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는 전통문화인 신교를 모체로 해서 유교도, 불교도 받아들이고, 도교와 함께 융합을 해서 신라 천년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화랑 문화를 보면, 화랑은 각자가 ‘화랑은 미륵의 화신이다’라는 미륵의 심법으로 미륵의 이상낙원을 건설하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내려 준 세속오계는 환국·배달·조선에서부터 내려온 그 소도 제천의 성지에서 우주광명의 인간 심법을 전수하는, 경당扃堂에서 가르친 오상지도五常之道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서론


천문, 지리, 인사를 충족하는 신라 문화
어젯밤 잠자리에서 신라新羅 천년 왕국의 수도 이 경주慶州의 역사의 근원과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전 『환단고기』 콘서트보다 훨씬 더 값진 의미가 들어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오늘 일요일 오후 즐겁게 다 같이 한마음이 되어서, ‘이 땅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으신 위대한 역사 문화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연하게 동감하고 다시 한 번 깨쳐서 앞으로 통일 문화 역사관을 정리하는 데에 오늘 말씀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역사 전쟁입니다. 동북아의 역사 대전쟁입니다. 근대사의 출발점에서 선언된 개벽으로 가는 역사 대전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역사 대전쟁의 중심 시간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잃어버린 역사의 근원을 바르게 알고 살아야 되는가? 시원 역사는 우리들의 삶의 원천이기 때문에, 영감의 근원이기 때문에, 삶의 동력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의 근원과 그 창조의 힘을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한민족 9천 년 역사 왜곡의 축소판인 천년 왕국 신라 역사의 근원을 바로 세우면서 진정한 한민족 역사 광복의 시간이 될 것을 다 함께 소망합니다.

오늘 왜곡되고 뿌리가 꺾여 있는 한민족 역사의 울타리를 넘어서, 동북아와 인류 창세 역사의 원형문화 정신, 강단사학에서 그토록 한 목소리가 되어 철저히 부정하는 『환단고기桓檀古記』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담겨 있는 역사 문화의 원형정신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제를 총체적으로 깨닫는다면 이 강연이 앞으로 우리 분단 역사의 종막을 고하는 진정한 통일역사 시대 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이 시원 역사문화 정신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으면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 새 희망의 역사의 문을 진정으로 최초로 활짝 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해외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경주를 한 번 와 보잖아요? 경주를 들어서면서 거대한 왕릉들을 보았습니다. 비록 크기는 장대하지 않지만 여러 역사 유적지, 왜곡되어 있는 포석사鮑石祠라든지 첨성대瞻星臺도 있습니다. 제가 경주에 오면서, 첨성대 속에 진실로 놀라운 우주 광명 역사의 삶의 체험이 총체적으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이 신라 역사 문화의 심원함과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함께 각성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신라를 전체적으로 볼 때 천년 왕도가 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 있을까요? 크게 보면 동양문화의 기본 3요소 천문, 지리, 인사를 총체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신라 역사의 토대가 아닌가 합니다. 신라가 천년 왕도를 한번 옮기려는 생각은 있었다고 하지만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지리를 중심으로 볼 때 저 백두산에서 한반도 척추라고 하는 태백산으로 지맥이 쭉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데, 경주는 중앙에 있는 첨성대와 그 주변의 반월성半月城, 남산南山, 서쪽 선도산仙桃山, 동쪽 토함산吐含山이라든지 북녘의 산, 이 오악五嶽이 아주 제자리를 잘 잡고 있습니다.

지리학의 핵심 하나는, 물이 어디서 생生해서 어디로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물이 역逆을 해야 지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형산강兄山江이 경주 중심부를 흘러서 저 포항浦項으로 빠져나가요. 그래서 ‘서출동류西出東流’라는 말을 쓰는데, 지금 하동지鰕洞池를 비롯해서 물이 전부 저쪽 왼쪽에서부터 이렇게 쭉 훑어 올라와서 서쪽으로 흘러서 합수가 됩니다. 역국逆局으로 해서, 한 천 년 왕도를 할 수 있는 틀이 잡혔습니다. 이 지리의 신비로움을 알고 6촌장六村長들이 여기 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다음 천문을 보면 이 우주의 삼원三垣, 28수 별자리를 중심으로 해서 왕도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의 전체 근본 별자리를 바로 경주, 이 왕도에 그대로 심어 놓았습니다. 그 중심에 첨성대가 있고, 주변 여러 왕묘王墓와 주요 문화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년 전에 울산 MBC TV에서 한번 체계적으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셋째 인사로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문화 역사의 힘, 토대가 화랑花郞입니다. 이 화랑 문화의 실상을 제대로 알면 신라 역사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화랑! 대부분 한국인들이 화랑을 ‘나라를 위해서 내 생명을 초개처럼 버리고 싸운 젊은 군인 조직이라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어요. 화랑은 본래 군인이 아닙니다. 인류의 창세 문화정신을 계승한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이 국가를 위해서 자원해서 목숨을 걸고 나가서 싸운 것이 화랑 문화입니다.

신라는 진한
무엇보다도 신라문화에서 그 역사의 근원을 찾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서두에서, 또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라는 진한辰韓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근원을 체계적으로 바로 세울 수 있는 역사문화 주제, 근본 주제입니다. 다 함께 한번 한마음이 되어서 소리 질러볼까요? ‘신라는 진한이다! 신라는 진한이다!’

이 진한辰韓의 실체를 알면, 천년 역사 신라 문화와 그 창세 역사의 근원을 총체적으로, 신라 역사의 자랑스러움을 정말로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9천 년 역사의 큰 주제는 단 한 글자로 밝을 환桓, 우주광명 환입니다. 이 우주의 광명이 크게 셋으로 나누어져서 하늘 광명과 땅 광명과 사람 광명인데, 이것을 ‘환桓·단檀·한韓’이라 합니다. 이것을 자연수 법칙으로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삼한三韓의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근원을 잃어버리면, 특히 창세 역사의 원형문화 정신을 잃어버리면 역사의 근원과 뿌리를 상실하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를 잃는 자 미래가 없다. 역사를 잃어버린 자 패망뿐이다. 역사를 잃어버린 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은 동서고금 인간 역사의 소중한 교훈입니다.

신라는 한국 고대사와 근대사의 성지
서두에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신라의 왕도 경주는 ‘고대사와 근대사의 성지聖地’라는 것입니다. 한국 9천 년 창세 문화 역사의 세계관, 우주관의 정수를 근본으로 해서 신라가 건국되었습니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 모퉁이에서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이 원천적 우주 정신문화의 근본을 바로 세우면서, 조직화하면서, 백성들의 문화 역사 정신으로 응집시키면서 통일을 이뤄 나갔습니다.

진한이라는 이 문화 정신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신라 금관을 보면 그 원형문화의 상징 문양이 중심에 딱 나타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뫼 산 같기도 한데, 저것이 무엇인가? 저 속에 잠시 후에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는 아주 재미있는, 조금 충격적인 인류 창세 문화정신의 핵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경주는 미래 부처님인 미륵불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석가불 중심이 아니고 미륵불을 세워서 모신, 초기 불교 사찰 창건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격동의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면서 우리 한국인의 현주소, 문화 인식의 현주소를 보면 고대사와 근대사의 두 눈을 모두 상실했습니다. 9천 년 환국·배달·조선의 역사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뿌리 문화가 완전히 꺾여 있기 때문에 그 악업으로 경주 땅에서 선언된 위대한 인류 현대사, 근현대사의 문화 주제 ‘개벽’ 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 뜻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세 가지 주제
오늘 경주 『환단고기』 콘서트에서 이 역사의 잃어버린 두 눈을 찾아서, 곧 닥쳐 올 남북통일의 변혁의 역사를 실제로 우리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제대로 깨쳐서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을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를 크게 세 가지로 잡아봤습니다.

첫째는 신라 천년 역사의 비밀, 둘째는 신라 역사 문화의 원형정신, 셋째는 통일문화를 여는 근대사의 새 울림입니다.

이 내용이 사실 대학에서 1년 강좌로 다루어도 남을 내용입니다. 그동안 쭉 정리를 해 보면서 여러 가지 PPT 자료를 준비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곁가지를 많이 쳐내고 주요 핵심을 좀 빠른 방식으로, 충청도 사람이라 그게 제대로 안 되지만 오늘 경상도에 와서 그 기운을 받아서 좀 속도감 있게 전개하겠습니다.


신라 천년 역사의 비밀



한국사 왜곡의 축소판, 신라 뿌리의 조작


신라의 전신, 진한에 대한 왜곡
왜곡된 한국사 역사의 축소판이 신라 건국의 첫 소식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신라는 진한辰韓이다’라고 했는데, 중국에서는 어떻게 왜곡을 하고 있는가?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양만춘楊萬春 장군에게 눈알이 빠지고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중국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한나라 무제와 더불어 위대한 제왕이 동방 침략을 감행해서 그렇게 무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고서 우리 동방의 역사를 왜곡하는 여러 가지 책을 냈는데요. 『진서晉書』, 『송서宋書』, 『양서梁書』 같은 여러 책을 냈는데, 『진서』와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진한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만리장성 노역을 피해서 이 동방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진한이 동방 진辰 자가 아니고 진나라 진秦 자 ‘진한秦韓’입니다. 『진서晉書』를 보면 “자언自言호대 진지망인秦之亡人이 피역입한避役入韓하니라”라고 했고, 『후한서』에도 “진지기로자언辰韓耆老自言호대 진지망인秦之亡人이 피고역避苦役하야 적한국適韓國하니라”라고 하여 ‘진한의 노인들이, 우리는 노역을 피해서 도망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내용을 슬쩍 끼워 넣었어요. 지금 동북공정보다도 그 근원에서 볼 때는 더 잘못되고 악질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 저 남쪽에 있는 신라도 전부 중국 사람들이 가서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한반도는 아무것도 없고 거기도 다 중국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보면 그 원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워낙 중요한데 여기 보면 “선시先是 조선유민朝鮮遺民 분거산곡지간分居山谷之間 위육촌爲六村... 시위진한육부是爲辰韓六部”라 해서 ‘이보다 먼저 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서는 단군조선이 망해서 그때 내려온 백성들이 산과 계곡에 흩어져서 살았는데 이들이 진한의 여섯 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진한 6부다’라는 것입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은 진한입니다.

여기에 와서 살았던 6부, 6촌의 지배 세력은 본래 조선 유민입니다. 단군조선 역사가 망하면서 북방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선시先是’, 신라의 진한이 생기기 이전은 언제일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서력 전 238년에 단군조선 마지막 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단군 자리를 내놓고 은둔하셨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만주 영역인 진한이 그때 망해 버리고 6년 공화정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진한이 망한 것을 기준으로 약 180년 전부터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바로 신라 땅 경주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신라 땅, 경주 이 지역도 본래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습니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명백히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해석의 문제인데요. 식민사학의 안목으로 해석할 것이냐, 본래 대한의 주체사관으로 제대로 번역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강 남쪽 삼한, 남삼한南三韓은 어디서 왔는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신라의 진한, 가야의 변한, 그리고 백제의 전신 마한 즉 남삼한은 저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북쪽 삼한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곳 신라의 첫 이름인 진한은 북쪽 단군조의 삼한에서 진한 사람들이 내려와서 형성된 것입니다. 『환단고기』에서도 이 신라의 전신을 진한으로 정의하고 있어요.

그런데 동방 진辰 자의 실체가 아주 정확하게 중국 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나옵니다.

지금 역사 교과서에서는 준왕準王이 단군조의 마지막 왕으로 되어 있어요. 그 수도는 대동강 평양이라 합니다. 한반도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왕검성王儉城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碣石山 근교에 있는 낙랑군樂浪郡 창려현昌黎縣에 있었어요. 당시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왕검성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3세 후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하기 위해서 한나라 무제武帝도 육군과 해군을 왕검성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고서 한반도에다가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을 비롯해서 네 개 군, 한사군漢四郡을 위아래 쪽으로 세워 놓았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역사 진실을 알 수 있는 「위지동이전」의 내용은, “초初, 우거미파시右渠未破時, 조선상역계경이간우거불용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 동지진국東之辰國”입니다. 처음에 우거왕 때, 정승 역계경이 정책을 건의해도 안 받아주니까, 망명을 했는데, ‘동지진국東之辰國’, 동쪽 진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동방에 진국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진국이라는 것은 원래 동방의 천자 나라, 진한(진조선)입니다.

단군조선 전체에서 북쪽 만주에 있었던 진조선이 서력 전 238년에 먼저 멸망하고, 44년 뒤인 서력 전 194년에 왼쪽 날개인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패망 당했어요. 그래서 기준이 발해로 해서 황해 바다를 건너 군산群山으로 들어왔습니다. 단군조선(진한)이 망한 뒤에, 위만한테 단군조선의 왼쪽 귀퉁이 번조선을 뺏긴 것입니다.

이런 역사 인식이 전혀 없이 지금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진국 문제를 어떻게 조작을 했는가?

진국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식민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조선사대관』(1948)에 ‘남방의 진국’이라 써놨어요. ‘우거는 한나라 유망인流亡人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고 남방의 진국이 한漢에 교통하려 함을 방해하였다’는 겁니다. 이것을 본받아서 지금 강단사학에서 신라, 가야, 백제가 생기기 전에 거기에 여러 작은 성읍국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중심 세력이 생겼는데 그게 진辰이라는 겁니다. 교과서를 보면 남쪽에 진이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로 성장했고, 그것이 삼한三韓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애매하게 꿈꾸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제가 한 15년, 20년 전에 윤내현 교수의 논문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 윤 교수는 이 진국을 어떻게 말하는가?

“갈석산碣石山에서 조선을 지나 대인의 나라를 통과하면 동쪽의 해 뜨는 곳에 이른다.”는 말이 『회남자淮南子』 「시칙훈時則訓」에 나옵니다. 이것은 갈석산에서 ‘조선’ 즉 위만조선을 지나 ‘대인의 나라’를 통과하면 동쪽의 해 뜨는 나라에 이른다는 겁니다. ‘대인의 나라’가 무엇인가? 이게 진국이라는 겁니다. 진국은 중국 사서에도 동쪽에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고구려가 패망당한 뒤에 대중상大仲象이 후고구려를 세웠다가 뒤에 그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대진大震이라 그랬어요. 단군조선을 전체로 부를 때는 진국辰國이고, 그것을 나눠서 부를 때는 만주가 진한辰韓이고, 그다음에 왼쪽 요서, 산둥까지가 번한番韓이고, 한반도 전체는 마한馬韓입니다. 나중에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 때 삼한이 삼조선三朝鮮 체제로 바뀝니다.

『환단고기』는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전하고 있어요.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서 “총지總之하야 명왈단군관경名曰檀君管境이니 시즉진국是則辰國이오 사칭단군조선史稱檀君朝鮮이 시야是也라”, 이를 총칭하여 ‘단군관경’이라 하니 이것이 곧 진국辰國이라 했습니다. 단군이 이 전체 영역을 다스렸고 이것이 진국이라 했어요.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환단고기』의 역사문화 언어와, 역사문화 시대와, 역사문화의 근본정신에 대한 정의가, 우주관에 근거한 정의가 얼마나 힘차고 명료한지 읽으면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산仙桃山 성모에 대한 왜곡
이 신라의 근원과 뿌리에 대한 역사 왜곡에서 볼 때 또 하나의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신라의 건국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 아니고 중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국유사』, 『삼국사기』에서 함께 왜곡을 하고 있어요.

그 내용을 보면 신모神母는, 이 신성하고 거룩한 어머니는 본래 중국의 제실의 따님, 중국 황실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이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했으니 박 씨들이 전부 들고 일어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라 역사의 근원과 뿌리에 대한 두 가지 왜곡은, 진한은 중국의 진나라 때 사람들이 와서 만들었기에 ‘진국秦國’이라는 것과 그 개국조의 어머니가 중국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보면 신라 역사에 대해서 고정관념을 깨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환단고기』 첫 편인 『삼성기』 상上을 보면 그 마무리 부분에 “부여고도夫餘故都하사… 시내신라고양야是乃新羅故壤也라”,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부여의 옛 도읍에 나라를 열었는데 그곳은 신라의 옛 땅’이라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어요. 이 고두막한은 동명왕東明王으로 불리는데, 한나라 무제가 들어왔을 때 그걸 꺾어버렸습니다. 지금은 고두막한이 고주몽高朱蒙으로 왜곡되어 있어요.

그런데 『흠정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라는 책 서문을 보면 건륭제乾隆帝가 한 말씀을 유훈으로 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나라 때 계림雞林으로 일컬었던 곳은 마땅히 지금의 길림吉林이란 말이 와전된 것이요, 신라·백제 등 여러 나라도 역시 모두 그 부근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나라 때 계림이라 했던 곳은 지금의 길림이고, 신라도 백제도 그 건국조의 지배세력의 고향은 길림이라는 겁니다. 중국어 발음에 길림과 계림이 성조는 다르지만 ‘지린’으로 발음이 같아요.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언어 정서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삼국 이전 한민족 뿌리 역사에 대한 왜곡
삼국 이전 한민족의 뿌리 역사가 왜곡되어서, 남쪽의 삼한은 북쪽의 단군조가 망하면서 그 삼한의 중심 세력들이 내려와서, 왕족이 내려와서 나라를 열었다는 이 진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북쪽 삼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현실적으로는 단군조를 신화로 보고 총체적으로 근본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대영박물관을 가보면 한국사 연표에 어떻게 나오고 있느냐?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가 있고 ‘원삼국原三國’이라는 게 있습니다. ‘Proto-Three-Kingdoms’, 원 삼국시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서력 전 100년부터 서력 300년까지 400년 동안은 한반도 북부에 고구려와 남부에 신라, 백제, 가야가 성립되기 전에 원삼국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게 아주 기막힌 말이에요. 여기 국립 경주 박물관에도 원삼국실이라는 섹션이 있어요.

그러니까 원삼국 전은 선사시대이고 단군조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중화 대국주의 역사관과 식민사관 이 이중의 역사 왜곡의 올가미에 빠져서, 어떠한 역사학의 논리로도 결론은 한국인은 역사의 뿌리가 신화라고 합니다. 환국·배달·조선은 다 신화고 없는 역사라는 겁니다. 환인·환웅·단군도 신화의 인물이라 합니다.

한평생, 한 생애를 바쳐 우리의 시원 창세 역사문화를 공부한 그 다양한 분야의 전문학자들의 총 결론이 무엇인가? 한국인은 그 근원과 조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8,200만, 지구촌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역사 인식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학문의 어떤 정교한 논리로도, 과학주의 실증사학의 강변으로도 우리 역사의 뿌리 환국·배달·조선, 삼성조 역사 시대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사관은 우리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민족 뿌리 역사 밝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 단군조선 이후 삼국 탄생의 전모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사실은 긍정적인 면이 더 많지만, 우리 역사를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알리바이를 식민사학이나 동북공정을 끌고 가는 중국 사학자들에게 제공하여 한강 이남까지도 잘못하면 뺏길 수 있는, 우리 역사를 송두리째 실제로 강도질 당할 수 있는 그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사대주의 사서의 특성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고구려의 시조, 백제의 시조, 신라의 시조와 관련한 내용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혼전에 임신하고 옥저沃沮를 통해서, 배를 타기도 해서 이쪽 경주로 오셨다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본론 2부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고구려 시조에 대한 문제와 신라 탄생 문제가 좀 얽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뿌리를 알 수 있도록 간단하게 한번 정리를 해 보겠어요.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 뿌리
『삼국사기』는 신라를 정통으로 놓기 위해서 고구려를 폄하하고, 고구려의 시조에 대한 천륜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황제국 중국을 넘보고 까불어 댄다고 해서 대륙의 역사, 대진국(발해) 역사는 한마디도 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단절이 사실은 고구려의 뿌리인 동시에 백제의 뿌리, 신라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중간 역사의 맥이 완전히 뿌리 뽑혀 버린 데서 일어났어요. 환국·배달·조선뿐만 아니라 단군조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가 뭐예요? 바로 북부여北夫餘인데, 그 역사가 뿌리 채 잘린 겁니다. 결론은 무엇인가? 고주몽의 아버지가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解慕漱라는 것입니다. 옛날 드라마, 송일국이 출연한 그 드라마에도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가 화살을 맞고서 죽는 걸로 나왔어요.

북부여 역사는 182년인데 1세 해모수, 2세 모수리慕漱離 이후 6세까지 이어지다가, 고주몽이 계승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조를 계승한 북부여 왕조 역사의 족보를 총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잃어버린 우리 한민족 9천 년 역사의 심장부, 환국·배달·조선을 북부여가 어떻게 계승해서 동부여東夫餘 역사가 탄생했는가?

고구려의 탄생
고주몽의 아버지는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인데, 불리지는 해모수의 증손자입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柳花夫人이 혼전 임신을 하자 황실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부모에게 쫓겨났습니다. 그래 동부여에 갔고 주몽은 금와왕金蛙王 곁에서 컸어요.

그런데 여기서 김부식金富軾이 아주 결정적인 사대주의 역사관으로 고주몽의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도 고주몽의 자식이 아니라, 우태優台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설을 실었습니다. 우태는 맥아리가 없는 남자였던지 아내 소서노召西弩와 아들 둘을 남기고, 전쟁에 나가서 그냥 한순간에 죽어버렸어요. 주몽은 부호富豪인 연타발延陁勃의 자금을 가지고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과부 소서노와 정략적으로 결혼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소서노는 연타발의 딸이 아니고 누구 딸이냐? 바로 북부여의 마지막 왕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고무서 단군은 아들이 없었어요. 고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해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꿨습니다.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 이게 『환단고기』의 『삼성기』 끝에 나옵니다.

우리가 해모수 역사를 제대로 알면 신라 역사의 근원을 다 찾는 것입니다. 일본 역사의 근원을 다 찾는 겁니다. 여기에 바로 9천 년 역사의 잃어버린 국통國統을, 파괴된 역사의 근본 생명이 되는 사통史統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결정적 역사 광복의 근거가 있습니다.

고주몽이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너무도 공경해서, 『삼성기』 상 마무리 부분을 보면 ‘사해모수위태조 祠解慕漱爲太祖’라고 했어요.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서 제사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단군세기』에 바로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 고향 땅 이름이 ‘고구려’ 라는 것입니다. 고구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하여간 본래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모향이 고구려이기 때문에 그 시조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를 공경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습니다.

신라의 탄생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는 파소婆蘇인데, 선도산仙桃山에 가면 선도산 성모 박혁거세 어머니를 모신 사당이 있어요. 한무제漢武帝가 우거를 무너뜨리고서 동북아 대천자가 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구국의 영웅이 튀어나왔는데 그분이 고두막한高豆莫汗입니다. 파소는 이분의 따님입니다. 일설에는 고두막한이 단군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하죠. 이 양반이 튀어나와서 한무제를 꺾고, 전쟁을 10년, 20년 수행했는데 자기 스스로 당시 북부여의 4세 임금을 압박했어요. 그러자 4세 임금이 죽고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등극했지만 등극하자마자 쫓겨나 버렸어요. 그래서 거기서 동부여東夫餘가 탄생했습니다. 동쪽 가섭원迦葉原에 수도를 정하고 옮겨갔어요.

그러고서 동명왕東明王이던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세 단군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 역사가 사라지고 중국에서 이 역사를 완전히 제거하자, 후세의 우리 역사가들이 그것을 차마 기록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북부여의 후기 시대인 5세 고두막高豆莫 단군의 따님인 파소가 아마 혼전 임신을 해서 이 경주, 나정蘿井까지 오게 된 데에는 어떤 비밀이 있다고 봐요. 동명왕 고두막한이 한나라 무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지만, 동시에 북부여의 왕조를 장악,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북부여 왕조의 어떤 제왕의 아들하고 파소가 연애를 해서 임신을 하니까, 그 왕실에서 ‘왕통을 뺏겼는데 네가 이럴 수 있느냐’ 해서 거기에서 살 수가 없어서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박혁거세의 아버지 이름이 혹시 ‘사로斯盧’가 아니냐 하는 추정도 있어요. 고주몽이 시조 할아버지 고향을 따서 나라를 고구려라 했듯이, 아마 박혁거세 어머니가 사랑한 왕자님의 이름이 사로여서 진한에서 수도를 서라벌徐羅伐로 하고 나라 이름을 사로로 바꾸지 않았겠느냐, 이런 추정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백제 시조, 사실은 최초의 여왕이라 볼 수 있는 고주몽의 둘째 부인 소서노는 북부여 마지막 6세 단군의 외동 따님입니다. 소서노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어요. 그런데 동부여에 있었던 예씨 부인禮氏夫人이 낳은 유리琉璃 태자가 찾아오니까, 소서노는 자기 아들들에게 불리하다 해서 요동, 요서 지역으로 내려와서 어하라於瑕羅라 불리는 여왕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왕국을 하나 세웠지만 아들 비류와 온조가 저 인천 미추홀彌鄒忽로 왔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 발판을 굳히고 왕국을 열었습니다.

삼국의 건국에서 결론은 무엇인가? 신라의 혈통의 근원, 그것도 북부여와 직접 연관이 있고, 고구려도 북부여 마지막 단군을 계승한 정통 왕조라는 것입니다. 백제는 고주몽의 아들이 세웠으니까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이 삼국이, 크게 보면 가야伽倻까지도 단군조의 정통을 계승한 한 형제이고, 직계로 보면 바로 북부여를 뿌리로 한 형제입니다.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한 형제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
우리가 『삼국유사』를 보면, 원元나라가 지구 대세를 정복하고 있을 때 거기서 충격을 받은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도대체 우리 동방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2천 년 전에 위나라 왕침王沈이 쓴 『위서魏書』를 인용해서,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세웠는데 요임금과 같은 때’라고 했어요. 4천 년 전 요임금과 같은 때다 이겁니다.

그러면 단군조선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우리 기록에 없는가? 이분이 옛 기록을 봤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 역사 문화의 옛 기록을 종합해서 써놓은 고기古記를 본 겁니다. 『해동고기』를 봤든지, 『단군기』를 봤든지, 『환단고기』의 여러 원형 고기를 봤든지.

일연 스님이 말한 첫 마디가 무엇인가?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밝은 나라, 우주광명의 나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서자부庶子部의 왕자님 환웅桓雄이 동방 태백산, 백두산에 와서 배달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환국과 배달과 조선의 역사를, 국통의 큰 틀을 『삼국유사』에서 바로잡아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무리에서 ‘일웅一熊’과 ‘일호一虎’라든지, ‘환웅이 낳은 것이 단군이다’ 해서 이 환웅의 배달 신시 역사 1,500년 역사가 다 사라지고 그냥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로 묶어놓아 버렸어요. 부자지간의 역사로 만들어놓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것을 악용하여 우리 역사의 근원, 한민족 역사의 눈알을 뽑아내고 심장을 도려내었습니다. 환국桓國의 나라 국國 자를 쪼아서, 글자를 변조해서 환국·배달·조선 40년 부족한 7천 년 역사를 부정하고, 환인·환웅·단군의 역사는 다 신화의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 말살의 족쇄를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가 전혀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의 뿌리, 한국의 창세 시원사를 바로 세우는 『환단고기』
『환단고기』의 역사를 한번 간단히 정리해 보면, 『환단고기』는 다섯 분이 약 천 년에 걸쳐서 써놓은 다섯 책, 열세 권을, 조선의 3대 문호의 한 사람인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와 그 제자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가 함께 교정을 보고 정리를 해서 낸 책입니다. 조선 왕조가 패망당한 그 다음 해, 얼마나 서둘러서 냈겠어요? ‘이제 우리의 그 역사 뿌리를 바로 세워야 된다, 본래의 동방 우주 역사 문화의 주인공의 문화정신이 나와야 된다’, 해서 우리의 원형문화 정신을 밝히는 책을 30권 출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곤궁했으면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 장군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30권밖에 못 찍었겠어요?

그런데 이것을 왜곡해서 ‘『환단고기』는 근세에 나왔다, 백 년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그것도 79년도 이후 80년대 초에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역사서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천 년 동안 써놓은 책을 묶어서 합본을 한 해가 1911년입니다. 위서론자僞書論者들의 바이러스에 일체 재치기도 하지 마시고 감염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고려 말에 소전거사素佺居士라는 분이 비책秘冊, 고기를 평생 최대한 수거했는지 그 조상되는 분들이 수거해서 자손에게 사명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전거사는 태소암太素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그 암자에서 9천 년 문화 역사 정신에 깨어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상까지 지낸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과, 같은 조정에 근무하며 북부여사를 전체적으로 복원시킨 범세동(范世東, ?~1395) 그리고 이명李茗 이런 분들이 소전거사를 모시고 결의동맹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고성 이씨固城李氏 문중에서 9천 년 역사, 문화, 철학을 정리합니다.

그래서 이존비(李尊庇, 1233∼1287), 그 다음에 이암李嵒, 이맥(李陌, 1455~1528), 이기(李沂, 1848~1909), 이유립(李裕岦, 1907~1986) 등 고성 이씨가 환국·배달·조선·북부여와 사국 시대, 남북국 시대, 고려의 역사 대세를 알 수 있는,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한민족과 인류 창세 문화 역사의 대의를 깨칠 수 있는 소중한 역사 경전, 문화 원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환단고기』는 국통 맥을 바로 세워 줍니다. 9천 년 역사의 국통 맥, 인류 원형문화 정신, 창세 역사를 알 수 있는 역사 경전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신라 왕가와 북방 유목문화



신라 왕가 박·석·김의 시조


우리가 신라 왕가의 전체 역사를 보면, 박혁거세朴赫居世 시조로부터 열 분, 석탈해昔脫解를 중심으로 해서 여덟 분, 그 다음에 김씨 왕조 서른여덟 분이 나오는데요. 992년, 8년 부족한 천 년의 장구한 신라 왕조의 역사에서, 박·석·김 세 성씨를 높이는 것을, 단재 신채호는 우리의 전통문화인 본래의 삼신, 삼신문화를 의방依倣한 것이라 했습니다.

시조 박혁거세는 나정蘿井에서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석탈해는 본래 남쪽 다파라국多婆羅國에서 올라왔는데 어떤 할머니가 ‘하늘에서 보낸 아들’이라 해서 길렀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아주 키가 컸는가 봐요. 그 수양어머니가 ‘너는 특별한 사람이다. 아주 크게 될 사람이니 학문에 정진해야 된다’고 엄정하게 얘기했어요. 석탈해는 박혁거세의 아들하고 왕이 되는 걸 견주다가 이빨이 긴 사람이 왕이 된다는 우스운 게임에서 양보를 하고서 박혁거세의 아들인 남해왕南解王의 사위가 됐습니다. 그 뒤에 왕이 됩니다. 그래서 박씨와 석씨가 융합이 되었어요.

신라와 가야의 김씨 시조
13세 미추왕味鄒王이 첫 김씨 왕인데요. 이 김씨는 북방 유목민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흉노의 한 왕자, 한무제에게 생포됐던 그 왕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그 왕자가, 난이 일어났을 때 한무제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훈족은 사람 모양에 금을 입혀서 천제를 올리는 풍속이 생겼어요. 그걸 ‘제천금인祭天金人’이라 합니다. 그것은 삼신상제 천신, 아니면 『산해경山海經』에 있는 것처럼 환웅천황을 뜻하는 웅상雄像이라는 전통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천금인의 풍속에 따라서 김씨 성을 줬다는 것입니다. 그 왕자가 김일제金日磾입니다. 김일제의 후손 가운데 왕망王莽이 나서 자기 아들을 죽여 가며 대권 잡아서 나라를 뺏어버렸어요. 그래서 신新나라라 했지만 30년 만에 패망하고, 그때 김씨 왕족들이 망명을 해서 여기 신라와 가야에 들어왔습니다.

이 김일제의 동생이 김륜金倫인데 그 5세손 중에 형이 김알지金閼智, 바로 신라의 김씨 왕조의 시조이고, 그 동생이 김수로金首露, 가야의 시조입니다.

지금 김해에 있는 가야 수로왕과 허 왕후許王后 묘를 가보면 그 뒤에 구지봉龜旨峰이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다 고개 뒤로 넘어가는 굴을 팠기 때문에 이 김씨 후손에 큰 인물이 안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해시장이 그것을 메꾼 뒤부터 인물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구지봉에 올라가서 보면 그게 제사 터입니다.

신라 역사 전체로 보면 그 역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김씨 왕조의 왕족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북방 유목문화를 형성하고 유럽의 역사를 평정한 흉노족 왕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라 국호의 변천
신라가 1세 박혁거세(朴赫居世, 재위 BC 57~AD 4) 때 ‘서라벌徐羅伐, 진한辰韓, 사로斯盧, 시림始林’ 등 여러 국호를 쓰다가 4세 탈해왕脫解王(57~80) 때 계림鷄林으로 바꾸었습니다. 15세 기림왕(基臨王, 298~310) 때(307년) 국호를 신라로 썼어요. 여러 국호로 쓰던 것을 실제 신라로 딱 못을 박아서 쓰기 시작한 것은 22세 지증왕(智證王, 500~514) 때입니다. 그런데 이미 광개토대왕 비문에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고 있어요. 신라의 원 뜻은 ‘덕업일신德業一新 망라사방網羅四方’입니다. 여기에는 ‘덕업이 새로운 나라, 밝은 햇살, 천지의 광명이 온 천하를 덮으소서’ 하는 이런 기도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신라와 가야의 김씨 시조
신라의 김씨 시조 김알지가, 탈해왕을 ‘하늘에서 나에게 보낸 아들이다’ 해서 길렀는데, 하여간 김씨와 석씨가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되는 내용이 정말로 신비스러워요.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681) 비문에도, 우리 조상 할아버지는 ‘투후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하가 굽이친 오르도스 그쪽의 투후로서, 아주 강력한 제후로 봉함을 받은 김일제, 즉 흉노 왕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문무왕이 직접 ‘우리 조상은 북방 유목민 흉노의 왕손’이라고 밝힌 겁니다. 이 김가가 참 무서워요. 당해 내기 어려운 북방의 아주 강력한 유목문화의 기동력과 전사의 피가 김가들의 생명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락국駕洛國 왕의 역사를 보면 허 왕후許王后가 시집을 와서 자기 남편에게 시집오게 된 실제 이야기를 합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사실은 천상의 상제님에게 명을 받았어요. 저 동방에 있는 가락국 시조를 하늘에서 내가 내려 보냈으니까 네 딸을 그쪽으로 보내서 왕비가 되게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야와 형제가 되는 신라의 김씨 왕족의 역사에서 어떻게 당나라와 친해져서 형제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는가? 그게 진정한 통일이냐?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누구도 좀 찜찜하게 느끼거든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나 후예들도 좀 떳떳하지 못한 자책감이라고 할까,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북방 유목문화의 근본정신을 한번 들여다보면, 당시 중국 당나라 왕조의 혈통을 같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정한 역사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고 봅니다.

북방 유목문화의 특성
유목문화는 지구촌의 동서남북의 문화를 소통하는 진정한 개척자로서, 문화 소통자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유목민은 야만인이 아닙니다. 말 타고 가축을 몰고 이동한다고 해서 문화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유목문화의 꽃은 무엇인가? 유목문화의 정화는 황금문화인데, 실제로 우리가 지구촌 여기저기를 가보면, 스키타이라든지 저 몽고 서북쪽에 있는 소련 땅 파지릭이라든지 지금 동경에서 전시하고 있는 전쟁하는 비극의 나라 아프가니스탄, 여기저기의 황금문화를 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유목문화를 한평생 연구하신 서울대 김호동 교수가 최근에 유목문화를 종합 정리한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라는 아주 멋진 역사적인 책을 냈습니다.

지구촌의 유목 강국들은 공통적으로 3수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립니다. 몽골도 그렇고, 흉노도 그렇고, 선비도 그래요. 전체적으로 보면 3수의 정신에 따른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이 있고, 그 밑에 군 조직에 우방과 좌방이 있고 24장의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방 유목문화는 그 유물을 보면 신라, 가야 유물과 상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편두偏頭를 하고, 기마상을 보면 동복銅鍑을 말 등에 싣거나, 엉덩이 위에다 지고 다닙니다. 저 동복도 제대로 잘 생긴 걸 보면 삼신의 3수 문양으로 되어 있어요. 제가 러시아 답사를 할 때 한 유목 문화권 박물관을 가니까 지구에서 가장 큰 동복이 있어요. 몇 천 명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그런 거대한 동복 큰 솥도 봤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황금 금관이 한 열 개 나왔다고 하는데, 그중에 여덟 개가 바로 신라에서 나왔습니다. 여러 무덤에서 나온 신라의 금관은 인류의 원형문화, 우주 역사의 원형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신라의 금관 문화에 나오는, 우주 창세 역사 문화의 어떤 최상의 상징, 우주의 진정한 수수께끼를 저는 곡옥曲玉이라고 봅니다. 곡옥은 참 아름답고, 어떻게 보면 귀엽기도 하고 신비스러워요. 뭔가 신성한 기운이 있어요.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태아의 모습, 물고기 모습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대한 독립문을 보면 그 위에도 태극 형상으로 그런 문양이 있어요.

이 곡옥이 무엇인가? 곡옥이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이 만든 술어입니다. ‘구부러진 옥’이라는 뜻인데 사실은 유치한 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마가타마まがたま’라고 하는데 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이것도 식민사학의 연장선에서 나온 하나의 술어입니다.

중국에서는 5,500년 전에서 한 9천 년 전의 광의의 홍산문화, 진정한 동북아의 인류 창세 역사문화의 유적지가 나왔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문화의 상징이 용봉龍鳳입니다. 초기에 옥으로 만든 용을 곡옥이라 하지 말고 옥룡玉龍이라 부르자고 했어요. 우리나라의 강우방 교수 같은 분은 절대 곡옥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합니다. 곡옥이라는 말은, 그냥 생긴 형상이 구부러진 옥이라는 뜻이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린이 코흘리개들 수준의 언어인 것입니다.

사실은 북방 유목문화의 유물에서 보면, 아주 재미난 문화 정신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라의 김씨 왕에게 보낸 황금 보검이 있잖아요. 황금 보검을 보면 무엇이 있어요? 거기에 삼태극三太極이 있는데, 이 삼태극 문양을 바로 구부러진 곡옥처럼 새겨 놓았어요. 저런 문양의 원상原象은 무엇일까요? 우주광명 환桓에서 분화된 하늘·땅·인간에 살아있는 삼신의 신성, 그것을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라 합니다. 바로 이 우주의 조물주의 생명과 신성이 3수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일·지일·태일, 하늘 광명·땅 광명·인간 광명을 저렇게 구분해서 삼태극 양식으로 새긴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 다음 신라에 나오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 파지릭에서 놀라운 얼음공주의 유물과 미라가 나왔는데, ‘알타이 고분 얼음공주’라고 해서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박물관 한쪽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유목문화의 왕 ‘쿠르간’의 목관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게 있어요. 피터 대제가 처음 개척한 한때의 수도인 저 러시아의 서부, 페테르스부르크 박물관 지하관을 가보면, 그 거대한 관을 그대로 뜯어다 놓았어요. 해가 져서 문 닫기 전에 거기를 달려갔는데, 아주 큰 목관木棺을 그대로 뜯어다 놓고 거기에 왕이 타던 말의 모습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 말의 모가지에 곡옥이 있어요. 그게 그렇게 신비스러워요.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동방문화의 표지標識 유물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밝히는 북방 유목민족의 시원
그런데 이 유목문화는 어디서 나갔는가? 흉노 즉 훈족이 됐든, 선비족이 됐든 그것은 우리하고 조상이 같잖아요. 지금 터키도 그 조상은 투르크, 돌궐족입니다. 돌궐족 후손들이 내려가서 오스만제국을 열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버렸어요. 칭기즈칸 부대가 러시아, 인도까지 이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면 몽골, 선비라든지, 돌궐, 흉노 이들은 어디서 나갔는가? 이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게 『단군세기』밖에 없어요. 3세 가륵嘉勒 단군이 열양列陽 욕살褥薩인 색정索靖이 잘못한 게 있다고 감숙성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면을 해서 흉노 시조, 왕으로 임명했어요.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 때는 그 동생을 몽골의 초대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3세 단군 때는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켜서 단군께서 지백특支伯特을 평정했는데, 강거는 돌궐의 시조입니다. 이런 역사가 『단군세기』에 나오고 있어요.

대세를 보면 이 동서 유목문화의 큰 세력권은 바로 환국·배달·조선을 계승한 동방 우주광명 문화, 삼신사상, 우주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심장부인 단군조에서 행한 삼신 우주광명 통치문화를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 하는데,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서 국가 영역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 유목문화를 보면, 좌현왕·우현왕 제도 같은 삼한관경 문화를 거반 다 가지고 있어요.

신교를 모체로 유교·불교를 통합한 신라의 천년 역사



주요 임금의 치적
신라는 신교를 모체로 해서, 전통문화를 모체로 해서 유교도, 불교도 받아들이고, 도교와 함께 융합을 해서 신라 천년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중심 세력인 6촌장이 박혁거세(朴赫居世, BC 57~AD 4)를 왕으로 모시고 나라를 다스렸고, 2세 남해왕(南解王, 4~24)은 석탈해昔脫解를 사위로 삼고, 중국 호칭인 왕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이라는 호칭을 썼는데 이 호칭은 전부 우두머리, 광명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13세 미추왕(味鄒王, 262~285)은 김알지의 6세 후손인데, 이때 김씨 왕대가 시작되었어요. 17세 내물왕(奈勿王, 356~402) 때 김씨 왕위가 세습되어서 왕통은 성골에서만 나오고, 진골은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김춘추(金春秋, 603∼661)와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진골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지만, 신라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아마 두 사람이 자기 누이를 주고 딸을 받는 혼인을 통해서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졌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23세 법흥왕(法興王, 514~540) 때 이차돈異次頓 순교 사건이 나오는데, 신라는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세기 초에 고구려 사람 아도阿道 승려가 내려오기도 했지만, 신교 우주광명 전통사상과 전통문화 세력과 새로운 불교 혁신 세력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과 대화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차돈이 희생자로서 순교를 하고, 그 이후로 불법을 국가 경영정신의 근본으로,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만들어 나갔어요. 그렇다고 해서 꼭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라 하면 불교를 떠올리고, 석가모니를 주불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27세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 때부터 통일의 기반을 실제로 닦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통일을 처음 이루기 시작한 김춘추 즉 29세 무열왕(武烈王, 654~661) 때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김유신은 가야의 왕자였는데 신라의 가족, 조상과 더불어서 귀부歸附해서 공을 세웠어요. 김유신은 열다섯 살 때 화랑이 되었고 그 후에 신인을 통해서 기도하면서 하늘의 인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김유신이 천상 33천의 천신의 한사람으로 지상에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역사서에도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김춘추의 아들 30세 문무왕(文武王, 661~681) 때 통일이 이루어지고. 마지막 56세 경순왕(敬順王, 927~935) 때 신라 왕조가 마무리됩니다.

신라의 불교문화
신라의 불교문화를 보면, 우선 아도阿道 화상이 미추왕 2년, 263년에 고구려의 자기 어머니 고도녕高道寧의 명을 받아서 신라에 왔어요. 아도의 어머니는 유명한 승려와 연애를 해서 아들을 뒀는데, 그 아들을 다섯 살 때 출가를 시켰어요. 아마 도승이 되기를 원했던 모양인데, 그 뒤에 ‘앞으로 3천 개월 후에 동국에 불법을 크게 흥왕하게 하는 성군이 나온다. 그러니까 너는 거기에 가서 불교의 개조開祖가 돼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도가 신라에 들어왔는데 3년 뒤에 공주님의 병을 고쳐주고 신임을 받거든요. 그러고서 자기 소원은,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는 것이라 했고 그래서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고 합니다. 제가 답사를 해 보니까 흥륜사는 지금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그것이 신라 최초의 절터입니다. 그 학교의 본관 건물 바로 앞을 보면 예전의 절터에 연화대도 있고 여러 가지 기둥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이 신라에는 석가 부처님이 오시기 전 원래 원형原型 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절터가 일곱 개나 있습니다.

그 터는 역사적으로 바로 신교의 제천 소도蘇塗 터인데 여기에 전부 절을 세워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우주광명 전통 신교문화의 성지, 천신 기도터에 불교가 자리 잡아 나가는 과정이라는 지적은 아주 올바른 합리적인 역사 해석이라고 봅니다.

신라의 불교 정착 과정을 보면 아도 화상이 미추왕 2년에 들어오고, 약 3백년 뒤에 이차돈 순교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불교 정착 과정에 갈등이 컸습니다. 그 갈등은 소가(蘇我) 집안과 모노노베(物部) 집안 사이에 일어났어요. 모노노베 집안에서는 ‘우리들이 모시는 국신國神은 본래 조선에서 왔고, 이 천신을 모시는 신사문화로 만족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가 집안은 ‘불교를 받아들여야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막 싸웠는데 모노노베에서 소아를 쳐들어가서 집안에 만들어 놓았던 절간을 때려 부수고 불상을 질질 끌어다가 바다에다 처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소가 집안이 모노노베 집안을 멸족시켜 버립니다.

신라에서는 이런 철저한 갈등이 아니라 비교적 순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미추왕 때 아도가 와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죽어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한 5백 년 세월 동안은 하늘 광명, 땅 광명, 그리고 천지의 광명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 역사의 심장부, 단군조선 진한의 그 역사 주체정신, 우주광명 문화의 진정한 주인정신, 이 진한의 문화역사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화랑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당나라 사대주의 역사 과정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라 왕도 경주는 미륵신앙의 성지
그런데 신라 불교는 단순히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아닙니다. 화랑 문화를 보면, 화랑은 각자가 ‘화랑은 미륵의 화신이다’라는 미륵의 심법으로 미륵의 이상낙원을 건설하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신라 역사의 초기에는 백제로부터, 고구려로부터, 또 한쪽에서는 왜적들이 순식간에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조용히 읽다 보면 신라의 고통을 엿볼 수가 있어요. 특히 처음에 남삼한이 자리 잡을 때는 북쪽에서 탁卓 장군이 내려와서 마한을 세우고, 남쪽 삼한의 진왕辰王이 됐어요. 백제 전신인 마한의 왕이 그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진왕으로서 변한과 진한의 종주 역할을 했습니다. 삼한은 항상 일체였는데 신라가 진한의 역사정신과 문화정신을 회복하면서, 원래 우리 역사의 중심은 마한 진왕 아니고 ‘우리들 자신’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강단사학자들이 교과서에서 남쪽에 진辰이라는 나라가, 진이라는 어떤 세력이 있었다고 추정될 뿐이라 그랬어요.

이 신라 왕도 경주는 미륵신앙의 성지입니다. 이 신라의 미륵신앙을 어찌 보면 자랑스럽고, 어찌 보면 새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천년 불교문화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또 삼국을 통일하는 역사의 추동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물론 화랑의 실체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개벽을 하는 도솔천 천주님 미륵불이 이 땅에 오신다, 미륵불이 이 땅에 오신다’는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을 꿈꾼 진흥왕眞興王은 자기 두 아들을 ‘동륜銅輪’, ‘사륜舍輪’이라 했습니다.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도 26세 성왕聖王이, ‘내가 바로 미륵님의 이상을 성취하는, 용화낙원을 세우는 전륜성왕’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백제 성왕을 성명왕聖明王이라 합니다.

이 미륵신앙이 돈독했기 때문에 신라의 초기 왕대에 도솔가兜率歌라는 전통음악이 나왔어요. 그 노래 제목이 왜 도솔가인가? 도솔천 미륵에 대한 신앙은 어디서 발원이 된 것인가? 정말로 신비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이 등장하는데, 이 신라의 전설에서는 미시랑을 하늘에 있는 미륵님이 직접 인간으로 오신 것이라 합니다. 이 미시랑이 인간 세상에서 7년 교화를 하고 어느 날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신라 천년 역사의 국력이 가장 강력하게 결집할 수 있는 화랑도 문화의 조직이 아주 빠르게 체계화되었습니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이때 나와서 바로 환국·배달·조선에서부터 내려온 그 소도 제천의 성지에서 우주광명의 인간 심법을 전수하는, 경당扃堂에서 가르친 오상지도五常之道를 바탕으로 해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 주었어요. ‘원광’은 우주광명이라는 뜻이에요.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했는데 학문이 얼마나 방대한지 유학을 도통했습니다. 신라 왕가에서 이분을 모셔다가 모든 외교문서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거반 백 살을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충忠, 효孝, 신信, 의義, 용勇이라는 것은 유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원광법사가 자기를 찾아온 두 젊은이에게 화랑의 계율로 내려 준 겁니다. 임금을 섬기되 충으로, 부모를 섬기되 효로, 친구를 사귀되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생유택殺生有擇, 임전무퇴臨戰無退를 말했어요.

호국불교의 화랑도 정신은 정말로 강력한 것입니다. 김유신 장군이, 자기 아들에게 나가서 싸우다 죽어라고 했는데 살아왔다고, 그 아들을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고 부모가 평생 만나지 않았어요. 그 아들은 산속에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죽었잖아요. 이처럼 아주 감동적인 역사적인 화랑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신라 역사문화의 원형정신은 무엇인가? 이제 신라 역사 문화의 원형정신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